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페이퍼에서 나는 신경숙의 문학에 대해 아무런 가치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의 현황이며 이전의 표절 논쟁 역시 오래전 <외딴방>을 읽던 학생 때만큼의 관심도 없고(그때도 뭘 알았겠냐마는) 잘 아는 바도 없다. 아는 게 없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설익은 판단은 내비치지 않는 것이 맞다. 다만, 내가 보고 읽었으며 가능한 한 정확한 논리와 근거에 의거해 할 수 있는 얘기를 했다. 문제의 대목과 비교되는 앞선 작품이 있으며 이들의 유사성을 밝혔고, 명백히 표절이 의심된다, 그리고 표절은 옳지 않은 일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얘기의 전부이다.

 

작가가 지금까지 받아온 상찬이나 상업적 성공과 한국문학의 문제 사이의 관련성, 그리고 지금 이와 관련한 모 출판사의 대응에 관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말보다 다른 이들이 해줄 수 있는 말이 더 많을 것이고 나는 그것을 '먼저' 읽는 입장이어야 할 것이다. 작가의 문제에 관해, 그리고 한국문학의 문제에 관해 내 생각과 행동은 앞서도 말했듯 변함이 없다. 구구절절 떠들기보다, 어설픈 가치 판단 한마디를 보태기보다 안 보고 안 사는 것이다. 그리고 책이란 게 여타의 상품과는 좀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로서 '안 사겠다'는 언급이나 행동이 소극적으로 보이기는 해도 그다지 위력 없는 것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지금 신경숙 관련 기사에 줄줄이 달린 ㅊ사 책은 앞으로 안 사겠다는 언급이나 내 돈을 돌려달라는 불평들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전반적인 '상품'으로서의 '한국문학 작품'이 '소비자'에게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죽었다 깨어나도 '비교 경쟁 우위' '시장 점유율 상위권'을 점하고 있다고는 말 못할 것이다.

 

덧붙여 최근 읽은 우에노 치즈코의 글 가운데 인상 깊었던 대목이 있어서 여기 적어둘까 한다. 이것은 문학의 차원에서 생각할 게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이지만 울림이 크다. (그러니 이런 걸 옮겨놓는 의도가 이거냐 저거냐 물어보지는 마시길.)

 

이처럼 연구 영역이 넓어져가는 학문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는 우리의 둘도 없는 경험을 타인에게 전달되는 말로 만들어 공유하는 것이다. 듣는 이가 없으면 언어화될 수 없으므로 청자인 동료에게 들려주고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는 말로써 근거를 보여주어 언어화한다. 그럼으로써 처음으로 타인에게 전달되는 '지(知)'라는 것이 생겨난다.

 

학문이란 우리의 경험을 전달 가능하며 공유할 수 있는 지로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지의 공유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학문과 문학은 어떻게 다른가? 문학은 단 한 사람의 언어이다. 물론 사람들에게 전달이 안 되면 문학이 아니지만, 타인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면 그 사람의 문학은 이미 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학문이란 타인과 공유 가능한 언어를 사용하여 타인에게 자신의 경험과 발견을 전달해나가는 것이다.

 

ㅡ우에노 치즈코, <젠더 연구를 권장하며>(2010, 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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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풍속화 속의 고독의  날들 속에서 내가 자주 힘겹게  떠올린 건 도시로 나오던 그날 밤. 외사촌이 보여준 사진집 속의, 아득한  밤하늘 아래, 별을 향해 높고 아름답게 잠든 새들이었다. 나, 그들을 내 눈으로 보러 갈 날이 있을 것임을 힘겹게 나에게 기약하며 그 풍속화 속에서의 나날들을 살아내곤 했다. 훗날, 살아가는 피로와 관계의 부재 속에 처절하게 외로워졌을 때도, 그날 밤 외사촌이 들고 있던 화보 속의 새들, 백로들. 숲속에, 밤이 온 숲속에, 마치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용서한 듯, 서로 올망졸망 기대어 숲을 아름다이 잠으로 뒤덮고 있던 백로들의 무리를 내 눈으로 보러 가겠다는 마음 버리지 않았다. 나,  언젠가, 기차의 창틀에 팔을 흔들리며. 눈앞을 가로막는 능선을 넘어서 가리라고, 절망과 고독의 날일수록 남몰래 나에게 기약하였다.

