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현대철학연습 발제. 심혜련, 『20세기 매체철학』 4장 요약.>

   1990년대 초반 대중문화에 관해 성찰했던 이론가들에게 주요한 관심사는 사진
, 영화와 같은 것들이었다. 처음 논쟁은 이런 수단을 사용해 만들어진 작품이 예술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시작되었겠지만, 이는 점차 대중문화라는 현상 자체 그리고 그 속에서 이런 매체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해 분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보았을 때 사진이나 영화 등의 매체가 대중문화의 중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왠지 옛스러운 측면이 있다. 이는 이들이 대중문화라는 현상을 매우 잘 분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적 성격 또한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이 드는 까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대중문화의 중심에 자리잡은 미디어가 사진도 영화도 아닌 텔레비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동시대의 대중문화에 관해서 그리고 미디어에 관해서 분석하려고 한다면
, 텔레비전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귄터 안더스는 텔레비전에 관해 철학적으로 분석하려고 한 선구적인 철학자로 간주된다. 그는 유대인으로 1902년생이다. 1923년에 후설의 지도 아래 <논리적 문장에서 상황범주의 역할Die Rolle der Situationskategorie bei den logischen Sätzen. Erster Teil einer Untersuchung über die Rolle der Situationskategorie>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 시기에 동료이자 선배인 하이데거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와 1929년에 결혼했으나 37년에 이혼했고, 이후 두 번의 결혼을 했다. 나치 정권을 피해서 1933년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갔고, 2차 대전 종전 이후 귀국해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대표작인 <인간의 골동품성(구식성)>1권이 1956년에, 2권은 1990년에 출판됐으며, <팬텀과 매트릭스로서의 세계>1권에 포함되어 있다.


   그가 텔레비전에 관해 문제삼은 것은 우리가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이미지의 존재론적 위상이었다
. 그는 그 이미지가 실재와 가상이 뒤섞인, 우리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이상한 성격을 가진다고 분석한다. 또한 이 이미지들이 텔레비전을 보는 우리의 세계관 자체를 재구성하고 있으며, 이는 실재에 대한 외면이며 더 나아가서는 실재의 상실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미디어에 관해 비관론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에코의 분류법에 따르면 그는 미디어 '종말론자'("종말론적 지식인들은 문화 상품의 소비자들을 대중이라는 획일적인 물신화된 개념으로 격하시킬 뿐 아니라, 대중들이 모든 귀중한 예술 작품들을 단순히 맹목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고 비난하지만, 동시에 자기 스스로도 대중 문화 상품들을 물신화된 개념으로 격하시킨다. (...) 이에 대한 구조적인 특징만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대중문화 상품 전체를 통째로 부정한다." "<텔레비전은 세상을 환영으로 몰고 간다. 따라서 시청자의 바람직한 반응이나 모든 비판적인 대응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는 텔레비전이 자기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하여 여전히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프로메테우스적인 부끄러움
- 인간의 상황에 관한 유비로서의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적 상황이란 인간이 어떤 처지에 있는가에 관한 안더스의 비유다. 이 비유엔 단지 인간과 미디어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과 기술 전반에 관한 그의 통찰이 담겨있다. 인간은 기술을 쟁취하고 통제한다. 기술은 자신의 논리에 의해 독자적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만 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기술과 인간 사이의 전도가 일어나고, 기술지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런 전도 이후에 기술은 인간을 자원으로 삼아 더욱 폭발적으로 팽창하고, 인간의 종속은 더욱 심화된다. 인간은 근대 이전의 도덕적, 윤리적 사고를 통해 다시 기술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자 하지만, 이미 기술은 저 멀리 가버리고 없는 상태다. 인간과 기술 사이의 이런 차이가 바로 프로메테우스적 격차이며, 여기에서 겪는 인간 존재의 성격이 바로 프로메테우스적인 부끄러움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술보다 뒤쳐져 있는 인간의 상태를 가리켜 '골동품성'이라고 부른다.


   미디어와 기술에 관한 그의 분석은 하이데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 분명하다
. 그러므로 그의 주장을 하이데거의 기술 개념과 비교해서 알아보면 더욱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현대 문명의 기술에 관한 그의 생각은 <기술에 대한 물음>이라는 강연문에서 잘 나타난다. 여기에서 기술 개념은, 처음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동원되는 수단으로 정의된다. 이것은 현대 기술 또한 마찬가지여서, 지금 우리가 이 시대에 사용하는 여러 장치들 또한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설계된 장치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내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더 깊은 의미
, 즉 기술 일반의 의미를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을 인용해 설명한다. 질료인, 형상인, 목적인, 운동인(작용인) 가운데 기술은 작용인이다. 각각 독립적일 때는 아무것도 아닌 질료, 형상, 목적을 통합하여 무언가를 우리 앞에 드러내주기 때문이다("위에 열거한 세 가지 방식들을 숙고하여 한 군데에 모은다. 숙고한다는 말은 레게인, 로고스이다. 이 낱말은 아포파이네스타이에, 즉 앞에 내보임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술은 없던 것을 있게끔 해주는 탈은폐의 방식, 즉 우리에게 진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고대 그리스어에서는 이런 측면에서 기술이라는 말에 제작술(포이에시스)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반영하였다. 기술은 없어지기 쉬운 것들을 좀 더 강하게 붙들어매는("금방 이렇게 저렇게 모양새를 바꾸어버릴 수 있는") 제작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탈은폐의 방식은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을 수 없다
. 그러나 현대 사회는 특정한 방식의 탈은폐만을 강조하고, 이를 재촉한다("그러나 오늘날의 농토 경작은 자연을 닦아세우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경작 방법 속으로 흡수되어버렸다." "오히려 강 물줄기가 발전소에 맞추어 변조되었다. (...) 즉 수압 공급자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발전소의 본질에 맞추어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써 그에게 닦달(닦아세움)은 현대 문명의 기술의 본질적 성격이다. 닦달이 탈은폐의 방식인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에, 이는 허위가 아니다. 인간은 이 탈은폐를 목도하는 사람이기에 이것을 지배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런 탈은폐의 방식에 자기 자신조차 탈은폐당한다("이렇듯 주문 요청하는 탈은폐로서의 현대의 기술은 단순한 인간의 행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적인 것을 부품으로서 주문 요청하도록 인간을 닦아세우는 그 도발적 요청 역시 드러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한 도발적 요청은 인간을 주문 요청에로 집약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집약시키고 있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적인 것을 부품으로서만 주문 요청하는 데 몰두하게 한다.") 그는 이런 현상이 기술을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인간이 겪어내야만 하는, 일종의 역사적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기술문명에 관한 안더스의 분석은 하이데거와 유사하다
.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 강연의 말미에서 이런 비관적인 상황을 넘어서는 개념으로 시적인 탈은폐로서의 예술을 제시한다. 즉 고대의 기술 개념(테크네)과 제작술 개념(포이에시스)를 상기하고, 그런 자유가 탈은폐를 목도하는 자들의 주권임을 인지할 때, 인간은 기술을 넘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기술에는 이런 측면이 그 개념적 측면에서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다. 반면 안더스에게서는 이런 측면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이미 기술(기계)에 종속되고 기술의 일부가 된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술은 전체이며, 전체는 무한이고, 인간은 이를 파악할 수 없다. 파악할 수 없다면 통제할 수도 없다. 이것이 지금 인간의 상황이다("예전의 플라톤의 대화편에서부터 하이데거의 '적소전체성' 분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행위와 제작은 행위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형상을 따라 해야 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만들어지는 것(또는 행위 속에서 도달되는 것)의 에이도스는 미디어적 행위에서는 '제거된다'.").

 


   팬텀이 지배하는 텔레비전
& 매트릭스가 된 세계와 그 세계 안에서의 대중

   - 텔레비전 영상에 관한 존재론적 분석, 텔레비전은 어떻게 대중을 주조하는가

 

   텔레비전 영상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은 매우 크다. 안더스는 이 영향이 선험적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어, 인간의 감성형식 나아가서 존재의 문제까지 결정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텔레비전은 일종의 '이미지의 압도적인 홍수'로 파악할 수 있다. 텔레비전 방송에 내보내기 위해 수없이 많은 곳에서 수없이 많은 이미지들이 생산되고, 전파를 통해 배포된다. 여기에 적응하기 위해 인간은 문자성을 포기하고 이미지성을 획득한다. 이들이 '탈문자적인 문맹자 집단', 즉 아이콘매니아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홍수같은 이미지들로 실재를 대체한다. 이런 반복적 이미지들이 소비되고, 또 실재를 대체할 수 있는 이유는 근대적 이성의 특징 때문이다("자연과학의 근대적 인식론에서는 모든 것이 실험적으로 반복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보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유일성은 점차로 사라져 버린다. "오로지 유일무이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지 버클리의 존재와 지각의 동일화 명제, (...) "존재한다는 것은 소유된다는 것이다"라는 강력한 명제로 대체된다. (...) 관광여행자들에게 일관되게 중요한 것은 "거기 있다"가 아니라 휴가사진을 통해 제시되는 증거, "거기에 있었다"이다.").


