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의 철쭉에서 백로의 숲까지

 

이 글에서는 우선 이노우에 야스시의 초기 시 가운데  몇 편에 일정하게 드러나는 시 구성의 패턴을 찾아보려고 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노우에 야스시는 산문시를 많이 썼기에 그만의 난해하고 독창적인 비유를 찾기가 힘든 작가라는 점이 '표절'을 논하는 데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어서이다. 대신 내 논리를 보강할 근거로서 시의 구성을 택했다. 당시 이노우에 야스시가 즐겨 쓴(적어도 선호했던) 패턴은 다음과 같다.

 

 

1. 과거에 무언가를 본 일이 있다.

 

 

2.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3. 지금 나는 그 무언가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한다.

 

 

이상의 시 구성을 그의 첫 시집 <북국>에 실린 서른일곱편 가운데 세 편의 시이자, <일본현대 대표시선>에도 실린 <유성> <엽총> <시리아 사막의 소년>을 통해 드러내겠다. 

 

그런 다음 현재 <히라의 철쭉>의 다른 번역문을 찾기 힘든 관계로 직접 번역을 하여 번역문을 만들어보려 한다. 단, 유정과는 다른 번역의 방법을 택할 것이다. 즉 번역자의 주관적 해석을 최대한 배제하는 '직역'을 라인 바이 라인으로 시도하겠다. 이렇게 하면 문장이 많이 이상해지겠지만 원문과 문제의 대목을 비교하기 쉬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자어의 경우에는 한국식으로 음을 읽고 그 외 번역어의 선택은 가급적 해당 단어를 싣고 있는 사전 페이지의 첫머리에 나오는 것으로 하겠다. 번역 대본은 1983년 신초샤에서 초판이 발행된 <이노우에 야스시 전시집>(문고본, 1999년 10쇄)이다.  

 

 

인용문의 강조는 내가 했으며 인용문 표시 및 글상자 넣기가 잘 되지 않아 인용문은 부득이 다른 서체로 구분했다.

 

 

유성


고등학교 학생시절, 일본해의 모래언덕 위에서, 홀로 망또에 몸을 감싸고 드러누워 별이 흐르는 하늘을 바라본 적이 있다. 11월의 얼어붙은 성좌에서, 한줄기 푸른 빛이 반짝이며 나와 홀연히 사라지고 만 그 별의 고독한 움직임만큼, 강하게 내 청춘의 영혼을 흔들어놓은 것은 없었다. 나는 언제까지나 모래언덕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나야말로, 이윽고 떨어져내릴 그 별을 이마에 받아들일, 지상에 있어 단 하나의 인간임을, 나는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십몇해의 세월이 지났다. 오늘밤, 이 나라의 한 많은 청춘의 유해(遺骸)ㅡ쇳조각과 기왓장으로 이뤄진 황량한 도시 풍경 위에 길게 꼬리를 끌며 질주하는 별 하나를 보았다. 눈을 감고 벽돌을 베개 삼은 나의 이마에는 이미 그 무엇도 떨어져내릴 성싶지 않았다. 그 한순간의 제전(祭典)의 무연(無緣)함이여, 전란의 황망(慌忙)함 속에 잃어버린 이내 청춘을 닮아, 그 별의 행방은 알 수도 없다. 다만, 언제까지나 나의 눈꺼풀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홀로 항성군에서 탈락해, 천체를 낙하하는 별의 종언이 지닌 그 놀라운 정갈함뿐이었다.

 

 

 

엽총


왠지 그 중년남자는 마을 사람들의 빈축을 샀으며, 그를 겨냥한 나쁜 소문들은 어린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어느 겨울 아침, 나는 그 사람이 탄띠를 꽉 매고, 코르덴 윗도리 위에 엽총을 묵직하니 매단 채, 장화로 서릿발을 밟으면서, 아마기(天城)로 가는 샛길 풀숲을 천천히 헤치고 오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그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때 그 사람의 뒷모습은 지금도 내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살아있는 동물의 생명을 끊는 하얀 강철 기구로, 그처럼 차갑게 무장해야 했던 것은 어째서일까. 나는 지금도 도시의 혼잡 속에 있을 때, 문득, 그 사냥꾼처럼 걷고 싶을 때가 있다. 천천히, 조용히, 냉정하게ㅡ그리곤, 인생의 허연 강바닥을 엿본 중년의 고독한 정신과 육체 양쪽에, 동시에 배어들 만한 중량감을 눌러 찍는 것은 역시 저 닦고 닦아서 번쩍이는 하나의 엽총 말고는 없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시리아 사막의 소년

 

 

시리아 사막 가운데 영양떼와 함께 살고 있는 벌거숭이 소년이 발견되었다고 신문은 보도하며 그 사진을 실었다. 더벅머리 옆얼굴은 어쩐지 차갑고, 시속 오십 마일을 달린다는 아름다운 두 다리를 지닌 자태는 묘하게 슬펐다. 알아선 안될 것을 알고, 보아선 안될 것을 본 것 같은, 그때 나의 당황스러움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그 뒤 굶주린 노인을 보거나, 혹은 마음 거만하고 고명한 예술가를 만나고 있는 그런 때, 나는 문득 어딘가 먼 곳에, 그 소년의 눈길을 느끼곤 한다. 시리아 사막의 한 점을 기점 삼아, 영양의 생태를 뒤쫓아 완만하게 샘물을 돌아, 곧장 별에까지 뻗은 그 소년이 지닌 운명의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은, 다시 말해서 그 운명이 그린 순수회화적 곡선의 정갈함은, 그럴 때면 언제나, 세상 인간들을 한결같이 불행해 보이게 하는 이상한 슬픔을 애오라지 되비추고 있는 것이었다.

