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특강 보고서. 제출은 영어로. 각주는 제거.>

 

 

요약

 

 

  아담 스미스의 도덕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공정한 관찰자이다. 우리가 어떤 도덕적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이 행위와 관련이 없는 독립적인 관찰자를 상상한다. 만약 그 관찰자가 우리의 행동이 적절하다고 시인할 경우, 그것은 도덕적인 가치가 있는 행동이 된다. 이 개념을 끌어들임으로써 우리는 주관적인 도덕적 판단에서 객관적인 판단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과 손해 또는 좋고 싫은 것만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내 행동에 관해 어떻게 생각할지를 도덕적 판단의 과정에서 중요하게 고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정한 관찰자는 행동을 하는 당사자의 상상으로부터 도출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가 상상하는 공정한 관찰자는 그가 자신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른 사람들 이외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공정한 관찰자의 도덕적 판단이 그 관찰자를 상상하는 사람의 문화적 맥락에 의존하는지, 혹은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을 획득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만약 상상된 공정한 관찰자가 행위자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 또는 그 사람들을 일반화한 어떤 존재의 시선이라면, 공정한 관찰자는 행위자가 살고 있는 사회의 규범과 관습과 일치하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는 그의 도덕철학 전체에 걸쳐서 공정한 관찰자의 도덕적 판단이 보편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암시하는 듯하다. 그가 공정한 관찰자를 상정함으로써 노리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어떤 행위가 단지 지금 이 곳에서 칭찬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칭찬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우리의 최초의 도덕적 판단은 다른 관찰자들이 칭찬하는 행동을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유행과 관습이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 일정정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하기도 있다.

 

  그러므로 공정한 관찰자가 내리는 도덕적 판단의 보편성에 관한 문제는 두 가지 해석을 낳았다. 하나는 아담 스미스가 기술하듯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는 행동과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일치시키지만, 이런 칭찬에 관해 비판적으로 반성할 능력이 생긴 뒤에는 칭찬받을만한 행동이 무엇인가에 관해 고민해보는 단계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은 관습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율성을 획득하고, 나아가서 도덕적 행동에 관한 보편적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다른 한 가지 해석은, 공정한 관찰자는 보편적인 도덕적 판단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핵심은 공정한 관찰자는 그 행동의 적절함을 통해서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어떤 행동 자체에 내재된 옳고 그름에 의해 판단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행동의 적절함은 공감을 통해서 설정된다. 하지만 그 공감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다. 그러므로 행동의 적절함에 대한 나와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은 내 주변에 있지 않은 사람들의 감정과는 공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행동의 옳고 그름은 여전히 내 주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칭찬하고 비난하는지에 대해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공정한 관찰자가 자율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과한 해석이다.

 

  도덕감정론의 5부와 6부에서는 이런 두 해석의 갈등이 드러난다. 그는 관습과 유행이 도덕판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이들이 취미 판단에 미치는 영향에 비해서는 그 정도가 미미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가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 제시하는 사례는 오히려 우리의 도덕적 판단이 거의 관습에 의존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반대로 6부에 등장하는 자만과 허영에 관한 분석에서, 우리는 관습에 따라 판단하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와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가 일치하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사례는 도덕적 판단에 관한 아담 스미스의 이론 안에 어떤 긴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이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게 되는 과정에 관해서 기술하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행동을 하는 것이 판단의 토대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그가 목표했던 바는 인간 본성의 구조를 통해서 특정한 행위에 관한 보편적인 도덕적 판단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구조 때문에, 우리의 도덕적 판단은 언제나 관습의 강한 영향 아래 놓여있게 된다. 그러므로 공정한 관찰자를 상정한 것은 도덕적 판단의 객관성을 확보하기에 효과적인 전략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회학적 속성 때문에 그 도덕적 판단이 인류 전체에 유효하지는 않다.