   텔레비전의 이미지가 이렇게 실재를 대체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존재론적 근거는 무엇일까
? 이에 대한 안더스의 대답이 바로 '팬텀'이다. 텔레비전의 이미지는 실재하는 세계를 촬영한 것이 분명하고, 그리고 그것을 내가 지금 여기에서 수상기를 통해 보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하지만, 사실 그것의 시공간적 실재성은 분명하지 않다. 카메라와 전파, 수상기를 통해서 매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있다는 것 만큼이나 분명한 것은 내가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세계에 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이런 매개를 경유하는 것 뿐이다. 수상기가 내보내는 영상의 존재론적 지위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인데, 이 때문에 텔레비전의 이미지는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하는 유령에 유비된다.


   텔레비전은 인간의 생물학적 감각이 닿을 수 없는 곳의 실재를 매개한다
. 이것이 실재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텔레비전이 그것에 접하는 유일한 창구라는 점이다. 이런 이미지의 중첩들은 생물학적 감각의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이내 인간의 세계이해를 완전히 대체해버린다. 이미지의 홍수로 만들어진 이런 세계를 안더스는 매트릭스라고 표현한다. 수상기를 통해 발사되는 이미지의 존재론적 성격이 모호하기 때문에, 여기에 기반을 둔 매트릭스의 존재론적 성격 역시 모호하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실재이다. 더 나아가 실재와 가상, 실제와 텔레비전 화면 사이의 경계 자체가 붕괴된다. 이런 세계에서 무언가를 결정하는 주체는 텔레비전의 영상이 된다. 개성은 채널 선택권으로 환원된다. 우리는 텔레비전이 걸어주는 말을 듣거나 듣지 않는 소극적 선택 이상의 것을 할 수가 없다("우리가 세계롤 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우리에게 올 때, 우리는 더 이상 세계 안에 있을 수가 없다.").

 


   안더스 이후 텔레비전에 대한 논의

 

   안더스가 텔레비전을 보았던 것은 1940년대 후반이다. 이후 프로그램의 성격이나 제작방식, 제작기술 등 방송환경은 매우 많이 바뀌었다. 이에 따라 텔레비전을 긍정적으로, 또는 최소한 중립적으로 분석하는 학자들 또한 많이 등장했다. 대중문화에 관한 부정적 시선을 '오웰주의적 환상'이나 '대중에 관한 물신화'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학문적인 관심에서 비껴있는 텔레비전을 본격적인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의 논의는 선구적인 측면이 있다. 설령 그가 아주 부정적이고 혹독한 평가를 내렸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안더스 이후 텔레비전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눠진다. 하나는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여러가지 내용들을 분석하는 경향이다. 레이먼드 윌리엄스 등은 문화연구의 일환으로서 텔레비전과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한 대중문화 현상을 고찰한다. 또한 니클라스 루만은 대중문화 현상의 중심에 텔레비전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다른 하나는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 형식을 주목하는 경향이다. 실재와 가상 문제는 보드리야르에 의해 반복되고 있으며, 현상학적 탐구라는 방법은 플루서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덧댐. 본문의 내용이 너무 개괄적이고 그 장에서 다루려는 사람이 아닌 다른 학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다른 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체이론이나 매체미학, 매체철학을 공부하려는 분들께 이 책을 권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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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yke 2013-09-28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서양현대철학연습 발제. 『20세기 매체철학』 3장 요약.>

 

   이른바 '대중문화'라는 현상은 자유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산업사회 이후에야 나타난 완전히 새로운 문화적 현상이다. 그 이전에는 수요의 측면에서 문화 또는 예술작품을 향유할만한 계층이 매우 한정되어 있었으며, 또 생산의 측면에서 특정한 작품 또는 문화적 생산물을 많은 사람에게 제공할만한 체제가 갖춰져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한정된 계층의 소수가 몇몇 작품을 감상하면서 생성됐다. 그러나 부르주아적 혁명은 예술을 향유하는 계층을 한층 더 넓히는 데 기여했고, 결정적으로 공장제 공업은 높은 밀도로 모여있는 노동자 집단을 형성시켰다. 이들은 후에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대중문화는 이들 속에서 형성된 문화, 더 구체적으로는 이들이 즐기는 문화적 대상물을 가리키며, 대량으로 생산되고 대량으로 소비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이전과는 다른 문화적 현상이었기 때문에
, 많은 사회학자와 철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아도르노는 대중문화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매우 부정적이다. 대중문화 현상에서 중심을 이루는 문화적 대상물들은 생산의 단계에서 이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포섭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이들은 문화적 대상물이 아니라 상품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떤 기만이 있다. 이런 상품들은 상품이 아닌 문화적 대상물로서 소비되기 때문이다. 상품과 문화적 대상을 소비하는 방식은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기만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문화적 태도'를 잃어버리고 자본주의적 사회에 매몰된다. 이것이 그의 문화산업론의 핵심이다. 그의 고찰은 이후 대중문화에 관해 비판적인 많은 사람들에게 그 원형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의 문화산업론은 대중매체가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한 고찰을 포함하고 있다
. 따라서 매체이론의 관점에서 그를 살펴보려면 문화산업론을 반드시 다뤄야만 한다. 이 글에서는 아도르노의 예술사회학과 예술 개념에 관해 살펴보고, 그에 따른 문화산업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회비판으로서의 매체이론 - 아도르노의 예술사회학(문화사회학)

 

   대중문화의 등장은 많은 학자들의 이목을 끌었지만, 이는 주로 부정적인 측면에서 평가되었다. 대중문화 속 문화적 생산물들은 이전의 문화적 생산물들 즉 예술작품에 비해서 저열하고 통속적이기 때문에 그 내용의 측면에서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학파, 특히 아도르노의 대중문화 비판은 이런 일차원적인 가치평가에서 벗어나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는 문화적 생산물들의 내용이 아니라 이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고찰하였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대중문화의 수준이 아니라 대중문화의 사회적 역할, 효과, 영향이었다. 이런 면에서 그의 대중문화 비판은 단순한 비난들과 구별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중문화
, 그리고 대중매체가 파시즘과 연결되어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대중은 자신들에게 잠재된 혁명의 동력을 파시즘이라는 형태로 잘못 표현하고 있으며, 이런 정치적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던 계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중문화와 대중매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문화와 대중매체에 대한 비판은 곧 파시즘에 대한 비판,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된다. 또한 이런 발상은 문화와 사회를 구별하고 예술이 고유한 영역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에 반대하고, 나아가 새로운 미학적 입장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 그들은 미학이 아닌 예술사회학을 통해 문화에 접근하려고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벤야민은 이런 대중문화 현상을 정치의 예술화(미학화, 심미화)라고 주장했다. 대중매체는 대중에게 표현수단을 부여했는데, 정치의 문제를 권리의 체계의 변화가 아닌 표현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난 것이다. 반면 아도르노는 문화산업론을 통해 문화의 생산 과정에 자신의 탐구를 집중함으로써 독특한 예술사회학을 전개했다. 그에게는 대중매체를 통해 전파되는 문화적 생산물을 누가 만들었는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그의 문제의식을 짧게 표현하자면 예술의 상품화 또는 상품의 예술화(미학화, 심미화).

 


   '
관리되는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예술 - 아도르노의 예술개념

 

   그렇다면 예술의 상품화 또는 상품의 예술화가 왜 문제가 되는가? 아도르노가 왜 이것을 문제삼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의 예술 개념과 예술작품에 관한 관점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결론을 먼저 간략히 이야기하면, 그가 보기에 예술 또는 예술작품과 상품은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생산양식은 대중문화의 문화적 생산물들을 상품과 동일한 방식으로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예술의 성격과 상품의 성격이 충돌하고, 문화적 생산물은 예술로서의 성격을 상실한다.


   그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의 생산양식에 따라서 그 시대에 사용할 수 있었던 재료들을 조합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 그리고 어떤 생산물이 예술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기준, 즉 예술의 개념 또한 역사성을 가진다고 설명한다("예술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여러 계기들의 짜임 관계(성좌)에 의해 이뤄진다" "현재의 예술에 대한 규정은 언제나 과거 한 시대의 예술에 의해 제시된다."). 그러므로 예술 개념과 예술작품은 사회와 반드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만약 예술작품이 이런 특징만 가지고 있다면 다른 생산물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 여기에서 그가 제시하는 예술의 특징은 부정성 내지는 창조다. 즉 예술작품은 역사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새로운 것, 이제까지 감성적으로 파악되지 않았던 것을 감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을 조합해 보여주는 변증법적 생산물이다("예술은 경험적 현실과 분리됨으로써 자체의 필요에 따라 전체와 부분들의 관계를 형상화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분리를 통해서만 예술작품은 이차적인 존재로 된다. 예술작품은 작품의 외부에서 거부되어 있는 것을 경험적인 생명체에 부여하며, 이로써 또한 물적이고 피상적인 작품 체험을 통하여 만들어진 작품 형태를 탈피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위대한 예술작품은 예술의 개념을 바꾼다("위대한 예술가들이란 결코 매끈하고 완전한 양식을 구현한 사람들이 아니라 카오스적인 고통의 표현에 대항하기 위한 강인함으로서, 즉 양식을 '부정적 진리'로서 작품 속에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이에 따라
, 예술 개념의 역사성과 예술 작품의 부정성이라는 긴장은 예술작품에게 사회비판적 성격을 부여한다. 예술은 경험적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무엇, 반대되는 무엇을 자신의 내적 형식을 통해 표현한다. 만약 자유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산업사회에서 어떤 문화적 생산물이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사회가 보여주지 않는 무엇인가를 표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사회에서 예술작품이 지녀야할 덕목은 '쓸모없음'이 된다("예술은 기존 사회의 규범에 따르거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으로서의 자격을 갖추는 대신에, 독자적인 것으로서 자체 내에서 결정체를 이룸으로써, 마치 청교도들이 모든 종파를 부인하듯이 그 단순한 존재를 통해서 사회를 비판한다. 순수한 것, 그 내재적 법칙에 의해 철저히 형상화된 것 가운데 무언의 비판을 가하지 않는 것, 혹은 총체적인 교환 사회를 지향하는 상태로 인한 굴욕을 탄핵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예술의 비사회적 요인은 특정한 사회에 대한 확정적 부정이다.")

