놓고, 더 놓고, 더 놓아라.

 

심지어 아름다운 주기도문 설교집,

헬무트 틸리케의 <세계를 부둥켜안은 기도>

 

 

-나치 독일이 패망해가던 1940년대 중반, 폭격으로 인해 폐허가 된 도시 슈투트가르트의 무너진 교회 터에서 설교가 이루어졌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곳에서 신에 대한 설교가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잔악했던 나치 정부도, 또한 나치에 대항한다는 이유로 민간인 구역을 폭격한 연합군도, 그 누구도 자신들의 편이 아니었던 시민들에게 과연 신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아니, 신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요. 모두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는 신도들에게 어떤 위로를 주어야 했을까요. 안식과 평화를 약속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틸리케는 정면으로 돌파합니다. 그는 신도들에게 손가락을 향합니다.

"우리는 벌거벗고 있습니다. 그런데 옷을 구하는 대신 과자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44쪽

모두 내려놓음 

-이 책의 주제를 압축하면 모두 놓는 것입니다. 내가 신과 하나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당장의 욕심과 감각을 좇아 신에게 과자를 달라는 기도를 멈추는 것입니다.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는 신이 우리의 곁에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면 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늘 모자랍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달라, 무엇을 원한다고 하는 기도는 늘 어리석습니다. 미래도 볼 수 없고, 지금에 대한 판단도 곧잘 틀리니까요. 그저 "아버지여!" 라고 외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멀리 내다보는 신 앞에서는 우리가 판단하는 선과 악은 어리석은 구분에 불과하며(독일 기독교는 나치에 협력했고, 카톨릭은 모른 척 외면했습니다), 전도서에 나타난 바, 욕망과 영욕 역시 헛된 것이 됩니다. 무한의 진리 이외에는 모든 것이 부서지고 사라집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헛되어 바람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하시겠습니까? 복권 당첨을 위해서? 내일 시험치는 우리 아들 점수를 좀 더 높이기 위해서? 동료를 제치고 승진하기 위해서 기도하십니까?

바로 여기가 어떠한 욕망도 다 사라져버린 자리, 모든 종교와 철학이 비틀거리며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 이름이 모두 다를 뿐, 서로가 같은 것을 외쳐 부릅니다.

"우리는 자신들의 신념, 그 단 한 가지만 빼고, 혹은 그것까지 모든 것을 의심했고 부정하고 분석했다. 무엇이 남았는가?"

완전한 텅 빔이 신과 함께 거기에 서 있습니다.

천국에 비해 초라한 지상이란, 영생이나 축복의 문제가 아니라 물질과 영욕에 집착하는 지상의 삶에 대한 은유입니다. 천국은 텅 빈 곳이며, 해탈과 열반의 장소이며, 초끈 이론이 통용되는 곳이며, 존재가 자신의 실존을 납득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여!" 라고 부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지상의 우리는 그 곳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니까요. 상상하지 못하는 것을 달라고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기도도 없을 겁니다. 하물며 사탕발림에 가까운 안식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저는 많은 수의 기도 책들을 믿지 않습니다. 응답받는 기도는 욕망과는 하등 관련이 없습니다. 좀 더 열린 인간으로 살게 해 달라는 기도조차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이미 그렇게 살게 될 테니까요. 기도는 온갖 한계에 부딪히고 사소한 욕망에 시달리는 인간이 더 넓은 곳을 향해 던지는 작은 돌멩이일 뿐입니다. 돌멩이는 물 속에 가라앉고, 기적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돌을 던지는 우리의 근육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돌멩이를 삼킨 바다를 잠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 바다의 찬연함, 그 거대함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바라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곳은 아름답고 광활합니다. 그 앞에서 좀 더 겸손해지고 기꺼이 작아집니다. 저는 그것이야말로 기도의 정수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소리로 응답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자신을 알고, 세계를 더 가까이 느끼게 됩니다. 더 많은 것들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더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기도문 안에 있습니다. 그 짧은 기도 안에.

