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3시, 모처럼 '세모녀 연극보기'를 기획한 나는 뮤클에서 표 석장을 예매해 두었다. 이만오천원의 입장료가 부모님과 함께 3인이상이면 2만원씩으로 할인되었다. 극장은 집에서 가까운 모대학 콘서트홀이라 가기도 좋고 세모녀의 나들이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동생이 배탈이 나는 바람에 엄마랑 둘이서 갔다. 현장에서 표 한 장은 다른 모녀에게 팔아서 다행!


연극배우 유순웅은 영화배우 유해진과 닮아 나도 처음엔 그사람인가 했다. 그런 착각을 자주 받는다고 한다. 45세의 충청도 사나이, 그는 가까이서 보니 꽤 주름이 많았다. 하지만 아주 편안하고 소박한 인상의 주름이 일인 드라마를 하는 내내 얼마나 사람을 웃기고 울리는지, 피식피식 웃다가 나중엔 나도 흑흑 눈물바람을 했다. 젊은이들도 많았지만 우리처럼 모녀가 많이 보였다. 내 앞 좌석엔 초등5학년 남자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할머니도 있었다.


한 명의 배우가 15명의 역할을 한다. 아버지의 업을 마지못해 이어받아 염쟁이 일을 천직으로 살아온 유씨는 오늘 이 자리에서 마지막 염을 하려고 한다. 어느 젊은이의 가벼운 시신이 뭔가 특별한 인연으로 얽힌 것 같아 보인다. 일면식이 있는 신문기자를 불러놓았고(사실은 관객 중에 한 사람을 지목하여 끌어들인다. 그래서 그는 이선생이 될 수도 있고 김선생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흰색 야구모자를 쓴 이십대 청년 이선생이 지목되었다.) 우리 관객들은 따라온 사람들 혹은 구경꾼이 되었다. 유순웅이 혼신을 다해 90분을 연기하는 동안 우리는 염을 하는 절차를 지켜보는 전통문화체험단이 되고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구구절절 들어주는 사람도 되고, 나중엔 하나밖에 없는 그의 아들 장례에 문상객이 되어 ‘아이고 아이고’ 곡성을 함께 내기도 한다. 율곡의 십만염병설, 동학의 염내천, 등 기발한 조어로 웃음을 주면서 '죽음'을 보내는 마지막 절차를 담당하는 ‘염’쟁이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는 솜씨가 재미나다. 구수한 입담으로 풀어가는 이야기에 빠져들어 90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시신은 무서운 게 아니여, 산 사람이 무섭지. 산 사람한테서 나는 냄새에 비하면 시신에서 나는 냄새는 아무렇지도 않어. 그가 하는 말들이 하나하나 뼈가 있었다. 그가 염을 하여 떠나보낸 시신들의 종류도 다양하여 조폭두목에서부터 재산다툼을 하는 자식들을 둔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그네들의 이야기를 통해 냄새나는 산 사람들의 어지러운 군상을 보여주고 꼬집기도 한다. 중간에 등장하는 '장사치'는 장례절차도 장삿속이 된 오늘날의 세태를 풍자한다. 시신을 소개해주면 십만원씩을 주겠다면서 관객들에게 명함을 나눠주고 염쟁이는 그런 장사치와 드잡이를 하는데 혼자서 두명의 역할을 하는 장면에 배꼽 잡았다.

 

죽음을 두려워말고 어떻게 잘 살 것인가를 고민하라는 그의 말은 투신자살로 생을 먼저 떠난 젊은 아들에 대한 애끊는 부모의 심정에서 절정에 이른다. 애미없이 너를 기르기 위해 하루도 염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 넌 인형을 만들어 놀고 있었지.- 그게 무신 인형이여? - 엄마 아빠 인형이야...

절절하게 죽은 아들을 그리며 아비로서의 한을 푸는 대목에서 나는 눈물이 흘렀다. 정성들여 손수 염을 하고 수의를 입혀 관에 넣고 떠나보내는 마지막 길에서 여기저기 눈시울을 닦아내는 사람들이 보인다. 옆에 앉아 계시던 엄마가 내 손을 꼭 잡으셨다.

죽으면 목숨은 떠난 줄 알겠지만 우리들 맺은 인연은 떠나갈 수 없는 거여. 

네가 이 생에서 내게 와줘서 고마웠다며 울부짖는 아버지의 울음. 가슴이 묵지근해지다가 흐르는 눈물로 씻기듯 후련해졌다.

 

잘 살아야겠다! 알지만 어떻게?