 


   '
관리되는 사회'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는 문화산업 -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

 

   하지만 문화산업은 이러한 예술과 예술작품을 상품화한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주장이다. 오히려 문화산업을 통해 만들어진 문화적 생산물들은 혁명의 동력이어야 할 대중의 잠재력을 무마하고, 도피처를 제공하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된다. 현대의 문화산업이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이유는 문화적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생산수단이 독점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이고, 이런 식으로 문화적 생산물을 이용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대중문화의 관계자들은 문화 산업을 기술적 용어로 설명한다. 그들은 문화 산업에 수백만이 참여하기 때문에 수많은 장소에서 동일한 상품에 대한 동일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든 재생산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생산의 중심지는 몇 안되지만 수요는 여기저기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는 기술적 문제가 경영에 의한 조직과 계획을 필요하게 만든다고 얘기한다. (...) 이러한 주장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은 문화 산업의 조종과 이러한 조종의 부메랑 효과인 수요가 만드는 순환 고리로서 (...) 기술이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할 수 있는 기반은 사회에 대한 경제적 강자의 지배력이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기술적 합리성이란 지배의 합리성 자체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들은 이윤 동기에 따라서 상품을 생산해내지만
, 이것을 대중문화와 대중매체라는 환경 속에서 예술 또는 문화로 포장한다. 그러나 이 문화상품에는 작품 내적인 예술적 성격 즉 부정성과 창조가 거세되어있고, 감각적 부분만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다르다는 것, 개성이라고 강조되는 것들은 아주 부차적이고 감각적인 문제일 뿐이며, 내적인 측면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다.


   "
영화 제작자는 베스트셀러에 의해 보증된 안심할 수 있는 원고가 아닌 경우 모든 원고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 스케치나 단편, 문제작, 히트송과 같은 형식들은 후기자유주의적인 취향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대중 문화의 단계에서는 화석화되어 문화 산업에 의해 강요된 평균적 규범이 되었다." "문화 산업의 특징인 '새롭게 하기'는 대량 복제의 개선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체계'의 핵심적 요소다." "자아의 특수성이란 언뜻 보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에 의해 결정된 개인들의 독점 상품이다. (...) 지문을 제외한다면 신분 증명서는 모두 정확히 똑같은 것으로서 영화 배우로부터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인의 삶과 얼굴은 보편성의 힘에 의해 똑같은 신분 증명서 중의 하나로 변질된다."


   내용의 부정성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문화적 생산물은 소비를 통해서 동일한 소비자들을 만들어낸다
. 또한 이런 이윤 동기에 부응하지 못하는 '부정성'의 예술들은 문화의 영역에 등장조차 하지 못한다.("세상에 나타나고 있는 모든 것에는 예외 없이 문화 산업의 인장이 찍혀지기 때문에 문화 산업의 흔적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나 확인 도장이 찍히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세상에 등장할 수 없다.")


   여기에서 향유와 유흥의 차이가 드러난다
. 향유는 예술작품과 감상자 사이에 생겨나는 소통의 형식이다. 아도르노는 이것을 미메시스적 수용방식이라고 표현한다. 반면 유흥은 문화상품과 소비자 사이의 관계다. 예술작품을 향유하는 감상자는 객체의 형식과 내용 속에 자신을 침잠시키고 관조함으로써 작품과 변증법적 관계를 맺는다. 역설적이게도 이 변증법적 관계는 주체의 사유 속에서 이뤄지고, 결과는 부정성의 경험이 될 것이다. 반면 문화상품을 유흥하는 소비자는 감성적(감각적) 형식에만 만족하거나 온전히 자신을 투영하기만 함으로써 변증법적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


   이런 경험이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통해 일어난다
. 대중문화는 생산양식을 포위한다("사적인 문화 독점 하에서 "폭군은 육체를 자유롭게 놓아두는 대신 곧바로 영혼을 공략한다. 지배자는 (...) 이렇게 말한다.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자유다. 너의 생명이건 재산이건 계속 네 것을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 이후 너는 우리들 사이에서 이방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독점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대중은 예술작품와 감상자 사이에서 생겨나는 진정한 개성 즉 부정성으로부터 배제당하고, 감성적 형식의 차이를 물신화하는 소비자들만이 넘쳐나는 사회로 점차 나아간다.


   이 과정이 더 진행되면
, 문화산업의 독점자본은 단순히 수요에 맞춘 대량생산 뿐만 아니라 수요를 핑계로 자신들이 원하는 상품을 생산하며 수요를 조작하는 단계에 이른다. 수요를 조작한다는 것은 대중이 거짓된 욕망을 품게끔 한다는 의미이다("즐김은 사실 도피다. 그러나 그 도피는 일반적으로 얘기되듯 잘못된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마지막 남아 있는 저항 의식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오락이 약속해주고 있는 해방이란 '부정성'을 의미하는 사유로부터의 해방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수사학적 질문의 뻔뻔스러움은 이러한 질문이 사유하는 주체에게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주체적 사유로부터 빠져 달아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향하고 있다는 데 있다."). 대중은 감상자에서 소비자로 퇴행하고, 독점자본의 문화산업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한다.


   아도르노에게 대중이 소비자로 퇴행한다는 것은 대중이 비판적 시선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문화산업은 자신의 논리에 의해 욕망을 창출한다. 그리고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여러 장치에 대중을 종속시키는데, 이 장치는 독점자본주의에 알맞는 행동양식을 강요한다. 그런데 욕망은 지속적으로 창출되고, 그래서 욕망의 완전한 충족은 끊임없이 유예된다. 그러므로 대중은 문화산업의 논리에 종속된 상태에서 거의 벗어날 수 없으며, 나아가서 주체의 상태 자체가 수동적으로 변화하고 혁명 또한 영원히 유예된다. 이 과정에서 남는 것은 이와 같이 '관리되는 사회'에서 생산되는 자극적 문화상품들 뿐이다.

 


   문화산업론의 의의와 한계

 

   대중문화를 통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는 사람들에 맞서서, 아도르노는 미학적 경험이 빠져있는 대중문화의 확산은 단지 야만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듯 하다. 즉 독점자본주의적 사회에서 대중문화의 등장은 예술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배제한 채 확산되기 때문에, 긍정적인 현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종속된 대중이라는 주체를 낳는다는 것이다.("개인이라는 관념은 개인과 보편성과의 완전한 동일성이 문제되지 않을 경우에만 용납될 수 있다."). 대중매체란 결국 확립된 소유관계과 그에 관한 의식을 정당화하고 확산시키는, 일종의 조작의 수단이다.


   그는 이렇듯 문화산업이 판치는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 우리가 가장 처음에 다뤘던 예술 개념과 예술작품을 제시한다. 순수한 부정성으로서, 언제나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서의 예술은 사회와 맺는 변증법적 관계에 의해서 해방의 공간을 자신의 내부에서 전개한다. 그리고 이것을 향유하는 감상자는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과 문화산업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주체성을 획득한다. 이런 새로운 주체들이 해방의 토대가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그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살펴보자면
, 크게 두 가지가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하나는 그가 고찰한 것이 미디어의 소유자나 그 내용에 관한 것이지, 미디어 자체에 관한 비판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미디어 형식 자체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그러므로 어떤 내용을 전달해주는가에 따라 해방의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반론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온당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문화산업의 관점에서 분석한 것은 이미 문화산업의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결정된 상태에서 진행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올바로 쓰인다면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에 관한 긍정적 가정이 이미 전제된 상태에서 가해지는 비판은 아도르노의 문제의식과 분석 대상을 염두에 두지 않은 상투적인 어구이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의 문제점, 즉 문화상품의 소비자들을 수동적인 존재로만 설정했다는 것은 진지한 비판이 될 수 있다. 소비자들은 대중매체를 단순히 전해주는 그대로 소비하지만은 않는다. 분명히 소비자들은 미디어의 형식과 내용에 영향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의 역사성'이라고 부를만한 독립적 영역이 있다는 것 또한 명확하다. 어느 때에는 온전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또 다른 때에는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은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과 1인 미디어 시대 이후에 더욱 부각된다.