누군가 제게 기도에 관한 책을 추천하라면 어쩌면 단 한 권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전쟁통에 절망한 사람들에게, 절망조차 하나의 과정이라고 일깨우는 주기도문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핵심적인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마음껏 슬퍼하시기를. 또한 마음껏 기뻐하시기를. 그리고 그 순간을 깊게 느끼고, 그 모두를 바람처럼 떠나 보내시기를.

 

그렇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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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y come, hard to go

이번에 소개할 두 권의 책들은 얼핏 쉽게 넘기면서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책처럼 보입니다(사실은 실제로 그렇죠). 차이점이 있다면 하나는 넓고 멋드러진 세계에 대한 개괄서이며, 나머지 하나는 어떤 가족에 대한 냉소적이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 두 권의 공통점은 강렬합니다. 읽기는 쉬우나, 머릿속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다는 거죠.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창고에 가져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매우 고민하던 책들이라는 거죠.

결국 결정했고, 해서, 쉽게 읽고 쉽게 잊혀지지 않는 책 두 권입니다. 그 이유는 다르지만요.

 

재미난 집 - 물론 기호학과 씨름하셔야죠. 그렇지만 그냥 일단 즐기셔도 됩니다.

청소년들이 읽기에도 좋고 내용 면으로도 유익한 그래픽 노블로는 양대 산맥이 있습니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와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지요. 여기에 개인적으로 앨리슨 백델의 <재미난 집>을 추가할지 말지 고민이 됩니다. 사실 이 책은 첫 번째 상자에도 들어가려고 했지만 망설이다가 말았죠. 앞의 두 작품처럼 역사적인 스펙터클이 있는 것도 아닌데다가, 좀 어려워서요.

사실 얼핏 보기에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를 인용한 부분들을 제외하면 별로 어려운 부분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치밀하게 짜여진 연출을 통해 대사와 행동 이외의 부분에다가 메시지를 숨겨 놓는 작가와 내내 게임을 치러야 하죠. 앞서 언급한 두 작품에 비해 <재미난 집>은 그런 기호학적인 놀이를 확실히 더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재미난 집>은 보통 만화들처럼 그림이나 대사가 직접적으로 상황을 수식하지 않고, 어떤 순간 주위를 빙빙 돌며 스케치하듯 그려나가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진실은 똑바로 들여다 볼 수 없다고 말하는 철학자들처럼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괴로워하고 아파하지만, 겉으로는 모두들 냉소적인 표정을 짓고만 있습니다. 그 인물들 중 한 명인 작가 자신을 포함해서요.

그렇다면 문제는, 그렇다면 청소년들이 이 책을 읽어도 재밌을까. 내내 고민이 됐습니다. 게다가 죽음이니 동성애니 하는 소재들이 굉장히 현실적이고 건조하게 다뤄지는 것도 자칫 재미없어 보일 수 있고요(성기가 드러나는 장면들도 있지만 그야말로 무미건조합니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장례식에서 만난 형제들이 서로 피식 웃음을 주고받는 부분을 청소년들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후배에게 읽혀 봤습니다. 뭔가 다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흥미롭다라는 반응이 나오더군요. 더 고무적인 반응은 그래서 한 번 더 읽어보고 싶다라는 거였습니다.

고심 끝에 <재미난 집>을 이 코너에 집어넣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아마 많은 청소년들에게 이 책은 너무 솔직하고 적나라해서 오히려 재미없을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수없이 인용되는 낯설은 고전 소설들도 물론이고요. 그러나 한 번이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정독한다면(만화라서 쉽습니다) 곧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환상적인 영화같은 스펙터클한 감동이 아니라, 마음 속 어딘가에 남아서 자신의 일상 속에 문득 출현하곤 하는 그런 기억으로 남게 될 테니까요.