 

---------------------------------------------------------------------------------

 

1. 서론

 

 

  아담 스미스의 도덕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공정한 관찰자이다. 우리가 어떤 도덕적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이 행위와 관련이 없는 독립적인 관찰자를 상상한다. 만약 그 관찰자가 우리의 행동이 적절하다고 시인할 경우, 그것은 도덕적인 가치가 있는 행동이 된다. 이 개념을 끌어들임으로써 우리는 주관적인 도덕적 판단에서 객관적인 판단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과 손해 또는 좋고 싫은 것만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내 행동에 관해 어떻게 생각할지를 도덕적 판단의 과정에서 중요하게 고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정한 관찰자는 행동을 하는 당사자의 상상으로부터 도출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가 상상하는 공정한 관찰자는 그가 자신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른 사람들 이외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공정한 관찰자의 도덕적 판단이 그 관찰자를 상상하는 사람의 문화적 맥락에 의존하는지, 혹은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을 획득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만약 상상된 공정한 관찰자가 행위자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 또는 그 사람들을 일반화한 어떤 존재의 시선이라면, 공정한 관찰자는 행위자가 살고 있는 사회의 규범과 관습과 일치하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그는 『도덕감정론』의 5부에서 도덕적 판단의 기초인 도덕적 감정과 관습 사이의 관계에 관해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의 시작에서 아담 스미스가 강조하는 것은 관습이 도덕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그렇게 크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 사례는 네로와 클라우디우스의 폭정이다. 하지만 영아살해 등의 다른 사례는, 관습이 도덕적 판단에 충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보편적인 자비로움은 인간의 능력 밖에 있다는 언급을 미루어 보면, 한 행위자가 그를 둘러싼 문화적 맥락을 벗어난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담 스미스의 이론으로부터 도출되기 힘든 결론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만약 관습이 도덕적 감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면, 한 행위자가 상상할 공정한 관찰자 역시 관습에 의존적인 관찰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6부에서 드러나는 자만과 허영에 대한 분석은, 상상된 공정한 관찰자의 관점과 관습에 의존적인 관점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두 가지 현상은 자신에 대한 자신의 평가와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 그리고 관습에 의존적인 내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는 내 주변 사람들 그 누구의 시선, 또는 그 시선을 일반화한 어떤 관점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분석은 공정한 관찰자가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가?

 

  이 글은 공정한 관찰자와 관습 사이의 관계에 관해, 『도덕감정론』의 5,6부에 등장하는 논의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아담 스미스가 성취하고자 했던 목표와, 그가 전개하는 이론 사이에 해결되지 않은 긴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스미스는 자신의 이론을 통해 모든 도덕적인 판단의 기초가 행동의 적절함에 대한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이라고 주장하며 특정한 행동의 보편적인 도덕적 평가를 이끌어내려고 한다. 그러나 그 평가는 상상이라는 우연에 의존하며, 그러므로 문화적인 맥락을 벗어나기 힘들고 따라서 자신이 의도했던 결론을 도출하기 힘들다.
 

 

2. 공정한 관찰자

 

 

  아담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에게 본성으로 내재된 여러 능력 중에는 공감 능력이 있다. 공감은 상상을 통해서 내가 보고 있는 어떤 상황 속에 있는 대상이 느끼는 정념과 똑같은 정념을 가지는 능력을 뜻한다. 물론 같은 종류의 정념이긴 하지만 그 정도는 훨씬 덜하다. 당사자가 느끼는 정념과 관찰자가 느끼는 정념 사이의 이 차이가 행위의 적절함을 결정하는 요소다. 어떤 정념을 표현하는 행동의 당사자는 관찰자가 상상을 통해 얻은 정념의 정도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어떤 행동이 적절한 행동인지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는 무관하면서 우리의 행동을 관찰하는 어떤 사람을 상상한다. 만약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시인한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이다. 이 사람이 바로 공정한 관찰자다.

 

  그렇다면 공정한 관찰자는 누구인가? 아담 스미스는 이 공정한 관찰자가 지켜보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식으로 그에 대해 가정적으로 서술하기도 하지만, ‘내 가슴 속에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가 실제로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것처럼 서술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어떤 행위가 적절한지에 관해 판단하는 과정에서 우선 고려되는 대상은, 자신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 즉 가족이나 친지, 친구들이다. 한 사람은 이들의 시인과 부인을 통해서 어떤 행동이 적절한지, 또는 적절하지 않은지에 관해 알아나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행동의 적절함을 판단할 때, 이렇게 배운 것에 의존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의존하는 내 주변 사람들의 판단은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과 일치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공정한 관찰자는 내 주변 사람들의 판단 가운데 하나 또는 그것을 일반화한 것일 뿐인가?