 

 

덧댐. 중간에 겹따옴표 안에 들어간 말들은 아도르노의 『미학이론』, 그리고 『계몽의 변증법』의 문화산업 장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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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1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현재 사회에 아도르노를 적용하면 우리는 무엇을 구체적으로 예술로 향유해야할까요?
대중가요는 안될테고..
클래식음악?
미술관에가는것 정도가 되나요?

박효진 2013-04-26 01:04   좋아요 0 | URL
아도르노 본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클래식에 집착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할 때 아도르노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예술작품을 대하는 수용자의 태도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어떤 유형이나 장르를 즐겨야 예술을 향유하는 것은 아니고, (뻔한 얘기지만) 작품에 대해 내면으로부터 깊이 감상해보는 자세가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보통 형식을 파괴하는 작품들이 이런 깊은 생각을 자아내기 때문에, 아도르노가 불협화음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실용주의연구 발제. 『로티와 사회와 문화』(김동식 엮음, 철학과현실사, 1997)에 있는 리처드 로티, <낭만적 다신론으로서의 실용주의>(남기창 옮김) 요약. 영어 원문은 in Philosophy as Cultural Politics>

 

   로티는 실용주의를 낭만주의, 다원주의, 공리주의의 결합으로서 파악하고 있다. 낭만주의는 완전함을 향한 개인의 끊임없는 노력과 그 과정에서 취하는 열려있는 태도, 그리고 삶에 대해 개인이 취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특성을 말한다. 다원주의는 이런 개인들의 삶의 태도를 존중하며, 이들의 위계를 결정할 특정한 기준 또는 그에 관한 지식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공리주의는 이런 개인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가장 추구해야 할 바는 각 개인의 가능한 한 가장 행복한 삶의 방식이며,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하는 경우는 오직 어떤 행위가 다른 사람 또는 사회의 다른 많은 구성원들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 뿐이라는 사회적 삶에 대한 시각을 뜻한다.

 

   이런 식으로 실용주의를 이해하는 입장은 베르텔로의 입장에서 잘 드러나있다. 실용주의에 관한 그의 기준은 니체와 제임스-듀이, 그리고 밀을 모두 같은 실용주의자로서 분류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한 사람의 삶을 표현하고 그것을 유통하는 수단으로서 철학이나 지식보다는 시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낭만주의적 문학작품들에 관해 긍정적이었다. 이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이들이 일신론적이고 플라톤주의적인 기독교에 맞서서 다신론을 긍정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개인들의 수 만큼 다양한 시, 그리고 다양한 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이들에게 다신론과 다원주의는 대체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공통점 못지 않게 차이점 또한 분명히 드러난다.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민주주의에 대한 해석이다. 니체는 민주주의에 부정적이었는데, 그것을 이른바 현대의 기독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티는 니체의 이런 정치적, 종교적 태도가 그의 사상에서 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실제로 표방하고자 한 것은 이른바 반표상주의이다. 그러나 이런 반표상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와도, 반민주주의와도 양립가능하다. 니체는 다른 기독교주의자들 그리고 플라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대문자 진리에는 이상적 사회에 관한 지식이 담겨있다는 생각을 공유했으며, 따라서 대문자 진리에 관한 거부는 곧 이상적 사회에 관한 거부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때문에 니체에게서는 반표상주의와 반민주주의가 공존했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반표상주의와 민주주의를 양립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종교가 인간의 삶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드러내고, 그 방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색채가 탈색되어 사회적 강령만 남은 기독교는 어떤가? 기독교에서 신에 관한 언급과 역설을 제외한다면, 남는 것은 평등과 박애(동포애) 뿐이며, 이것은 실용주의적으로 충분히 수용가능한 것이다.

 

   이런 점을 정당화하기 위해 로티는 실용주의의 종교관을 다섯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종교는 습관이다. 둘째, 종교는 진리와는 무관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소속된 문화의 한 부분이다. 셋째, 진리 개념을 폐기함에 따라 우리는 우리의 활동에 관해 새로운 구분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은 사회적 활동/개인적 활동의 구분이다. 넷째, 종교가 문제가 되는 시기는 그것이 사회적인 것과 결합되어 구분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날 때 뿐이다. 다섯째, 니체는 이런 종교성(그리고 종교적 도덕성)을 도덕적 나약함의 상징으로 보았지만, 반면 제임스와 듀이 그리고 밀은 타인의 행복에 관한 무관심의 징후 그리고 민주주의적 합의를 우회하려는 수단으로서 종교성을 보았다.

 

   실용주의자들의 종교관을 살펴보면, 제임스와 듀이는 많은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미묘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제임스는 종교를 실용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노력했고 상당한 성과 또한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종교적 경험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초월적인 존재 또는 그에 관한 무엇인가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이것은 여전히 플라톤주의적인 실수, 즉 진리를 향한 욕구와 행복을 향한 욕구를 구분하고, 진리욕구가 충족되면 행복욕구도 자연스럽게 충족될 것이라는 생각이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듀이는 종교가 아무리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진리성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종교가 권장하는 바를 실천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진리욕구와 행복욕구의 구분을 없앴을 뿐만 아니라 행복욕구만이 인간에게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런 실천을 통해 증명되는 것은 그 종교가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적 성격, 자신이 진리라고 설파하는 내용에 관한 내용 전부가 아니라 실천과 관련된 사항들 뿐이다. 이렇게 그는 기독교에서 형이상학적 색채를 빼는 데 성공했고, 그것이 인간의 삶에서 충분히 하나의 시로써 역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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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실수 - 리처드 로티

 <실용주의연구 발제. 리처드 로티,  in Philosophy as Cultural Politics 요약. 원문은 http://blog.aladin.co.kr/russell85/6072772>

  

   로티는 '냉전적 자유주의자'라는 개념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이들은 냉전을 지지한 자유주의자들인데, 언듯 보아서는 형용모순이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경멸하는 데 이러한 표현이 쓰였다. 이런 칭호를 얻을법한 사람들은 주로 예전에 공산주의 정당에서 활동을 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스탈린주의에 의해 강요된 가혹한 당파투쟁을 경험했다. 그리고 이런 당파투쟁은 과연 소비에트 연방이 정의를 구현하고 있는가에 관한 사상적, 철학적 논쟁으로까지 번졌다. 이 논쟁의 진영은 크게 양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공산당적을 유지하고 있는 스탈린주의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공산당을 포기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이다(로티의 부모가 트로츠키주의자였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이들은 서로를 변절자라고 욕했으며, 상대편을 궤멸시키기 위해서 자본주의적 세력(즉 미국 정부)과 결탁하는 것 또한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많은 지식인들에게 냉전적 자유주의자라는 칭호는 여전히 달갑지 않다. 그리고 이런 칭호를 받는 사람이 되고싶어하지 않고, 비평의 과정에서도 위대한 작가들에게 이런 칭호를 붙이지 않는다. 로티는 조지 오웰에 관한 히친스의 비평을 이런 태도의 좋은 사례로 든다. 오웰은 반-공산주의자였다. 그렇다면 오웰은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지지했을까? 히친스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웰은 반-공산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반-제국주의자였고, 이 둘 사이에서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져야할지 확실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티는 이런 히친스의 확신에 의문을 제기한다. 로티는 오웰이 베트남전을 스탈린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인식했을 가능성 또한 있으며, 만약 그랬다면 오웰은 전-트로츠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참전을 지지했을 것이라 본다.

 

    로티는 이어서 이런 식으로 소설가를 비평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많다고 지적한다. , 오웰에게 "불편한 사실을 직면하는 힘"이 있었다면, 다른 정치적 입장을 취했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던 것인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로티가 보기에 히친스는 모든 성실하고(honest) 지적인 사람은 미래의 역사가들의 판단과 거의 일치하는 정치적 판단을 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이 성실함은 경험적 사실에 관해 면밀하게 조사하고, 그에 관해 가감없이 솔직하게 표현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단어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사례가 훨씬 많다. 조지 버나드 쇼는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묵인했고, 예이츠는 무솔리니를 한 때 존경했다. 사르트르는 한때 공산당원으로서 스탈린주의 비판에 소극적이었으며,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에게 매우 공격적이었다. 그러므로 히친스를 비롯해서 이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 관해 로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이들은 지적으로 불성실(dishonest)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지적으로 불성실한 자들은 사실에 관한 조사가 부족했거나, 또는 알고도 묵인하거나 자신을 기만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로티는 이런 태도가 좌파들의 악명높은 깐깐함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근원을 더 추적해보면 도덕적-정치적 선택에 관한 고전적 관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릇된 도덕적 선택은, 신중한 선택의 결과 고의적으로 선함을 배반하는 것이라는 기독교적 생각과, 선택에 필요한 원리가 모든 합리적 존재에게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플라톤주의적인 생각의 결합에 의해서 '비합리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현대의 많은 도덕철학자들 또한 이런 생각을 많이 수용하고 있다. 반면 듀이는 이 둘의 결합을 이루어낸 것이 칸트라고 생각하고, 이는 도덕적-정치적 선택에 관한 잘못된 관점을 심어줄 수 있으므로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도덕성에 관한 헤겔의 생각, 즉 도덕적 원리란 과거에 우리가 해왔던 것의 성긴 요약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의 도덕적-정치적 선택은 신념과 욕망의 연결망을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사건이라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결과이다.