청소년들이 이 책을 한 번 읽고 나서 나이를 좀 더 먹고 또 읽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이 겉모습처럼 냉소적인 책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해주는 가슴 뜨거운 작품이라는 걸 알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사실 결코 청소년들을 위해 나왔다고는 볼 수 없는 이 책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을 위해 쓰여진 책들보다 더 직접적이고 적나라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히 뭐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깊은 슬픔과 오해와 냉소, 가족은 하늘이 점지해 준 집단이기 이전에 서로 다른 인간들이 서로를 매일 바라봐야만 하는 곳이라는 서글픈 깨달음, 그리고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애정까지요.

조숙한 문학소년소녀들과 한 발 앞서가는 부모님/선생님들이시라면 눈여겨 볼 만한 책이라고 자신합니다. 추천. 뭐, 뉴욕타임스 올해의 책 선정은 그냥 참고하시고요.

 

 

한 권으로 읽는 세계의 신화 - 헤쳐 모이니 이렇게 즐겁네요!

 

-독일에서 학생들이 논술 대비용으로 읽는다는 아비투어 교양 시리즈네요. 시리즈의 앞 책이었던 <청소년을 위한 철학 교실>이 국내 학생들의 수준에 비추어 볼 때 꽤 어려운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 책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왠걸, 생각보다 훨씬 가벼우면서 응용도가 높은 책이더군요. 즐거운 독서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이 책을 즐겁게 읽은 바로 그 점 때문이었습니다. 이 책은 세계의 유명 신화를 개별적으로 소개한 것이 아니라, 주제 별로 세계의 신화를 별도의 체계 없이 모아 놓았기 때문이죠. 신선한 시도이기는 하지만, 이 책이 정말로 논술에 즉시 써먹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됐었드랬구요... 뭐 사실, 여기는 제가 좋게 읽은 책을 다 가져오는 개인 블로그가 아니니까 말입니다.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이런 책이 논술에 써먹기는 훨씬 좋습니다. 각 신화의 통사를 꿰려는 매니아가 아닌 다음에야 주제별/상황별 적용 사례를 모아 놓은 게 더 써먹기 편하니까요. 신화라는 게 정말로 신성 불가침의 주제라도 되는 양 하나같이 큰 덩어리만 던져주는 기존의 입문서들에 비하면 읽기도 훨씬 쉽고 간단해서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책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보죠. 이 책에서 달에 대한 신화는 몇 개나 소개되고 있을까요? 네 페이지 남짓한 분량 속에서 그리스, 게르만, 발트, 인도, 토고 신화 속의 달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토고요? 아프리카의? 그렇습니다. 이 책은 유명 신화 뿐 아니라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의 작은 신화들까지 아우르고 있지요. 유명 신화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세계의 신화'를 담고 있는 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신화 비교를 통한 학습이 통사를 익히는 학습보다 그 문화적 가치에 훨씬 빨리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 신들의 연대기를 달달 외우는 것보다 하수구를 수호하는 로마의 여신 클로아치나를 만나는 게 더 매력적이지 않나요?

그 많은 신화들의 서로 비슷한 면과 다른 면을 내보이도록 사례별 정리를 한 것은 결국 좋은 시도였던 셈입니다. 게다가 청소년들을 위해 나온 책으로써 쉽게 쓰여졌으면서도 폭넓은 세계를 아우르는 좋은 균형 감각을 유지하고 있지요. 한 우물로 끝을 보는 우리나라의 대세에는 썩 들어맞지 않는 컨셉이지만, 저는 이런 책이야말로 정말 좋은 입문서라고 생각합니다. 두루두루 맛을 보여주는 것만큼 입문서가 갖춰야 할 미덕이 또 있겠습니까? 비록 분량에 비해 다루는 분야가 턱없이 넓다 보니 깊이가 부족하다는 필연적인 약점이 있습니다만, 이 책의 목적을 생각해 볼 때 그 정도는 오케이! 아닐까나요? ㅎㅎ

어딘가에 참고하거나 써먹을 일이 생겨 생각보다 자주 꺼내보게 되는 책입니다. 쉽게 읽고 즐겁게 느낀 다음, 다시 언제고 필요할 때 꺼내보고 싶어지죠. 위대한 걸작과는 또다른 Hard to go라고나 할까요. 다이제스트의 모범이라고 할까요. 묻히기에는 아까운 책입니다.

