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숲
스가 히로에 지음, 이윤정 옮김 / 포레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멀지 않은 미래, 예술품을 소장한 박물관 소행성 아프로디테가 작품의 배경이다.

주인공 다카히로는 이 박물관의 학예원으로 신체에 컴퓨터가 이식되어 있다는 설정으로, 그는 갖가지 예술품과 연관된 소소한 사건들을 맡아 해결해 나가게 된다.

<천상의 음악을 듣다> 에서는 <어린 아이에게 바치는 선율>이라는 그림을 보고 특정한 사람들이 천상의 음악을 듣는 경험을 하는 내용이다. 행성 이름만 '아프로디테'인게 아니라 음악과 무대를 관할하는 부서는 '뮤즈', 회화 공예담당 부서는 '아테나', 공식물 부문 담당은 '데메테르', 컴퓨터 이름은 '므네모시네(기억의 여신)' 라는 식으로 작품 전체의 컨셉을 풀어놓는 도입부이다.

<이 아이는 누구?>는 어딘지 모르게 Uriah Heep의 노래 'Come Away Melinda'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낡은 인형의 이름을 찾아달라는 부탁으로 인형의 과거를 추적하다 보니 과거 지구에서는 행방불명의 미아를 찾기 위해 똑같은 모습의 인형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여름에 내리는 눈>은 피리 명인의 습명공연과 관련한 에피소드인데 각종 기모노와 기모노 문양을 활용해 일본적 느낌을 살린 소설이다.

<꿈을 보여주는 사람>은 매너리즘에 빠진 인도계 무용가가 '고독한 예술'에서 벗어나 '스스로 빛나는 예술'로 거듭나는 내용이, <포옹>은 올드스쿨 학예원이 진정한 예술품 감상을 위해 자신의 남은 생을 바치는 얘기이다.

작품의 표제작인 <영원의 숲>은 생체시계라는 가상의 시계 시스템을 둘러싼 표절 시비를 다루고 있는데, 사실은 지극히 서로를 연모했던 두 연인이 한 시계에 비슷한 모티프를 다루게 된 사연이 소개된다.

<라리사의 거짓말>은 인어공주를 테마로 한 짧은 소품이고, <반짝반짝 작은별>은 우주에 있는 미지의 존재가 보내는 메시지에 관한 소설이다.

마지막 작품 <러브송>은 작품들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소개되는 '97 건반의 흑천사'라는 피아노의 해머에 이달고의 연꽃 홀씨가 붙어서 해머의 스펀지 역할을 대신 하다가 러브송과 함께 홀씨가 되어 공기중에 눈꽃송이처럼 흩뿌려지는 환상적인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컨셉이 과도해서 자칫 오글거릴 수 있는 작품인데 상복은 많아서 일본 SF 작가와 서평가들이 뽑는 '베스트 SF 2000', SF 독자의 인기투표로 선정되는 '세이운상',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등을 수상했다고 한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1790426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홍글씨 - 이윤기 소설
이윤기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화자는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남녀차별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다 은행원인 남편과 결혼한다. 남편은 '남성우월주의 자의 성향'을 보이지만, '이성적인 사유 습관에 따라 행동할 때는 남녀동권으로 가파른 기울기를 보이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남자가 병역과 노역의 주체 노릇을 하던 과거와 달리 현대는 산업화 시대를 지나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어 육체적·물리적 힘이 생존을 좌우하지 않기 때문에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 말할 논리적 근거가 없다고 판단'하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남편이 어느 날 '컨베이어 벨트'에 얹혀져 흘러가는 삶이 싫다며, 육 개월 말미를 얻어 미국으로 박사 유학을 떠난다. 초기엔 서로 애틋해하며 메일을 주고 받았지만 어느 순간 남편으로 부터 연락이 뜸해진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화자는 남편의 부정을 알게된다. 보아서는 안되는 제우스의 본 모습을 보고 타죽은 '세멜레의 운명'이자, 목욕하는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알몸을 본 '악타이온의 운명'을 맞게 된 것.

남편은 자신과 한자 표기가 똑같은 아키코(명자)라는 일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변변한 변명도 하지 못하는 남편이 나와 실랑이를 벌이다 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려던 순간, 화자는 무심결에 벼루를 집어 남편의 머리를 내리치고 만다.

그리고 화자는 쓴다.

사랑하라. 이것은 딸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싸워라. 이것은 딸들이 지켜야 하는 원칙이다.

