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원문: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9/sep/21/best-books-of-the-21st-century


9월 21에 <가디언> 지에 발표된 21세기 최고의 책 100권 리스트입니다. 영국이라는 문화적 배경 아래에서 선정된 리스트겠지만, 이 땅의 독서인들에게도 참고가 될만한 목록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찾지 못한 번역은 댓글로 보충해주시면 수정/업데이트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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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노라 에프론,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브리즈(토네이도), 2007














99. 알랭 마방쿠,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98. 스티그 라르손,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문학동네, 2017
















97. J.K.롤링, <해리포터와 불의 잔>(1,2,3,4), 문학수첩, 2014














96. 한야 야나기하라, <리틀 라이프>(1,2), 시공사, 2016














95. 밥 딜런, <밥 딜런 자서전>, 문학세계사, 2010















94. 말콤 글래드웰, <티핑 포인트>, 21세기북스, 2016














93. 니콜라 바커, <다크맨스(Darkmans)>, 2007 (번역 안됨)


92. 헬렌 던모어, <공성전(The Siege)>, 2001 (번역 안됨)


91. M. 존 해리슨, <빛(Light)>, 2002 (번역 안됨)



90. 예니 에르펜베크,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 을유문화사, 2010















89. 로나 세이지, <나쁜 피(Bad Blood)>, 2000 (번역 안됨)


88. 맬러리 블랙맨, <영과 십자가(Noughts & Crosses)>, 2001 (번역 안됨)


87. 패트리샤 락우드, <프리스트대디(Priestdaddy)>, 2017 (번역 안됨)


86. 야니스 바루파키스, <방 안의 어른들(Adults in the Room)>, 2017 (번역 안됨)



85.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김영사, 2007















84. 데버라 리비, <삶의 비용(The Cost of Living)>, 2018 (번역 안됨)


83. 발레리아 루이셀리, <어떻게 끝날지 말해줘(Tell Me How It Ends)>, 2016 (번역 안됨)



82. 닐 게이먼, <코랄린>, 주니어김영사, 2005














81. 짐 크레이스, <거둠(Harvest)>, 2013 (번역 안됨)



80.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엘리, 2016















79. 리처드 윌킨슨, 케이트 피킷, <평등이 답이다>, 이후, 2012














78. N.K. 제미신, <다섯 번째 계절>, 황금가지, 2019














77. 유리 헤레라, <세계의 끝을 알리는 신호들(Signs Preceding the End of the World)>, 2009 (번역 안됨)



76. 대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 김영사, 2018














75. 올가 토카르축, <뼈 위에서 밭을 갈다(Drive Your Plow Over the Bones of the Dead)>, 2009 (번역 안됨)


74. 서배스천 배리, <끝없는 나날들(Days Without End)>, 2016 (번역 안됨)


73. 바버라 데믹, <부러울 게 없다(Nothing to Envy)>, 2009 (번역 안됨)


72. 쇼샤나 주보프, <감시자본주의의 시대(The Age of Surveillance Capitalism)>, 2019 (번역 안됨)



71. 크리스 웨어, <지미 코리건>, 세미콜론, 2009








70. 조에 헬러, <스캔들에 관한 기록(Notes on a Scandal)>, 2003 (번역 안됨)


69. 하비에르 마리아스, <반감(The Infatuations)>, 2011 (번역 안됨)


68. 존 르 카레, <콘스탄트 가드너(Constant Gardener)>, 2001 (번역 안됨)


67. 팻 바커, <소녀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Girls)>, 2018 (번역 안됨)



66. 카를로 로벨리, <모든 순간의 물리학>, 쌤앤파커스, 2016
















65. 길리언 플린, <나를 찾아줘>, 푸른숲, 2013















64.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김영사, 2017















63. 레베카 스클루트,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 문학동네, 2010















62.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모유>, 현대문학, 2018















61. 헬렌 가너, <이 우울한 집(This House of Grief)>, 2014 (번역 안됨)


60. 앨리스 오스왈드, <다트>, 2002 (번역 안됨)



59. 앤 카슨, <남편의 아름다움>, 한겨레출판, 2016
















58. 토니 주트, <전후 유럽 1945~2005>(1,2), 열린책들, 2019














57. 마이클 셰이본, <캐벌리어와 클레이의 놀라운 모험>(1,2), 루비박스, 2009













56. 로버트 맥팔레인, <언더랜드>, 2019 (번역 안됨)



55. 마이클 폴란, <잡식동물의 딜레마>, 다른세상, 2008















54. 메리 비어드, <여성, 전적으로 권력에 관한>, 글항아리, 2018















53. 피터 캐리, <켈리 파의 진짜 역사(True History of the Kelly Gang)>, 2000 (번역 안됨)


52. 안드레아 레비, <작은 섬(Small Island)>, 2004 (번역 안됨)



51. 콜럼 토빈, <브루클린>, 열린책들, 2016















50. 마거릿 애트우드, <인간 종말 리포트>(1,2), 민음사, 2008













49. 재닛 윈터슨, <왜 평범할 수 있을 때 행복한가(Why Be Happy When You Could Be Normal?)>, 2011 (번역 안됨)


48. 테리 프래챗, <나이트워치(Night Watch)>, 2002 (번역 안됨)



