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일요일이 그렇듯 어제 혼자서 애들 둘이 보느라 저녁시간을 무료하게 보낼 뻔 했는데 마침 TV에서 영화제 중계를 한다.

몇 년 전만하더라도 한국 영화 개봉작은 줄줄이 다 보곤 했는데, 세월의 무게인지 연이어 태어난 아이들 덕택인지 극장의 영화 보는 값이 7천원인지 8천원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다들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슬아슬함과 조마조마함의 끝에 오는 감동의 순간을 즐긴다. 한국시리즈, 월드시리즈의 마지막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도 감격에 겨워 방방 뛰는 모습을 엿보고 싶어서다. 내가 그런 순간을 평생에 한번 겪을 수나 있을려나? 그냥 대리만족인 것이다. 영화제도 별로 다르지 않다. 수상자를 발표하는 순간 엇갈리는 배우들의 표정을 감상하는 것을 즐기고, 혹여나 감격에 겨워 수상소감을 말하며 눈물까지 흘리면 따라 울고 싶을 정도로 쉽게 감동한다. 솔직히 말해 잘 꾸미고 나온 여배우의 뒷태와 앞모습을 슬쩍 엿보는 재미도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어제 영화제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여러모로 조금씩 부족해서 아쉽다는 것이다. 오늘은 두 가지만 언급하자.

1.  어찌 배우들의 수상 소감이 저리도 천편일률적인가? 그렇게도 할 말이 없는가? 

어제의 하이라이트라고 하는 여우주연상.  수상자 전도연은 하도 많이 여우주연상을 타서 그런지 (일반인이 볼 때) 그리 감격스럽지 않아 하였다. (물론 본인은 감격스럽겠지?)  게다가 짧은 소감을 말한 다음엔 무조건 주위 사람 이름 대는데 급급하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참 부러운 것은... 외국의 수상 배우들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많이 주저리 주저리 한다는 것이다. 그 순간만은 자신이 왕이다. 그리도 할 말이 없는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두번 수상한 힐러리 스웽크를 보라..

물론 배우 탓만 할 수도 없다. 우리 시상식은 TV와 결코 떼놓을 수 없기에 방송시간을 맞춰야 하는 TV로서는 쓸데없는 배우의 긴 소감은 자칫 부담이겠지. 그래서 수상소감을 짧게 하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인터뷰할 때 무조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조잘대는 우리나라 프로 운동선수들이나 관객들과 만나는 유일한 인사 시간에 "열심히 찍었습니다. 이쁘게 봐주세요"라고만 말해버리고 마는 우리 영화배우들이나 말재주가 없기는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상을 거머쥔 장진감독이 "동막골은 반미도 친북 영화도 아니다. 지금까지 그런 식의 등분으로 우리 작품을 해석했던 여러 분들, 앞으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라고 한 말은 어제 들은 말 중 가장 멋있었다. 그나마 장진이 무대에 자주 섰던, 감독으로도 많은 매스컴 노출 경험이 있었던 감독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2. 스텝들은 여전히 죄인이구나..

그나마 요즘은 미술상이나 음악상이니 음향효과상이니 하는 상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지, 예전의 기억을 되돌아보면 배우들이 나오지 않는 상은 말 그대로 구색맞추기식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관객들이 별로 관심없어하는 편집상이니 특수효과상이니 하는 상을 받은 수상자들은 간단히 감상만 밝히고 빨리 무대를 떠나야 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 자리에서 감격의 눈물을 보인다거나 지나치게 흥분된 수상소감을 말한다는 것은 차라리 영화제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상받는 주인공이 아니라 무슨 죄인같아 보였다.

