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의 몸값 1 오늘의 일본문학 8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964년 여름, 도쿄는 가뭄으로 제한급수가 실시되고 있었다. 곳곳에서 땅을 적시는 것은 비가 아니라 공사장 인부들의 땀이었다. 올림픽을 두달 여 앞두고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었던 것이다. 

수도고속도로가 새로 놓이고, 모노레일과 신칸센이 개통을 앞두고 있었다. 요요기 체육관과 무도관도 이 때 완공된 건물들이다. 그 건물과 도로 주변을 혼다 S600 스포츠카가 질주했고, 관광객들을 아사히 펜텍의 일안 레프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어떤 사람들은 새로 나온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사용하기도 했다. TV에서는 드라마 <소용돌이 치는 바다>가 한창이었고, 가수 사카모토 큐의 '위를 보며 걷자'가 '스키야키'라는 이름으로 빌보드 핫100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헤이본 펀치>와 같은 남성잡지는 물론이고 <장미족>과 같은 동성애 잡지도 유행하는 등 도쿄는 새로운 건물과 문화를 일으켜 세우며 전쟁의 폐허를 극복한, 완전한 새로운 도시로 거듭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시기, 아키타의 구마자와촌에서 태어나 천재적인 머리로 도쿄대에 입학한 뒤 지금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시마자키 구니오의 형이 사망한다. 그 사건이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근간부터 뒤흔들게 될 사건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시마자키 구니오의 형 하쓰오는 건설 인부로, 수도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했다. 어느 날, 그가 취직한 야마신 흥업에서 전보가 날아든다. 하쓰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야마신 흥업에 따르면 하쓰오는 두 타임 연속 일하는 '통 일'을 반복하다가 심장마비에 걸렸다고 했다. 고향의 노모와 형수는 도쿄에 와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시마자키가 형의 유골을 수습해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른다. 

그런데, 시마자키의 형이 기거하던 합숙소는 고향 아키타 출신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취업한 곳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는 남편 소식을 묻는 고향 아낙의 요청으로 시마자키는 그 합숙소를 찾아가게 된다. 

합숙소의 열악한 노동조건에 다소 충격을 받은 시마자키는 충동적으로 그곳 현장에서 여름 한 철 일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자신의 학비를 대기 위해 형이 했던 고생을 조금이라도 체험해야한다는 의무감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도로서 실천을 통해 사상을 검증하겠다는 호승심 등이 더해진 결과였다. 

일은 쉽지 않았다. 일륜차를 끌다가 블록을 엎기 일쑤였다. 게다가 건설 현장 내에는 '히에라르키(계층간 차별의식)'가 만연해 있었다. 하청 회사 직원은 원청 회사 직원에게 찍소리도 못 했고, 원청 회사에서도 대학을 나온 먹물과 노동자는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노동자들끼리의 착취도 있었는데, 히구치라는 반 야쿠자가 건설현장에 신참이 나타나면 도박참여를 강권한 뒤 사기도박으로 돈을 빼앗아갔다. 시마자키도 여기에 당해 1만 6천엔의 빚을 지게 된다. 한달을 꼬박 일한 돈 전액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차츰 올림픽이 민중에게 강요하는 바가 무엇인지, 도쿄라는 중심도시가 주변도시로부터 빨아인 부가 왜 핏빛을 띠는지, 정직하게 노동하는 사람이 왜 가장 밑바닥에서 허우적대다가 필로폰과 같은 마약에 중독되어 끝내 '심장마비사' 처리 되는지 알게된다. 철도 전문 소매치기(하코시) 무라타씨와 만나 동료를 얻게되고, 다이나마이트 12발까지 손에 쥐게 되자 시마자키는 도쿄대 졸업으로 보장된 미래를 거부하고 단독으로 혁명의 대열에 참가하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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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성분은 일본 최하층 계급이지만 가스미가세키의 한 자리를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도쿄대생 시마자키 구니오. 그가 가정사를 계기로 일본 자본주의의 모순을 깨닫고 급기야 테러리스트로 변모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출신 성분만큼이나 모순된 과정을 거치는데, 시마자키는 안보투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면서도 강단 사회주의자 교수 밑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배우는 대학원생이었다. 그는 이론적으로는 전학련 투쟁가들보다 훨씬 세련된 면모를 갖췄지만, 이를 혁명 운동에 접목시켜야 한다는 관념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 중반, 일본의 급진파는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요요기파(공산당사가 요요기역 인근에 있었다)와 반요요기파로 완전히 분화되어 대립하던 시기였다. '공산당 무오류'를 주장하는 요요기파를 급진적 학생들은 극도로 경멸했고, 반대로 요요기파는 이들을 '극좌 트로츠키스트'로 매도했다. '극좌 트로츠키스트'로 매도된 이들도 실상 내부를 보면 그들의 헬멧 수만큼이나 다양한 섹트가 있었고, 대립, 심지어는 살인까지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분화 정도만 따지자면 세계 어느 급진 진영보다도 다양했다.


