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정경湖畔情景

 

 

1

 

말이 공간을 휘감고 돌아 약간의 말만으로도 따뜻해지는 카페에 앉아 입김처럼 커피를 마시고 옛 사진 속 하얗고 통통한 아이를 보며 웃고 손을 만지고 머리를 만지고 발끝으로 발끝을 만지고 마음으로 마음을 만지고 아무리 둥글게 둥글게 갈아 놓아도 진심은 진심이고 약간의 진심만으로도 눈물은 뚝뚝 흐르고 휴지는 필요 없다며 힘주어 눈물의 허리를 끊으려 애쓰는 모습을 보고 기왕에 눈물이라면 눈물과 함께 슬픔도 증발하라 증발하라 속으로 외치고 어차피 세상의 모든 마음이 부패의 운명에서 달아날 수 없는 것이라면 기왕에 눈물이라면 눈물과 함께 부패도 정지하라 정지하라 속으로 외치다 보니 창 너머엔 저녁이 밤 속으로 저녁저녁 걸어 들어가고 있었으므로 하루치 사랑을 충실히 마치고 다시 마음의 공간을 휘저어 걷어 올린 몇 마디 사랑의 말을 따뜻하게 서로의 목에 감아주며 주차장으로 나선 우리는 휘발유 가격이 가장 싼 주유소를 검색해 한 주치 기름을 먹인 차를 타고 차근차근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어른들의 노래는 대부분 단조로 되어 있다이주 가끔장조의 노래가 있을 뿐이다어쩌다 만들어지는 장조의 노래는 단조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대한 역설이거나우리 삶에 스며든손에 쥐고 싶지만 스쳐갈 뿐인 행복의 순간적 포착이다.

목수정월경독서

 

나는 밀려오는 것이 좋았고 짝꿍은 아마도 밀려가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짝꿍이 해변의 작은 모래언덕을 내려가다 잠시 멈춰 서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나는 그런 짝꿍을 뒤에서 바라봤다거기짝꿍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알 수 없으나 나는 나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 있는 것이 한 사람의 행복이길염원했다연인을 이루는 두 사람은 이렇게도 다르다해변에서 깨치게 되는 인생의 진리 중에서 가장 그윽한 것은 우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서로에게 애정을 가진 두 사람에게 그 앎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

김현아무튼스웨터

 

 

 

2



 용건을 마치고 돌아왔더니아오타가 아까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초콜릿 여자애애게 이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괜찮아정말 아까 괴롭힘을 당한 거 아니지?”

 “정말로 아니라니까요.”

 초콜릿 여자애가 조금 화가 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다행이지만여자들끼리 모이면 아무래도 옥신각신하거든우리 슈퍼에서도 아줌마 아르바이트가 고등학생 아르바이트를 들볶는 문제가 많아서 껄끄럽고 질척거리고 그래여자들은 좀 음험한 면이 있잖아!”

 그러면서 혼자 웃던 아오타는 내가 돌아온 것을 보고 대놓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그 표정을 보고 정말 아까 괴롭힘을 당한 거 아니지?”의 괴롭히는 주체가 나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임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아오타의 바짝 긴장한 얼굴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괜찮니?”

 초콜릿 여자애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이 사람이 괴롭히거나 하지 않았어?”

 아오타가 무슨 말씀을 하시냐며 웃으려고 했는데 나도 여자애도 웃지 않자 다시 얼굴을 굳혔다.

 “다른 사람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악담을 해서 번잡한 일에 끌어들이려고 하는 건 음험하고 껄끄럽고 질척거리는 괴롭힘이니까설마 남자가 그런 짓을 하진 않겠지아이고다행이야안심했어.”

나는 생긋 웃었다.

 “악담이라니요...... 혹시 아까 제가 한 얘기 들으셨어요제가 말한 아줌마는 다른 아줌마 아르바이트들을 말하는 거고요시마다 시는 아직 젊으니까 당연히 괜찮지요.”

 당연히 괜찮아뭐가?

 아오타 쪽으로 돌아선 나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이 미소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괜찮다고괜찮아요사십일 년간 열심히 살아왔으니까 그야 당연히 괜찮죠이봐요, ‘아줌마란 단순히 중년기 이후의 여성에 대한 호칭혹은 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야사전을 보면 그렇게 적혀 있어요. ‘아줌마를 욕이라고 생각하는 건그쪽이 젊지 않은 여자에게는 가치가 없다고 인식하기 때문이잖아요댁이 사귈 여자를 고를 때라면 그래도 상관없어요나이든 뭐든 댁이 좋아하는 기준에 따라 마음껏 고르라고요하지만 나는 여기에 그냥 일하러 왔어요당신의 그 웃기지도 않은 성적 대상 선정의 장에 나를 멋대로 끌어들여서는 아줌마는 안 되겠다느니 뭐니 생각한다면 불쾌하고 불편하니까 그만둘래요? ‘당연히 괜찮지요라니 뭐가 괜찮아그게 위로랍시고 하는 소리야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그래나는 아직 괜찮구나다행이다하고 기뻐할 줄 알았어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당신이 나를 감정해줄 필요 없어요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는 내가 정하니까.”