(p.s: 어떤 청소년이 이 책을 읽고 조셉 켐벨로 넘어가고 싶어 한다면, 아, 저는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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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천국은 맞는데, 불신 지옥은 뭡니까?

쉽고 간결하게 뒷통수를 후려치는 강력한 선교 비판서

 

SF작가 테드 창의 중편 소설인 [지옥은 신의 부재]를 들어 봅시다. 거기에는 천국과 지옥이 분명히 존재하고, 심지어 종종 사람들의 눈에 띄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을 모두 믿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 세계의 지옥은 무한히 불에 지져지는 세계가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와 똑같습니다. 그럼 왜 지옥일까요? 어떤 형벌도 주어지지 않는데요? 답은 간단합니다. 지옥에는 딱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신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뿐입니다.

지옥과 지상을 구분하는 것은 어떤 '체제'의 차이가 아니라는 얘기죠. 중요한 것은 신의 유무 뿐입니다.

이 책을 소개하게 되어 기쁩니다! 쉽고 평이한 문체로 쓰여져 있으며, 간결하고 논리적이며,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좋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렵게 씌여지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평신도들도 두루두루 읽을 수 있다는 점은 매우 뛰어난 장점이지요.

<바울의 선교 vs 우리의 선교>는 20세기 이후의 선교 문화가 어떻게 왜곡되어 진행되었는지, 가장 위대한 선교자인 사도 바울의 사례를 들어 비판합니다. 너무 쉽게 요약이 잘 되어 있어서, 부족한 제가 이래저래 말을 하느니 차라리 본문을 수없이 발췌하는 게 더 낫겠습니다. 몇몇 부분만 퍼 보겠습니다.

특히 선교에 관심 있는 분들은 길다고 넘어가지 마시고 눈여겨 보십시오!

 

우리는 '가련한 이교도'라고 버릇처럼 부르는 이들에 대해 인종적, 종교적 자만심을 품은 채 대해 왔다. 우리의 부를 죽어 가는 불쌍한 인간에게 나눠줘야겠다는 동정심에 이끌리는 등 우월한 입장에서 그들에게 접근했다. (중략) 우리는 우리에게 복음이 위탁된 것이 우리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온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의 구원을 전하는 그분의 도구가 되기 위함임을 미처 배우지 못했다. (중략) 우리는 이제까지 주님의 성전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로 구성된 것처럼 생각했고, 이방인의 회심은 그 몸의 연장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왔다. 따라서 복음을 전파할 때도 마치 부자가 거지의 무릎에 동냥 한 푼을 던져 주는 식으로 해왔다. (중략)

우리는 이런 정신으로 그들에게 접근하고 도왔다. 우리는 실로 무언가 해주고 싶어서 안달을 냈다. 그리고 많은 것을 해냈다. (중략) 우리는 그들을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양떼처럼 돌봤다. 그들의 자금도 관리하고, 성직도 임명하고, 교회도 짓고, 교사도 공급했다. 그들에게 젖도 먹이고, 음식도 주고, 치료도 했다. 그들을 훈련하여 일부에게는 안수까지 주었다. 서로 동등함을 인정하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을 다 해준 셈이다. 그들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해주었으나, 그들과 함께한 것은 별로 없었다. 그들에게 자리를 허락하는 일만 빼고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해주었다. 그들을 '귀여운 자녀'로 대하기는 했으나 '형제'로 대우하지는 않았다.

p.223~224 (밑줄은 제가 쳤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찌 했을까요.

