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라쉬 브런치 -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 동유럽 독서여행기
윤미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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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은 빙하와 같다. 빙하처럼 혹독하고 소스라치게 차가운 그것은 아무 때나 소리 없이 녹아내려 연락한 하루를 난감하게 적셔버린다. 고독은 일상의 재해이다.
-프롤로그 中-13쪽

육류는 정치적이고 주류는 파괴적이다. 찌개류는 일부일처제의 답답함을, 탕류는 자유연애의 허무맹랑함을 닮았다. 그렇다면 면류는? 면류는 한마디로 요긴하다.
-프롤로그 中-14쪽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연기를 한다. 잘 지내는 척, 부끄럽지 않은 척, 무관심한 척. 그 중의 제일은 뭐니뭐니해도 쿨한 척이다. 먹어치운 밥그릇 개수만큼 노련해진 우리는 있는 그래도 감정을 노출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 참혹한 결과를 잘 알고 있ㄲ다. 너무 성급하게 표시한 관심 때문에 망쳐버린 연애. 딱 한 번 진짜 속마음을 이야기했다가 깨져버린 우정 따위. 진심이란 녀석은 땀을 잘 흘린다. 그래서 여차하면 들키기 십상이다. 아무한테나 겨드랑이를 드러내고 땀 냄새를 맡게 해서는 안 된다.

-엄중히 감시받는 트램에서 아침을 中-40쪽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은 곧 삶에 대한 애착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산다는 게 허기를 채우는 것과 다를 게 뭐냐 싶다. 여행을 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관계를 맺는 것도 결국은 서로 다른 종류의 허기를 채우는 일이 아니겠는가. 세계 각지의 공항에는 섭식장애자들이 우글거린다. 그들, 아니 우리들은 아무리 잘 먹어도 해결되지 않는 어떤 충동을 품고 있다. 때로는 그 뜨거운 충동 때문에 가슴이 터질 지경이다. 지구가 점점 더워지는 것은 이산화탄소가 아니라 그런 충동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구를 떠난 수는 없으니까 제가 태어난 나라라도 떠날 궁리를 하는 것이다. 여행에 대한 갈말은 실질적인 의미의 장애이다.
-아사에 이르는 다섯 가지 단계 中-60쪽

내게 행복은 본디 여집합이다. 감당해야 할 것들을 감당하고 견뎌야 할 것들을 견디고 났을 때 그제야 얻는 것, 그래서 황송하기 짝이 없는 것.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그저 쉽기만 하다. 이상하게도 그들의 행복 꽃가루는 내 몸속에 행복을 전염시키는 대신 이물질이 되어 나를 가렵게 한다.
-씁쓸한 꽃가루 中- 67쪽

슬픔의 끈질긴 점성은 도리 없이 매혹적이다. 웃음도 뛰어난 미학이지만 안타깝게도 찰나적이다. 오래 가는 것은 슬픔이다. 슬픔에 픔씬 젖었을 때 나는 인생 앞에 고분고분해진다.
-석탄통에 걸터앉은 단식광대 中-79쪽

지구가 텅 빈 듯 고즈넉하다. 침묵에도 무늬가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고독하거나 지루하거나 두려움에 짓눌려 있거나 거짓말을 꾸며내는 중이거나.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침묵한다. 지금 이 순간의 침묵은 아무 무늬도 없는 순전한 것이다. 텅 빈 지구에 평화가 수북이 쌓여 있다. 평화의 폭탄 세일! 이 평화를 헐값에 사재기해 두었다가 생활이 허무에 틈을 내주려고 할 때마다 얼른 꺼내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면.
-질소 같은 여자 中-138쪽

여행을 할 때는 스스로에게 관대하고 솔직해진다. 엄밀한 의미에서 여행은 삶의 일부일 테지만, 분명 그 두 가지는 확연히 다르다. 여행 중에는 처치 곤란한 자아를 그런 대로 참아낼 수 있고 때로는 즐기기까지 한다. 산소 같은 여자가 아니라도 뭐 어때. 질소 같은 여자는 어떨까? 뭔가 독해 보이고 치명적으로 느껴지잖아.
-질소 같은 여자 中-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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