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현대철학연습 발제. 『20세기 매체철학』 3장 요약.>
이른바 '대중문화'라는 현상은 자유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산업사회 이후에야 나타난 완전히 새로운 문화적 현상이다. 그 이전에는 수요의 측면에서 문화 또는 예술작품을 향유할만한 계층이 매우 한정되어 있었으며, 또 생산의 측면에서 특정한 작품 또는 문화적 생산물을 많은 사람에게 제공할만한 체제가 갖춰져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한정된 계층의 소수가 몇몇 작품을 감상하면서 생성됐다. 그러나 부르주아적 혁명은 예술을 향유하는 계층을 한층 더 넓히는 데 기여했고, 결정적으로 공장제 공업은 높은 밀도로 모여있는 노동자 집단을 형성시켰다. 이들은 후에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대중문화는 이들 속에서 형성된 문화, 더 구체적으로는 이들이 즐기는 문화적 대상물을 가리키며, 대량으로 생산되고 대량으로 소비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이전과는 다른 문화적 현상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회학자와 철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아도르노는 대중문화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매우 부정적이다. 대중문화 현상에서 중심을 이루는 문화적 대상물들은 생산의 단계에서 이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포섭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이들은 문화적 대상물이 아니라 상품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떤 기만이 있다. 이런 상품들은 상품이 아닌 문화적 대상물로서 소비되기 때문이다. 상품과 문화적 대상을 소비하는 방식은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기만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문화적 태도'를 잃어버리고 자본주의적 사회에 매몰된다. 이것이 그의 문화산업론의 핵심이다. 그의 고찰은 이후 대중문화에 관해 비판적인 많은 사람들에게 그 원형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의 문화산업론은 대중매체가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한 고찰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매체이론의 관점에서 그를 살펴보려면 문화산업론을 반드시 다뤄야만 한다. 이 글에서는 아도르노의 예술사회학과 예술 개념에 관해 살펴보고, 그에 따른 문화산업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회비판으로서의 매체이론 - 아도르노의 예술사회학(문화사회학)
대중문화의 등장은 많은 학자들의 이목을 끌었지만, 이는 주로 부정적인 측면에서 평가되었다. 대중문화 속 문화적 생산물들은 이전의 문화적 생산물들 즉 예술작품에 비해서 저열하고 통속적이기 때문에 그 내용의 측면에서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학파, 특히 아도르노의 대중문화 비판은 이런 일차원적인 가치평가에서 벗어나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는 문화적 생산물들의 내용이 아니라 이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고찰하였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대중문화의 수준이 아니라 대중문화의 사회적 역할, 효과, 영향이었다. 이런 면에서 그의 대중문화 비판은 단순한 비난들과 구별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중문화, 그리고 대중매체가 파시즘과 연결되어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대중은 자신들에게 잠재된 혁명의 동력을 파시즘이라는 형태로 잘못 표현하고 있으며, 이런 정치적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던 계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중문화와 대중매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문화와 대중매체에 대한 비판은 곧 파시즘에 대한 비판,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된다. 또한 이런 발상은 문화와 사회를 구별하고 예술이 고유한 영역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에 반대하고, 나아가 새로운 미학적 입장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즉, 그들은 미학이 아닌 예술사회학을 통해 문화에 접근하려고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벤야민은 이런 대중문화 현상을 정치의 예술화(미학화, 심미화)라고 주장했다. 대중매체는 대중에게 표현수단을 부여했는데, 정치의 문제를 권리의 체계의 변화가 아닌 표현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난 것이다. 반면 아도르노는 문화산업론을 통해 문화의 생산 과정에 자신의 탐구를 집중함으로써 독특한 예술사회학을 전개했다. 그에게는 대중매체를 통해 전파되는 문화적 생산물을 누가 만들었는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그의 문제의식을 짧게 표현하자면 예술의 상품화 또는 상품의 예술화(미학화, 심미화)다.
'관리되는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예술 - 아도르노의 예술개념
그렇다면 예술의 상품화 또는 상품의 예술화가 왜 문제가 되는가? 아도르노가 왜 이것을 문제삼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의 예술 개념과 예술작품에 관한 관점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결론을 먼저 간략히 이야기하면, 그가 보기에 예술 또는 예술작품과 상품은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생산양식은 대중문화의 문화적 생산물들을 상품과 동일한 방식으로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예술의 성격과 상품의 성격이 충돌하고, 문화적 생산물은 예술로서의 성격을 상실한다.