 

 

 

比良のシャクナゲ

 

むかし写真画報という雑誌比良のシャクナゲ写真をみたことがある

(옛날 <사진화보>라는 잡지에서 '히라의 철쭉'이라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そこははるか眼下のような湖面一部が望まれる比良山界きであのりの高山植物群落その急峻斜面しくおおっていた

(그곳은 아득히 눈 아래로 거울 같은 호면의 일부가 바라보이는 히라 산계의 꼭대기로서, 저 향기 높고 하얀 고산식물의 군락이, 그 급준한 사면을 아름답게 덮고 있었다.)

 

その写真はいつか自分生活疲労しみをリュックいっぱいにまなかいに比良稜線ぎながら湖畔さい軽便鉄道にゆられこのしい山巓一角辿つくがあるであろうことをひそかにしてわなかった

(그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언젠가 내가, 인간 세상의 생활의 피로와 슬픔을 륙색 가득히 짊어지고, 눈앞에 선 히라 능선을 우러러보면서, 호반의 작은 경편철도에 흔들리면서, 이 아름다운 산정의 일각에 다다를 날이 있을 것임을, 남몰래 마음에 기약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絶望孤独ずや自分はこのるであろうと—。

(절망과 고독의 날, 반드시 나는 이 산에 오를 것이라고ㅡ.)

 

それからおそらく十年になるだろうがはいまだに比良のシャクナゲをらない

(그 이후 아마 십년이 되겠지만, 나는 아직껏 히라의 철쭉을 알지 못한다.)

 

れていたわけではない

(잊고 있는 것은 아니다.)

 

その機会にはくなっている

(연년세세, 그 높은 봉우리의 흰 꽃을 눈꺼풀에 그리는 기회는 내게는 많아졌다.)

 

ただあの比良群落のもとでけてりをうとその自分姿とか不幸とかに無緣ひたすらなるしみのようなものにれるとなぜか下界のいからる絶望いかなる孤独なお猥雑なくだらぬものにえてくるのであった

(다만 저 히라 봉우리 꼭대기, 향기 높은 꽃 군락 곁에서, 별로 얼굴을 향하고 잠들 내 잠을 생각하면, 그때의 내 모습이 갖는, 행이라든가 불행이라든가와 무연한, 한결같은 슬픔과 같은 것에 접하면, 왠지, 하계의 어떠한 절망도, 어떠한 고독도 한층 외잡한 하찮은 것으로 생각되어오는 것이었다.)

 

 

 

이상이다.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이후 이 문제에 대해서 쓰지 않겠다. 나는 내 근거를 보강하고 싶었을 뿐이고 딱히 다른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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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페이퍼에서 나는 신경숙의 문학에 대해 아무런 가치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의 현황이며 이전의 표절 논쟁 역시 오래전 <외딴방>을 읽던 학생 때만큼의 관심도 없고(그때도 뭘 알았겠냐마는) 잘 아는 바도 없다. 아는 게 없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설익은 판단은 내비치지 않는 것이 맞다. 다만, 내가 보고 읽었으며 가능한 한 정확한 논리와 근거에 의거해 할 수 있는 얘기를 했다. 문제의 대목과 비교되는 앞선 작품이 있으며 이들의 유사성을 밝혔고, 명백히 표절이 의심된다, 그리고 표절은 옳지 않은 일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얘기의 전부이다.

 

작가가 지금까지 받아온 상찬이나 상업적 성공과 한국문학의 문제 사이의 관련성, 그리고 지금 이와 관련한 모 출판사의 대응에 관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말보다 다른 이들이 해줄 수 있는 말이 더 많을 것이고 나는 그것을 '먼저' 읽는 입장이어야 할 것이다. 작가의 문제에 관해, 그리고 한국문학의 문제에 관해 내 생각과 행동은 앞서도 말했듯 변함이 없다. 구구절절 떠들기보다, 어설픈 가치 판단 한마디를 보태기보다 안 보고 안 사는 것이다. 그리고 책이란 게 여타의 상품과는 좀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로서 '안 사겠다'는 언급이나 행동이 소극적으로 보이기는 해도 그다지 위력 없는 것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지금 신경숙 관련 기사에 줄줄이 달린 ㅊ사 책은 앞으로 안 사겠다는 언급이나 내 돈을 돌려달라는 불평들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전반적인 '상품'으로서의 '한국문학 작품'이 '소비자'에게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죽었다 깨어나도 '비교 경쟁 우위' '시장 점유율 상위권'을 점하고 있다고는 말 못할 것이다.