이들은 1960년 안보투쟁을 필두로, 1961년 정폭법 반대, 1962년 대관법 투쟁, 1963년 원자력잠수함 기항 저지투쟁, 미소핵실험 항의, 1964년~65년 한일협상 저지투쟁(그렇다, 일본 좌익은 한일협상이 자본주의적 이해에 기반한 반민중적 협상이라고 평가했다) 등 다양한 투쟁을 벌였다.

언뜻 초식동물처럼 보이는 현재의 일본 급진세력이 사실 아사마 산장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스탈린주의자부터 적군파테러리스트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사회 곳곳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좌익으로 분류되는 이들의 활동에 유독 '올림픽 반대 투쟁'은 없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을 오쿠다 히데오는 파고들어 소설화했다. 2권에서 시마자키 구니오는 도쿄대의 좌익 동아리와 조우하는데, 이들을 오쿠다 히데오는 '유치한 수준에서 혁명 놀이 하는 그룹'으로 평가한다. 좌익 동아리 리더는 올림픽이야 말로 일본 자본주의 상부구조 완성에 있어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올림픽'이라는 프로파간다를 해체하려다 역풍을 맞으면 좌익은 100년 동안 미움을 받을 것이라며 전략과 전술을 혼동한다. 그러면서도 다이나마이트를 요구하는 소아병적 발상을 보인다. 이런 소아병적 발상이 적군파로, 그리고 아사마 산장의 살인 사건으로 이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외로운 혁명을 수행하던 시마자키 구니오는 평범한 대학을 나와 보통의 사고방식을 갖춘 형사의 총에 맞아 쓰러진다. 시마자키 구니오가 공안부 형사의 총에 맞는 것이 아니라는 점, 이것이야 말로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룬 일본은 좌익들의 저항을 70년 초 완전 분쇄하고 거품경제로 접어든다. 전공투로 칭해지던 그 거대한 저항은 그 후 50년간 침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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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 전2권 세트
로렌 와이스버거 지음, 서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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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인공 앤드리아는 코네티컷 주 에이본에서 자랐는데, 이는 고등학교 때 온갖 운동을 하고, 끼리끼리 모여 놀며, 부모님이 안 계실 때면 '술 파티'를 즐겼다는 의미이다. 학교 갈 때는 스웨트 팬츠를 입었고, 토요일 밤에는 청바지를, 댄스파티에서는 드레스라 칭할 만한 것을 입었다. 앤드리아는 이후 브라운 대학-온갖 유형의 예술가와 사회부적응자, 그리고 컴퓨터 괴짜들이 모여드는-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여행을 다녀왔다. 인도 여행에서 아메바성 이질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긴 앤드리아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은 <뉴요커>지에 기사를 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커리어를 위해 온갖 잡지사에 편집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싶다는 이력서를 집어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엘리아스 클라크'에서 앤드리아에게 면접 기회를 주었고, 면접 과정이 신통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앤드리아는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 프리스틀리를 위해 어시스턴트로 일할 기회를 잡게 된다.


인사과 직원의 말에 따른 미란다 프리스틀리는 패션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에디터 중 한 사람인데, 그녀가 날마다 헤내는 모든 업적을 옆에서 돕는 일은 '백만 명쯤 되는 여자들이 너무도 하고 싶어하는 일' 이라고 했다. 계약기간은 1년이었고, 그 1년을 잘 마친 선임 어시스턴트들은 에디터로 승진하는 등 고속 승진 가도를 달렸다.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앤드리아가 수행해야 할 과제는 수행 비서나 할 법한 일들이었다. 앤드리아의 아침 식사를 대령하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 오고, 옷들을 세탁소에 맡기고, 일정표를 업데이트 하는 따위였다. 

앤드리아는 정확하게 지시하는 법이 없었다. 이를 테면 최근 자신이 신문에서 본 퓨전 레스토랑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해서 책상에 올려놓으라는 식이었다. 언제, 어떤 신문에서, 어떤 종류의 식당을 봤는지 묻는 것은 금기였다. 그리고 종종 지시는 엉뚱하게 이뤄지기도 했다. 맨해튼에서 무언가를 찾아오라고 해서 온 신경을 거기에 쏟고 있는 앤드리아에게 '워싱턴에서 그 가게를 찾는 게 그렇게도 힘든 일이냐'고 소리지르는 식이었다.