47. 마르얀 사트라피, <페르세폴리스>, 휴머니스트, 2019














46. 셰이머스 히니, <휴먼 체인(Human Chain)>, 2010 (번역 안됨)



45. 줄리언 반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다산책방, 2014
















44. 리베카 솔닛, <어둠 속의 희망>, 창비, 2017














43. 클라우디아 랭킨, <시민: 한 미국인의 노래(Citizen: An American Lyric)>, 2014 (번역 안됨)



42. 마이클 루이스, <머니볼>, 비즈니스맵, 2019















41. 이언 매큐언, <속죄>, 문학동네, 2003















40. 조안 디디온, <상실>, 시공사, 2006















39. 제이디 스미스, <하얀 이빨>(1,2), 민음사, 2010














38. 앨런 홀링허스트, <아름다움의 선>, 창비, 2018














37. 앤 엔라이트, <그린 로드(The Green Road)>, 2015 (번역 안됨)


36. 마틴 에이미스, <경험(Experience)>, 2000 (번역 안됨)


35. 에드먼드 드 발, <호박색 눈 토끼(The Hare with Amber Eyes)>, 2010 (번역 안됨)


34. 레이철 커스크, <윤곽(Outline)>, 2014 (번역 안됨)



33. 앨리슨 벡델, <펀 홈: 가족 희비극>, 움직씨, 2018















32. 싯다르타 무케르지,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 까치, 2011













31. 매기 넬슨, <항해사들(Argonauts)>, 2015 (번역 안됨)



30. 콜슨 화이트헤드,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은행나무, 2017














29.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나의 투쟁 1>, 한길사, 2016














28. 캐롤 앤 더피, <황홀(Rapture)>, 2005 (번역 안됨)



27. 앨리스 먼로,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뿔(웅진), 2007















26.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글항아리, 2014














25. 샐리 루니, <평범한 사람들(Normal People)>, 2018 (번역 안됨)



24. 제니퍼 이건, <깡패단의 방문>, 문학동네, 2012















23. 앤드류 솔로몬, <한낮의 우울>, 민음사, 2004















22. 조지 손더스, <12월 10일>, 알에이치코리아, 2015















21.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김영사, 2015















20. 케이트 앳킨슨,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 문학사상사, 2014
















19. 마크 해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문학수첩리틀북, 2018














18. 나오미 클라인, <쇼크 독트린>, 살림Biz, 2008















17. 코맥 매카시, <로드>, 문학동네, 2008















16. 조너선 프랜즌, <인생 수정>, 은행나무, 2012














15. 앨리자베스 콜버트, <여섯 번째 대멸종>, 처음북스, 2014















14. 새라 워터스, <핑거스미스>, 열린책들, 2016















13. 바버라 에런라이크, <노동의 배신>, 부키, 2012














12. 필립 로스, <미국에 맞서는 음모(The Plot Against America)>, 2004 (번역 안됨)



11. 엘레나 페란테, <나의 눈부신 친구>, 한길사, 2016















10.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1,2), 민음사, 2010














9. 데이비드 미첼, <클라우드 아틀라스>(1,2), 문학동네, 2010














8. 앨리 스미스, <가을>, 민음사, 2019















7. 타네하시 코츠, <세상과 나 사이>, 열린책들, 2016
















6. 필립 풀먼, <황금나침반 3부 - 호박색 망원경>, 김영사, 2007















5. W.G. 제발트, <아우스터리츠>, 을유문화사, 2009















4.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2009















3.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세컨드핸드 타임>, 이야기가있는집, 2016














2. 메릴린 로빈슨, <길리아드>, 마로니에북스, 2013















1. 힐러리 맨틀, <울프 홀>(1,2), 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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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화주의에 대한 전형적인 두 가지 비판이 있다. 하나는 공화주의가 과거회귀적이며, 전지구적으로 연결된 현대사회에서는 실현불가능한 이념이라는 입장이다. 이것은 공화주의 공공철학의 이념의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일리가 있다. 다른 하나는 공화주의가 바람직하지 않으며, 배제와 억압의 정치학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특정한 정체성을 중심으로 구성된다고 해서 배제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나, 현대사회의 특징 덕분에 공화주의적 이념이 억압으로 작동할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형적인 억압적 공화주의자인 루소와 열린 공화주의자인 토크빌의 차이에 주목해보면, 공화주의가 반드시 억압을 동반하는 것만도 아니다. 즉, 공화주의 공동체란 동질성이 강한 시민권자격자들로 뭉친 집단이 아니라, 민주적 과정에 대한 이해와 공적 참여에 대한 강한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들로 이뤄진 연대체다.


  절차적 공화정은 우연적인 도덕적 의무를 소홀히 하며, 그에 따른 두 가지 징후(결과)를 만들어냈다. 하나는 절차적 공화정이 회피한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 이상한 해답을 유도해내는 잘못된 도덕주의를 향한 운동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을 둘러싼 도덕 공동체에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의 지배(자기-지배)의 상실이다. 공화주의는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처방으로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경향은 1970년대 이후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보수주의자들의 경우 복지프로그램을 축소시키면서 시민적 노선에 속하는 이유를 들었다. 즉, 공짜로 주어지는 복지프로그램이 수혜자들의 근로의욕을 감소시키고 노력 없는 댓가에 길들임으로써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도덕적 타락에 의거한 사회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언어와 논증은 1990년대에 이르러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까지 옮겨갔다.