첫 교회는 나름대로 자체의 필요를 채우는 데 적합한 사고방식과 그에 걸맞은 관습을 갖고 있었다. 맨 나중에 생긴 교회도 마찬가지로 자체의 필요를 채우는 데 적합한 사고방식과 그에 걸맞은 관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전자는 단지 첫 교회라고 해서 그 법과 관습을 후자에 강요할 권리가 없다. 한마디로, 통일성은 맨 처음 지체의 관습에 대한 외적인 순응이 아니라 그 몸에의 합류에서 찾아야 했다. 따라서 맨 처음 지체가 맨 나중 지체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는 것은, 맨 나중 지체가 앞선 지체로부터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만큼 분열을 책동하는 행위다. (중략)

그(바울)는 유대 교회의 법과 관습을 네 지방에 이식하기를 거부했다. 중앙집권적 권위를 세워 온 교회가 지역적 사안을 처리할 때 그로부터 지침을 받도록 하는 체제를 거부했다. 또 모든 시대, 모든 장소, 모든 상황에 적용되어야 할, 선험적인 정통성 테스트를 제정하길 거부했다. 특정한 전례를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일도 거부했다.

p.206~207

왜일까요.

사실 외국의 완벽한 예배와 신학 체계를 모두 수입하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행위다. 우리는 공식 예배를 반복적으로 시행하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또 우리의 기도서가 매년 순환적으로 믿음의 체계를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그 기도서를 수입해서 새로운 교회에 전수한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 완벽하다. 너무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초심자들은 아무것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중략)...결국 그들은 진리를 통달하겠다는 노력마저 그만두고 만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다수에게 가장 단순한 요소들을 가장 단순한 형식에 담아 가르치고, 더 많은 지식을 스스로 얻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몇 가지 기본 진리에 대해 묵상하고 발견한 바를 서로에게 가르치도록 그들을 내버려두는 등 여러 방식으로 그들이 가장 중요한 것을 섭렵하게 해주었다.

(중략) 신조(信條)는 아주 간략하지만, 얼마든지 아주 길고 모호하게 만들 수도 있다. 사실 그리스도를 붙잡는 데 그리 많은 것을 알 필요는 없다. 사도 바울은 단순하고 간단하게 시작했다.

p.147~148

지금 우리의 교회와 얼마나 다른지 느껴지십니까? 저것이 선교계의 슈퍼스타이며 에이스이며 그 외적인 성과와 내적인 성장에서 모두 최고를 달린 사람, 사도 바울의 선교법입니다. 우리는 불신 지옥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데 어느새 신을 믿는다는 것과 계율을 지킨다는 것이 마치 하나처럼 겹쳐지고 있습니다. 계율은 인간답게 살면서 보다 경건한 모습으로 신을 맞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언제이고, 어디인가'에 따라 분명히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는 왜 다른 곳에 가서 우리의 방식을 마치 아버지가 가르치듯이 하는 걸까요? 다 같은 평등한 자식들이 아닙니까? 이 책의 저자이자 역시 위대한 선교자였던 롤런드 앨런이 '변해가는 기독교인들'에게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이 글을 읽은 그리스도교 신자/선교자 모두에게, 그리고 종교의 종류와 유무를 떠나서, 모든 분들께 관용과 이해가 좀 더 가슴 속에 심어지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예배와 문화를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신의 유무 뿐입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어떤 것을 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기에 '예' 혹은 '아니오'라는 응답을 받지 않는다. (중략)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이것이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누군가 '그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든지 '시대가 변했다'고 대꾸한다면... 나로서는 '이것이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의 방식'이라고 반복할 수밖에 없고, 그가 이 문제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도록 내버려둘 도리밖에 없다."

p.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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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시절에 열심히 비디오 게임 잡지를 탐독했었습니다. 그 중 모 잡지는 특유의 개그 센스로 유명했었는데요. 뛰어나지만 이상한 사람들이 모인 SEGA라는 회사에서 괴상한 게임기를 야심차게 내놓고 속절없이 휘청거렸을 때, 그 잡지에서 칼럼을 쓰던 양반은 이런 문구를 남겼습니다.