특권을 원칙에 앞세워서는 안 된다. 그러면 둘 다 잃는다.

------

<작가정신> 출판사가 단편소설 하나에 비평을 덧붙여 비싼 값에 팔던 책이다.

이윤기는 소설가 보다는 번역가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소개자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나는 소설가 이윤기를 더 선호한다.

그가 번역한 움베르토 에코 소설의 영문판 재번역은 번역가로서 해서는 안 되는 작업이었다.

어찌되었든, <진홍글씨>는 남녀 문제를 다룬 기존 소설과는 다소 다른 시각에서 씌여져서 다소 참신한 맛이 있다.

90년대 이전 소설에서는 남자의 물리적 폭력성과 이로 인한 여성의 피폐해진 삶이 주조를 이루었다면, <진홍글씨>의 남편은 화자 보다도 오히려 남녀차별의 부당함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바람 피우기'는 진부하다. 남편이 유학 가기 전 구질구질하게 늘어놓던 '컨베이어 벨트' 이론을 보자.

정교하게 짜여진 거대한 망상 조직의 '컨베이어 벨트'... 초중고 차례로 졸업하면 좋든 싫든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그것도 좀 쓸 만한 놈을 좋은 성적으로 쑥 나오면 학계 관계 재계 언론계 법조계 같은 거대 망상 조직과 합류하고... 일단 합류하면 조직의 '컨베이어 시스템'에 올라간다. 그러면 된다. 조직은 생리상 거기에 합류한 동아리를 외방인들로부터 차별화하고 신변을 철저하게 보호해 준다.

남편은 그렇게 흘러가기 싫다며 공부를 하러 떠났지만 결국 가부장제 사회에 순응하여 지극히 통속적인 방식으로 바람을 피운다. 벨트에서 벗어나기를 스스로 거부한 것.

한편, 이 소설 역시 남녀의 문제를 성의 문제로 국한해서 설명하다 보니 복잡한 권력관계와 이러한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근본적인 갈등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그러다 보니 '여성이 남성의 머리를 벼루로 내리치는' 형태로 소설은 끝이 난다.

이러한 경향성은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조잡한 소설에서 찬란한 결실을 맺는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1771109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칠드런
이사카 코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뱅크>

진나이와 가모이, 그리고 맹인인 나가세는 은행에 갔다가 은행강도 사건에 휘말린다. 진나이는 인질인 주제에 제멋대로 노래를 부르고 강도에게 대들기도 한다. 원래 강도들은 조용히 돈만 털어갈 예정이었는데 진나이 때문에 총을 발사하게 되고, 이 때문에 경찰이 출동한다.

사실은 은행원 전원이 공범이었다는 특이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

<칠드런>

책을 훔친 죄로 가정재판소 조사를 받게 된 시로와 시로의 아버지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게다가 시로는 두번째 면담을 은근히 반기기까지 하는데...

가정재판소 상담이 예정된 소년이 나타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까봐 강도가 아버지인 척 상담에 참여하는 이야기로, 나중에 소년은 강도의 처지를 동정해 거짓 유괴사건까지 일으켜 돈을 마련해준다.

<리트리버>

진나이는 비디오가게 점원에게 고백을 했다가 차인 후 트루먼 카포티의 다음 말을 인용한다. "세상의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슬픈 것은 개인에 관계없이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연인과 헤어졌다면 세계는 그를 위해 멈춰야 한다".

그런데 왠일인지 진나이의 주변 사람들이 아까부터 비슷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다.

알고보니 인질사건 범인을 잡기 위해 경찰들이 잠복한 현장에 진나이 일행이 뛰어든 것.

<다시 칠드런>

바람난 어머니보다 우유부단하고 매력없는 아버지가 더 불만인 청소년을 맡게된 진나이는 뜬금없이 그에게 자신이 몸담고 있는 록그룹 공연 티켓을 내미는데... 최근 진나이가 발견한 끝내주는 싱어가 사실은 청소년의 아버지.

<인>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똘똘 뭉친 진나이 앞에 다시 나타난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곁에는 원조교제 대상으로 보이는 여고생. 진나이는 다시금 곰 탈을 쓰고 아버지를 패주기 위해 걸음을 내딛는다.