데라치 하루나같이 걸어도 나 혼자, 69-71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래도 이 정도까지 대놓고 수준이 낮으며 답 없는 인간은 이제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거지 실제로는 다 멸종했을 거야,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세상을 너무 쉽게 봤지. 오늘만 해도 카페에서 거의 저 수준의 이야기를 큰 소리로 떠드는 남정네 두 명을 뒷자리에 앉혀놓고 커피를 마시자니 비싼 커피 맛이 영 별로였다. 그들은 하루 빨리 결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랬다. 서른 넘은 여자는 순수하지 못해서만나서 결혼까지 가기가 힘들다. 그래서 서른이 안 된 여자랑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 좋고, 그게 안 되더라도 최소한 여자가 서른이 되기 전에 사귀기 시작하면 서른을 넘겨도 결혼할 만은 하다. 어쨌든 그렇게 결혼하려면 하루 빨리 뭐라도 시작해야 한다. 안 그러면 장가를 못 간다.

 

당신들은 안 그래도 장가를 못 가고 그래도 장가를 못 가고 하여튼 장가를 못 갈 것만 같다.

 

 


3



하비 교수는 기득권의 아웃사이더였고(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전문가주의를 떨쳐낸 아마추어였다그는 옥스퍼드라는 타이틀에도 괘념치 않았다또 동료 교수들보다는 대학원생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하비 교수와 나는 제리코 북바인더라는 술집에서 당구를 치거나동네 놀이터 구석에서 그의 딸을 지켜보면서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었다(그러면서 교수를 관찰할 수 있었다). 우리의 대화는 지적 아마추어주의의 두 가지 중심축을 기반으로 돌아갔다첫째는 탈전문화에 대한 감수성이었고둘재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정치적 충성이었다데이비드 하비 교수는 전혀 전문가처럼 행동하지 않았고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앤디 메리필드아마추어, 35

 

책 날개에 박힌 작가 소개 첫 머리에서 마르크스주의 도시이론가라는 타이틀을 발견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이 데이비드 하비였다. 작기는 34쪽만에 데이비드 하비와의 관계를 실토하였고 그것만으로도 syo는 작가가 사랑스러워졌다. 하비는 syo가 아주아주아주아주 사랑하는 할아버지인데, 이제 보니 하고 다니는 것도 syo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비할배의 <맑스 자본 강의>는 정말 축복 같은 책이고,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역시 젊은 syo에게 개안의 경험을 전해 준 역작이다. 그때 뜬 눈이 세월의 더께가 앉아 지금은 다시 감겼는데, 그렇다면 오랜만에 다시 한 번 데이비드 하비를 한 바퀴 돌면서 눈을 번쩍 뜨면 좋겠다. 가끔 이렇게 오늘의 책이 어제의 책을 내일의 책으로 정해주는 경험을 할 때마다 이 맛에 읽는 거지 싶고 그렇다.


 



 

-- 읽은 --



박이문, 하나만의 선택

사토 다카유키, 나는 회사 다니면서 공부하기로 했다

채호석, 안주영,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1

 

 

 

-- 읽는 --



테리 이글턴, 유물론

장강명 외,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데라치 하루나, 같이 걸어도 나 혼자

장윤석, 전공이 보이는 미분적분학

앤디 메리필드, 아마추어

고병권, 마르크스의 특별한 눈

송찬호, 10년 동안의 빈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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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8-12-11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 그러다 장가 못 간다 라는 노래 들으면 왠지 어마어마한 욕 같은 느낌인데 카페의 그 분들은 뭐랄까 욕도 아깝네요ㅎㅎ

syo 2018-12-11 22:01   좋아요 1 | URL
조용히도 아니고 찌렁찌렁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호연지기가 하늘을 찌르더라구요.

반유행열반인 2018-12-11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분들이 마신 커피도 아깝네요ㅎㅎㅎㅎ

syo 2018-12-12 00:18   좋아요 1 | URL
하하하하 그러네요. 생각해 보니 제일 불쌍한 건 그들이 마신 커피네요. 빻은소리의 연료로 쓰이다니.....

공쟝쟝 2018-12-12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녁은 저녁저녁... 근데 그 남자분들 본질을 잘 짚으셨네요... 진짜 서른넘으면 절대 결혼 안하고 싶음..

syo 2018-12-12 22:41   좋아요 0 | URL
아이러니네요. 삐꾸와 현자의 한끗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