"선사여, 세가가 32X를 내놓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 "앞뜰의 잣나무다."

이것이 제가 생애 최초로 접한 화두였습니다. 다소 우습게도 그 이후로 간화선이란 무엇이고 불교란 무엇이냐를 찝적거리게 되었으니, 과연, 깨침에는 상하가 없고 유치함과 진지함의 차이도 없는 것인가 봅니다. 세상 만사가 허상의 집합체인가 하면 또 죄다 부처의 현현이라지요. 넌센스 같기도 하고 게임 같기도 한 이 문구들 속에 우주가 들어있다면, 그리하여

세계 최고의 프로페셔널들이 펼치는 우주 최고의 수수께끼 놀이

 선관책진(禪關策進) . 이라 합니다.

                                                           .

유명한 화두들을 한번 들어 보시지요. 선사께서는 마음 가벼운 자들은 화두를 들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라 하십니다만, 그 시도 쯤이야 괜찮을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잣나무 화두는 사실은 저 유명한 달마 대사에 관련한 것이지요.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 "앞뜰의 잣나무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없음(無) 화두는 아래와 같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 "없느니라(無)."

그러면 스님들은 이 화두를 가지고 깨칠 때까지 마음 속에서 놓지 않습니다. 먹을 때도 쌀 때도 놓지 않습니다. 평범한 인간의 집중력이란 한계가 있거니와, 이 책의 한 선사께서 말씀하시듯 온 힘을 다해 정진하면 오래지 않아 반드시 깨우칠 것이다라는 말도 기약이 없어 보이지요. 그런데 여기 나온 스님들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화두를 수십 수백 일, 길게는 수 년을 가슴에 얹고 갑니다.

선관책진. 수행자들이 깨우쳐 뚫고 나가야 할 관문들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수행자들에게 팁을 선사해주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팁을 바라는 것부터가 틀린 마음이라고 줄기차게 강조합니다. 심지어 유식하냐 무식하냐도 깨우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책 많이 읽어봐야 무엇 하려느냐? 염라대왕은 말이 많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까지 합니다. (하기는 맞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언어로 썰을 풀어봐야 이 세상의 파편밖에 주워담지 못한다고 서양 학자들이 아주 잘 밝혀 주었지요)

방법은 오로지 용맹정진이며, 결단코 단 하나의 샛길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단 하나의 질문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저 위의 선문답을 보고 여러분들이 하셨을 질문, 그게 깨달음의 열쇠입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사실상 이게 이 책의 전부입니다. 수십 명의 전설적인 선사들께서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처음 주욱 읽었을 때는 뭐 이리 똑같은 소리를 하나 싶다가, 하루에 한 편씩 읽자 하고 띄엄띄엄 읽어 보니 선뜩한 것이 무슨 회초리 맞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공부에는 '법'이 있습니다만, 깨달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하나의 길,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뿐입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깨우치는 세계에 대해 더 말로 풀어낼 것은 없어 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無자 수행에 있어 열 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나열하며 마칠까 합니다.

 

생각으로 알아맞히려 하는 것 // 눈썹을 오르내리고 눈을 껌벅이는 곳에 지식과 견문을 들어앉히는 것 // 말길에서 알아맞추고자 하며, 그것으로 공부를 삼는 것 // 경전이나 어록에서 끌어다가 인증을 삼으며 알려고 하는 것 //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아맞추려는 것 // 모든 것을 다 날려 버리고 일없는 곳(멍하게 있음)에 들어 앉아있는 것 // 있는 것이나 없는 것으로 아는 것 // 참으로 없는 것으로 아는 것 // 도리가 그렇겠거니 하고 알음알이를 짓는 것 // 자기가 미혹했다고 하면서 깨치기를 그저 기다리는 것.