 

덧붙여 최근 읽은 우에노 치즈코의 글 가운데 인상 깊었던 대목이 있어서 여기 적어둘까 한다. 이것은 문학의 차원에서 생각할 게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이지만 울림이 크다. (그러니 이런 걸 옮겨놓는 의도가 이거냐 저거냐 물어보지는 마시길.)

 

이처럼 연구 영역이 넓어져가는 학문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는 우리의 둘도 없는 경험을 타인에게 전달되는 말로 만들어 공유하는 것이다. 듣는 이가 없으면 언어화될 수 없으므로 청자인 동료에게 들려주고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는 말로써 근거를 보여주어 언어화한다. 그럼으로써 처음으로 타인에게 전달되는 '지(知)'라는 것이 생겨난다.

 

학문이란 우리의 경험을 전달 가능하며 공유할 수 있는 지로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지의 공유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학문과 문학은 어떻게 다른가? 문학은 단 한 사람의 언어이다. 물론 사람들에게 전달이 안 되면 문학이 아니지만, 타인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면 그 사람의 문학은 이미 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학문이란 타인과 공유 가능한 언어를 사용하여 타인에게 자신의 경험과 발견을 전달해나가는 것이다.

 

ㅡ우에노 치즈코, <젠더 연구를 권장하며>(2010, 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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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풍속화 속의 고독의  날들 속에서 내가 자주 힘겹게  떠올린 건 도시로 나오던 그날 밤. 외사촌이 보여준 사진집 속의, 아득한  밤하늘 아래, 별을 향해 높고 아름답게 잠든 새들이었다. 나, 그들을 내 눈으로 보러 갈 날이 있을 것임을 힘겹게 나에게 기약하며 그 풍속화 속에서의 나날들을 살아내곤 했다. 훗날, 살아가는 피로와 관계의 부재 속에 처절하게 외로워졌을 때도, 그날 밤 외사촌이 들고 있던 화보 속의 새들, 백로들. 숲속에, 밤이 온 숲속에, 마치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용서한 듯, 서로 올망졸망 기대어 숲을 아름다이 잠으로 뒤덮고 있던 백로들의 무리를 내 눈으로 보러 가겠다는 마음 버리지 않았다. 나,  언젠가, 기차의 창틀에 팔을 흔들리며. 눈앞을 가로막는 능선을 넘어서 가리라고, 절망과 고독의 날일수록 남몰래 나에게 기약하였다.

 

그 기약으로부터 십육  년.

 

나는 아직 새를 보러 떠나지 못했다. 잊은  건 아니다. 잊기는...... 오히려 연년세세 내 마음속의 하얀 백로들 더욱 눈부시게 도드라지며 내 기약을 아로새기는 날들이 많아졌다. 피로한 발바닥을 주무르다가도, 아직  가보지 못한 그 숲속, 별을 향하고 잠들고 있을 나무 위의 백로의 무리를 생각하면, 내 피로가 가져다주는 고단함은 물론이고 간혹 찾아드는 기쁨들하고조차 웬일인지 덤덤해질 수 있었다. 쓰라리게 느껴지던 불행도, 여러  날 계속 내리는 찬비 같은 고독도, 왠지 쓰잘데없이 느껴져서 그 힘으로 다시 다음날을  맞이하고 살아갈 수 있었다.

 

 

(2)

 

예전에 <사진화보>라는 잡지에서 <히라의 철쭉>이라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아득히 눈 아래로 거울 같은 호면(湖面)의 일부가 바라보이는 히라산 줄기 꼭대기의, 저 향기 높고 하얀 고산식물 군락이 그 가파른 사면을 아름답게 뒤덮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언젠가 세상살이의 고단함과 슬픔을 배낭 가득히 짊어지고, 눈앞에 막아 선 히라 능선을 쳐다보면서, 호반의 조그마한 협궤열차에 흔들리며, 이 아름다운 산정의 일각에 닿을 날이 있을 것임을, 남몰래 굳게 다짐했었다. 절망과 고독의 날, 기필코 난 이 산에 오르리라고ㅡ.

그로부터 아마 십 년이 지났을 것이지만, 나는 아직껏 히라의 철쭉을 알지 못한다. 잊어버린 건 아니다. 해가 거듭될수록 그 높은 봉우리의 하얀 꽃을 눈앞에 그리는 기회는 나에게 늘어났다. 다만 저 히라 봉우리 꼭대기 향기 높은 꽃 군락 아래, 별을 향해 든 나 자신의 잠을 생각하면, 그때의 내 모습이 갖는, 행·불행 그런 것과 무관한 외줄기 슬픔과 같은 것에 접하게 되면, 웬일인지, 하계(下界)의 그 어떠한 절망도, 그 어떠한 고독도, 한결같이 외잡(外雜)하고 쓰잘데없는 것만 같이 느껴지곤 하는 것이었다.