 

그 기약으로부터 십육  년.

 

나는 아직 새를 보러 떠나지 못했다. 잊은  건 아니다. 잊기는...... 오히려 연년세세 내 마음속의 하얀 백로들 더욱 눈부시게 도드라지며 내 기약을 아로새기는 날들이 많아졌다. 피로한 발바닥을 주무르다가도, 아직  가보지 못한 그 숲속, 별을 향하고 잠들고 있을 나무 위의 백로의 무리를 생각하면, 내 피로가 가져다주는 고단함은 물론이고 간혹 찾아드는 기쁨들하고조차 웬일인지 덤덤해질 수 있었다. 쓰라리게 느껴지던 불행도, 여러  날 계속 내리는 찬비 같은 고독도, 왠지 쓰잘데없이 느껴져서 그 힘으로 다시 다음날을  맞이하고 살아갈 수 있었다.

 

 

(2)

 

예전에 <사진화보>라는 잡지에서 <히라의 철쭉>이라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아득히 눈 아래로 거울 같은 호면(湖面)의 일부가 바라보이는 히라산 줄기 꼭대기의, 저 향기 높고 하얀 고산식물 군락이 그 가파른 사면을 아름답게 뒤덮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언젠가 세상살이의 고단함과 슬픔을 배낭 가득히 짊어지고, 눈앞에 막아 선 히라 능선을 쳐다보면서, 호반의 조그마한 협궤열차에 흔들리며, 이 아름다운 산정의 일각에 닿을 날이 있을 것임을, 남몰래 굳게 다짐했었다. 절망과 고독의 날, 기필코 난 이 산에 오르리라고ㅡ.

그로부터 아마 십 년이 지났을 것이지만, 나는 아직껏 히라의 철쭉을 알지 못한다. 잊어버린 건 아니다. 해가 거듭될수록 그 높은 봉우리의 하얀 꽃을 눈앞에 그리는 기회는 나에게 늘어났다. 다만 저 히라 봉우리 꼭대기 향기 높은 꽃 군락 아래, 별을 향해 든 나 자신의 잠을 생각하면, 그때의 내 모습이 갖는, 행·불행 그런 것과 무관한 외줄기 슬픔과 같은 것에 접하게 되면, 웬일인지, 하계(下界)의 그 어떠한 절망도, 그 어떠한 고독도, 한결같이 외잡(外雜)하고 쓰잘데없는 것만 같이 느껴지곤 하는 것이었다.

 

 

(1)은 지금 새삼스럽게 표절 문제로 화제가 되고 있는 신경숙(이하 존칭 생략)의 대표작 <외딴방>의 1장 가운데 한 부분이고 (2)는 일본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 1907~1991)의 시집 <북국(北國)>(1958)에 실린 <히라의 철쭉>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1)은 1999년 개정판 17쇄(2005년 발행)로 만든 전자책에서 가져왔으며, (2)는 1997년 창작과비평사 발행, 유정이 편역한 <일본현대 대표시선>에서 가져왔다. (1)이 1995년의 초판본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개정판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혹시 초판본을 갖고 계신 분이 계시면 비교해주시면 감사할 듯하다). 

 