 

어째 이렇게 철두철미하고 타협이 없으며 올곧은 길을 권하는 계명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가히 지상 최고의 프로페셔널들이라 할 만 하며, 그 분들이 붙잡은 화두는 또한 우주 최고의 수수께끼라 하겠습니다. 리뷰를 남겨 주신 mb퇴진할때까지(좋고!) 님의 말씀마따나, 이만큼 삼매경을 통해 마음 시원하게 해 주는 책도 없지 않을까 합니다.

 

올 여름, 블록버스터 말고 소울버스터(soul-buster) 한 권 장만하시죠. 우주 최고의 문답이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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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방글 2008-06-12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은 책이고, 돈은 돈이노라(...)

외국소설/예술MD 2008-06-16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사여,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물으니.
멍. 이라고 벗이 대답했습니다.

두발짐승 2008-06-19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불의 편집자' 정태룡 선생이 참 좋았다능-_-

외국소설/예술MD 2008-06-23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존함을 알고 계시다니.. 대단하십니다.
 

가끔은 출판사 분들과 만나면 서로 씩 웃을 때가 있습니다. 말없이 눈빛으로 대강 이런 대화가 오갑니다.

'이거 좋은 책 같은데요' '네 그렇죠. 근데 잘 안 팔리겠죠?' '네 뭐 아쉽죠..' 씨익.

담당하고 있는 분야들에 진열해 놓은 책들을 바꿀 때가 되면 늘 갈등에 휩싸입니다. 꼭 한두 번은 개인적으로 좀 더 밀고 싶은 책과 아무래도 좀 더 팔릴 듯한 책이 맞서곤 하지요. 이런 딜레마까지 일종의 즐거움으로 생각한다면야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합니다만...

마침 이번 주는 우격다짐으로 밀어보는 책들이 두 분야의 메인 도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들은 예의 그 눈빛을 교환한 책들이에요., 아마 이 상자에 들어가 있어도 별로 어색하지 않을 겁니다. ㅎㅎ 

 

예수의 독설

-개인적으로 접할 때마다 감탄하지만, 어째서인지 꾸준하게 파고들지 못해서 아쉬운 분야가  민중신학입니다. 거기서는 하늘을 바라볼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해 땅으로 내려오신 분에 대해 얘기하지요. 존경은 커녕 온갖 조롱의 대상으로까지 밀려난 대형 교회들의 규모 지상주의와 자본주의화와는 완전히 다른 길입니다.

이 책 속에서 성서의 신화는 그 신비의 옷을 벗고 역사와 현실과 민중 속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 진실을 캐겠다는 역사/고고학적 호기심의 문제가 아니지요. 민중신학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정신 자체를 복원하는 일입니다.

<예수의 독설>은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싼 각종 신화와 떠받들려짐을 향해 독설을 날립니다. 없는 자의 편에 서서 제도의 편견을 타파하기 위해 애썼던 위대한 혁명가이자 영적 지도자의 가르침을 되새기자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부름이며 메시아의 임재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이죠. 왜냐하면 소외받는 자들, 가장 낮은 곳에서 사는 자들이야말로 생전의 그리스도가 감싸던 어린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생전에 주목했던 것을 지금 우리가 바라봄으로써, 우리 역시 보다 그리스도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이 책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지상에 넘쳐나는 낮은 자들의 슬픔이 지금도 끝없이 그리스도를 호출하는 신호를 깜빡입니다. 그들은 나약한 양떼가 아니라, 사실은 메시아를 향한 문을 여는 열쇠 그 자체였던 것이죠. 향유 부은 여인에게서 20세기 한국의 '수지 킴 사건'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처녀 수태라는, 사실상 사생아로 태어남으로써, '아버지라는 권력의 부재'와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출생'이라는 두 가지의 마이너리티를 동시에 안고 태어난 비천한 인간- 예수 그리스도. 그의 무한한 아래로의 껴안기가 수많은 성경 해석을 통해 실려 있습니다. 제사장들의 계급주의와 형식주의에 항거하고, 그 세계가 저버린 병자와 천민들에게 네 두 발로 서라고 말하는 이 사람. 누구의 아들인가를 묻기 이전에 그야말로 위대한 인간임에 틀림없지요.

