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정정희 지음 / 세계사 / 1996년 3월
평점 :
품절


소설은 크리스, 이곤, 혜리, 미나 각각의 시점을 이동하며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데, 이렇다 할 스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때 그때 감각적인 사고와 몸짓들이 나열된다. 

이들의 공통점이라 하면 뿌리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일까. 크리스는 미국인 양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밑에서 컸고, 혜리는 고아원에서 자라다 입양되었다. 이곤과 혜리는 어머니쪽에서 적극적으로 바람을 피운 케이스이다. 특이한 점은 넷 다 출생으로 부터 비롯된, 어찌보면 불행한 유년기라고 해도 무방한 가정사를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애정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진지하지 못하다. 기껏 관계의 끈을 유지하는 것은 성적 욕망의 냄새를 풍기는 동물적인 것일 뿐. 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세련되게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듯 하다. 어쩌면 욕망은 고통과 번민 속에서 갈고 닦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품 속에서 중국음식, 마리화나, 재즈와 같은 감각적인 이미지는 고향, 할머니, 결혼과 같은 전통적인 이미지와 동등한 권리를 주장한다. 덕분에 모두 같은 크기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무가치하게 보인다. 오직 남는 것은 현재와 찰나이다.

96년도 제5회 작가세계 문학상 수상작으로 세기말을 앞 둔 남한 땅에 일시 불었던 퇴폐적이고 감각적인 분위기를 제법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하지만 시간을 견뎌내는 힘도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오렌지>는 작품이 포착한 당시 세태와 같이 빠르게 읽히고, 빠르게 잊히는 소설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4004948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