이 두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같은 단어가 많이 나온다. 그중 '해가 거듭될수록'이라고 유정이 옮긴 부분은 일어 원문에는 '연년세세'라고 되어 있기까지 하다. 그뿐만 아니라 (1)의 '나'가 백로 사진((2)에서는 철쭉 사진)을 보았다는 것, 열차를 타고 그들을 보러 가리라는 마음을 다진 것, 잊지는 않았지만 아직 보러 가지는 못했다는 것, 그렇지만 그들을 보러 가겠다는 마음을 다지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잠들고 있을 백로((2)에서는 '나의 잠')를 생각하면 '불행'과 '고독'((2)에서는 '절망'과 '고독')이 쓰잘데없이 느껴진다는 구성이 똑같다. 시 전문을 가져와서 철쭉을 백로로 바꾸고 그 외 문장들도 자기 식(?)으로 바꾼 혐의가 짙은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단, 의문이 느껴지는 건 <외딴방>은 1994년에 연재가 시작되었고 <일본현대 대표시선>이 나온 것은 1997년이라는 점이다. 이노우에 야스시의 <둔황>은 아주 오래전부터 국내에 번역본이 나와 있었고 그 후로도 거듭 출판되었기 때문에 나름 이름이 알려진 일본 작가였음은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시, 특히 이 <히라의 철쭉>이 이전에 또 번역된 적이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연세대와 고려대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이노우에 야스시로 검색하였을 때 번역된 시집은 분명 나온 바가 없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 시선집이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또 신경숙 본인이 일본어를 잘 알 가능성도 있고, <일본현대 대표시선>이 나오기 전 원고를 보았을 수도 있다. 반드시 당사자만이 보고 원고 내용을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출간 전의 원고를 검토하거나 보게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닐 테니까. 어쨌거나 지금은 (1)이 참고했을 것이라 생각되는 번역문을 찾지는 못한 상태다. 이 역시 혹시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가르쳐주시면 좋겠다.

 

표절에 대한 내 생각은 사회의 통념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는 거다. 표절의 법적 정의와 그에 대한 처벌은 어떠한지도 잘 모르고 사회적 단죄도 어느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 명확한 생각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작가든 누구든 글이든 뭐든 남의 것을 무단으로 가져와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딱 거기까지이다.

 

(1)과 (2)의 유사성을 알게 된 것은 오래전 일이다. <일본현대 대표시선>이 나온 지 1년 정도 뒤였으려나. 이 시선집에서 가장 좋아했던 시인이 이노우에 야스시가 아니었더라면, 우연히 도서관에서 <외딴방> 1권을 다시 넘겨보지 않았더라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의 실망스러움을 친구 몇 사람에게만 지나가듯 이야기했고 더 이상 신경숙의 책을 사서 보지 않았다는 정도가 그저 독자로서 내가 한 일이었다.

 

이응준 작가의 문제 제기를 읽고, 또 <외딴방>의 표절 여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다기에 뒤늦은 줄 알면서도 굳이 포스팅을 해본다. (신경숙, 미시마 유키오 표절 논란 휩싸여…자전소설 '외딴방'은?  CBC미디어  http://www.cbci.co.kr/sub_read.html?uid=240550) 오랫동안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응준 작가가 문제 제기를 하니까 기어나오느냐는 비판은 충분히 있을 수 있고 또 달게 받겠다. 솔직히 나는 누군가의 작품이 실망스럽다면 그걸 구구절절 떠들기보다 더 이상 내가 안 보면 되고 언급도 하지 않고 사지도 않는다는 쪽이지만 이런 방침이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비겁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독자로서 '비판의 의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누군가에게 떠넘기기보다 자신이 먼저 그것을 자각하는 것이 순서일 테니까(네가 뭔데 그런 의무를 지느냐는 이야기도 나올 수 있겠지만). 풍파를 더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많긴 했지만 일단은 올리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많은 이들의 반박과 비판을 바란다(인신공격은 마시고...ㅜㅜ).

 

아, 이 포스트의 제목인 '히라의 철쭉에서 백로의 숲까지'는 초판에 실린 남진우의 해설 제목 <우물의 어둠에서 백로의 숲까지>에서 빌려온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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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로부터 오늘까지 십몇해의 세월이 지났다."
    from . 2015-06-20 00:30 
    이 글에서는 우선 이노우에 야스시의 초기 시 가운데 몇 편에 일정하게 드러나는 시 구성의 패턴을 찾아보려고 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노우에 야스시는 산문시를 많이 썼기에 그만의 난해하고 독창적인 비유를 찾기가 힘든 작가라는 점이 '표절'을 논하는 데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어서이다. 대신 내 논리를 보강할 근거로서 시의 구성을 택했다. 이노우에 야스시가 즐겨 쓴(적어도 선호했던) 패턴은 다음과 같다. 1. 과거에 무언가를 본 일이 있다.
 