 

  하지만 반대로 질문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만약 공감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우리는 이 본성에 반하는 행동 또한 적절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각 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그러므로 자신을 돌보는 데 가장 알맞게 만들어져 있으며, 자연에 의해서 자신을 가장 먼저 돌보는 것이 권장된다. 하지만 공감 또한 우리의 자연적인 능력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장 자주 그리고 잘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돌보는 것은 자기를 돌보는 행동의 목록에 포함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관습이 부과하는 행동 가운데 인간의 이런 자연적 측면에 반하는 행동이 있다는 것을 반성을 통해 알게 된다면, 우리는 이것을 거부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과연 그런 능력은 어떻게 생겨나며, 그 보편성은 보장되는가?
 

 

 (1) 공정한 관찰자와 자율적인 도덕적 판단

 

 

  그러므로 공정한 관찰자가 내리는 도덕적 판단의 보편성에 관한 문제는 두 가지 해석을 낳았다. 하나는 아담 스미스가 기술하듯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는 행동과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일치시키지만, 이런 칭찬에 관해 비판적으로 반성할 능력이 생긴 뒤에는 칭찬받을만한 행동이 무엇인가에 관해 고민해보는 단계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Evensky는 “A significant part of Smith’s career was devoted to teaching about ethics and his views how education shapes individual ethics are well developed” 라고 말한다. 즉 스미스의 설명은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은 이유에 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사람이 어떻게 어떤 행동을 도덕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게 되는 과정에 관한 기술에 가깝다. 같은 맥락에서 스미스는 가정교육, 가정도덕이 공립학교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훨씬 더 좋은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한 사회가 칭찬하는 여러 행동의 유형들을 부모를 비롯한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교육으로부터 배우고, 그것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한 사람이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는가에 관한 중요한 정보들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관찰자들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된다. 그들의 인식적 능력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어떤 도덕적 판단 즉 적절함을 계산하는 데 고려해야 할 모든 상황에서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 한계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지만, 또 어떤 상황에서는 그렇지 못한다. 그러므로 “We appeal to the sympathies of the impartial spectator, who is freed from the limitations of their knowledge and personal situation” 만약 이렇게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편파적이지 않은 관찰자로부터 시인될 수 있는 행동이라면, 스미스가 보기에 그것은 단순히 칭찬받는 행동이 아니라 칭찬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행동이다. “We can escape from the dictates of the general clamor because, according to Smith, although we seek praise, we also value the thought of being praiseworthy.” 공정한 관찰자가 모든 상황에 관해 가장 잘 알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행위자의 상상의 산물이고, 그러므로 행위자와 모든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반면 행위자나 다른 관찰자가 가지는 인식적 능력은 뛰어넘기 때문에, 공정한 관찰자의 도덕적 판단은 객관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따라서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은 관습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율성을 획득하고, 나아가서 도덕적 행동에 관한 보편적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Griswold는 “This is just what Smith says in referring to these standards as “the slow, gradual, and progressive work of the great demigod within the breast”” 라고 말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이런 능력을 획득한 사람들을 스미스가 demigod으로 은유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Evensky는, 미묘한 표현이긴 하지만, “We can move beyond the current norms of society. But we can never reach the limit.” 라고 스미스의 도덕심리학적 기술을 요약하고 있다.

 

 

 (2) 사회적 존재로서의 공정한 관찰자

 

 

  그러나 Evensky가 아담 스미스가 묘사한 도덕발달의 심리학을 요약하면서 마무리한 앞의 문장은 매우 다르게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사회를 넘어설 수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덕에 다다를 수는 없다. Evensky 스스로도, “There is no culmination, there is no final determination in Smith.” 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서문에서도 언급했듯 아담 스미스 역시 인간의 능력이 허용하는 일과 신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을 구분하고 있다. 만약 완전한 덕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도덕적 행위의 형태나 속성을 가리킨다면, 여기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성취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이로부터 공정한 관찰자에 관한 또 다른 해석이 도출된다. 이런 주장의 핵심은 공정한 관찰자는 그 행동의 적절함을 통해서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뿐이라는 것이다. 행동의 적절함은 공감을 통해서 설정된다. 하지만 그 공감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다. 그러므로 행동의 적절함에 대한 나와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은 내 주변에 있지 않은 사람들의 감정과는 공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행동의 옳고 그름은 여전히 내 주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칭찬하고 비난하는지에 대해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공정한 관찰자가 자율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과한 해석이다.