이미 스텝들은 이런 상황에 잘 적응되어 있다. 그들이 영화배우 못지 않은 멋지구리구리한 옷을 입고 온다면, 다들 미친 것 아냐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어제도 청바지 쪼가리를 입고 수상한 스텝도 분명히 있었다. 게다가 5명의 후보자를 모두 다른 카메라로 한 화면에 잡는 등의 노력도 스텝들의 수상때는 기울이지 않았다. 물론 발표자가 이미 선정되어 있어 후보자들이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일 크지만(심지어 수상자가 오지 않은 경우도 어제는 최소한 2번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스텝들의 수상 장면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카데미상을 자꾸 거론하는 것이 기분언짢은 일이지만, 스텝들도 당당히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곳이 바로 아카데미더라.

마지막 '웰컴투 동막골'의 작품상 수상이 발표된 후 제작자인 장진은 자신만이 이 상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수고하신 관계자 여러분들을 무대 앞으로 불렀다. 감독, 주연, 조연 배우들이 모두 참가한 가운데 수상 소감을 발표하는 중간, 카메라는 관중석에서 홀로 감격하여 흐느끼고 있던 그 영화의 프로듀서를 비췄다. 한 영화를 책임지고 모든 잡다한 일을 했던 그 젊은 여성 프로듀서는 자신의 작품이 작품상을 타는 동안에도 관중석에서 홀로 감격을 느끼는 존재밖에 안되었던 것이다. 맨날 입는 그 청바지를 입고 말이다.

내년에 78회째가 되는 아카데미상의 권위와는 어찌 경쟁이 되겠는가? 아카데미와 비교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다. 그래도 한때 영화인이 되고자 열망했었던 한 관객의 푸념이라 생각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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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5-12-05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이에요. 전 황정민씨 수상소감이 가장 맘에 안들었는데..단편영화로 상받으신 여성감독의 수상소감도 장진감독의 수상소감과 함께 기억에 남네요.

moonnight 2005-12-05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부턴가 영화제 중계에 무관심해지게 되더군요. 어제도 채널 돌리다가 언뜻 하는 걸 봤는데 그냥 꺼버렸다는 -_-; 흠. 여러모로 생각해보게 되는 글입니다.

BRINY 2005-12-05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날씨에 어깨를 다 드러낸 하늘하늘한 의상을 입고서, 레드카펫을 올라오던 참가자들을 인터뷰하던 아나운서(?)는 감기 안 걸렸나하는 생각만 남았습니다.

클리오 2005-12-05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도대체 황정민씨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상을 2번 주고, 박광현씨에게도 2번 주고... 보지는 않았지만 주먹이 운다..가 최우수 작품상이라는게 좀 의외였어요. 청룡영화제에서 감독상까지 받은 친절한 금자씨가 완전히 배제된 것은, 냉정한 평가였을까 뭐 기타 등등의 생각을 하게했고 말이죠..

엔리꼬 2005-12-05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만 레이라라고 부르는 라이라님.. 황정민씨 청룡영화제땐 수상소감 멋졌다던데, 어제는 주연, 조연 다 받아서 그런지, 힘이 좀 딸리더군요.. 그렇지만 왜 가장 맘에 안들었는지도 궁금합니다.. 단편영화상 땐 제가 잠시 못보는 바람에..
moonnight님.. 저도 뭐 일부러 찾아서 보는 것은 아니고요.. 어제 집에 있다보니 재밌어서 그냥.. ㅎㅎ
BRINY님.. 참가자 걱정은 안하시고 아나운서분을 걱정하시다니,, 브리니님도 역시 비주류인가요?
클리오님.. 2번 상을 준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엄연히 상을 준 영화제는 다른데, 우연히 상을 받은 사람이 같았을 뿐이니깐요. 주먹이 운다가 최우수 작품상 노미네이트는 되었지만 작품상은 안탔는데요??? 어제 영화제는 일반인이 평가의 절반을 차지했던 것이라 아무래도 흥행작에 표가 몰릴 수 밖에 없는 허점이 있을 수 있겠어요..