  반면 진보주의자들 또한 시민적 노선에 서서 불평등을 비판했다. 이전의 불평등 비판은 권리와 자유의 축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최근의 불평등 비판은 가난이 인격을 파괴하기 때문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또한 극심한 불평등은 계층 사이의 공간적-시간적 분리 또한 가속화시키는데, 이런 경향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면서 익혀야 할 현대사회에서의 시민적 덕의 학습 기회를 사람들로부터 빼앗아간다. 이런 분리는 사람들을 사적인 영역으로 몰아넣으며, 공적인 것에 대한 고려 또는 상상의 능력을 지워버린다. 이런 주장은 약간은 역설적이게도 90년대 중반 민주당 정부의 노동부 장관이었던 라이히에게서 나왔다.


  정부 주요 각료들의 담론 이외에도 공화주의적 경향이 확대되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 지역개발조합의 재조명, 20세기 초반에 사라졌던 반체인법을 연상시키는 스프롤 버스터 기업형 슈퍼마켓 반대운동, 공공성을 띈 기관들을 중심으로 도시를 재조직하는 신도시기획운동, 종교공동체나 마을회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삼은 지역사회 공공부조조직인 산업지역재단의 발흥이 이런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들의 운동의 동기와 활동방식은, 자기지배를 학습하는 시민화 프로그램으로서의 소규모 공동체라는 미국 건국시기의 이상을 닮아있다.


  그러나 이런 소규모 공동체 안에서의 시민적 덕성의 함양이라는 사회 모델이 전지구적 네트워크가 이미 형성된 현대사회에도 유효할까? 이 질문은 특히 국민국가 단위로 조직된 정치체에 비해 너무나도 비대해져버린 초국적 경제권력의 전횡에 시민적 노선이 유효한 대답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현재 EU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정치적 난항으로부터, 그리고 193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경제구조 조직 논쟁으로부터 현 상황에 대한 대응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런 대응으로서 등장한 것이 세계시민윤리라는 노선이다. 이 노선의 옹호자들은, 마치 경제규모에 대항해서 정치규모를 키워야 한다고 말하듯이 전지구적 거대 경제조직에 대항하는 정치운동의 인격적 기반은 세계시민적 태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발주의적 자유주의의 절차적 공화정에서 추상적 인간의 모델이 윤리의 기반으로서 실패하듯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세계시민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이란, 자유주의자들이 머리에 그렸던 인간으로서의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시민 정체성으로서의 윤리보다는 지역공동체성을 살리는 것이 오히려 이 시대에 더 요청된다. 세계시민적 태도보다는 정치에 대한 통제의 경험이 훨씬 더 참여와 변화에 대한 동력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다양한 형태의 소규모 공동체의 조직과 그 증가가 사회를 전체적으로 고양시킨다. 미국은 연방주의 논쟁의 과정에서 소규모 공동체의 조직과 그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공동체들과 주권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숙고의 경험을 지니고 있다. 하부의 소규모 공동체들로 주권을 일부 이양하면서 공동체적 경험과 잘 조직된 연방정부를 동시에 만들고자 노력했던 역사를 지닌 것이다. 또한 흑인민권운동도 이런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 운동이 단순히 권리에 대한 청원이 아니라 문화적 변혁과 영적 고양을 목표로 삼은 운동이었다는 것은, 운동의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여러 코멘트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의 우려와 달리, 그래서 공화주의적 공동체 또한 다중적인 정체성을 묵과하지 않는다. 특정한 공동체 내부와 외부에 수많은 정체성들을 놓고 고민하고 토의하며 결정하는 과정이야말로 시민적 덕성의 고양의 과정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다중적인 정체성의 공화주의를 위협하는 두 가지 잠재적 요소가 있다. 하나는 다중성 자체를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움직임이고, 다른 하나는 다중적 정체성 사이에서 나와 우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부유하는 상태로 빠져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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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샌델의 관점에서, 절차적 공화정은 한 가지 역설을 품고 있다. 독립된 개인이 누려야 할 자유와 그에 해당하는 권리를 강조하면 할수록, 실제로는 개인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구조에 대한 종속이 더욱 심화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시민적 덕성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시민적 덕성이 강조하는 공동체의 자치에 대한 참여의 덕목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회의 확대와 공동체의 확대의 구별, 의존의 심화와 공동체성의 강화의 구별을 내세운다. 기술의 발전이 사회의 규모를 점점 키우고, 고도의 분업이 사람들의 사이의 의존을 심화시켰지만, 이것이 공동체 의식의 강화로 연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이 거대한 규모의 사회를 온전히 인식할 수 없는 개인의 한계상황만 심화되었으며, 따라서 사람들은 “공공적인 것”에 관한 관념과 인식을 가지는 것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응하는 담론의 역사를 추적해봄으로써, 절차적 공화정을 향한 전이를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는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대규모 조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진보주의자들은 과학적 관리법, 전문가주의를 도입해서 이런 대규모 조직들에 대응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도 진영을 막론하고 시민적 덕성의 담론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특히 대규모 기업집단에 대응하기 위한 두 가지 노선을 살펴보면 이런 점이 드러난다.