 

  Forman-Barzilai는 세 가지 이유를 근거로 스미스가 보편주의자(세계시민주의자)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가운데 도덕적 판단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은 두 가지 점인 것 같다. 첫째는 국제관계에 관해 현실주의적인 스미스의 관점이다. 그는 모든 인간은 자연에 의해 자기가 태어나면서 소속되는 단체들 – 가족, 고향, 지역, 국가 등을 사랑하게 된다고 보았으며, 그러므로 애국주의자들의 희생은 아주 적절한 행위이며 따라서 공정한 관찰자의 완전한 시인을 받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도덕적 판단에도 적용되어서, 이른바 자연스럽게 발생한 (도덕적) 편견이나 편파성은 국가에 대한 고귀한 사랑으로 규정된다.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단체들의 번영을 방해하는 다른 집단의 번영과 세력확장은 자연스럽게 혐오와 질투의 대상이 된다. 또한 국가들 사이를 조정할만한 상위의 단체가 없는 것이 분명한데, 이는 공동체 단위 이상의 영역에서 적용되는 도덕적 규범이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스미스에게서 어떤 행동의 적절함을 판단할 수 있는 최초의 증거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도덕 발달의 순서에 따라, 특정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시인과 부인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A key implication of my interpretation here is that the Impartial Spectator is very much a cultural artefact, and not an independent, transcendent faculty likely to generate unbiased cosmopolitan judgments.”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도덕감정론』은 어떤 행동에 관한 판단 못지 않게 그 판단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발달하는지에 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Forman-Barzilai는 이것을 도덕적 삶의 인류학이라고 평가하는데, “Smith’s moral psychology is not merely an account of how selves are socialized. It is also a highly original anthropological description of moral culture.” 때문이다. 만약 스미스의 연구를 이렇게 받아들인다면, 공정한 관찰자는 한 도덕적 문화의 오래된 특징을 일반화한 산물이며,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는 스미스가 사회를 넘어선 도덕적 판단이 가능하리란 전망에 비해서, 그 문화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문화 속의 관점을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에 관해서 더욱 명백하게 서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우리와 다른 도덕적 삶의 방식을 맞딱드린다면, 우리는 공감의 본성에 의해서 그것을 수용하기 보단 주로 거부하게 될 것이다.


 

 

3. 사례? - 관습, 유행, 도덕적 감정

 

 

  『도덕감정론』의 5부와 6부에서는 이런 두 해석의 갈등이 드러난다. 5부는 관습과 유행이 도덕판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언급하고, 6부는 자연에 의해 우리가 돌봐야 하는 것으로 권장되는 것의 순서에 관한 설명이다. 그러나 갈등이 드러나는 양상은 각 부분마다 다르다. 5부의 경우 그가 주장하고 싶어하는 바는 우리의 도덕적 판단이 관습에 크게 좌우되지는 않는다는 주장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것이 자신의 관찰의 결과라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외의 나머지 문단에서는 거의 관습과 유행이 행위의 적절함에 관한 우리의 판단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사례가 제시된다. 즉 공정한 관찰자는 내가 어떤 문화에서 어떤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상황에서도 판단을 달리 한다.

 

  우선 어떤 동료들과 함께 지내느냐에 따라 행위의 적절함에 대한 판단이 달라진다. 좋은 동료들과 지내면 적절함에 관한 감각에 예민해지고, 적절한 행동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어떤 시대의 유행에 따라서도 어떤 행위가 적절한가에 관해 다르게 생각한다. 연령이나 직업에 따라서도 다르고, 국가에 따라서도 다르며, 문명이 발달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도 다르다. 야만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더 강한 절제를 적절하다고 하는 반면, 문명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않아도 사람들로부터 쉽게 적절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우리의 본성에 완전히 어긋나보이는 영아살해의 경우에도, 그 조건에 따라서는 관습으로서 인정된 경우도 있다는 것 또한 역사적 탐구의 결과로서 드러난다.