 

 

(1)은 지금 새삼스럽게 표절 문제로 화제가 되고 있는 신경숙(이하 존칭 생략)의 대표작 <외딴방>의 1장 가운데 한 부분이고 (2)는 일본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 1907~1991)의 시집 <북국(北國)>(1958)에 실린 <히라의 철쭉>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1)은 1999년 개정판 17쇄(2005년 발행)로 만든 전자책에서 가져왔으며, (2)는 1997년 창작과비평사 발행, 유정이 편역한 <일본현대 대표시선>에서 가져왔다. (1)이 1995년의 초판본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개정판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혹시 초판본을 갖고 계신 분이 계시면 비교해주시면 감사할 듯하다). 

 

이 두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같은 단어가 많이 나온다. 그중 '해가 거듭될수록'이라고 유정이 옮긴 부분은 일어 원문에는 '연년세세'라고 되어 있기까지 하다. 그뿐만 아니라 (1)의 '나'가 백로 사진((2)에서는 철쭉 사진)을 보았다는 것, 열차를 타고 그들을 보러 가리라는 마음을 다진 것, 잊지는 않았지만 아직 보러 가지는 못했다는 것, 그렇지만 그들을 보러 가겠다는 마음을 다지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잠들고 있을 백로((2)에서는 '나의 잠')를 생각하면 '불행'과 '고독'((2)에서는 '절망'과 '고독')이 쓰잘데없이 느껴진다는 구성이 똑같다. 시 전문을 가져와서 철쭉을 백로로 바꾸고 그 외 문장들도 자기 식(?)으로 바꾼 혐의가 짙은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단, 의문이 느껴지는 건 <외딴방>은 1994년에 연재가 시작되었고 <일본현대 대표시선>이 나온 것은 1997년이라는 점이다. 이노우에 야스시의 <둔황>은 아주 오래전부터 국내에 번역본이 나와 있었고 그 후로도 거듭 출판되었기 때문에 나름 이름이 알려진 일본 작가였음은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시, 특히 이 <히라의 철쭉>이 이전에 또 번역된 적이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연세대와 고려대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이노우에 야스시로 검색하였을 때 번역된 시집은 분명 나온 바가 없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 시선집이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또 신경숙 본인이 일본어를 잘 알 가능성도 있고, <일본현대 대표시선>이 나오기 전 원고를 보았을 수도 있다. 반드시 당사자만이 보고 원고 내용을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출간 전의 원고를 검토하거나 보게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닐 테니까. 어쨌거나 지금은 (1)이 참고했을 것이라 생각되는 번역문을 찾지는 못한 상태다. 이 역시 혹시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가르쳐주시면 좋겠다.

 

표절에 대한 내 생각은 사회의 통념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는 거다. 표절의 법적 정의와 그에 대한 처벌은 어떠한지도 잘 모르고 사회적 단죄도 어느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 명확한 생각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작가든 누구든 글이든 뭐든 남의 것을 무단으로 가져와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딱 거기까지이다.

 

(1)과 (2)의 유사성을 알게 된 것은 오래전 일이다. <일본현대 대표시선>이 나온 지 1년 정도 뒤였으려나. 이 시선집에서 가장 좋아했던 시인이 이노우에 야스시가 아니었더라면, 우연히 도서관에서 <외딴방> 1권을 다시 넘겨보지 않았더라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의 실망스러움을 친구 몇 사람에게만 지나가듯 이야기했고 더 이상 신경숙의 책을 사서 보지 않았다는 정도가 그저 독자로서 내가 한 일이었다.

 

이응준 작가의 문제 제기를 읽고, 또 <외딴방>의 표절 여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다기에 뒤늦은 줄 알면서도 굳이 포스팅을 해본다. (신경숙, 미시마 유키오 표절 논란 휩싸여…자전소설 '외딴방'은?  CBC미디어  http://www.cbci.co.kr/sub_read.html?uid=240550) 오랫동안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응준 작가가 문제 제기를 하니까 기어나오느냐는 비판은 충분히 있을 수 있고 또 달게 받겠다. 솔직히 나는 누군가의 작품이 실망스럽다면 그걸 구구절절 떠들기보다 더 이상 내가 안 보면 되고 언급도 하지 않고 사지도 않는다는 쪽이지만 이런 방침이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비겁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독자로서 '비판의 의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누군가에게 떠넘기기보다 자신이 먼저 그것을 자각하는 것이 순서일 테니까(네가 뭔데 그런 의무를 지느냐는 이야기도 나올 수 있겠지만). 풍파를 더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많긴 했지만 일단은 올리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많은 이들의 반박과 비판을 바란다(인신공격은 마시고...ㅜㅜ).

 

아, 이 포스트의 제목인 '히라의 철쭉에서 백로의 숲까지'는 초판에 실린 남진우의 해설 제목 <우물의 어둠에서 백로의 숲까지>에서 빌려온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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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로부터 오늘까지 십몇해의 세월이 지났다."
    from . 2015-06-20 00:30 
    이 글에서는 우선 이노우에 야스시의 초기 시 가운데 몇 편에 일정하게 드러나는 시 구성의 패턴을 찾아보려고 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노우에 야스시는 산문시를 많이 썼기에 그만의 난해하고 독창적인 비유를 찾기가 힘든 작가라는 점이 '표절'을 논하는 데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어서이다. 대신 내 논리를 보강할 근거로서 시의 구성을 택했다. 이노우에 야스시가 즐겨 쓴(적어도 선호했던) 패턴은 다음과 같다. 1. 과거에 무언가를 본 일이 있다.
 