  첫째는 대규모 기업집단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경제를 탈집중화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 동참한 사람들은 대규모 회사의 운영자들이 확보한 대규모의 금권을 통해 민주주의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고 간주했다. 또한 소속 피고용자(노동자)들을 회사에 묶어놓아서 이들이 시민적 덕성을 고양시킬 기회를 박탈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은 산업민주주의라는 담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은 기업을 고용주와 피고용자 모두의 통제범위 안에 놓으려는 발상이다. 이것은 피고용자로 있다가 기술을 배워 자영업자로 독립하는, 자유노동의 이상에 충실한 아이디어였다.


  반대로 대규모 기업집단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규모를 키워야한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이런 생각은 기업집단의 대규모화가 역진불가능한 현상이라는 진단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현대적인 규모의 경제라는 발상과 달리, 이들은 대규모화에 따른 시민적 공동체의 대규모화라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즉, 지역공동체성이 아닌 국가정체성을 매개로 시민들을 규합하고, 이들의 열망을 대규모화된 정부에 집중시키자는 발상이었다.


  반면 이런 대규모 기업집단이 새로운 사회적 정체성을 부여한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소비자주권이라는 개념을 꺼내들었다. 사회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서, 더 이상 가치를 중심으로 뭉쳐있는 공동체는 유효하지 않다. 하지만 기업집단과 그들의 판로가 커질수록, 그 기업집단의 생산품을 사용하는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은 어느 시대보다도 확고해졌다. 그러므로 사회 또한 소비자 정체성을 중심으로 조직될 것이라는 전망이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생산자 기반 가치 중심의 사회관에서 소비자 기반 만족 중심 사회관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이 사회관은 두 가지 방식으로 옹호되었다. 한계효용의 법칙에 따라, 소비로 인한 생산과 분배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공리주의적 방식과, 소비생활이 더 이상 도덕적 명령에 구속받지 않고 완전히 자발성을 확립한다는 자발주의적 방식이 그것이다. 이들에게 모든 사회적 조직의 목표는 “가장 광범위”하고 완전한 “경제적 만족”이었다.


  이런 변화를 추적해보기 위해서는, 경제와 관련된 서로 다른 두 가지 법의 서로 다른 운명을 살펴보면 된다.


  첫번째는 체인점 숫자가 늘어날수록 점포당 세율이 누진되는 세법인 반체인법이다. 19세기 말 반체인법이 처음 시행될 때, 옹호자들은 체인점이 지역 공동체에 아무 것도 기여하지 않는데, 반면에 소상공인들은 이웃의 사정에 밝고 공동체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시민적 덕성의 고양에 기여한다고 주장했다. 즉, 이런 소규모 공동체들은 시민적 덕성이 가장 잘 발현되는 경제체제로서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반체인법은 이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다. 반면 반대자들은, 상점의 목적은 최고의 제품을 최저가에 공급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소비자주의적 논증에 기대고 있었다. 이 주장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힘을 얻었고, 반체인법은 1930년대 폐지된 이후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두번째는 기업간의 연합이나 개별 기업의 규모, 독점을 제한하는 반트러스트법이다. 19세기 말 이 법이 처음 생길 때, 이 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시민적 덕성에 의존하는 논증을 펼쳤다. 즉, 큰 기업은 정치를 침범하고 시민들의 연합을 고용-피고용 관계로 단순화시키기 때문에 나쁘다. 이렇듯 반트러스트법은 가격과 무관한 이슈로 등장했다. 오히려 이 법의 최초의 반대자로 기록된 노동운동가 건턴은, 소비자주의와 유사한 논증으로 반트러스트법을 반대했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생산품의 가격이 내려가고, 노동자에게 안정된 고용과 높은 임금을 보장할 것이다. 물론 건턴 또한, 이런 환경이 시민적 덕성의 육성에 더욱 유리할 것이라는 주장도 동시에 내놓았다.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브랜다이스 대법관은 효율성과 시민적 덕성에 각각 의거한 논증을 통해서 반트러스트법을 옹호했다. 우선, 대규모 기업집단은 규모의 경제보단 경직성이 훨씬 더 부각된다. 또한 그들의 성공은 효율성보단 독점을 이용한 가격조정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기업집단의 대규모화는 규제할 필요가 있다. 또한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노력에 따라 성공할 기회가 주어지는 시민적 상황을 유지해야 한다는 논증도 내세웠다. 브랜다이스의 이런 입장은 가격 고정정책에 대한 그의 옹호에서 잘 드러난다. 생산품 가격을 고정시키는 것은, 폭탄할인을 쏟아내는 대형 할인매장으로부터 소규모 상점들을 지켜내서 “경쟁을 보호하는” 정책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반면 루스벨트 시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보수적인 법학 교수인 아놀드는, 반트러스트법을 구닥다리라고 매도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 정부에서 반트러스트위원회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그리고 그는 그 당시까지 유명무실하던 반트러스트법을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 두가지 모습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샌델이 볼 때 그의 논리는 일관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반트러스트법에 반대할 때도, 책임자로서 이 법을 활용할 때도 가격 지표와 효율성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즉, 기업의 규모는 더 이상 반트러스트법의 압박대상이 아닌 것이다. 반면 독점으로 인해 기업이 시장가격 이상으로 판매할 때에는, 지체없이 반트러스트법의 기소대상이 되었다.