성경 속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질곡의 역사를 거쳐 2008년 초까지의 이 나라 상황까지 아우르면서 민중신학의 요건을 탄탄히 갖춘 책입니다.  낮은 곳의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접점을 탐구하는 그 정신은 열린 마음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물론, 책을 좋아하는 모든 분들께 가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요즘은요.

 

 

열두 살 소령

-열두 살 소년이 보기만 해도 다 알 수 있을 만큼 단순하고 명쾌한(그러나 비극적인) 상황들이 펼쳐집니다. 인과관계가 확실하고 원인도 결과도 다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겹쳐져 만들어진 것은 당췌 이해라고는 불가능한 지옥도지요. 이 소설은 독자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아프리카의 비극적 상황은 그 원인이 단순하기에 오히려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이는 절망에 맞딱드립니다. 거기에는 살아남으려는 욕구와 계속 그 이상을 요구하는 탐욕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압도하는 탐욕의 열기는 뜨겁습니다. 아프리카 특유의 문화는 그 열기에 타 들어가면서 기괴하게 비틀어져 거의 초현실적으로 보일 때조차 있습니다.

여자 아이들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음핵 절제 시술을 한 뒤 그 아이들의 자기방어를 위해 소총 제식 훈련을 시키는, 허리에 AK소총을 찬 수녀님과 그 예하의 전투용 소녀병 부대(소년이 아닙니다!)를 떠올려 보세요. 이것이 바로 아프리카의 비극입니다. 카프카라도 혀를 내둘렀을 겁니다. 주인공의 어머니를 둘러싼 미신과 저주의 공방이 벌어진 도입부에서부터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이 뒤틀어진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거친 숨을 내뿜습니다. 그 열기는 심지어 우울해지거나 무거워질 틈조차 주지 않습니다. 죽거나, 화내거나, 웃으면서 버틸 수밖에 없지요. 이유를 막론하고 어깨가 처지는 자부터 죽어간다는 것을, 주인공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지옥에서 살아남은 열두 살 소년의 고백 역시 신열에 들떠 있습니다. 냉소와 분노에 가득 찼는가 하면 해학과 아프리카 특유의 능청으로 굼실거리기도 하지요. 사람도 죽여보고 마약도 껌 씹듯이 복용해 봤던, 사춘기에 접어들지도 않았을 때에 이미 인간의 바닥을 체험하고 온 그의 고백이 갈지자를 그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솔직히 말하자면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알라께서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다라고 합니다. 뜨거운 열기 때문에 일그러진 프리즘을 통해 대자대비한 우주의 절대원리마저 불공평하게 비추어지는 그 곳, 아프리카의 참혹한 현실을 신파가 아니라 그 특유의 열기와 자조적인 유머로 풀어가는 작품을 또 만날 수 있을까요? 강렬한 소재와 그를 풀어나가는 능청스러운 전개,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듯한 뜨거운 부조리함이 함께 섞여든 이 작품은 걸작의 반열에 올리더라도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강력히 추천합니다...(만 썩 잘 팔리지는 않았습니다. 열심히 팔고 있어요)

p.s: 좀 더 노골적인 번역이었다면 하고 아쉬워합니다만, 청소년도 함께 보는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한 타협이었다고 봅니다.

 

어째 이번에 선정한 두 권을 놓고 보니 어딘가 정치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네요. 물론 우연의 일치였습니다만, 저를 포함해서 주위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다 보니 권력과 탐욕에 대해 또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요즘입니다. 모두들 좀 더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탐욕스런 자들만 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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