또한 그녀의 업무 범위는 직장에서의 일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녀의 쌍둥이 딸들을 위해 해리포터 신간이 서점에 깔리기도 전에 구해와야 했고, 그 집 강아지를 동물병원에서 찾아와야 했으며, 시동생을 위한 파티도 지원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그녀가 정한 불가능에 가까운 시간 내에 처리되어야 했다. 할 수 없는 이유를 대는 것은 해고를 종용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미란다 프리스틀리는 심지어 앤드리아와, 그녀의 동료 에밀리를 같은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녀에게 있어 에밀리든, 앤드리아든, 자신이 원하는 사항을 충족시켜주기만 하면 되었고,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교체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앤드리아는 매일 매일 미란다의 폭압에 시들어갔다. 정해진 식사 시간도, 정해진 퇴근 시간도 없었다. 그러나 좋은 점도, 굳이 찾자면 얼마쯤 있었다. 그것은 앤드리아가 타운카를 자신의 전용 차처럼 타고 다닐 수 있다는 점과 패션에 관한한 무엇이든 제공받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경비 처리를 유연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미란다는 앤드리아가 자신의 일을 신속히 처리하길 원했고, 런웨이에서 자신을 위해 일하는 데 촌뜨기 처럼 입는 것은 못 견뎌 했으며, 경비 처리에 신경 쓰다가 자신의 요구사항이 그르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란다는 이런 이유로 갈 수록 하이패션으로 치장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절친 릴리, 그리고 남친 알렉스와 멀어지게 된다. 도저히 그들과의 친교를 다질 시간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란다 프리스틀리의 그림자가 앤드리아의 삶을 거의 잠식해 들어가 이제 일상 생활의 모든 영역이 그녀의 박자에 맞춰졌을 무렵, 앤드리아는 그녀와 함께 파리의 패션쇼에 가게 된다. 원래는 동료 에밀리가 함께 가기로 했었으나 단구증가증에 걸려 드러누웠기 때문이다. 

파리에서도 미란다의 무리한 요구는 계속 되었다. 그런데 그 때, 아주 약간의 변화가 감지된다. 미란다가 앤드리아에게 런웨이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그리고 장래 희망이 무엇인지 물었던 것이다. 그녀는 앤드리아의 삶에 아주 약간의 관심을 보였던 것 뿐이지만, 그녀가 암시하는 바는 매우 강력해 보였다. 그녀는 원한다면 <런웨이> 내에서 승진을 시켜줄 수도, <뉴요커>지의 유력한 사람에게 앤드리아를 소개시켜 줄 수도 있다고 암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한다. 앤드리아의 오랜 친구 릴리가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일으켜 코마 상태에 빠진 것이다. 앤드리아는 파리에서 며칠 더 머물며 장래를 보장 받을 지, 아니면 당장 자신의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 달려갈지 결정해야 했다. 

다음 날, 앤드리아는 미란다에게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코마 상태에 빠졌지만 남기로 결정했다'고 고백한다. 미란다는 매우 만족하며 앤드리아의 결정을 칭찬한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앤드리아를 다시 하녀처럼 부리며 무리한 요구를 해 댄다. 바로 쌍둥이 딸의 여권이 만료되었으니 당장 갱신하라고 소리치며 발작을 시작한 것이다. 앤드리아는 불가능한 요구를 당연한 권리인 듯 요구하는 미란다에게 '엿 먹으라'고 말해준 뒤 미국으로 돌아온다.


릴리는 다행히 건강을 회복한다. 남친 알렉스와는 서먹해 진다. 미란다는 그 후로 앤드리아에게 복수를 하지는 않았다. 물론 11개월에 달하는 그녀의 봉사를 인정하여 업계에 영향을 행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와의 관계가 아무런 도움이 안 된 것은 아니었다. 앤드리아가 쓴 짤막한 소설을 좋게 본 쎄븐틴의 편집자가 자신도 미란다의 어시스턴트 출신이라며 기뻐했던 것이다. 앤드리아의 새로운 커리어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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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셀러를 한 10년 쯤 뒤에 읽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일단 느긋하게 읽을 수 있고, 다른 사람과 의견을 교환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시간이라는 훌륭한 비평가의 도움을 받아 책의 가치를 좀 더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가 있다.