 

  물론 스미스 자신은 이렇게 관습의 영향을 받는 것들이 일반적인 양식이 아닌 특정한 행위 각각의 적절함에 대한 감각을 잃게 만드는 것일 뿐이며, 따라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또한 영아살해를 경우에 따라 권장해야 할 만한 것으로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관습이 서로 다른 전통 아래서 때로는 정당화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스미스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스미스가 이 장을 비롯한 다른 부분에서 완전한 적절함에 들어맞는 행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할지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그런 행동을 관습에 의해서 금지하는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다면 그 사람은 그 행동에 대해서는 언제나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모든 점들을 고려하는 동시에 스미스가 암시하는 것처럼 관습과 무관하게 완전한 적절함을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모든 관습에서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추상적인 언명이거나 또는 그 관습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합의해 만드는 규약, 즉 또 다른 관습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4. 반대사례? - 자만과 허영에 관한 분석

 

 

  하지만 반대로 6부에서는 우리 인간에게 주어지는 돌봄의 순서가 자연에 의해서 정해져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에 접하게 되는 단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해, 가장 마지막에는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 마무리된다. 또한 자만과 허영에 관한 분석에서, 우리는 관습에 따라 판단하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와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가 일치하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내용이 시사하는 바는, 5장의 분석에서 제시된 바와는 정반대다. 우리의 도덕적 판단이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는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신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가 관찰했을 때 옳은 것 즉 객관적인 것이 실제로 존재하며, 공정한 관찰자는 그것을 통찰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먼저, 스미스에 따르면 보편적인 자비로움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신의 영역이다. 그러나 그 실천이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것은 아니며, 인간이 추구하는 것 가운데 가장 숭고한 대상이라는 것도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런 보편적인 자비로움을 실천한다면, 공정한 관찰자는 그 행동을 완전히 시인해야 할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이것을 아주 쉽게 생각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리를 분별할 줄 알지만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resentment의 대상이 될 것이다. 또 사리를 분별할 줄 알고 죄가 없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상상하기도 힘들다. 이것은 실제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공감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지만, 공정한 관찰자 또한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면 그에게 완전하게 공감하여 보통 사람들과 같은 유형의 생각에 도달할 것이다.

 

  다음은 자만과 허영에 관한 분석을 살펴보도록 하자. 자만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The proud man is sincere, and in the bottom of his heart, is convinced of his own superiority; though it may sometimes be difficult to guess upon what the conviction is founded.” 또한 허영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The vain man is not sincere, and, in the bottom of his heart, is very seldom convinced of that superiority which he wishes you to ascribe to him.” 여기에는 세 가지 평가가 존재한다. 실제 능력의 크기, 자기평가, 그리고 다른 평범한 사람들의 평가. 실제 능력의 크기는 현명한 사람이 그에 관해 내리는 평가로 간주되는데, 이것은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로 대체해도 무방할 것이다.

 

  문제는 세 평가의 정도가 불일치할 때 자만과 허영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는 어떤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우리는 어떤 행동에 대해 평가하는 기준을 이런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제공받는다. 또한 그것이 어떤 추상적인 형태로 일반화된다고 하더라도, 그 시선으로부터 크게 벗어나는 것은 힘들다. 따라서 공정한 관찰자를 문화적 산물로 이해할 경우,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과 공정한 관찰자의 평가의 정도는 거의 동일할 것이고, 자만과 허영같은 현상은 일어나기 힘들다.

 

 

 

5. 결론 - 이론적 긴장

 

 

  이런 사례는 도덕적 판단에 관한 아담 스미스의 이론 안에 어떤 긴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긴장은 보편성을 비편파성으로 해석하려 한 스미스의 시도로부터 파생되었다. 그는 인간이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게 되는 과정에 관해서 기술하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행동을 하는 것이 판단의 토대라고 주장했다. 공정한 관찰자라는 상상은 분명히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내 행동을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려하면서 생겨나는 인간의 능력이다.

 

  반면에 그가 목표했던 바는 인간 본성의 구조를 통해서 특정한 행위에 관한 보편적인 도덕적 판단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구조 때문에, 우리의 도덕적 판단은 언제나 관습의 강한 영향 아래 놓여있게 된다. 상상과 공정한 관찰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도약이 존재한다. 이것은 비편파성에서 보편성을 향한 도약이다. 그러므로 공정한 관찰자를 상정한 것은 도덕적 판단의 객관성을 확보하기에 효과적인 전략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회학적 속성 때문에 그 도덕적 판단이 인류 전체에 유효하지는 않다는 점에서 스미스의 의도는 아직 달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Smith, Adam. (1982)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D.D.Raphael and A.L.Macfie, eds. Indianapolis: Liberty Fund
Evensky, Jerry (2007) Adam Smith’s Moral Philosoph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Brown, V. and Fleischacker, S. (eds.) (2010) The Philosophy of Adam Smith. New York: Routledg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