 
비로그인 2015-06-18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다보니.. <외딴방>도 표절이 아니냐는 의도가 쓰신 것 같은데 맞나요?

서재에서 이 글 보고 약간 황당해서 로그인했습니다.

˝ <외딴방>은 1994년에 연재가 시작되었고 <일본현대 대표시선>이 나온 것은 1997년이라는 점이다. ˝라고 하셨지요? ˝또 신경숙 본인이 일본어를 잘 알 가능성도 있고, <일본현대 대표시선>이 나오기 전 원고를 보았을 수도 있다. 반드시 당사자만이 보고 원고 내용을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출간 전의 원고를 검토하거나 보게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닐 테니까.˝라고 이어 쓰셨는데요.

신경숙 작가가 일본어를 잘 아나요? -> 이걸 확인도 없이 문제 제기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당사자만이 보고 원고 내용을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출간 전의 원고를 검토하거나 보게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닐 테니까.˝라는 건 어떤 근거인가요? 이거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것 같은데요? 이응준 작가가 이런 글도 썼던가요?

이건 풍파가 아니라..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자~~~~~ 라고 느꼈습니다.

저는 종이정원님의 글을 보고 첫 생각은.. 단순히 연도로 생각해도, 번역가였습니다. 종이정원님이 신경숙 작가를 떠올린거야 지금 상황이 그러니까 그러시겠지만.. 이런 글을 `결정적인 이유` 없이 이 책도 표절같지? 하는 건 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이응준 작가의 글은 얼마나 막힘이 없습니까. 이럴 가능성도 있고, 저럴 가능성도 있으니 표절 같다.. 그랬다면 그 글이 이렇게 사람들을 이끌지는 못했을겁니다.

하.. 정말 슬픈 밤이네요.

종이정원 2015-06-18 10:26   좋아요 0 | URL
제가 거꾸로 여쭤볼게요. 신경숙 작가가 일본어를 잘 알 가능성이 있다고 제가 썼는데 정황상 그런 문제 제기를 할 수 없는 건가요? 남들에게 자기 특기를 알리지 않는 사람도 세상에는 많잖아요. 어쨌거나 이노우에 야스시의 <히라의 철쭉>이 <외딴방>보다 37년쯤 앞서 발표된 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고, 유정 선생님 번역문 외에 다른 번역문이 있을 법도 한데 못 찾겠으니 아는 분이 있으면 도와달라고 했는데 뭐가 문제인가요? 번역문이 없었다면 작가가 원문을 직접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그렇게 터무니없는 얘기인가요?

원고 출간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나 출간 전 독자 반응을 보기 위해 출판사에서 공식적으로 외부 사람에게 원고를 보여주고 의견을 들을 때가 있어요. 비공식적으로 작가나 번역가가 친분 있는 사람에게 원고를 한번 읽어달라고 하기도 하고요. 저는 두 경우 다 경험해봤어요. 당연히 원고 제목이며 내용은 발설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죠. 이건 출판사의 중요한 정보니까. 이걸 무슨 원고 유출 문제처럼 생각하시면 안 되고요. 출판사나 작가, 번역가의 원고 관리가 그렇게 허술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외부 사람이 출간 전 원고를 볼 수 있는 경로가 있고 그렇다면 신경숙 작가도 출간 전 원고를 봤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건데 정말 이게 불가능한 얘기 같으신가요? 마음 같아선 창비나 유정 선생님께 확인해보고 싶지만 유정 선생님은 그렇다 치고 창비가 지금 이 상황에서 만약 원고를 보여줬어도 `보여준 일이 있다`고 할 것 같으세요? 글고 이응준 작가가 이런 내용을 썼는지 안 썼는지는 저한테 확인하려 하시면 안 되죠.