그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의 생산양식에 따라서 그 시대에 사용할 수 있었던 재료들을 조합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어떤 생산물이 예술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기준, 즉 예술의 개념 또한 역사성을 가진다고 설명한다("예술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여러 계기들의 짜임 관계(성좌)에 의해 이뤄진다" "현재의 예술에 대한 규정은 언제나 과거 한 시대의 예술에 의해 제시된다."). 그러므로 예술 개념과 예술작품은 사회와 반드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만약 예술작품이 이런 특징만 가지고 있다면 다른 생산물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그가 제시하는 예술의 특징은 부정성 내지는 창조다. 즉 예술작품은 역사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새로운 것, 이제까지 감성적으로 파악되지 않았던 것을 감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을 조합해 보여주는 변증법적 생산물이다("예술은 경험적 현실과 분리됨으로써 자체의 필요에 따라 전체와 부분들의 관계를 형상화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분리를 통해서만 예술작품은 이차적인 존재로 된다. 예술작품은 작품의 외부에서 거부되어 있는 것을 경험적인 생명체에 부여하며, 이로써 또한 물적이고 피상적인 작품 체험을 통하여 만들어진 작품 형태를 탈피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위대한 예술작품은 예술의 개념을 바꾼다("위대한 예술가들이란 결코 매끈하고 완전한 양식을 구현한 사람들이 아니라 카오스적인 고통의 표현에 대항하기 위한 강인함으로서, 즉 양식을 '부정적 진리'로서 작품 속에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이에 따라, 예술 개념의 역사성과 예술 작품의 부정성이라는 긴장은 예술작품에게 사회비판적 성격을 부여한다. 예술은 경험적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무엇, 반대되는 무엇을 자신의 내적 형식을 통해 표현한다. 만약 자유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산업사회에서 어떤 문화적 생산물이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사회가 보여주지 않는 무엇인가를 표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사회에서 예술작품이 지녀야할 덕목은 '쓸모없음'이 된다("예술은 기존 사회의 규범에 따르거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으로서의 자격을 갖추는 대신에, 독자적인 것으로서 자체 내에서 결정체를 이룸으로써, 마치 청교도들이 모든 종파를 부인하듯이 그 단순한 존재를 통해서 사회를 비판한다. 순수한 것, 그 내재적 법칙에 의해 철저히 형상화된 것 가운데 무언의 비판을 가하지 않는 것, 혹은 총체적인 교환 사회를 지향하는 상태로 인한 굴욕을 탄핵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예술의 비사회적 요인은 특정한 사회에 대한 확정적 부정이다.")
'관리되는 사회'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는 문화산업 -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
하지만 문화산업은 이러한 예술과 예술작품을 상품화한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주장이다. 오히려 문화산업을 통해 만들어진 문화적 생산물들은 혁명의 동력이어야 할 대중의 잠재력을 무마하고, 도피처를 제공하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된다. 현대의 문화산업이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이유는 문화적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생산수단이 독점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이고, 이런 식으로 문화적 생산물을 이용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대중문화의 관계자들은 문화 산업을 기술적 용어로 설명한다. 그들은 문화 산업에 수백만이 참여하기 때문에 수많은 장소에서 동일한 상품에 대한 동일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든 재생산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생산의 중심지는 몇 안되지만 수요는 여기저기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는 기술적 문제가 경영에 의한 조직과 계획을 필요하게 만든다고 얘기한다. (...) 이러한 주장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은 문화 산업의 조종과 이러한 조종의 부메랑 효과인 수요가 만드는 순환 고리로서 (...) 기술이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할 수 있는 기반은 사회에 대한 경제적 강자의 지배력이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기술적 합리성이란 지배의 합리성 자체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들은 이윤 동기에 따라서 상품을 생산해내지만, 이것을 대중문화와 대중매체라는 환경 속에서 예술 또는 문화로 포장한다. 그러나 이 문화상품에는 작품 내적인 예술적 성격 즉 부정성과 창조가 거세되어있고, 감각적 부분만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다르다는 것, 개성이라고 강조되는 것들은 아주 부차적이고 감각적인 문제일 뿐이며, 내적인 측면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다.
"영화 제작자는 베스트셀러에 의해 보증된 안심할 수 있는 원고가 아닌 경우 모든 원고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 스케치나 단편, 문제작, 히트송과 같은 형식들은 후기자유주의적인 취향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대중 문화의 단계에서는 화석화되어 문화 산업에 의해 강요된 평균적 규범이 되었다." "문화 산업의 특징인 '새롭게 하기'는 대량 복제의 개선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체계'의 핵심적 요소다." "자아의 특수성이란 언뜻 보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에 의해 결정된 개인들의 독점 상품이다. (...) 지문을 제외한다면 신분 증명서는 모두 정확히 똑같은 것으로서 영화 배우로부터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인의 삶과 얼굴은 보편성의 힘에 의해 똑같은 신분 증명서 중의 하나로 변질된다."
내용의 부정성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문화적 생산물은 소비를 통해서 동일한 소비자들을 만들어낸다. 또한 이런 이윤 동기에 부응하지 못하는 '부정성'의 예술들은 문화의 영역에 등장조차 하지 못한다.("세상에 나타나고 있는 모든 것에는 예외 없이 문화 산업의 인장이 찍혀지기 때문에 문화 산업의 흔적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나 확인 도장이 찍히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세상에 등장할 수 없다.")