 

    듀이의 설명방식에 따라 오웰이 왜 정치적으로 옳았는가에 관해 해명한다면, 그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인 것이다. 만약 이런 관점을 채용해서 오웰의 정치적 적절함의 원인이 성실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의 정치적 부적절함 또한 그 원인이 불성실함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엘리엇은 <동물농장>의 초고를 받고도 출판하기를 거부했지만, 이것이 그가 불성실하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이런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이전 세대의 정치적 선택에 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스탈린주의를 뒤늦게 포기한 사람들은 그렇게 될법한 여러 조건에 놓여있었을 뿐인 것이지, 그들이 신념으로서 지니고 있던 특정한 원리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만약 그 사람들도 더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면, 스탈린주의에 훨씬 더 빨리 환멸을 느끼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이런 문제에 성실함이 중요하다고 한다면, 왜 많은 성실한 사람들은 영국의 공장과 광산을 보면서 사회주의가 더 나은 정치제도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굴락의 존재가 폭로된 것만으로도 소련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사건이 벌어지던 당시에 이들은 전혀 다르게 알려지고 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판단의 문제에 관해서 섣불리 이야기할 수 없다. 인간의 삶이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한 듀이는 의사결정에 관한 플라톤주의적 모델은 인간의 삶과 맞지 않기 때문에 무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리스적인 '이성'이라는 말을 '지성'이라는 말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수용한 평론가 가운데 한 사람은 라이오넬 트릴링이다. 트릴링은 인간의 지성이란 인간의 삶의 어려움과 복잡함을 마주하고 대처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인간 이해를 비평에 적용했는데, 그 결과는 인간사에서 이런 대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르가 소설이라는 생각으로 나타났다. 소설은 판단의 합리적 근거가 아니라 그런 판단을 내리게 된 이야기(서사)를 알려준다. 이 견해에 따라서 성실한 사람이라는 개념을 다시 해석하면, 그는 다양한 서사를 가지고 그것이 어떤 도덕적-정치적 판단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 된다. 또한 그 이야기들은 완벽하게 구성된 이야기가 아니고 엉성하게 이어지고 있을 가능성도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의 소설 <여행의 중간>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이른바 '냉전적 자유주의자'라고 불릴만한 사람인 챔버스를 모델로 삼아 만들어졌다. 챔버스는 히스가 간첩활동을 하고 있다고 폭로한 최초의 사람이고, 처음엔 공산당에서 활동했으나 이후 반-공산주의자가 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는데, 로티에 따르면 그 이유는 단지 챔버스와 히스 사이의 다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가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챔버스는 당시 좌파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다른 많은 저널리스트, 평론가들과 달리 <타임> 지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반-공산주의적 성향의 기사를 보도하는 데 열심이었다. 이런 그의 성향은 보수적 성향의 발행인인 루스조차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성향이었다. 루스를 비롯한 많은 출판인들, 그리고 미국의 많은 지식인들 사이에는 2차 대전 당시에 미국과 소련이 협력했던 것처럼 종전 이후에도 두 국가가 협력하는 세계가 되길 바라고, 스탈린이 정말 나쁜 놈인지에 관해서 아무도 섣불리 그렇다고 판단을 내리려 하지 않는 분위기가 존재했다. 결국 챔버스의 편집 성향과 논고들은 심각한 반대 이외의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좌파적 지식인들은 공화당 지지자들이 공산주의를 뉴딜 정책을 반대하는 구실로 이용했던 과거를 상기하면서, 같은 역사가 또 다시 반복될 것을 걱정했다. 챔버스는 이런 분위기를 잘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으며,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타임> 지를 비롯한 루스의 다른 잡지들의 성향이 자신과 거의 일치하는 방향으로 점차 바뀌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는 이겼다."

 

    그러나 챔버스는 히스와의 그 유명한 다툼으로 인해서 1948년 이후에야 그 이름이 알려졌다. 히스가 완전히 탄로난 뒤에 트릴링의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트릴링이 마치 챔버스를 모델로 막심을 묘사한 것처럼 낸시 크룸과 아서 크룸은 히스를 모델로 만들었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여러 정황을 미뤄볼 때 트릴링은 이 소설을 쓰던 당시 히스에 관해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히스 부부와 크룸 부부의 이 평행은 우연이지만 놀랍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 관한 광고를 보면 챔버스(와 막심)는 변절자로 묘사되며, 돈 또는 명예라는 이익을 위해 당을 배신했고 그러므로 그는 불성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여러 표현들로 꾸며진다. 그러나 트릴링은 히스의 대변인에게 챔버스에 관해 "명예로운 사람"이라는 답변을 남겼다. 그 대변인은 이것을 풍자의 의미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로티는 이것이 진지한 답변이라고 해석한다. 그 까닭은 트릴링은 그 책의 새로운 판본에 붙인 서문에서 챔버스는 그의 조국을 배반하는 간첩활동에 참여한 전력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명예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적었기 때문이다. 로티는 이 문구를 도덕적-정치적 실수가 불성실함이나 멍청함 같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이런 단어들은 도덕적-정치적 선택에 관해 기술하는 데 매우 조잡하다는 생각을 트릴링이 표현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이런 선택과 실수는 소설을 통해서 가장 잘 배울 수 있다고도 덧붙인다.

 

    트릴링 주변의 많은 인물들이 챔버스에 관해 그가 그런 식으로 묘사하는 것을 마뜩찮게 생각했다. 심지어 부인인 다이애나 트릴링도 그랬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트릴링의 답변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비평가 포스터는 조국과 친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조국을 배신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은 현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다. 이런 식으로 원리를 세워놓고 그 원리에 자신의 판단을 호소하는 것은 구체적이고 복잡한 것 속에서 온전히 살아남기를 싫어하는 책임회피의 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남는 것이 바로 듀이가 말한 지성이 활동하는 영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의 중간>은 듀이적 삶의 방식을 표현하는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라스켈은 막심과 크룸 부부 양쪽 모두와 자신을 차별화하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이러한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크룸 부부는 스탈린주의를 굳게 믿는 사람이고, 막심은 이들이 반드시 파멸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공산주의적 활동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라스켈은 자신이 자유주의자라고 생각했지만, 누군가가 당을 떠난다고 할 때 불쾌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미국공산당과 모스크바의 관계에 관한 보수 언론들의 보도는 신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막심의 배신은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도록 라스켈을 몰아붙였다. 그는 누가 옳은 것인지 끊임없이 의심하는 위치에 있다. 독자들은 라스켈이 트릴링이 걸어간 길을 걸어갈 것 같은 캐릭터라고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이를테면 왈라스 대신 트루먼에게 투표하고, 챔버스의 편에 서서 냉전적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반면 크룸 부부는 스탈린주의에 관해 의심하지 않고, 이런 의심을 일종의 정신적 무질서라고 생각했다. 이런 막심과 크룸 부부를 동시에 바라보는 라스켈은 "크룸 부부에게 배운 것 때문에 막심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는 일견 모순적인 말을 내뱉게 된다. 막심은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라스켈에게 설명하며 라스켈 식의 지혜는 이 시대에 필요하지 않다고 대답한다. 승리를 거두는 것은 자신이나 크룸 부부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런 국면에서 라스켈은 막심과 크룸 부부 사이에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트릴링은 이런 공통점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이 소설을 썼다. 막심의 오만함과 크룸 부부의 깐깐함은 듀이적인 의미의 "인간적인 비판적 지성"의 부족이 드러나는 두 가지 방식인 것이다.

 

    막심은 챔버스와 마찬가지로 어떤 절대적이고 보상을 주는 것에 기대어 영웅적이고 단독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삶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챔버스는 동료들의 압력을 어떻게 견뎠는가라는 질문에 "어떤 힘이 내 옆에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크룸 부부는 이에 필적하는 완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스탈린의 악행에 관해 이야기할 때 히스의 부인 프리실라가 그에게 '정신적 자위'를 하고 있다고 지적한 데서 드러난다. 막심은 마치 키에르케고르처럼, 확실성은 불가능하지만 필요하지 않은 것이기에 성취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대적인 합의는 논쟁에서 이기는 능력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크룸 부부와 히스 부부는 키에르케고르가 "기독교계"라고 부른 사람들의 특징을 그대로 물려받았기에, 구원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었고, 모든 성실한 사람이 자신들과 같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구원으로부터 등을 돌린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과 대화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반면 라스켈과 같이 "인간적인 비판적 지성"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무조건적, 자기충족적 계율과 같은 원리에 저항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이에 비추어볼 때, 막심과 크룸 부부는 다 이런 종류의 생각에 자신의 도덕적-정치적 결정을 의존하는 인물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행의 중간>은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한 쁘티-부르주아적 정서라는 공세에 대해 트릴링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쓴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라스켈을 통해서 드러나며,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왜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지를 우리는 알아차릴 수 있다.