뉴욕을 배경으로 패션계 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동감 있게 포착해 냈다는 점이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실제 작가는 <보그>지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의 어시스턴트로 1년간 일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구성이나 주제의식은 다소 산만하다. 러브라인은 엉망이고, 미란다-엔드리아의 대립 구도 외에 공을 들인 관계도 거의 없다. 입체적인 인물과 사건이 전혀 없이 평면적으로 진행되는 점도 단점이다. 이는 작가의 심리묘사 기술이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것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엔드리아가 <런웨이>를 박차고 나오는 부분도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하는 식으로 표현되는데, 독자는 '겨우 이런 식으로 나오려고 11개월을 고생했다고?' 하는 아쉬운 마음을 품게 된다.

<아메리칸 사이코>와 같이 일정한 지향점을 향해 이미지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비싸고 예쁜 것', '일상에서 보기 힘든 것' 으로 한정하다 보니 울림이 작다. 소설 보다는 영화로 시각화 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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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정정희 지음 / 세계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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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설은 크리스, 이곤, 혜리, 미나 각각의 시점을 이동하며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데, 이렇다 할 스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때 그때 감각적인 사고와 몸짓들이 나열된다. 

이들의 공통점이라 하면 뿌리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일까. 크리스는 미국인 양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밑에서 컸고, 혜리는 고아원에서 자라다 입양되었다. 이곤과 혜리는 어머니쪽에서 적극적으로 바람을 피운 케이스이다. 특이한 점은 넷 다 출생으로 부터 비롯된, 어찌보면 불행한 유년기라고 해도 무방한 가정사를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애정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진지하지 못하다. 기껏 관계의 끈을 유지하는 것은 성적 욕망의 냄새를 풍기는 동물적인 것일 뿐. 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세련되게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듯 하다. 어쩌면 욕망은 고통과 번민 속에서 갈고 닦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품 속에서 중국음식, 마리화나, 재즈와 같은 감각적인 이미지는 고향, 할머니, 결혼과 같은 전통적인 이미지와 동등한 권리를 주장한다. 덕분에 모두 같은 크기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무가치하게 보인다. 오직 남는 것은 현재와 찰나이다.

96년도 제5회 작가세계 문학상 수상작으로 세기말을 앞 둔 남한 땅에 일시 불었던 퇴폐적이고 감각적인 분위기를 제법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하지만 시간을 견뎌내는 힘도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오렌지>는 작품이 포착한 당시 세태와 같이 빠르게 읽히고, 빠르게 잊히는 소설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40049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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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밴드왜건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4
쇼지 유키야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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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은 도쿄 - 진보초 인근으로 추정되는 곳- 에 자리잡은 헌책방이다. 메이지 시대부터 3대째 이어오는 이 헌책방 이름은 <도쿄밴드왜건>, 당주는 올해로 79세가 된 훗타 칸이치다. 

훗타 칸이치의 아내 훗타 사치는 76세로 사망했지만 성불하지 못하고 이 헌책방 주위를 떠돌며 가족들 이야기를 들려준다.(화자)

칸이치와 사치의 외아들 가나토는 올해 60이 되었고, 긴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로커이다.

가나토는 정실부인에게서 아이코와 콘을 낳았고, 밖에서 아오를 낳아왔다.

아이코는 화가이자 미혼모로 초등학교 6학년인 카요를 키우며 혼자 살아가고 있고, 콘은 34세로 한때 대학강사를 했지만 지금은 자유기고를 생업으로 삼고 있다. 아내는 동갑이자 전직 스튜어디스인 아미이고, 둘 사이에 4학년 남자아이 켄토가 있다. 마지막으로 26살이 된 아오는 여행사 투어가이드이다.


작품은 도쿄밴드왜건을 잠깐 소개한 뒤, 사계절로 이뤄진 네 개의 장을 할애하여 소소한 에피소드를 연속으로 엮어 나간다. 


매일같이 헌책방에 두 권의 두꺼운 백과사전을 두고 학교로 가는 초등학교 1학년 소녀의 비밀(자동문이 감압식이라 무게를 얻기 위한), 그 소녀를 안아서 올려주겠다며 매일같이 기다리는 수상한 경비(사실은 친할아버지), 바람둥이 아오를 찾아온 마키하라 미스즈라는 미모의 아가씨는 운 이유(그녀는 카요와 배다른 자매인데 나중에 아오와 결혼), 우연히 양로원에 기증한 오래된 수필집을 읽고 가출을 감행한 노부인(작가와 노부인은 서로 아는 사이였는데 어렸을 적 작가가 노부인을 질투한 나머지 그녀의 브로치를 신사 나무에 던져버렸다는 이야기를 읽고 찾아나섬), 마지막으로 아오의 친어머니가 깜짝놀랄 만큼 유명한 여배우였다는 이야기 까지 소설은 연속극 대본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드라마적 스토리텔링을 이어간다. 실제로 작가는 "그 시절 많은 눈물과 웃음을 거실에 가져다준 텔레비전 드라마에"라고 헌사를 바치고 있다.