 
비로그인 2015-06-18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다보니.. <외딴방>도 표절이 아니냐는 의도가 쓰신 것 같은데 맞나요?

서재에서 이 글 보고 약간 황당해서 로그인했습니다.

˝ <외딴방>은 1994년에 연재가 시작되었고 <일본현대 대표시선>이 나온 것은 1997년이라는 점이다. ˝라고 하셨지요? ˝또 신경숙 본인이 일본어를 잘 알 가능성도 있고, <일본현대 대표시선>이 나오기 전 원고를 보았을 수도 있다. 반드시 당사자만이 보고 원고 내용을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출간 전의 원고를 검토하거나 보게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닐 테니까.˝라고 이어 쓰셨는데요.

신경숙 작가가 일본어를 잘 아나요? -> 이걸 확인도 없이 문제 제기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당사자만이 보고 원고 내용을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출간 전의 원고를 검토하거나 보게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닐 테니까.˝라는 건 어떤 근거인가요? 이거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것 같은데요? 이응준 작가가 이런 글도 썼던가요?

이건 풍파가 아니라..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자~~~~~ 라고 느꼈습니다.

저는 종이정원님의 글을 보고 첫 생각은.. 단순히 연도로 생각해도, 번역가였습니다. 종이정원님이 신경숙 작가를 떠올린거야 지금 상황이 그러니까 그러시겠지만.. 이런 글을 `결정적인 이유` 없이 이 책도 표절같지? 하는 건 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이응준 작가의 글은 얼마나 막힘이 없습니까. 이럴 가능성도 있고, 저럴 가능성도 있으니 표절 같다.. 그랬다면 그 글이 이렇게 사람들을 이끌지는 못했을겁니다.

하.. 정말 슬픈 밤이네요.

종이정원 2015-06-18 10:26   좋아요 0 | URL
제가 거꾸로 여쭤볼게요. 신경숙 작가가 일본어를 잘 알 가능성이 있다고 제가 썼는데 정황상 그런 문제 제기를 할 수 없는 건가요? 남들에게 자기 특기를 알리지 않는 사람도 세상에는 많잖아요. 어쨌거나 이노우에 야스시의 <히라의 철쭉>이 <외딴방>보다 37년쯤 앞서 발표된 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고, 유정 선생님 번역문 외에 다른 번역문이 있을 법도 한데 못 찾겠으니 아는 분이 있으면 도와달라고 했는데 뭐가 문제인가요? 번역문이 없었다면 작가가 원문을 직접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그렇게 터무니없는 얘기인가요?

원고 출간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나 출간 전 독자 반응을 보기 위해 출판사에서 공식적으로 외부 사람에게 원고를 보여주고 의견을 들을 때가 있어요. 비공식적으로 작가나 번역가가 친분 있는 사람에게 원고를 한번 읽어달라고 하기도 하고요. 저는 두 경우 다 경험해봤어요. 당연히 원고 제목이며 내용은 발설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죠. 이건 출판사의 중요한 정보니까. 이걸 무슨 원고 유출 문제처럼 생각하시면 안 되고요. 출판사나 작가, 번역가의 원고 관리가 그렇게 허술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외부 사람이 출간 전 원고를 볼 수 있는 경로가 있고 그렇다면 신경숙 작가도 출간 전 원고를 봤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건데 정말 이게 불가능한 얘기 같으신가요? 마음 같아선 창비나 유정 선생님께 확인해보고 싶지만 유정 선생님은 그렇다 치고 창비가 지금 이 상황에서 만약 원고를 보여줬어도 `보여준 일이 있다`고 할 것 같으세요? 글고 이응준 작가가 이런 내용을 썼는지 안 썼는지는 저한테 확인하려 하시면 안 되죠.

`단순히 연도로 생각해도, 번역가였습니다.` 이건 뭔 말씀이신지 도무지 모르겠고요. 결정적 이유가 없다고 하시는데 전 나름의 논리와 근거를 댔어요(문장 구성 유사, 단어 유사, 문제의 대목과 비교를 위해 히라의 철쭉 작품 전문 게재. 원문도 게재해드려요?). 거기에 준하는 논리와 근거를 보여주세요. 아니면 제 추측들이 다 틀린 거라는 걸 증명해주세요. 저는 정황상 제기할 수 있는 추측에 대해 썼고요, 그걸 저보고 다 확인하라고 하시는 건 억지 같네요. 확인하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 작가가 이러저러한 걸 본 게 분명하다며 함부로 쓰지도 않았고 작가에 대한 카더라 식의 루머를 끌고 들어온 일도 없어요.