 

    만약 그의 소설을 이런 식으로 읽는 것이 옳다면, 트릴링은 막심-챔버스 뿐 아니라, 크룸-히스 부부 또한 명예로운 사람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챔버스와 히스 모두에게 비열한 동기는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이 가져다주는 최선의 선택을 했고, 그것은 챔버스가 공산주의자 그룹을 폭로한 이유이기도 하고 히스가 죽기 전부터 45년 동안이나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간첩활동도 하지 않았고 거대한 음모의 희생자였다는 거짓말을 반복한 이유이기도 하다. 알프레드 케이진은 "앨저 히스는 왜 고백할 수 없었나" 라는 글에서, 히스가 열정적인 애국자라는 것을 확신했다고 적고 있다. 뉴딜 정책을 입안한 것과 소비에트 정보국의 스파이가 된 것은 둘 다 그의 조국애로부터 나온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케이진은 "히스는 자신이 우리보다 더 좋은 미국인이었다는 것을 확신하며 죽을 것"이라고 보았다. 다양한 시간에서 두 사람은 간첩이고 위증자였지만, 그들은 그럴듯한 이유에서 이런 행위를 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이해한 만큼 인간성을 위해서 헌신했지만, 그것은 이후의 역사가들이 그 행위의 결과에 따라 어떻게 그들에 관해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 관련이 없었다. 반면 소설가는 행위의 동기와 행위의 결과 모두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도덕적-정치적 선택에 관한 기독교적이고 칸트적인 생각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만든다.

 

 

    덧붙여, 트릴링이 이런 듀이적인 생각을 언제나 확고하게 지지한 것은 아니다. 오웰에 대한 그의 태도는 히친스와 흡사하다. 그는 오웰의 독특함은 머리를 굴리지 않는 것, 즉 간단하고 직접적이고 기만하지 않는 지성만으로 세계와 대면하는 덕에서 찾을 수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구절은 우리에게 마치 험프리 보가트가 되고 싶어하는 우디 알렌, 헤밍웨이는 우리 시대에 그가 유일하게 질투하는 작가라고 말하는 트릴링의 태도를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트릴링이 단지 오웰을 비평할 때 최선을 다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로티는 오웰이 듀이적인 관점에서도 좋은 작가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는 독특하게 단순하고 진실하게끔 보이는 작품을 만드는 데 매우 공을 들였다. 헤밍웨이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그런 단순함과 건실함들을 차분히 모았다. 물론 이 작가들이 트릴링과 히친스가 보인 것과 같은 반응을 바란 것은 사실이나, 이들이 이런 작업을 할 때는 어떤 거부감을 일으킬만한 것도, 어떤 위선적인 것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이런 시도들은 당신에게 없는 덕목을 있는 척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덕있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행위들을 수행하며 자신이 점차 덕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문제라는 것이다. 한쪽 편에서는 이런 시도에 대해, 직접적이고 명증한 선함과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면 단지 위선적이라고만 말할 뿐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나 듀이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런 직접적인 관계가 가능하다는 환상은 오웰에 관한 트릴링의 글의 제목인 "진리의 정치학"에서 암시된다. 정치적인 실수를 피하는 방법은 성실하게 진실들을 모으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과학이 없는 것처럼 진리의 정치학 또한 있을 수 없다. 갈릴레오는 지적인 옳음이라는 칼로 미신과 편견을 쳐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될 결과를 산출하는 현명하고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갈릴레오는 근대의 영웅이 되었다. 오웰도 마찬가지로 20세기의 영웅이 되었다. 시대의 편견에 저항하는 이런 영웅들을 존경하는 것은 완전히 적절하며, 필수적이다. 만약 이런 존경이 없다면 도덕적 이상주의도, 도덕적 진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버나드 윌리엄스가 "도덕적 운"에서 쓴 내용을 잊어서는 안된다. 고갱은 이런 영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취급할 수 있지만, 그것은 그가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면, 고갱은 아마 수십년 동안 불쌍한 캔버스나 만들어내고 자신이 회화의 역사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키는, 앨저 히스같은 종류의 화가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갈릴레오는 그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옳다고 논증하기 위해 노력한 라이프니츠의 용감하고 공상적인 현대적 버전 정도 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부적절한 사례들이다. 정치학의 역사는, 과학의 역사처럼 사물들이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게 되는지에 관한 관점에서 쓰여진다.

 

    영웅숭배가 도덕적 진보를 위해 필수적이라고만 한다면, 이것은 혐오스럽다. 그러나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어떤 사람이 성실하게 하더라도, 어떤 한 사람에 의해 혐오를 받을 수 있다.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노예제를 유지하려고 싸우는 리 장군의 결정에 의해 혐오받았지만, 그렇다고 리 장군이 명예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무도 나치의 아이히만이나 소련의 수슬로프와 식사를 같이 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삶의 서사가 오웰과 트릴링 그리고 우리가 각자의 삶에 관해서 하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일관성을 가진다는 사실은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성실함과 명예로움은 이런 이야기의 일관성의 정도에 달려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의 삶을 선한 것으로 드러나게끔 자신의 삶에 관한 소설을 구성할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어떤 사람도 의식적으로 악하지는 않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진짜 의미하는 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적이고 칸트적인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들 대부분이 자기기만이나 불성실함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일관성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필요로 하게 되고, 결국 모든 인간에게 명료하게 보이고 우리의 삶을 인도해주는 별과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르고, 별과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은 엉성한대로 일관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를 찰지게(긴밀하게) 만드는 것이 후세에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있다.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거부한 사람들은 나쁜 것 같고,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착한 것 같다. 그렇지만 이들을 인도해주는 별 같은 것은 없었다. 이런 생각은 역사의 심판이라는 것도 완전히 그를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우리의 후손에게도 별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도덕적 판단을 하길 멈춰야 한다거나, 또는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나치가 승리하고 그들이 역사를 쓰더라도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한 사람들은 옳다고 말할 수 있으며, 만약 우리의 아이들이 라스켈보다는 막심이나 크룸과 더 비슷해지려고 하면 아이들을 꾸짖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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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특강 보고서. 제출은 영어로. 각주는 제거.>

 

 

요약

 

 

  아담 스미스의 도덕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공정한 관찰자이다. 우리가 어떤 도덕적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이 행위와 관련이 없는 독립적인 관찰자를 상상한다. 만약 그 관찰자가 우리의 행동이 적절하다고 시인할 경우, 그것은 도덕적인 가치가 있는 행동이 된다. 이 개념을 끌어들임으로써 우리는 주관적인 도덕적 판단에서 객관적인 판단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과 손해 또는 좋고 싫은 것만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내 행동에 관해 어떻게 생각할지를 도덕적 판단의 과정에서 중요하게 고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정한 관찰자는 행동을 하는 당사자의 상상으로부터 도출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가 상상하는 공정한 관찰자는 그가 자신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른 사람들 이외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공정한 관찰자의 도덕적 판단이 그 관찰자를 상상하는 사람의 문화적 맥락에 의존하는지, 혹은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을 획득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만약 상상된 공정한 관찰자가 행위자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 또는 그 사람들을 일반화한 어떤 존재의 시선이라면, 공정한 관찰자는 행위자가 살고 있는 사회의 규범과 관습과 일치하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는 그의 도덕철학 전체에 걸쳐서 공정한 관찰자의 도덕적 판단이 보편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암시하는 듯하다. 그가 공정한 관찰자를 상정함으로써 노리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어떤 행위가 단지 지금 이 곳에서 칭찬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칭찬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우리의 최초의 도덕적 판단은 다른 관찰자들이 칭찬하는 행동을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유행과 관습이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 일정정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하기도 있다.

 

  그러므로 공정한 관찰자가 내리는 도덕적 판단의 보편성에 관한 문제는 두 가지 해석을 낳았다. 하나는 아담 스미스가 기술하듯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는 행동과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일치시키지만, 이런 칭찬에 관해 비판적으로 반성할 능력이 생긴 뒤에는 칭찬받을만한 행동이 무엇인가에 관해 고민해보는 단계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은 관습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율성을 획득하고, 나아가서 도덕적 행동에 관한 보편적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다른 한 가지 해석은, 공정한 관찰자는 보편적인 도덕적 판단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핵심은 공정한 관찰자는 그 행동의 적절함을 통해서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어떤 행동 자체에 내재된 옳고 그름에 의해 판단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행동의 적절함은 공감을 통해서 설정된다. 하지만 그 공감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다. 그러므로 행동의 적절함에 대한 나와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은 내 주변에 있지 않은 사람들의 감정과는 공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행동의 옳고 그름은 여전히 내 주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칭찬하고 비난하는지에 대해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공정한 관찰자가 자율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과한 해석이다.