`단순히 연도로 생각해도, 번역가였습니다.` 이건 뭔 말씀이신지 도무지 모르겠고요. 결정적 이유가 없다고 하시는데 전 나름의 논리와 근거를 댔어요(문장 구성 유사, 단어 유사, 문제의 대목과 비교를 위해 히라의 철쭉 작품 전문 게재. 원문도 게재해드려요?). 거기에 준하는 논리와 근거를 보여주세요. 아니면 제 추측들이 다 틀린 거라는 걸 증명해주세요. 저는 정황상 제기할 수 있는 추측에 대해 썼고요, 그걸 저보고 다 확인하라고 하시는 건 억지 같네요. 확인하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 작가가 이러저러한 걸 본 게 분명하다며 함부로 쓰지도 않았고 작가에 대한 카더라 식의 루머를 끌고 들어온 일도 없어요.

글고 슬프니 하는 저로서는 이해가 전혀 안 되는 한탄은 본인의 빈 블로그에 가셔서 하시구요, <외딴방>을 알든 모르든 읽어보라고 이 페이퍼를 쓴 거지 표절 의혹 제기하는 데 작품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실례라는 건 무슨 말씀이세요? 작가에게 문제를 제기하는데 왜 실례는 독자가 당하나요? 제가 `여러분은 여태까지 표절 작가에 속아서 좋아한 거예요`라고 말하기라도 했나요? 이건 어디까지나 문제 제기이지 누구를 감정적으로 비난하거나 할 의도가 없는데 그런 말이 나올 이유가 만무하잖아요. 작가에 대한 문제 제기도 그래요. 저 역시 이응준 작가처럼 신경숙 작가에게도 아무런 개인적 감정이 없어요. 말했다시피 내가 안 보고 안 사면 그만이니까. 근데 굳이 이 글을 쓴 이유도 얘기했어요.

이응준 작가 글 보고 이거 쓴 건 맞는데 그분이랑 비교당할 이유도 없네요. 그분 글에 다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표절 의혹 제기하는 작품 자체가 다르고, 당연히 논리가 달라지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분은 그분이 하실 수 있는 이야기를 하신 거겠고 저는 제가 읽은 만큼 제 몫이 있다고 생각해요. 글고 제가 그분만큼 잘쓰지 못하는 건 당연하잖아요. 저는 프로가 아니니까요. 종이정원아, 이응준 작가는 막힘이 없는데 너는 왜 이 모양이니, 라는 식의 말이 오히려 작가님께 실례라는 생각은 안 드세요? 저 따위랑 작가님을 비교하시면 안 되죠.

마지막으로 제 글은 제가 썼지 `의도가` 쓴 건 아니구요, 제 의도를 두고 님이 듣고 싶어하는 대답을 제 입으로 할 것을 강요하지 마세요. 이 글을 쓴 이후 어떤 방향으로 달려갈지는 저도 짐작이 안 되니 제 느낌이랑 같으시고요, 풍파는커녕 실바람도 없을지 모르는 건 짐작이 가는 바이지만 풍파를 일으키려고 쓴 것도 아니고 실바람이 없다고 실망하려고 쓴 것도 아니라는 것만 말씀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슬퍼하지 마시고 좋은 하루이시기를 바랍니다.

moon 2015-06-18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충분히 문제 제기할만합니다.

종이정원 2015-06-18 10: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쓰지도 못하는 글을 주절거리며 갑자기 서재 활동에 열을 올린 건 다름아닌 알라딘에서 새로 론칭한 '북플' 때문이다. 피씨보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생활의 축이 거의 옮겨가고 있고 SNS 서비스는 보편화되다 못해 슬슬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고 느껴지긴 하지만(온라인상점을 제외하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한 웹서비스의 수명은 삼사 년 정도임...) 역시 알라딘, 서점 사이트들 중에서는 발빠르게 SNS 서비스를 내놓았다.