글고 슬프니 하는 저로서는 이해가 전혀 안 되는 한탄은 본인의 빈 블로그에 가셔서 하시구요, <외딴방>을 알든 모르든 읽어보라고 이 페이퍼를 쓴 거지 표절 의혹 제기하는 데 작품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실례라는 건 무슨 말씀이세요? 작가에게 문제를 제기하는데 왜 실례는 독자가 당하나요? 제가 `여러분은 여태까지 표절 작가에 속아서 좋아한 거예요`라고 말하기라도 했나요? 이건 어디까지나 문제 제기이지 누구를 감정적으로 비난하거나 할 의도가 없는데 그런 말이 나올 이유가 만무하잖아요. 작가에 대한 문제 제기도 그래요. 저 역시 이응준 작가처럼 신경숙 작가에게도 아무런 개인적 감정이 없어요. 말했다시피 내가 안 보고 안 사면 그만이니까. 근데 굳이 이 글을 쓴 이유도 얘기했어요.

이응준 작가 글 보고 이거 쓴 건 맞는데 그분이랑 비교당할 이유도 없네요. 그분 글에 다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표절 의혹 제기하는 작품 자체가 다르고, 당연히 논리가 달라지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분은 그분이 하실 수 있는 이야기를 하신 거겠고 저는 제가 읽은 만큼 제 몫이 있다고 생각해요. 글고 제가 그분만큼 잘쓰지 못하는 건 당연하잖아요. 저는 프로가 아니니까요. 종이정원아, 이응준 작가는 막힘이 없는데 너는 왜 이 모양이니, 라는 식의 말이 오히려 작가님께 실례라는 생각은 안 드세요? 저 따위랑 작가님을 비교하시면 안 되죠.

마지막으로 제 글은 제가 썼지 `의도가` 쓴 건 아니구요, 제 의도를 두고 님이 듣고 싶어하는 대답을 제 입으로 할 것을 강요하지 마세요. 이 글을 쓴 이후 어떤 방향으로 달려갈지는 저도 짐작이 안 되니 제 느낌이랑 같으시고요, 풍파는커녕 실바람도 없을지 모르는 건 짐작이 가는 바이지만 풍파를 일으키려고 쓴 것도 아니고 실바람이 없다고 실망하려고 쓴 것도 아니라는 것만 말씀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슬퍼하지 마시고 좋은 하루이시기를 바랍니다.

moon 2015-06-18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충분히 문제 제기할만합니다.

종이정원 2015-06-18 10: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어제의 페이퍼에 '한 번 읽은 책은 다시 읽고 싶지 않다'고 한 사람이 있다고 썼는데 그가 바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쓴 1985년생 젊은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이다. 그와 관련하여 올해 (역시나 브루터스에서^^;;) 자신의 성장배경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해놓은 기사가 매우 재미있었기에 그 기사 내용 일부와 '왜 한 번 읽은 책은 다시 읽고 싶지 않은지'에 대해서 조금 언급해놓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공무원 아버지와 매우 자유로우며 개인주의적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으며 두 명의 여동생이 있다. 그리고 어린 시절 그의 가족과 조부모는 함께 살았던 적이 있는 듯하다. '전형적인 쇼와 시대 가족'이라고 그는 술회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7인 가족'의 양상은 한국의 삼대가 함께 모여사는 가족의 그것과는 매우 달랐던 것 같다.

 

이 7인 가족이 보유하고 있는 티비는 무려 여덟 대였다. 그러니까 개인별로 한 대씩 티비를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거실에 한 대가 더 있었다고 생각하면 딱 맞다(한 집에 놓여 있는 엄마 테레비 아빠 테레비 할아버지 테레비 할머니 테레비, 란 얼마나 낯선 풍경인가...-_-;;). 각자 자기 방에서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는 것이 이 가족의 일반적인 시청 패턴이었다고 한다. 식사 역시 한 자리에 모여서 하는 법이 거의 없었던 것 같고 각자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시간에 먹는 것이 보통이었다. 크리스마스 때도 케이크는 샀지만 가족들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그것을 먹거나 하는 '이벤트'는 없었다고.

 

부모님의 교육열은 높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방학 때 일년치 예습을 해두는 공부 잘하는 아이였다. 좋아하는 책은 도감류였고 드라마 본편보다는 예고편을, 음악을 직접 듣기보다 1위부터 100위까지의 차트를 보는 것을 좋아했으며 처음으로 본 <도라에몽>도 만화가 아닌 '해설서'였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제가 하고 있는 것은 변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보를 모으고 그 정보를 제 나름으로 다시 정리하는 작업은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과 같은 거예요."

 

(이상은 <브루터스> 2014년 6월 1일자에서)

 

그는 결단코 독서광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냥' 책을 읽는 일은 없으며 그의 독서는 철저하게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일(연구) 때문에 난해한 사회학 책을 읽어야만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두 번 읽고 싶지는 않다고.

 

"제가 읽는 책은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명확합니다. 밑줄을 긋는 것은 제 목적에 필요한 부분이거나 나중에 인용, 참조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산만하게 읽은 책은 나중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요. 처음 읽을 때 두 번 읽는 일이 없도록 하지 않으면 시간 낭비입니다."