 

  도덕감정론의 5부와 6부에서는 이런 두 해석의 갈등이 드러난다. 그는 관습과 유행이 도덕판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이들이 취미 판단에 미치는 영향에 비해서는 그 정도가 미미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가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 제시하는 사례는 오히려 우리의 도덕적 판단이 거의 관습에 의존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반대로 6부에 등장하는 자만과 허영에 관한 분석에서, 우리는 관습에 따라 판단하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와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가 일치하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사례는 도덕적 판단에 관한 아담 스미스의 이론 안에 어떤 긴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이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게 되는 과정에 관해서 기술하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행동을 하는 것이 판단의 토대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그가 목표했던 바는 인간 본성의 구조를 통해서 특정한 행위에 관한 보편적인 도덕적 판단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구조 때문에, 우리의 도덕적 판단은 언제나 관습의 강한 영향 아래 놓여있게 된다. 그러므로 공정한 관찰자를 상정한 것은 도덕적 판단의 객관성을 확보하기에 효과적인 전략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회학적 속성 때문에 그 도덕적 판단이 인류 전체에 유효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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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아담 스미스의 도덕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공정한 관찰자이다. 우리가 어떤 도덕적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이 행위와 관련이 없는 독립적인 관찰자를 상상한다. 만약 그 관찰자가 우리의 행동이 적절하다고 시인할 경우, 그것은 도덕적인 가치가 있는 행동이 된다. 이 개념을 끌어들임으로써 우리는 주관적인 도덕적 판단에서 객관적인 판단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과 손해 또는 좋고 싫은 것만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내 행동에 관해 어떻게 생각할지를 도덕적 판단의 과정에서 중요하게 고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정한 관찰자는 행동을 하는 당사자의 상상으로부터 도출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가 상상하는 공정한 관찰자는 그가 자신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른 사람들 이외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공정한 관찰자의 도덕적 판단이 그 관찰자를 상상하는 사람의 문화적 맥락에 의존하는지, 혹은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을 획득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만약 상상된 공정한 관찰자가 행위자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 또는 그 사람들을 일반화한 어떤 존재의 시선이라면, 공정한 관찰자는 행위자가 살고 있는 사회의 규범과 관습과 일치하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그는 『도덕감정론』의 5부에서 도덕적 판단의 기초인 도덕적 감정과 관습 사이의 관계에 관해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의 시작에서 아담 스미스가 강조하는 것은 관습이 도덕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그렇게 크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 사례는 네로와 클라우디우스의 폭정이다. 하지만 영아살해 등의 다른 사례는, 관습이 도덕적 판단에 충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보편적인 자비로움은 인간의 능력 밖에 있다는 언급을 미루어 보면, 한 행위자가 그를 둘러싼 문화적 맥락을 벗어난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담 스미스의 이론으로부터 도출되기 힘든 결론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만약 관습이 도덕적 감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면, 한 행위자가 상상할 공정한 관찰자 역시 관습에 의존적인 관찰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6부에서 드러나는 자만과 허영에 대한 분석은, 상상된 공정한 관찰자의 관점과 관습에 의존적인 관점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두 가지 현상은 자신에 대한 자신의 평가와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 그리고 관습에 의존적인 내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는 내 주변 사람들 그 누구의 시선, 또는 그 시선을 일반화한 어떤 관점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분석은 공정한 관찰자가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가?

 

  이 글은 공정한 관찰자와 관습 사이의 관계에 관해, 『도덕감정론』의 5,6부에 등장하는 논의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아담 스미스가 성취하고자 했던 목표와, 그가 전개하는 이론 사이에 해결되지 않은 긴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스미스는 자신의 이론을 통해 모든 도덕적인 판단의 기초가 행동의 적절함에 대한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이라고 주장하며 특정한 행동의 보편적인 도덕적 평가를 이끌어내려고 한다. 그러나 그 평가는 상상이라는 우연에 의존하며, 그러므로 문화적인 맥락을 벗어나기 힘들고 따라서 자신이 의도했던 결론을 도출하기 힘들다.
 

 

2. 공정한 관찰자

 

 

  아담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에게 본성으로 내재된 여러 능력 중에는 공감 능력이 있다. 공감은 상상을 통해서 내가 보고 있는 어떤 상황 속에 있는 대상이 느끼는 정념과 똑같은 정념을 가지는 능력을 뜻한다. 물론 같은 종류의 정념이긴 하지만 그 정도는 훨씬 덜하다. 당사자가 느끼는 정념과 관찰자가 느끼는 정념 사이의 이 차이가 행위의 적절함을 결정하는 요소다. 어떤 정념을 표현하는 행동의 당사자는 관찰자가 상상을 통해 얻은 정념의 정도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어떤 행동이 적절한 행동인지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는 무관하면서 우리의 행동을 관찰하는 어떤 사람을 상상한다. 만약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시인한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이다. 이 사람이 바로 공정한 관찰자다.

 

  그렇다면 공정한 관찰자는 누구인가? 아담 스미스는 이 공정한 관찰자가 지켜보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식으로 그에 대해 가정적으로 서술하기도 하지만, ‘내 가슴 속에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가 실제로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것처럼 서술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어떤 행위가 적절한지에 관해 판단하는 과정에서 우선 고려되는 대상은, 자신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 즉 가족이나 친지, 친구들이다. 한 사람은 이들의 시인과 부인을 통해서 어떤 행동이 적절한지, 또는 적절하지 않은지에 관해 알아나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행동의 적절함을 판단할 때, 이렇게 배운 것에 의존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의존하는 내 주변 사람들의 판단은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과 일치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공정한 관찰자는 내 주변 사람들의 판단 가운데 하나 또는 그것을 일반화한 것일 뿐인가?

 

  하지만 반대로 질문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만약 공감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우리는 이 본성에 반하는 행동 또한 적절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각 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그러므로 자신을 돌보는 데 가장 알맞게 만들어져 있으며, 자연에 의해서 자신을 가장 먼저 돌보는 것이 권장된다. 하지만 공감 또한 우리의 자연적인 능력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장 자주 그리고 잘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돌보는 것은 자기를 돌보는 행동의 목록에 포함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관습이 부과하는 행동 가운데 인간의 이런 자연적 측면에 반하는 행동이 있다는 것을 반성을 통해 알게 된다면, 우리는 이것을 거부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과연 그런 능력은 어떻게 생겨나며, 그 보편성은 보장되는가?
 

 

 (1) 공정한 관찰자와 자율적인 도덕적 판단

 

 

  그러므로 공정한 관찰자가 내리는 도덕적 판단의 보편성에 관한 문제는 두 가지 해석을 낳았다. 하나는 아담 스미스가 기술하듯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는 행동과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일치시키지만, 이런 칭찬에 관해 비판적으로 반성할 능력이 생긴 뒤에는 칭찬받을만한 행동이 무엇인가에 관해 고민해보는 단계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Evensky는 “A significant part of Smith’s career was devoted to teaching about ethics and his views how education shapes individual ethics are well developed” 라고 말한다. 즉 스미스의 설명은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은 이유에 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사람이 어떻게 어떤 행동을 도덕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게 되는 과정에 관한 기술에 가깝다. 같은 맥락에서 스미스는 가정교육, 가정도덕이 공립학교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훨씬 더 좋은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한 사회가 칭찬하는 여러 행동의 유형들을 부모를 비롯한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교육으로부터 배우고, 그것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한 사람이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는가에 관한 중요한 정보들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관찰자들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된다. 그들의 인식적 능력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어떤 도덕적 판단 즉 적절함을 계산하는 데 고려해야 할 모든 상황에서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 한계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지만, 또 어떤 상황에서는 그렇지 못한다. 그러므로 “We appeal to the sympathies of the impartial spectator, who is freed from the limitations of their knowledge and personal situation” 만약 이렇게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편파적이지 않은 관찰자로부터 시인될 수 있는 행동이라면, 스미스가 보기에 그것은 단순히 칭찬받는 행동이 아니라 칭찬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행동이다. “We can escape from the dictates of the general clamor because, according to Smith, although we seek praise, we also value the thought of being praiseworthy.” 공정한 관찰자가 모든 상황에 관해 가장 잘 알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행위자의 상상의 산물이고, 그러므로 행위자와 모든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반면 행위자나 다른 관찰자가 가지는 인식적 능력은 뛰어넘기 때문에, 공정한 관찰자의 도덕적 판단은 객관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따라서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은 관습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율성을 획득하고, 나아가서 도덕적 행동에 관한 보편적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Griswold는 “This is just what Smith says in referring to these standards as “the slow, gradual, and progressive work of the great demigod within the breast”” 라고 말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이런 능력을 획득한 사람들을 스미스가 demigod으로 은유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Evensky는, 미묘한 표현이긴 하지만, “We can move beyond the current norms of society. But we can never reach the limit.” 라고 스미스의 도덕심리학적 기술을 요약하고 있다.

 

 

 (2) 사회적 존재로서의 공정한 관찰자

 

 

  그러나 Evensky가 아담 스미스가 묘사한 도덕발달의 심리학을 요약하면서 마무리한 앞의 문장은 매우 다르게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사회를 넘어설 수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덕에 다다를 수는 없다. Evensky 스스로도, “There is no culmination, there is no final determination in Smith.” 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서문에서도 언급했듯 아담 스미스 역시 인간의 능력이 허용하는 일과 신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을 구분하고 있다. 만약 완전한 덕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도덕적 행위의 형태나 속성을 가리킨다면, 여기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성취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이로부터 공정한 관찰자에 관한 또 다른 해석이 도출된다. 이런 주장의 핵심은 공정한 관찰자는 그 행동의 적절함을 통해서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뿐이라는 것이다. 행동의 적절함은 공감을 통해서 설정된다. 하지만 그 공감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다. 그러므로 행동의 적절함에 대한 나와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은 내 주변에 있지 않은 사람들의 감정과는 공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행동의 옳고 그름은 여전히 내 주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칭찬하고 비난하는지에 대해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공정한 관찰자가 자율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과한 해석이다.