  물론 루스벨트 시대 이후 1950, 60년대까지도 시민적 덕성에 의존하는 논증은 간간이 살아남았다. 이런 입장을 기반으로 의회에서 반트러스트법을 옹호하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기업집단이 점점 커져가는 것, 즉 경제력의 집중은, 실제로 특정한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무관한 대도시의 탐욕스런 경영자와 투자자들이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할 권력을 이양하는 것이다. 집중의 정도와 권력의 크기는 비례하므로, 기업의 크기를 일정 수준 이하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1970년 이후로 이런 논증은 담론지형에서 소수로 전락한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후의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에서의 논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레이건 정부 시기의 보크는 규모의 경제와 효율성 향상을 위해서는 반트러스트법에 반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예전에 이슈가 되었던 가격고정에 대해서도, 시장 참여자들의 권리를 제한하면 필연적으로 비효율이 발생하기 때문에 반대했다. 반면 진보주의자인 네이더는, 독점은 필연적으로 비최적분배상태를 야기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트러스트법을 옹호했다. 또한 유통채널의 장난으로 인한 비효율가격의 출현을 막기 위해 가격고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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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현대 자유주의의 공공철학


  샌델은 현대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에게서 발견되는 “공동체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현대 미국의 공공철학인 자유주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가치관에 대해 중립적이어야한다는 국가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이미지가 이런 상실감의 원인이다. 지금은 이런 생각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 같고 미국의 역사 또한 자유주의적 가치관을 확대해온 역사로서 해석된다.


  그러나 샌델이 보기에 미국의 역사에서 공존했던 두 가지 유형의 공공철학이 있다. 공화주의와 자유주의다. 공화주의는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가치관과 인간상이 정해져있으며, 이 지향점을 향해 공동체가 움직이고 구성원들이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모습을 바람직한 공동체상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공화주의 공공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자치(self-government)”다. 이런 견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으로부터 유래했으며, 미국 건국 초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샌델이 자신의 이론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견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제시하는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간은 덕(도덕적 탁월성, arete, virtue)를 갖춘 인간이다. 여기에서 덕은 사회적으로 좋은 평판을 받는 행위들과 그 너머에 있는 행위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도덕적으로 좋은” 행위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성향 또는 성격을 뜻한다. 덕 개념의 도덕철학적 함축은 사회적 맥락의 중요성, 판단의 다면성, 그리고 평가의 다면성이다.


  반대로 칸트, 밀, 롤스로 이어지는 자유주의적 전통은 개인이 가지고 있다고 간주되는 권리를 중심으로 정치행위를 사고한다. 권리는 인간이 가진 자유, 즉 선택할 능력으로부터 생겨난다. 국가 또는 공동체는 개인이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개인의 선택할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되며, 가치관에 대해 중립적이어야 한다. 이런 견해는 민주주의에 대한 현대 미국의 이해를 대변한다.


  칸트주의적 방식은 칸트의 논증에 대한 롤즈의 해석에서 비롯한다. 칸트의 도덕철학 프로젝트의 핵심은 세계의 구체적 사실로부터 비롯한 모든 “경향성”을 제거하고 이성을 통해서 파악가능한 “법칙으로서의 도덕법칙”을 제시하는 것이다. 『도덕형이상학 기초』에서 그는 이 작업을 물리학에 비유한다. 즉, 다양한 결과값을 산출해낸 모든 개별적인 사실로부터 일반적인 원칙을 찾아내는 것이 자연철학의 방식이듯, 구체적 개인이 보여주는 모든 도덕적 판단과 행위로부터 도덕성의 일반원칙을 찾아내는 것이 도덕철학의 목표라는 것이다. 롤즈는 이 해석을 이어받아 『정의론』에서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실험을 제시한다. 즉, 구체성이 모두 배제된 개인들이 도출해낼 원칙은 결국 각자의 가능성 즉 권리의 평등한 할당에 베팅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 추정했다.


  자유주의적 전통에서 주장하는 국가의 중립성을 정당화하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상대주의적 방식, 공리주의적 방식, 칸트주의적 방식. 상대주의적 방식은 어떤 것이 “실제로” 더 좋은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에 국가가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리주의적 방식은,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싶은 방식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었을 때 가장 행복하며, 그러므로 그 때에 “행복의 총합”도 가장 크다고 주장한다. 칸트주의적 방식은 좋음에 대한 “옳음”에 대한 좋음의 우선성 논증, 즉 인간의 본래적 능력에 의해 발현되는 몇몇 권리들은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나타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도 침해받아서는 안된다고 논증한다. 현대적 방식의 자유주의는 이 칸트주의적 논증에 많이 의지한다. 칸트주의적 정당화는 자유와 평등을 역설한다는 점에서 도덕적 매력이 있다.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할 능력으로부터 오는 자유와, 공동체에게 기본적인 존중을 요구하는 근거로서의 평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주의적 방식은 우리가 삶에서 실제로 수행하는 의무에 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어려움에 부딪힌다. 칸트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이 수행하기로 약속한 것만 의무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의무라는 이름 아래 수행하는 것 대부분은 자발적 동의 이상의 어떤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의무들이 우리의 도덕적 삶의 상당한 부분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구체적” 인간으로서 가진 다양한 정체성에 따른 의무를 지는데, 우리가 도덕적 갈등이라고 부르는 상황은 이런 의무들 간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은 결국 특정한 정책을 – 주로 평등주의적인 – 시행하려 할 때 내적인 모순에 부딪히는데, 권리를 보장한다는 이름 아래 시행하는 많은 정책들이 실제로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지정해주는 특정한 가치관을 지지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칸트주의적 자유주의에 대한 이런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입장을 약간 변경한다. 이 변경된 입장을 최소주의적 자유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입장에 따르면, 다원주의적인 현실 속에서는 특정한 도덕적-종교적 입장을 공공생활에서 표명해서는 안된다. 어떤 입장도 상당한 수의 동의를 얻기는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공생활을 결정할 정책, 즉 정의나 권리에 관해서 논의할 때에는 자신의 도덕적 입장을 유보하는 것만이,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존을 도모하는 길이다.


