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홍글씨 - 이윤기 소설
이윤기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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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화자는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남녀차별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다 은행원인 남편과 결혼한다. 남편은 '남성우월주의 자의 성향'을 보이지만, '이성적인 사유 습관에 따라 행동할 때는 남녀동권으로 가파른 기울기를 보이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남자가 병역과 노역의 주체 노릇을 하던 과거와 달리 현대는 산업화 시대를 지나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어 육체적·물리적 힘이 생존을 좌우하지 않기 때문에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 말할 논리적 근거가 없다고 판단'하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남편이 어느 날 '컨베이어 벨트'에 얹혀져 흘러가는 삶이 싫다며, 육 개월 말미를 얻어 미국으로 박사 유학을 떠난다. 초기엔 서로 애틋해하며 메일을 주고 받았지만 어느 순간 남편으로 부터 연락이 뜸해진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화자는 남편의 부정을 알게된다. 보아서는 안되는 제우스의 본 모습을 보고 타죽은 '세멜레의 운명'이자, 목욕하는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알몸을 본 '악타이온의 운명'을 맞게 된 것.

남편은 자신과 한자 표기가 똑같은 아키코(명자)라는 일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변변한 변명도 하지 못하는 남편이 나와 실랑이를 벌이다 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려던 순간, 화자는 무심결에 벼루를 집어 남편의 머리를 내리치고 만다.

그리고 화자는 쓴다.

사랑하라. 이것은 딸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싸워라. 이것은 딸들이 지켜야 하는 원칙이다.

특권을 원칙에 앞세워서는 안 된다. 그러면 둘 다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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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신> 출판사가 단편소설 하나에 비평을 덧붙여 비싼 값에 팔던 책이다.

이윤기는 소설가 보다는 번역가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소개자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나는 소설가 이윤기를 더 선호한다.

그가 번역한 움베르토 에코 소설의 영문판 재번역은 번역가로서 해서는 안 되는 작업이었다.

어찌되었든, <진홍글씨>는 남녀 문제를 다룬 기존 소설과는 다소 다른 시각에서 씌여져서 다소 참신한 맛이 있다.

90년대 이전 소설에서는 남자의 물리적 폭력성과 이로 인한 여성의 피폐해진 삶이 주조를 이루었다면, <진홍글씨>의 남편은 화자 보다도 오히려 남녀차별의 부당함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바람 피우기'는 진부하다. 남편이 유학 가기 전 구질구질하게 늘어놓던 '컨베이어 벨트' 이론을 보자.

정교하게 짜여진 거대한 망상 조직의 '컨베이어 벨트'... 초중고 차례로 졸업하면 좋든 싫든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그것도 좀 쓸 만한 놈을 좋은 성적으로 쑥 나오면 학계 관계 재계 언론계 법조계 같은 거대 망상 조직과 합류하고... 일단 합류하면 조직의 '컨베이어 시스템'에 올라간다. 그러면 된다. 조직은 생리상 거기에 합류한 동아리를 외방인들로부터 차별화하고 신변을 철저하게 보호해 준다.

남편은 그렇게 흘러가기 싫다며 공부를 하러 떠났지만 결국 가부장제 사회에 순응하여 지극히 통속적인 방식으로 바람을 피운다. 벨트에서 벗어나기를 스스로 거부한 것.

한편, 이 소설 역시 남녀의 문제를 성의 문제로 국한해서 설명하다 보니 복잡한 권력관계와 이러한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근본적인 갈등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그러다 보니 '여성이 남성의 머리를 벼루로 내리치는' 형태로 소설은 끝이 난다.

이러한 경향성은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조잡한 소설에서 찬란한 결실을 맺는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177110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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