 

  Forman-Barzilai는 세 가지 이유를 근거로 스미스가 보편주의자(세계시민주의자)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가운데 도덕적 판단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은 두 가지 점인 것 같다. 첫째는 국제관계에 관해 현실주의적인 스미스의 관점이다. 그는 모든 인간은 자연에 의해 자기가 태어나면서 소속되는 단체들 – 가족, 고향, 지역, 국가 등을 사랑하게 된다고 보았으며, 그러므로 애국주의자들의 희생은 아주 적절한 행위이며 따라서 공정한 관찰자의 완전한 시인을 받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도덕적 판단에도 적용되어서, 이른바 자연스럽게 발생한 (도덕적) 편견이나 편파성은 국가에 대한 고귀한 사랑으로 규정된다.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단체들의 번영을 방해하는 다른 집단의 번영과 세력확장은 자연스럽게 혐오와 질투의 대상이 된다. 또한 국가들 사이를 조정할만한 상위의 단체가 없는 것이 분명한데, 이는 공동체 단위 이상의 영역에서 적용되는 도덕적 규범이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스미스에게서 어떤 행동의 적절함을 판단할 수 있는 최초의 증거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도덕 발달의 순서에 따라, 특정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시인과 부인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A key implication of my interpretation here is that the Impartial Spectator is very much a cultural artefact, and not an independent, transcendent faculty likely to generate unbiased cosmopolitan judgments.”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도덕감정론』은 어떤 행동에 관한 판단 못지 않게 그 판단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발달하는지에 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Forman-Barzilai는 이것을 도덕적 삶의 인류학이라고 평가하는데, “Smith’s moral psychology is not merely an account of how selves are socialized. It is also a highly original anthropological description of moral culture.” 때문이다. 만약 스미스의 연구를 이렇게 받아들인다면, 공정한 관찰자는 한 도덕적 문화의 오래된 특징을 일반화한 산물이며,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는 스미스가 사회를 넘어선 도덕적 판단이 가능하리란 전망에 비해서, 그 문화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문화 속의 관점을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에 관해서 더욱 명백하게 서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우리와 다른 도덕적 삶의 방식을 맞딱드린다면, 우리는 공감의 본성에 의해서 그것을 수용하기 보단 주로 거부하게 될 것이다.


 

 

3. 사례? - 관습, 유행, 도덕적 감정

 

 

  『도덕감정론』의 5부와 6부에서는 이런 두 해석의 갈등이 드러난다. 5부는 관습과 유행이 도덕판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언급하고, 6부는 자연에 의해 우리가 돌봐야 하는 것으로 권장되는 것의 순서에 관한 설명이다. 그러나 갈등이 드러나는 양상은 각 부분마다 다르다. 5부의 경우 그가 주장하고 싶어하는 바는 우리의 도덕적 판단이 관습에 크게 좌우되지는 않는다는 주장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것이 자신의 관찰의 결과라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외의 나머지 문단에서는 거의 관습과 유행이 행위의 적절함에 관한 우리의 판단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사례가 제시된다. 즉 공정한 관찰자는 내가 어떤 문화에서 어떤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상황에서도 판단을 달리 한다.

 

  우선 어떤 동료들과 함께 지내느냐에 따라 행위의 적절함에 대한 판단이 달라진다. 좋은 동료들과 지내면 적절함에 관한 감각에 예민해지고, 적절한 행동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어떤 시대의 유행에 따라서도 어떤 행위가 적절한가에 관해 다르게 생각한다. 연령이나 직업에 따라서도 다르고, 국가에 따라서도 다르며, 문명이 발달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도 다르다. 야만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더 강한 절제를 적절하다고 하는 반면, 문명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않아도 사람들로부터 쉽게 적절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우리의 본성에 완전히 어긋나보이는 영아살해의 경우에도, 그 조건에 따라서는 관습으로서 인정된 경우도 있다는 것 또한 역사적 탐구의 결과로서 드러난다.

 

  물론 스미스 자신은 이렇게 관습의 영향을 받는 것들이 일반적인 양식이 아닌 특정한 행위 각각의 적절함에 대한 감각을 잃게 만드는 것일 뿐이며, 따라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또한 영아살해를 경우에 따라 권장해야 할 만한 것으로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관습이 서로 다른 전통 아래서 때로는 정당화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스미스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스미스가 이 장을 비롯한 다른 부분에서 완전한 적절함에 들어맞는 행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할지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그런 행동을 관습에 의해서 금지하는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다면 그 사람은 그 행동에 대해서는 언제나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모든 점들을 고려하는 동시에 스미스가 암시하는 것처럼 관습과 무관하게 완전한 적절함을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모든 관습에서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추상적인 언명이거나 또는 그 관습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합의해 만드는 규약, 즉 또 다른 관습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4. 반대사례? - 자만과 허영에 관한 분석

 

 

  하지만 반대로 6부에서는 우리 인간에게 주어지는 돌봄의 순서가 자연에 의해서 정해져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에 접하게 되는 단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해, 가장 마지막에는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 마무리된다. 또한 자만과 허영에 관한 분석에서, 우리는 관습에 따라 판단하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와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가 일치하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내용이 시사하는 바는, 5장의 분석에서 제시된 바와는 정반대다. 우리의 도덕적 판단이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는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신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가 관찰했을 때 옳은 것 즉 객관적인 것이 실제로 존재하며, 공정한 관찰자는 그것을 통찰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먼저, 스미스에 따르면 보편적인 자비로움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신의 영역이다. 그러나 그 실천이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것은 아니며, 인간이 추구하는 것 가운데 가장 숭고한 대상이라는 것도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런 보편적인 자비로움을 실천한다면, 공정한 관찰자는 그 행동을 완전히 시인해야 할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이것을 아주 쉽게 생각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리를 분별할 줄 알지만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resentment의 대상이 될 것이다. 또 사리를 분별할 줄 알고 죄가 없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상상하기도 힘들다. 이것은 실제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공감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지만, 공정한 관찰자 또한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면 그에게 완전하게 공감하여 보통 사람들과 같은 유형의 생각에 도달할 것이다.

 

  다음은 자만과 허영에 관한 분석을 살펴보도록 하자. 자만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The proud man is sincere, and in the bottom of his heart, is convinced of his own superiority; though it may sometimes be difficult to guess upon what the conviction is founded.” 또한 허영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The vain man is not sincere, and, in the bottom of his heart, is very seldom convinced of that superiority which he wishes you to ascribe to him.” 여기에는 세 가지 평가가 존재한다. 실제 능력의 크기, 자기평가, 그리고 다른 평범한 사람들의 평가. 실제 능력의 크기는 현명한 사람이 그에 관해 내리는 평가로 간주되는데, 이것은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로 대체해도 무방할 것이다.

 

  문제는 세 평가의 정도가 불일치할 때 자만과 허영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는 어떤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우리는 어떤 행동에 대해 평가하는 기준을 이런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제공받는다. 또한 그것이 어떤 추상적인 형태로 일반화된다고 하더라도, 그 시선으로부터 크게 벗어나는 것은 힘들다. 따라서 공정한 관찰자를 문화적 산물로 이해할 경우,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과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의 정도는 거의 동일할 것이고, 자만과 허영같은 현상은 일어나기 힘들다.

 

 

 

5. 결론 - 이론적 긴장

 

 

  이런 사례는 도덕적 판단에 관한 아담 스미스의 이론 안에 어떤 긴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긴장은 보편성을 비편파성으로 해석하려 한 스미스의 시도로부터 파생되었다. 그는 인간이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게 되는 과정에 관해서 기술하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행동을 하는 것이 판단의 토대라고 주장했다. 공정한 관찰자라는 상상은 분명히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내 행동을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려하면서 생겨나는 인간의 능력이다.

 

  반면에 그가 목표했던 바는 인간 본성의 구조를 통해서 특정한 행위에 관한 보편적인 도덕적 판단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구조 때문에, 우리의 도덕적 판단은 언제나 관습의 강한 영향 아래 놓여있게 된다. 상상과 공정한 관찰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도약이 존재한다. 이것은 비편파성에서 보편성을 향한 도약이다. 그러므로 공정한 관찰자를 상정한 것은 도덕적 판단의 객관성을 확보하기에 효과적인 전략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회학적 속성 때문에 그 도덕적 판단이 인류 전체에 유효하지는 않다는 점에서 스미스의 의도는 아직 달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Smith, Adam. (1982)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D.D.Raphael and A.L.Macfie, eds. Indianapolis: Liberty Fund
Evensky, Jerry (2007) Adam Smith’s Moral Philosoph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Brown, V. and Fleischacker, S. (eds.) (2010) The Philosophy of Adam Smith. New York: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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