 

"책은 그 내용을 전부 기억할 수 없습니다. 제가 쓴 책도 반년 정도 지난 후에 읽으면 마치 다른 사람이 쓴 책 같아요. 또 필자도 하나의 테마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써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그 안에서 좀 비껴난 내용도 쓰는 법이지요. 그러한 것들을 전부 접할 필요도 없고 좋아하는 부분만 읽어도 괜찮습니다. 모든 걸 다 이해해야 한다, 쓰여진 내용 전부를 다 흡수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저도 통독하는 건 소설 정도예요(그나마 이야기에 빠지기 위해서도 아니라고 함.ㅠㅠ). 필요한 몇 페이지만 읽고 마는 책도 있어요. 책이란 사람에 따라 다중적인 독해 방법이 가능한 것이니까요."

 

(<브루터스 2015년 1월 1일/15일자에서)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목적적인 독서(입시-_-;;)에 짓눌린 나머지 한편에서는 독서의 즐거움에 대한 논의나 혹은 입시와는 다른 '유용성'을 부각시키려는 독서론이 성행하는 듯하다.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독서는 어느 쪽에 속할까. 당연히 그는 독서의 즐거움 같은 걸 이야기하지 않는다. 또 힘겨움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독서를 하면 이런 게 좋고 저런게 좋고, 라는 식의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읽고 그것을 정리한 다음 두 번 다시 읽지 않는다고 말한다. 연구자에게나 어울릴 법한 독서이며 너무 건조하여 오히려 일반 독자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독서'가 아니라도 이런 형식의 글 읽기는 사실 누구나 하는 것이다. 특히나 인터넷에서의 글 읽기란 대부분 이런 패턴이라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그의 독서론이 신선하게 느껴진 이유가 있다면 '그냥 자신의 목적에 필요한 게 있다면 읽으면 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즐겁지도, 힘겹지도 않으며 읽으면 지식이 늘어나고 뭐가 좋다는 식이 아닌 독서. 여기에 딱히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그런 독서론에 오히려 어긋나는 일인 것만 같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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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터스>라는 일본 잡지가 있다. 다루는 분야는 사람들이 좋아하고 관심 있어 할 만한 분야 전부랄까. 보기 시작한 지는 몇년 되지 않았지만 대중문화, 책, 그리고 먹거리 관련 호는 거의 대부분 사보고 주택이나 잡화, 기타 예술 분야가 특집일 때도 가끔 사본다. 여행, 남성복 등이 특집일 때는 한번도 사본 적이 없다. 여기서 열거한 분야만 봐도 알겠지만 가히 '종합문화잡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하지만 본색은 남성지라는...).

 

그림만 보고 지나가는 호도 꽤 되지만 '책'이 특집일 때는 눈에 불을 켜고 보는 편이다. '꼭 읽고 싶은, 딱 들어맞는 한 권'이라도 건지고 싶기 때문이다. 여러 권을 사서 다 보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따르니까 어떻게 해서든 정말 읽고 싶은(다른 목적도 있기는 하지만) 한 권만 만나도 족하다. 물론 대개는 책이 특집인 이 잡지 한 권만 달랑 남게 되지만.ㅠㅠ(다행히 이번 호에서는 관심 가는 책이 몇 권이나 있었고 또 주변 사람들과 같이 이야기해보고픈 책도 있었다.)

 

 

<아래는 작년과 올해 발행된 책 특집호들ㅡ제목은 각각 '책, 남자에 대해 알 수 있는 책, 여자에 대해 알 수 있는 책 212권', '헌책방이 좋다', '책 특집 2014ㅡ이 책만 있으면 인생은 대체로 걱정없다'(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다...)>

 

 

 

 

 

 

 

 

 

 

 

 

 

'입문'이란 내게는 일종의 마법 같은 단어이다. '전문'이 없고 이것저것 찔러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제 시작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해야 하고 접근해야 하는가는 일하는 데나 살아가는 데 내겐 무척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혹은 '시작하게 만드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는 걸 늘 실감하기도 하니까. 아마 독서도, 각 사회의 환경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일 터이다. 그리고 '편집자의 말'을 빌리자면 일본 사회 역시 서점도, 독서 인구도 줄어드는 것을 반영하기라도 하듯이 '책 특집'이 아닌 '독서 입문 특집'이라는 것을 브루터스에서 내놓았다. 책이란 늘 당연한 듯 존재하는 물건이지만 독서란 더 이상 사회 구성원들이 당연히 여기는 행위가 아니게 되어가는지도 모른다(하지만 여기서 개인적으로 오버랩되는 건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에 나오는, 전후가 되자마자 독서에 굶주린 대중이 아귀같이(?) 책에 달려든 풍경이자 가이조샤와 이와나미 외 출판사[연맹]가 경쟁적으로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을 내놓고 서로 자기네 전집을 읽어야 한다며 내놓은 1920년대 말 <동아일보> 광고와 기사이다. 이런 단편들이야말로 '국가적'으로 몰아붙여봤자 쉽게 만들 수 없는 것이며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닐까. 그것이 곧 책과 독서의 미래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한 세기 가까이 형성된 책과 독서 행위의 레퍼런스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레퍼런스는 한번 갖춰지면 중심을 잃었을 때 손쉽게 되돌아갈 수 있는 지점이 된다는 점에서 무서운 것이다).