 

그래서 나도 앱을 깔아놓고서 요모조모 만져도 보고 서재와 어떤 식으로 연동이 되는지도 나름 살펴보았다. 아직 각 책 상품 페이지나 서재와는 완벽하게 연동되거나 매칭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장기적으로는 역시 북플이 서재를 대신하는 서비스가 될 것 같긴 하다. 상품 페이지에도 '읽고싶어요'나 '읽고있어요'를 보여주면 좋을 것 같고 아마 서재도 '친구' 사이에 어떤 책들이 화제인지 보여주는 북플의 방향으로 개편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읽었어요'이다. 물론 '읽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것이 곧 '구매'를 나타내는 지표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냥 '읽었다'고 표시하고 끝내는 건 심심하다. 독서란 최종적으로는 어떻게 읽었나, 좋았나 나빴나, 감동적이었는가 아닌가, 길게 언급할 가치가 있는 책인가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책인가 등등 여러 다양한 반응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것은 스마트폰으로 길게길게 쓰기에는 현재까지는 좀 어려움이 있다. 나도 지난 몇 주간 모든 글은 결국 피씨로 작성하게 되었고 스마트폰으로 한 건 하나도 없다. 이래서는 사실상 기존 서재 활동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이 사실을 서비스를 하는 알라딘 쪽에서 모를 리 없고 어떻게든 '독자'들을 피씨 앞으로 불러내서 오랜 시간 동안 키보드를 두들기도록 만들어야 더 재미가 있을 터인데 그걸 어떻게 유도해내느냐를 두고 아마 지금도 여러 사람이 머리를 싸매고 있지 않을까.

 

단 1초의 시간에도 여러 글(?)들이 주루룩 올라오는 SNS 시대에 고리타분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읽었어요'만으로 독서 활동을 끝내도록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 이유는 적어도 책은 '읽었어요'라는 말보다 훨씬 길게 언급될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해두자(실제로 대부분의 책은 훨씬훨씬 길게 쓰인 것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내가 북플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고 침체될 수밖에 없는(?) 리뷰나 책 담화에 좀더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멋진 서비스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거기에 서비스의 성패가 달려 있음은 굳이 내가 언급하지 않아도 더 잘 아시리라 믿는다.

 

덧) 친구 신청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종종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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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1-12 2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북플이 주는 젤 좋은점은 리뷰가 담화가 된다는 점 입니다.
영화평론가들의 이해도 안되는 오만한 일방적 평론과 달리, 북플 알라디너 분들의 글은, 친절하고 겸손하며,동의를 구하는듯하여 보다 공감할 수 있고 너무 좋네요. 배움을 주는 리뷰글이 북플 이전에도 많았지만 북플 이후에 더 접근성이 좋아진거 같아요!

종이정원 2015-01-12 23:06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접근성`은 정말 좋아진 것 같습니다. 글 읽기에 좋은 앱인 듯해요.^^ 몇년 전에 비해 리뷰가 많이 위축된 것 같다고 느껴지긴 하는데 북플이 새 활력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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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니 '젊은이' 혹은 '청년'에 대한 정의를 하기가 망설여진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그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현재 '행복하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행복 대신 '불행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정은 쉽게 짐작이 가는 바다. 스무 살 전후에는 입시 때문에 불행하고 입시를 거친 이후에는 비싼 학비 때문에 불행하며 그렇게 고생해서 공부를 마친 이후에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기가 너무 힘들고 따라서 경제적 도움 없이는 연애며 결혼, 출산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너무 진부해서 부끄럽고 민망하기만 하다. 그러나 더욱 진부하고 낯부끄러운 사실은 아무도 어떠한 전망을 약속하지 못하는 현실이 지속되고 있고 또한 지속될 거라는ㅡ비록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인간들이 푸른기와집 근처 및 여의도에 상주하는 것 같긴 하지만ㅡ사실이다. 앞으로 생활이 더 나아질 전망이 없으므로 젊은이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너무나 자명해 보인다.