  그러나 이런 최소주의적 자유주의조차도, 공존을 도모하는 것이 왜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에서 가장 우선하는 목표여야 하는지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함정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어떤 실천적 관심은 공동체의 존속 이상의 가치를 지니기도 하며, 우리는 얼마든지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때로 어떤 중요한 도덕적 갈등들은 괄호를 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 도덕적 갈등은 그 문제를 둘러싼 여러 가치관들 중 어떤 것이 실제로 참인지 논쟁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에서 가치관들에 괄호를 친다는 것은 의도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특정한 가치관을 지지하는 결과를 낳는다. 만약 이렇게 괄호를 친 상황에서 국가의 중립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인 타협에 이를 경우, 어떤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도덕적 신념에 큰 타격을 입는다. 그것이 국가로부터 지지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가치관에 반하는 특정한 정책들이 입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주의적이든 최소주의적이든 자유주의는 좋은 “공공철학”이 아니라는 것이 샌델의 결론이다. 그의 입장에서 자유주의가 강요하는 것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대한 철회이고, 자신의 가치관을 퍼뜨리고 동료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접으라는 지시다. 그래서 자유주의의 귀결은 “도덕적 진공상태”다. 이 상태가 오히려, 자유주의자들이 공화주의자들을 공격하는 가장 좋은 근거가 되는, 편협한 태도와 불관용의 정책을 생산해낸다. 그리고 이것은 민주주의, 다원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덕목을 자유주의 공공철학이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실제로 그 이념이 의도했던 바, 즉 특정한 가치관에 구애받지 않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2장: 권리와 중립적 국가


  샌델에 따르면,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공공철학은 두 가지 점에서 대조된다. 하나는 옳음과 좋음의 우선관계다. 자유주의는 옳음을 우선시하는 반면, 공화주의는 좋음을 우선시한다. 공화주의에서의 좋음은 인격의 특정한 형태를 뜻하기 때문에, 공화주의에서 공동체의 목표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또는 구성원 전부)이 이런 특정한 인격을 갖추게끔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목표와 개인의 가치관 사이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으며, 이것 때문에 개인들은 여러 가지 유형으로 공공생활에 참여한다.


  다른 하나는 자유(liberty/freedom)와 자치(self-government)의 관계다. 자유주의에서 자유는 선택의 능력에서 비롯된 불가침의 기본권을 의미하며, 이것이 개인의 삶의 토대를 이룬다. 반면 공화주의에서는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공동체의 여러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자신도 공동체의 모습에 영향을 주는 형태의 “자치”가 개인의 삶의 토대를 이룬다. 자치를 통해 개인은 공동체의 가치관을 습득함으로써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서 동시에 자신의 가치관을 다양한 활동을 통해 공동체에 관철시키는, 공동체와의 상보적 관계를 구축한다.


  이 두 공공철학에는 뚜렷한 강점과 약점이 있다. 공화주의는 고대인들의 견해를 대변하고 공적 활동에 대한 참여를 촉진시키지만, 다수의 압제에 취약하다. 자유주의는 공화주의의 이런 약점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했으며, 미국의 역사에서 헌법해석의 경향에 점점 더 강한 영향을 끼쳐왔다. 자유주의에서의 기본권은 근본적인 수준에서 개인이 다수의 경향에 반대할 수 있다는 점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건국 초기 미국에서의 “자유” 개념은 자기지배의 범위 확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었지, 기본권을 의미하진 않았다는 것에서, 우리는 건국 초기의 공화주의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샌델은 현재 미국을 구성하는 “절차적 공화정”의 구성 요소를 세 가지로 분석한다. 개인의 우선권, 국가의 중립성, 선택의 능력이 있는 추상적 개인으로서의 시민. 이 중 개인의 우선권이 헌법 개념과 함께 가장 먼저 역사에 등장한다. 즉, 법 자체로부터 그 법이 지키고자 의도하는 어떤 것들을 분리해내고, 그것들을 수호하는 상위법으로서의 “헌법”이라는 개념을 꺼내면서 그 대상이 된 것이 개인의 우선권이다. 따라서 헌법은 개인의 우선권을 수호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 특히 정부의 구조를 선언하고, 한 공동체 안에서 최고의 원칙으로서 작동한다.