2006년 작품이 발표된 후 독자들이 후속편을 읽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하자 2007년에는 <쉬 러브스 유 - 도쿄밴드왜건>가 발표된다. 따뜻하고 소소한 이야기들이라 부담 없이 읽힌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선의와 아름다움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고 싶은 날 읽으면 적당할 것 같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396253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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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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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낮과 밤, 아침과 저녁 해서 넉넉하게 스물네 시간이나 되는 하루가 다 가도록 아파서 죽거나, 자동차 사고로 죽거나 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문득 깨닫는다. 그 다음 날이 되어도 사람들은 죽지 않았다. 죽음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지 않기로 한 듯 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오래지 않은 시점이었다.

곳곳에서 정체와 혼란이 시작되었다. 먼저 병원과 요양원의 방들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장례업계는 당장 할 일이 없어졌다. 종교계 역시 당혹스러워했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는 것이고, 부활이 없으면 그 종교의 근간도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보험업계와 가입자도 곤란해졌다. 결코 죽지 않는다면 생명보험에 계속 돈을 지불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죽어가긴 하지만 죽지 않는 사람들이 차곡차곡 한 켠에 쌓이면, 연금도 고갈될 터였다.  

그 때 누군가가 국경 밖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데리고 나가면서 해결의 물꼬가 트인다. 국경을 나가는 즉시 죽음이 찾아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국경 밖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고, 이웃 국가들은 격렬히 항의했다. 마피아는 돈 냄새를 맡고 '죽어가는 사람 실어 나르기'를 독점적인 사업 영역으로 삼기 위해 정부와 협상을 벌였다.


몇 달이 흐른 어느 날, '죽음'이 방송국 사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보라색 편지에는 '죽음'이 일시 일을 멈췄었다는 것, 이제 다시 '죽음'을 가동시킬 것이라는 것, 대신 일주일 전에 통보해주겠다는 것 등이 쓰여 있었다. 보라색 편지는 우편배달부의 손을 거쳐 사람들에게 배달되었다. 사람들은 죽음을 예고하는 편지를 받고 불안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음에게 편지 하나가 반송되어 되돌아오는 사건이 일어난다. 죽음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다시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편지는 되풀이하여 돌아왔다. 죽음은 편지 수신인에게 흥미를 느낀다. 그는 그저 그런 첼리스트였다. 죽음은 그를 스토킹하고, 그를 분석했다. 하지만 왜 그에게 죽음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지는 알 수 없었다. 결국 죽음은 뼈만 앙상히 남은 자신의 모습을 살로 감싸 여자의 모습으로 변화시킨 후 남자 곁에 나타난다. 죽음은 남자에게 연주를 부탁한다. 연주를 끝낸 첼리스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이 그렇게 훌륭한 연주를 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여자를 바래다 주겠다고 했지만 죽음은 거절하고 남자와 몸을 섞는다. 남자가 잠든 후 죽음은 보라색 편지를 태워 없앤다. 죽음은 침대로 돌아가 두 팔로 남자를 안았다. 한 번도 잠을 잔 적이 없는 죽음은 잠이 자신의 눈까풀을 살며시 닫는 것을 느꼈다.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의 눈이 멀고, 또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이 눈을 뜬 것처럼, 이번 <죽음의 중지>에서는 이유 없이 죽음이 사라졌다가, 별다른 개연성 없이 다시 나타난다. 


작가는 비트겐슈타인의 다음과 같은 말을 권두에 인용해 놓았다.


예를 들어 죽음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해 보라.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언어적 영역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정말 이상한 일일 것이다. 


죽음이란 존재의 종말이다. 존재의 종말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유전자의 명령대로 새로운 씨앗을 뿌리고 잉태하고 낳아서 기르지만, 어쨌든 개체의 소멸은 부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개체의 소멸은 그 자체로 존재의 無化로서, 알 수 없으므로 공포스럽고, 설명할 수 없으므로 절망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체의 죽음을 사회의 죽음으로 확장시킬 때, 죽음은 다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개체의 죽음이야 말로 사회의 영속성을 담보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다.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의지했던 종교가 사실은 죽음을 전제로 구축된 불완전한 건축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죽음과 관련한 끊임없는 변증법적 아이러니가 반복되며 삶이 무엇인가 하는 역설적 의문이 솟아난다. 


무료한 토요일 당직을 이 책 덕분에 잘 넘겼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38872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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