 

일본이라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을 출간할 당시 스물여섯이었던 사회학 연구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절망적인 사회의 상황에 대해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자기 세대보다 훨씬 많은 수의 노인을 부양해야 한다. 물론 정규직 취직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늘 그렇듯이(?) 자신의 젊은 시절만을 기억하는 어른들의 꼰대질(이질적인 타자론) 내지는 젊은 세대를 편리할 대로만 동원한(편리한 협력자론) 국가의 간섭까지 종종 감내해야 한다.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현재의 젊은이를 둘러싼 담론들이 백여 년 전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내셔널리즘과 무관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 후 젊은 세대를 두고 어른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이 얼마나 자기들 입맛대로 그들을 재단하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런 다음 실제로 지금의 젊은 세대는 '행복하다'라고 말한다. 정규직이 되기는 어렵지만 비정규직으로도 당장의 나날을 보내는 데 큰 경제적 어려움은 느끼지 못하며 굳이 현실 사회가 아니더라도 '마음 둘 곳'을 찾아 승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까? 이 지점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어쩌면 한일 양국 간의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지금의 젊은이들은 중국의 농민공과 같이 새로이 나타나는 계급사회에서 하층민의 자리에 있더라도 자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며, 또한 '이제까지의 일본'이 멸망한다 해도 그것이 뭐 어떠냐고, 그것이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시대가 비록 어른들이 말하는 '좋았던 옛 시절'만큼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을 불행으로 여길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이 세대는 과거 세대가 상상한 이상의 '미래'를 살고 있는 것이다. 돌아갈 과거 따위는 존재하지 않지만, 미래는 확실히 불안한, '왠지 행복하고 왠지 불행한' 그런 삶을 이들은 살고 있다. 이것이 동 세대의 연구자가 자신의 세대의 삶에 대해 내린 객관적 평가이다.

 

이에 비하면 역시 한국은 '돌아갈 과거'라는 게 '어른'들에게도, 또한 젊은이들에게 너무나 명확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정규직-중산층의 삶을 확보하기 어려워질수록 온 집안이 똘똘 뭉쳐 입시며 취업이라는 불안한 확률에 매달렸고 지금도 대개는 매달릴 수밖에 없는 지경이기 때문이다. 이 게임의 가장 큰 당사자가 되는 '자식'일수록 부모에게 기대거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이 구도는 집 안에서만 그치지 않으며 사회로까지 확장된다. 여기에는 과연 '어떻게 해야 나는 행복한가'라는 의문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인다. 획일화된 사회 진출의 궤도에서 벗어난 행복이나 만족은 '어른들'의 눈에는 없으며 그들의 손아귀에 미래를 볼모로 잡힌 젊은 세대 역시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다. 불행과 불안의 조건은 눈에 훤히 보이지만 그 역은 누구도 제시하기 힘든 지금, '세상은 엉망이지만 그래도 나는 그럭저럭 행복하다'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이 사회는 또 어떤 시간들을 거쳐야 할지 상상하게 된다. 일본과 같은 경제적 부를 누린 적도 없고 제대로 된 개인주의의 발달도 맞지 못한 이 사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낼 세대는 영영 나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이야기한 대로 국가의 존속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문제이다. 이 나라가 망하더라도 이 물음만은 계속 던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의무는 당연히 젊은 세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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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사정상 일본 서적은 입수 경로가 여러 군데인데 오늘 아침 주문한 <현대사상> 임시증간호 가라타니 고진 특집호는 품절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기억에 따르면 12월 초에 발간된다고 했던 게 12월 19일로 밀렸고 주문을 넣은 건 23일이었다. 그리고 닷새 만에 품절 소식을 들었으니 제날짜에 발간된 게 맞다면 열흘도 안 되어 (몇 부나 찍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매진이 된 셈이다.ㅜㅜ 다행히 알라딘에서는 아직 품절로 뜨지 않아서 다시 주문을 넣어놓기는 했으나 어떨지 잘 모르겠다. 십중팔구 저쪽에서 증쇄를 하지 않는 이상 또 품절되었다는 연락을 받을 것 같긴 한데 일단은 기다려보련다. 인기 있을 만한 잡지는 종종 이런 품절크리를 맞으므로 별로 놀라운 상황은 아니다. 또 품절이 되었어도 정 필요한 책이라면 직구 카드도 있고 인터넷 서점 등에서 새 책 입수가 불가능하다면 중고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물론 배송비라는 배꼽이 더 클 각오는 좀 해야 한다. 시간도 생각보다 많이 걸리고). 최후의 최후 같은 카드라면 복사도 있다. 이 잡지를 정기구독하는 학교가 있으니까(라고 써놓고 보니 임시증간호까지 받아보는지는 확인을 안 했...ㅜㅜ).