 

'입문'이 주제인 데다 잡지의 성격상 안 읽히거나 하는 어려운 글은 없으며, 초등학교 4학년 아역배우부터 서평가, 전문 연구자들까지 골고루 갖춰진 스무 명 필진(대담자도 있지만)의 다양한 독서 방법에 대해 읽어보는 재미가 있다. 독서의 개인적 정의를 내리는 것부터 시작해서(호시노 겐-배우, 문필가) 책을 어디에 두고 읽느냐를 이야기한 사람도 있고(가쿠타 미쓰요, 작가) 책을 딱 한 상자만 보관한다는 사람도 있고(다가와 긴야, 디자인 회사 대표), 자신의 밑줄 긋는 법을 소개한 이가 있는가 하면(후루이치 노리토시, 사회학자), '낭독의 발견'을 이야기하는 시바타 모토유키(영문학자, 번역가) 같은 이도 있다. 같은 책을 백 번 이상 읽었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한 번 읽은 책은 다시 읽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있다. 일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연기 전에 원작을 읽는다는 배우도 있다(한국에도 이름이 알려진 아오이 유.^^). 그 가운데 '세계문학'에 대한 글과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을 읽는 방법'는 몇 군데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서 옮겨놓는다(사실 이 글들은 전문을 다 옮겨놓고 싶긴 하다).

 

(* 밑에서 두번째 밑줄긋기에 언급되는 사토 마사루는 '독서'와 관련되는 책을 아마존저팬에서 찾으면 반드시라도 해도 좋을 만큼 자주 마주치는 저자라 읽어볼까 하다가도 국내에 나온 책들이 대개 안 팔리고 있어서ㅠㅠ 흥미를 갖지 못했는데 <현대사상(겐다이시소)> 최근호에서 무려 가라타니 고진과 대담을 하고 있어서 다시금 급 흥미가 생겼다. 아마도 그 <현대사상>이 내가 처음 만나는 사토 마사루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대담 내용을 다 이해한다는 보장은 언제나 그렇듯이 없다...ㅠㅠ)

국경 없는 문학과 접해보기 _고지 도코(영문학자, 번역가, 와세다대 교수)

세계에는 실로 많은 언어가 있는데 일본어로 쓰인 것과 그 이외의 것으로 나누는 것은 왠지 기묘합니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세계문학전집은 나라별로 편집된 경우가 많은데 이것도 이상합니다. 왜냐면 작가가 태어난 장소와 살고 있는 장소, 그리고 소설의 무대와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세계를 돌아보면 이들이 전부 제각각인 작가는 매우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어느 나라의 문학이라고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언어라든가 국적 같은 기존의 지표를 일단 리셋하여 문학을 파악하여야 하지 않겠는가ㅡ이것이 제가 책 등을 통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세계문학`입니다.(36쪽)

생각해보면 음악은 비교적 하나의 장르로서 받아들이는 방식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 방식이 가벼운 마음으로 해외에 나갔다 온다거나 정보를 외국어로 받아들이게 된 오늘날 우리 생활에도 딱 맞는다고 봅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문학만은 거기서 뒤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큽니다. (같은 쪽)

인터넷 시대야말로 독서하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_하야미즈 겐로(저술가, 편집자)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누구라도 쉽게 접속 가능한 인터넷상의 정보는 금방 진부해지기 때문이다.
공업적 생산 중심의 시대에서 지식집약형 산업의 시대가 되면서 다른 사람과는 다른 정보, 아이디어만으로 비즈니스=돈이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러한 오늘날 다른 사람과 다른 정보를 어디에서 얻는가로 가치가 이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내 주위에서 어쨌든 책을 많이 읽는 직종은 작가나 저술가, 대학 강사나 교수, 학생(학생들은 놀라울 정도로 책을 안 읽는다!)이 아니라 아이티업계 종사자,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등이다. 이 사실이 그야말로 현대를 상징하고 있다. (74쪽)

우선 자신의 인생관이나 철학 등에 영향을 끼치는 `교양`으로서의 독서 방법이 있다.
최근 몇 년간 `인문학`을 몸에 익히는 것의 중요성이 이야기되고 있다. 인문학이란 기본적인 교양을 말한다.
박람강기형 저술가를 대표하는 사토 마사루의 책을 읽으면 옛 번역, 새 번역 성서부터 마르크스까지 종교, 철학 등의 고전의 내용이 재해석되어 있어 놀랄 만한 독서 방법을 보여줄 때가 많다. 새로운 지식은 새로운 책에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전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75쪽)

마지막으로 이 독서 방법에 대한 책에 관한 글을 전부 부정하는 듯한 변화구와도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 <사고정리학>의 저자로 친숙한 도야마 시게히코의 <난독의 세렌디피티>이다.
이 책은 난독, 속독을 권장한다. 아니, 오히려 책 같은 건 제대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쭉 훑어보는 편이 오히려 얻는 게 많다는 것이다. (중략) 책을 읽으면 사람은 자기 분야에는 정통해도 다른 부분에서는 상식조차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데 이는 창의성을 잃어가는 일이기도 하다고 이 책은 말한다. (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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