  그러나 헌법과 별개로 만들어진 권리장전이 헌법적 지위를 가지는지, 즉 자연권으로서의 개인의 우선권이 헌법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지에 관해서는 오랜 논쟁이 있었다. 특히 이것은 연방주의와 반연방주의 사이의 논쟁에서 갈등의 주요한 요소가 되었다. 논쟁의 초기에는 개인의 우선권이 헌법에서의 정부의 구조에 의해 보장될 수 있는지 여부에 논의가 집중되었다. 즉, 주의 권한을 강화하고 연방을 약화시킨다면 개인의 권리는 자연스럽게 보장될 것이라는 전망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매디슨이 권리장전을 헌법에 포함시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개인의 우선권이 헌법적 지위를 가지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이러한 해석이 실제 판결로 반영되는 데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후 남북전쟁을 지나 로크너 시대에 이르면, 개인의 우선권에서 연장된 국가의 중립성이라는 가치관이 헌법재판에 반영되기 시작한다. 특히 산업의 독점권을 허용하는 주법들, 노동과 관계된 여러 보호장치를 규정한 주법들에 대한 헌법재판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라는 요소가 갈등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이것은 주에 대한 연방의 우위를 표명한 것임과 동시에, 연방헌법과 연방헌법재판관들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국가의 중립성을 동원하는 것이 용이하다는 판단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홈즈 등의 판사에 의해서 국가의 중립성이 더욱 부각된다. 하지만 로크너 시대와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자유지상주의에 부합했던 로크너 시대의 자유 개념과 대비되어, 1900년대 이후의 재판관들이 인용하는 자유 개념은 매우 폭넓게 쓰인 것이다. 홈즈는 미국의 헌법이 특정한 철학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보았고, 단지 헌법 정신이 보장하는 민주적 제도 자체에 대한 사법적 존중을 표현한다고 이해했다. 로크너 시대의 자유지상주의적 자유 개념 이해에서 시작한 이러한 경향은, 역설적으로 모든 가치관에 대한 괄호치기로 그 이해의 방식이 변형됨으로써 개인의 우선성, 국가의 중립성, 그리고 선택의 능력을 가진 추상적 개인으로서의 인간이해가 결합된 절차적 공화정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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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까지 샌델은 연방대법원의 판례와 판결문을 통해서, 자유주의 공공철학이 헌법의 해석에 영향을 끼쳐온 역사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자유주의 공공철학은 법해석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 담론의 지형에도 똑같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0-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이 정부의 각종 정책, 특히 경제정책에 관해 논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사항은 번영과 공정성이다. 즉, 그 정책이 얼마나 성장과 분배의 적절성에 기여하는지에 따라 도입 여부가 판가름난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주의 공공철학이 우리의 정치적 담론으로 자리잡은 이후에 생긴 현상이다. 미국의 건국 초기의 정치경제학 담론에서 경제정책의 목적은 번영이나 공정성이 아닌, 시민적 덕성의 함양이었다. 특정한 산업의 육성이나 새로운 정책의 도입이 공공선, 공익, 명예, 권력에 대한 열망 등을 시민들의 마음 속에 북돋울 수 있는지 여부가 정책 도입의 찬성 또는 반대의 핵심적인 논거였다. 건국 이전에 제퍼슨은 시민적 덕성의 함양에 반대가 된다는 이유로 제조업 육성에 반대했으며, 몇몇 논자들은 무역항의 개수를 제한하는 항구법이 대형 상업도시를 키움으로써 사람들을 타락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같은 논의선상에서, 미국의 독립 또한 영국의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끔 미국 시민들의 도덕적 타락을 조장한다는 이유에서 쟁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독립 이후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시민적 덕은 매우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즉, 입안자들이 헌법을 기본법으로서 시민들의 덕성 함양에 기여해야하는 장치로 간주한 것이다. 한 편으로 시민적 덕성을 교육을 통해 직접적으로 주입할 것을 명기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헌법을 통해서 시민적 덕에 의한 통치를 보장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해밀턴, 매디슨 등). 특히 매디슨은 시민적 덕을 통치의 주요원리로 작동시키기 위해 헌법에 정부 기관 사이의 견제와 균형의 논리를 삽입했다. 후대의 학자들은 이것을 이익집단 다원주의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시민적 덕의 함양이라는 매디슨의 명확한 목적을 고려했을 때, 이런 해석은 틀렸다. 또한 민주정과 공화정의 대립이라는 당시의 정치이념적 지형도를 고려한다면, 시민적 덕을 중심으로 정치조직을 구성하려는 것이 공화주의자들의 목적이었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해밀턴이 제안한 중앙집중적 재정정책에 관한 논란도 시민적 덕성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해밀턴은 각 주의 부채와 연방정부의 부채를 통합하고 이 통합된 부채를 관리할 기관을 만든 뒤에 이 부채를 시민들에게 판매하고 수익을 보장함으로써, 이익을 매개로 한 국가와 주, 시민의 통합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반대에 부딪힌다. 이렇게 이익을 매개로 맺어질 경우, 국가가 이익집단화된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그렇다면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큰 이익이 걸려있는 사람들 또는 많은 채권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편향된 결정이 이뤄질 것이다. 또한 이런 편향된 결정은 불공정한 자원분배를 낳고,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을 낳을 것이라고 반대자들은 주장했다.