정성을 다하라’는 말이 가장 잊히지 않는다. 모두다 잊혀져도 정성만은 잊히지 않는 법이랬다.

설겆이를 하는 뒷모습에서 인품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염쟁이 유씨는 주검에 대한 정성, 삶을 보내고 죽음을 맞는 일에 대한 정성 그리고 삶을 살아내고 사람을 대하는 일에 대한 정성을 보여주었다.


연극이 끝나자 유순웅님은 밖으로 나와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참 겸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러곤 다시 무대로 가서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진을 찍었다. 나도 가져간 디카로 엄마와 셋이서 사진을 부탁했다. 잘 나온 것 같다. 요즘 부쩍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라는 엄마. 난 그 나이가 아닌데도 그런데... 다음에 또 좋은 공연 있으면 감성이 풍부한 엄마랑 함께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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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04-16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공연 보고 오셨네요. '정성을 다하라'와 유사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우리 할머니는 '명심(조심?)덕'을 강조하세요. 자꾸 명심하다보면 그것도 덕이 된다나? 맞나? 모르겠어요. 왜 갑자기 이 말이 떠올랐지? ㅎㅎㅎ

Mephistopheles 2007-04-16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극인 한사람의 혼을 보셨군요....^^
부럽습니다...^^

프레이야 2007-04-16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수맘님, 할머님의 그 말씀, 새겨들을 말씀이네요. 어르신들의 연륜에서 묻어나오
는 말씀에 지혜가 담겨있다고 생각해요. 이 연극 참 권하고 싶어요.^^

메피스토님, 네 유순웅의 연극은 처음 보지만 정말 좋은 연극이었습니다.
칠순이 2년 남은 엄니랑 가슴 뻐근한 시간이었습니다.^^

비로그인 2007-04-16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유해진이랑 닮았네요 ㅎㅎ...세모녀가 다 같이봤으면 더 좋을뻔했네요
연극이란 가슴 뭉클한장면들이 가슴 찡하게 만들잖아요...영화보다 더 좋을때가있어요^^;; 혜경님 잘 읽고갑니다

깜소 2007-04-17 0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보고싶네요,,저두 엄마랑 아버지랑..제 친구한테 연극 보자고 꼬시는 글로몇군데 좀 담아가고싶은데..괘안을까요?..허럭하시면 그때 슝~담아갈께요..ㅎㅎ

프레이야 2007-04-17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리지님/ 정말 닮았더군요. 연극은 배우랑 호흡을 같이 할 수 있어서 좋지요.
참 좋은 연극이었어요.

깜소님/ 네, 담아가셔도 괜찮아요. 혹시 담아가실 님의 다른 블로그가 있으면
소개해 주실래요. 보고 싶네요.^^

춤추는인생. 2007-04-17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극할때는 그캐릭터에 한참이나 빠져서 광기를 발휘하다가도. 막이내리면 부끄러워하시고 또 겸손하신분들이 전 좋아요. 어머님과 즐거운 시간 보내셨겠어요.
부러워요 님.^^

프레이야 2007-04-17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춤추는인생님, 정말 이 분도 그랬어요. 웃을 땐 더 유해진 닮았구요^^
엄마랑 함께 이런 거 보는 시간을 늘여볼려구요. 님, 요즘 날씨가 변덕스럽지만
마음에 따뜻한 봄바람 살랑대면 좋겠어요. 황량한 바람은 어여 사라져야할텐데..
건강 조심하시고 기쁜 하루 보내시기 바래요.
님의 노란 치맛자락만 보면 기분이 좋아요^^

비로그인 2007-04-17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간 사진만 보고 유해진씨가 연극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ㅠㅠ

icaru 2007-04-17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유해진이 아니군요..ㅠ.ㅠ
하다못해,,, 동네 산책이라도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을 자주 갖어보자고 혼자 조용히 부르짖고 가요!

소나무집 2007-04-17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랑 함께 가셨군요. 저도 엄마랑 이런 기회를 가져봐야겠어요.

글샘 2007-04-17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러 가려고요. 근데 2만 5천원이면...

프레이야 2007-04-17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님, 저도 첨에 광고만 보고 그사람인가 했어요. 원래 연극배우출신이라
최근에 연극도 하네, 그랬다니까요..ㅎㅎ

이카루님/ 정말 엄마랑 지낼 시간도 이 세상에서 그리 많이 남은게 아닐 것 같아요.

소나무집님/ 이 연극 참 권하고 싶어요.^^

글샘님/ 아들이랑 옆지기랑 세분이서 가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원하시면
제가 뮤클에 세명 2만원씩으로 예매해드릴까요? 원하시면 날짜/시간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