여기에서 향유와 유흥의 차이가 드러난다. 향유는 예술작품과 감상자 사이에 생겨나는 소통의 형식이다. 아도르노는 이것을 미메시스적 수용방식이라고 표현한다. 반면 유흥은 문화상품과 소비자 사이의 관계다. 예술작품을 향유하는 감상자는 객체의 형식과 내용 속에 자신을 침잠시키고 관조함으로써 작품과 변증법적 관계를 맺는다. 역설적이게도 이 변증법적 관계는 주체의 사유 속에서 이뤄지고, 결과는 부정성의 경험이 될 것이다. 반면 문화상품을 유흥하는 소비자는 감성적(감각적) 형식에만 만족하거나 온전히 자신을 투영하기만 함으로써 변증법적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
이런 경험이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통해 일어난다. 대중문화는 생산양식을 포위한다("사적인 문화 독점 하에서 "폭군은 육체를 자유롭게 놓아두는 대신 곧바로 영혼을 공략한다. 지배자는 (...) 이렇게 말한다.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자유다. 너의 생명이건 재산이건 계속 네 것을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 이후 너는 우리들 사이에서 이방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독점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대중은 예술작품와 감상자 사이에서 생겨나는 진정한 개성 즉 부정성으로부터 배제당하고, 감성적 형식의 차이를 물신화하는 소비자들만이 넘쳐나는 사회로 점차 나아간다.
이 과정이 더 진행되면, 문화산업의 독점자본은 단순히 수요에 맞춘 대량생산 뿐만 아니라 수요를 핑계로 자신들이 원하는 상품을 생산하며 수요를 조작하는 단계에 이른다. 수요를 조작한다는 것은 대중이 거짓된 욕망을 품게끔 한다는 의미이다("즐김은 사실 도피다. 그러나 그 도피는 일반적으로 얘기되듯 잘못된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마지막 남아 있는 저항 의식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오락이 약속해주고 있는 해방이란 '부정성'을 의미하는 사유로부터의 해방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수사학적 질문의 뻔뻔스러움은 이러한 질문이 사유하는 주체에게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주체적 사유로부터 빠져 달아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향하고 있다는 데 있다."). 대중은 감상자에서 소비자로 퇴행하고, 독점자본의 문화산업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한다.
아도르노에게 대중이 소비자로 퇴행한다는 것은 대중이 비판적 시선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산업은 자신의 논리에 의해 욕망을 창출한다. 그리고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여러 장치에 대중을 종속시키는데, 이 장치는 독점자본주의에 알맞는 행동양식을 강요한다. 그런데 욕망은 지속적으로 창출되고, 그래서 욕망의 완전한 충족은 끊임없이 유예된다. 그러므로 대중은 문화산업의 논리에 종속된 상태에서 거의 벗어날 수 없으며, 나아가서 주체의 상태 자체가 수동적으로 변화하고 혁명 또한 영원히 유예된다. 이 과정에서 남는 것은 이와 같이 '관리되는 사회'에서 생산되는 자극적 문화상품들 뿐이다.
문화산업론의 의의와 한계
대중문화를 통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는 사람들에 맞서서, 아도르노는 미학적 경험이 빠져있는 대중문화의 확산은 단지 야만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듯 하다. 즉 독점자본주의적 사회에서 대중문화의 등장은 예술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배제한 채 확산되기 때문에, 긍정적인 현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종속된 대중이라는 주체를 낳는다는 것이다.("개인이라는 관념은 개인과 보편성과의 완전한 동일성이 문제되지 않을 경우에만 용납될 수 있다."). 대중매체란 결국 확립된 소유관계과 그에 관한 의식을 정당화하고 확산시키는, 일종의 조작의 수단이다.
그는 이렇듯 문화산업이 판치는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우리가 가장 처음에 다뤘던 예술 개념과 예술작품을 제시한다. 순수한 부정성으로서, 언제나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서의 예술은 사회와 맺는 변증법적 관계에 의해서 해방의 공간을 자신의 내부에서 전개한다. 그리고 이것을 향유하는 감상자는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과 문화산업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주체성을 획득한다. 이런 새로운 주체들이 해방의 토대가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그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살펴보자면, 크게 두 가지가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하나는 그가 고찰한 것이 미디어의 소유자나 그 내용에 관한 것이지, 미디어 자체에 관한 비판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미디어 형식 자체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그러므로 어떤 내용을 전달해주는가에 따라 해방의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반론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온당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문화산업의 관점에서 분석한 것은 이미 문화산업의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결정된 상태에서 진행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올바로 쓰인다면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에 관한 긍정적 가정이 이미 전제된 상태에서 가해지는 비판은 아도르노의 문제의식과 분석 대상을 염두에 두지 않은 상투적인 어구이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의 문제점
, 즉 문화상품의 소비자들을 수동적인 존재로만 설정했다는 것은 진지한 비판이 될 수 있다. 소비자들은 대중매체를 단순히 전해주는 그대로 소비하지만은 않는다. 분명히 소비자들은 미디어의 형식과 내용에 영향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의 역사성'이라고 부를만한 독립적 영역이 있다는 것 또한 명확하다. 어느 때에는 온전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또 다른 때에는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은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과 1인 미디어 시대 이후에 더욱 부각된다.
덧댐. 중간에 겹따옴표 안에 들어간 말들은 아도르노의 『미학이론』, 그리고 『계몽의 변증법』의 문화산업 장에서 인용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