 

 

 

 

 

 

 

 

 

 

 

 

 

<세계사의 구조>는 발간된 지 5년 만에 이와나미 현대문고로 문고화된다. 내년 1월 16일로 일정이 잡혔고 알라딘에서도 무려 예판을 받고 있다.^^;; 번역서는 갖고 있지만 원서 가격은 좀 부담스럽던 차에 잘됐다는 생각이 든다(번역서보다 쌉니다...ㅜㅜ).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번쯤 보셔도 좋을 듯.

 

마지막으로... 이건 아직 품절이 되지 않았는데 가끔 '표지 모델'을 보는 재미(?)로 책 정보를 보곤 하는 책이다. 살까말까 하다가 내가 야나기타 구니오론(야나기타 구니오는 일본의 대표적인 민속학자)을 읽는다 해도 뭘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서 결국은 사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이런 표지는 소장해야 하는 게 아닐까 늘 망설인다.^^;;

 

 

 

 

 

 

 

 

 

 

 

 

 

가라타니 쌤의 글을 읽는다고 해서 내가 그 내용을 다 이해한다는 보장은 언제나 그랬듯 전혀 없다. 그러나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문장이 있다. 후쿠다 가즈야는 가라타니의 문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후쿠다 가즈야는) "가라타니 고진의 비평이 가진 힘은 추상화에 의한 철저함에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오로지 '문장=문체'에 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효과를 낳기 위해 가라타니는 문장에서 쓸데없는 장식이나 에피소드를 떼어내고 마치 거기에 벌거벗은 형태의 사고가 있는 듯이 꾸몄다. 가라타니의 문장이 난해하다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독자가 주의 깊게 읽으면 그의 '사고'를 완전하게 직접 볼 수 있고, 마치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사색을 체험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꾸며져 있다. 그 고안의 중핵을 이루는 것이 문장의 추상성임은 말할 것도 없다.

 

가라타니의 비평문은 독자에게 사고를 상연해 보여주기도 하는 한편 독자에게 사고 정지를 촉구하기도 한다. 비평가를 포함하는 독자들은 가라타니의 작품을 읽고 자신이 사고하는 것 같은 착각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의 두뇌를 가라타니에게 양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ㅡ후쿠다 가즈야 '가라타니 고진과 일본의 비평', <감미로운 인생>에서, 사사키 아쓰시, 송태욱 옮김, <현대 일본 사상>, 163쪽에서 재인용.

 

물론 가라타니의 글을 읽으면서 주제넘게 '내 생각인 듯 내 생각 같은 내 생각 아닌'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다만 후쿠다 가즈야가 말하는 가라타니 문체의 '무척 의식적이고 가공적인' 부분은 나와 같은 인문서-일어 초중급 독자에게는 매우 접근하기 편하게 설계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문장에 군더더기가 거의 없고 문장을 연결하는 논리의 힘이 굉장하기 때문에 일단 해석하기로 마음먹으면 해석이 안 되는 문장이 없도록 만들었구나, 라고 깨닫게 되는 부분이 있다. '읽으면 읽힌다'라고나 할까. 그것이 '촉구되는 사고 정지'라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러한 맛을 느끼게 하는 문장을 찾기가 매우 힘들기에 계속 읽어보고자 시도를 하게 된다. 어쩌면 그런 '문장 설계'는 번역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예전에 어느 선생님께서 '번역될 것을 의식하고 글을 쓰는 사람은 일본에 단 둘이다. 그중 한 사람이 가라타니 고진이다'라고 하신 적이 있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번역에의 가능성'을 증명하기에 좋은 지표라면 아마 가라타니 고진의 문장의 '지표 지수'는 매우 높을 것이다.

 

아, 나머지 한 사람은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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