------

예전에 일본 드라마 <립스틱>을 꽤나 흥미진진하게 본 기억이 있다. 가정재판소 조사관들이 주인공인 그 드라마는 꽤나 감수성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고 그때 나는 백수였다. 그래서 공무원을 하면 어떨까 생각하던 차라 교정직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잠시 끌렸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후로 교정직의 실상을 알고 바로 포기했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도 가정재판소 조사관이다. 아마추어 그런지록 그룹의 기타리스트로 제멋대로인 성격을 지닌 진나이는 다섯 개의 옴니버스 식 단편에 어떤식으로든 등장해서 사건의 향방을 결정짓는 특이한 캐릭터이다.

뭐라 규정하기 어려운 도덕관과 자기만의 행동 방식으로 문제에 직설적으로 부딪혀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젊음' 이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연상케 한다.

이사카 코타로 답게 각각의 이야기에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가미한 것도 매력 포인트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1748102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연한 산보
다니구치 지로 만화, 쿠스미 마사유키 원작 / 미우(대원씨아이)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독한 미식가> 콤비가 쓴 짧은 단편 만화이다.

자전거를 잃어버려 찾으러 갔다가 우연히 산책을 하게 되고, 그러다가 에디슨 전구를 사오는 에피소드로 시작하는 이 만화는 사소하지만 이야기가 있는 뒷 골목 풍경들을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 펼쳐 놓는다.

TV나 잡지에 나온 곳을 찾아가는 것이 아닌 '태평한 미아'가 되어 걷거나, 잠든 사람들 무리 속을 홀로 무작정 걷거나 하다 보면 서서히 얽히고 설키고 뒤죽박죽이 된 뒷골목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왠지 편하고 좋은 느낌을 갖게 된다.

목적 같은 거 없이 자기 마음대로 느긋하게 걷는 데서 오는 기쁨, 그것이 산책의 묘미가 아닐까...

관능 소설로 유명했던 가와카미 소쿤은 자신의 마지막 작품에서 '어디 한 군데 아픈 곳이 없고, 집 근처를 부인과 함께 산책하는 것'이 자신이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었다고 적는다. 너무나 소박하지만, 납득이 가는 소원 같다.

앞으로 일주일이 지나면 을지훈련이 시작되고, 찬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태양볕이 아직 뜨거운 이 시기에, 집 앞을 산책해야 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90년생 공무원이 왔다
정부혁신어벤져스 / 경성 e-북스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입직한 해에 내가 다니던 관서의 장은 적어도 관서 내에서 절대권력자였다. 방호원이 아침마다 정모를 쓰고 경례를 붙였고, 운전원이 출퇴근을 시켜줬다. 서무팀장은 국장이 다니는 방송통신대학의 리포트와 과제를 대신 해줬고, 업무추진비는 관서장의 쌈짓돈이었다.

그 후로 세월이 흐르고, 나 역시 승진을 하게되어 모처로 발령이 나서 임지로 와보니 책상에 이 책이 놓여 있었다. 관서장은 아니지만 과장이라서 새내기 공무원들과의 소통을 활성화 하고 이해를 높이라는 의미로 마련해 둔 책 같다.

책에 따르면 기원전 1700년 경 수메르 점토판,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소크라테스, 고대 이집트인, 기원전 3세기 법가사상으로 유명한 한비자 등이 공통적으로 남긴 말이 '요새 아이들은 버릇이 없어 장차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지 걱정이다' 라고 하니, 언제나 새로운 세대와 기성 세대는 갈등하나 보다.

그런데 이 책은 줄곧 "바뀐 것은 세대가 아니라 세상" 이다. 그러니, 절대로 '젊은 세대를 위한' 혹은 '밀레니얼 세대를 위한' 조직문화와 소통 문화를 만들지 말라는 말이 적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나와는 다른 생각과 행동양태를 가진 새로운 세대가 등장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내'가 여전히 기존의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다 보니 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못할 뿐이라는 말 같은데...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형식에 얽메인 보고서에 대한 집착, 대면 회의에 대한 신뢰, 회사 내에서 가족에 버금가는 인간관계를 구축하려는 헛된 욕망, 연공서열을 중시함으로서 조직의 위계를 세우고 이를 통해 효율을 추구하는 태도 등 내가 암암리에 내면화 했던 사고체계들이 이제는 바뀐 세상에서 적용되기 어려운 상황임을 자각한다.

한편, '젊은 사람들이 항상 문제' 라는 한탄 이상으로 자주 거론되는 것이 '나야 말로 낀 세대 주장'이 아닐까 싶다.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려면 당연히 권위의식과 기득권을 내려 놓아야 하는데, 정작 내면화된 위계질서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니 결국 '낀 세대'가 될 수밖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