  국가의 주요산업에 대한 논쟁에서도 시민적 덕성이 주요한 쟁점으로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해밀턴은 상공업 중심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반대로 제퍼슨과 매디슨은 농업이야말로 미국인에게 가장 적합한 산업이라고 믿었다. 해밀턴의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상공업이 진흥되지 않을 때 발생하는 수입의 증가와 이에 맞물린 사치풍조가 사람들의 풍기를 문란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반면 제퍼슨과 매디슨의 주장은, 상업사회는 사람들을 돈의 노예로 만들고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전하게 땀흘려 일한 댓가가 돌아오는” 농업이야말로 시민적 덕의 함양에 어울리는 사업이다. 따라서 해밀턴은 서부와 남부로 뻗어나가는 영토확장이 무의미하며 낭비적인 사업이라고 간주한 반면, 매디슨과 제퍼슨의 옹호자들은 이런 개척이 시민들의 도덕적 고양을 도와주는 사업이라고 주장했다.


  제조업에 관한 찬반논쟁도 마찬가지로 시민적 덕성을 둘러싼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즉, 어떤 사람은 제조업이 시민의 육성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이들은 제조업이 시민들의 인격적 상태를 나쁘게 만들것이라고 생각했다. 옹호자들은 제조업이 번성할수록 영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에 대한 무역 분야에서의 예속에서 벗어나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무역 분야의 예속은 수입품의 가격을 상승시키고 사치 풍조를 조장하며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계급간 격차를 심화시킴으로써 공동체의 결속을 해치기 때문에, 예속을 벗어나는 것은 공동체의 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또한 각자 생산수단을 소유함으로써 농업 생산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통치를 온전히 이룰 수 있게 된다. 이들의 이런 입장은, 제조업의 육성을 옹호하더라도 고도화된 분업이 이뤄지는 공장제 생산을 옹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반면 제조업의 육성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제조업의 육성은 필연적으로 분업과 공장제 생산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공장제 생산은 생산품에 대한 예속, 임금에 대한 예속, 생산수단을 소유한 고용주(자본가)에 대한 예속을 낳는다. 이런 예속의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제대로 된 시간과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반대자들은 사치와 낭비에 따른 도덕적 타락은, 생산이 충분히 고도화된다면 국내제조물품들만으로도 충분히 촉발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웰 공장은 이런 제조업에 대한 논의가 실제로 어떤 발전을 겪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다. 로웰 공장은 도시가 아닌 농촌의 주변에 지어졌고, 주변의 농민들과 순환근무를 하는 체계를 갖췄으며, 강한 규율과 노동자 교육을 통해 근검절약정신을 전파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모델은 시간이 가면서 붕괴하고 말았다. 우선,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의 관계가 문자 그대로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관계로 변화하고 말았다. 또한 강한 규율과 교육에 대한 반발로 파업이 빈번했다. 주변의 농민들과 순환근무를 함으로써 공장근무를 하면서도 시민적 덕을 쌓을 기회를 준다는 계획은, 이민자들을 점점 더 상시채용함으로써 유명무실해졌다. 결국 공장은 이주했고, 로웰과 같은 공장들이 한 곳에 모여들면서 시민적 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대도시가 공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시간이 흘러 잭슨 대통령의 시기가 되었을 때, 산업이 제조업과 상업 중심으로 재편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시민적 덕성에 관한 논의를 이어나갔다. 이 논의는 민주당과 잭슨의 옹호자들 대 휘그당의 잭슨 반대파의 구도로 전개되었다. 이들의 논의는 표면적으로 번영과 공정성을 축으로 삼는 현대의 경제정책논쟁과 유사해보이지만, 정책패키지는 정반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번영을 목표로 하는 휘그당은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주장했고, 반대로 분배의 공정성을 옹호하는 민주당은 정부의 불간섭을 주장했다.


  민주당은 엘리트로 구성된 정부에는 내재적인 불공정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즉, 정부를 구성하는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정부의 정책을 조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개입은 분배정의의 붕괴를 의미한다. 따라서 분배정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분산시키고, 권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는 생산을 탈집중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국가는 시민들의 자치권을 보장해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당시 민주당은 중앙은행을 설립한다는 정책에 반대했는데,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이러한 기관은 반드시 부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또한 실제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결정권에 접근하고 은행권발행의 조작을 통해 “땀흘리지 않고 돈을 버는” 문화가 조장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이유로 거론되었다.


  반대로 휘그당의 인사들은 탈집중화된 경제가 행정부의 상대적 비대화를 부른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적은 돈은 제대로 분배해봐야 가치가 없다는 고전적인 논증을 통해 성장을 옹호했으며, 이런 성장을 위해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경제성장에는 반드시 상업화에 따르는 타락만이 있는 것이 아닌데, 더 넓고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통합됨으로써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도 통합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히려 국가와 시민간의 일체감 증진, 즉 국민통합의 발판이 된다. 물론 상업사회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강력한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휘그당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보편적 덕성함양교육을 내놓았다. 즉, 국가적인 차원의 공동체 의식 고양을 통해 상업사회에서 예상되는 문제점들을 상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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