아영엄마 2005-12-05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애들 둘을 보는데 무료하실 수가!! ^^;; 배우들 말고도 고생한 스텝들의 수상에도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엔리꼬 2005-12-05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 말씀에 심하게 찔립니다... 구차한 변명을 하자면, 아직 어린 애들 등쌀에 하루종일 컴퓨터 자체를 켤 수도 없으니(컴퓨터로 작업을 하게 놔두지 않음) 천상 애들과 마루와 방에서 놀아야 하는데, 제가 책을 읽어주거나 덤블링을 하고 놀아줄 때도 있으나 일요일마다 아내 없는 하루종일 12시간 이상을 그런 일만 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러기엔 제가 너무 무료하다는 겁니다.흑흑 애들끼리 놀 때도 있는데 그 짜투리 시간동안 책을 봐도 책을 팽겨쳐버리니 유일한 소일거리인 티비라도 가끔 틀어놓고 힐끗 힐끗 보곤 하는데, 그러면 안될까요?

stella.K 2005-12-05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장진 감독 수상소감 멋있더만요. 전도연이 쑈하고 있다는 게 얼굴에 다 보이고. 여담이지만, 전 개인적으로 말아톤이 주목받지 못한 게 아쉬워요. 물론 스토리 기법이 미국 휴먼 드라마를 답습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내가 조승우나 김미숙을 편애해서 그런지 몰라도 괜히 그들 중 한 사람도 상을 못 받았다는 게 아쉽더라구요.한편 그 영화가 상을 못 받았다는 건 장애인을 소재한 영화가 뭔가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씁쓸하더만요.
아직 권위도 없는 영화제이긴 하지만 대종상 영화제를 답습하게되지나 않을까 그냥 그들만의 잔치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더군요.

이매지 2005-12-05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아톤이 아무리 올 초에 개봉을 했다고 해도,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상을 못 받아가더군요. 저도 스텔라님처럼 조승우를 편애해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부분에서도 받을만 했었는데 말예요. 가끔 영화시상식을 보면 그들이 늘 말하는 영화인의 잔치가 아니라, 영화배우들의 잔치인 것 같아요.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스텝들의 노고는 배우들의 입으로밖에 표현되지 않으니...

엔리꼬 2005-12-05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저는 말아톤은 물론이고 어제 나온 후보작들 중 본 것이 너는 내 운명 빼고는 단! 한개도 없었다는 사실은 너무 슬프지 않나요? 그래서 수상작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상황은 아니지만 저도 나름대로 조승우가 탔더라면 하는 생각은 했습니다.
이매지님.. 연초 개봉작에 홀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말로는 들었는데, 실제로도 그런 모양이네요? 그리고 그런 경향은 특히나 일반관객이 수상작을 결정하는데 큰 기여를 하는 대한민국영화대상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고 봅니다.

하루(春) 2005-12-05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래서 장진을 좋아한다는... ^^; 아무튼.. 좋습니다. 어제의 수상내역은 솔직히 제 기대에는 못 미치는 거였지만, 무직도르프의 연주와 노래는 참 좋더군요. 개인적으로는 황정민, 박광현, 장진, 김선민, 김동호의 수상소감이 와닿았어요.

하루(春) 2005-12-05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방은진의 말도 쏙쏙 박히더군요. 수상소감은 아니었지만... 멋있었어요.

하루(春) 2005-12-05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히사이시 조 대리수상한 여자분 말씀하시는 거죠? 그 분은 왜 안 나가셨을까요?

엔리꼬 2005-12-06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하루님 댓글 보면서 반성 많이 했습니다. 배우들 상 타는 것은 거의 다 봤는데, 김선민(누군지도 모르지만 단편영화상일까요?), 김동호, 방은진의 말은 다른 일 하다가 못들었군요... 이것 자체가 저도 배우에 관심이 훨 많았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아주 이율배반적이군요.. 쩝..

클리오 2005-12-07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서림 님. 저는 그 말씀이 아니라, 그 영화제에서 황정민이 남우조연상도 탔잖아요.. 그래서 드린 말씀이었어요.... ^^;

엔리꼬 2005-12-08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제가 잘못 알아들었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