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의 몸값 1 오늘의 일본문학 8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964년 여름, 도쿄는 가뭄으로 제한급수가 실시되고 있었다. 곳곳에서 땅을 적시는 것은 비가 아니라 공사장 인부들의 땀이었다. 올림픽을 두달 여 앞두고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었던 것이다. 

수도고속도로가 새로 놓이고, 모노레일과 신칸센이 개통을 앞두고 있었다. 요요기 체육관과 무도관도 이 때 완공된 건물들이다. 그 건물과 도로 주변을 혼다 S600 스포츠카가 질주했고, 관광객들을 아사히 펜텍의 일안 레프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어떤 사람들은 새로 나온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사용하기도 했다. TV에서는 드라마 <소용돌이 치는 바다>가 한창이었고, 가수 사카모토 큐의 '위를 보며 걷자'가 '스키야키'라는 이름으로 빌보드 핫100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헤이본 펀치>와 같은 남성잡지는 물론이고 <장미족>과 같은 동성애 잡지도 유행하는 등 도쿄는 새로운 건물과 문화를 일으켜 세우며 전쟁의 폐허를 극복한, 완전한 새로운 도시로 거듭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시기, 아키타의 구마자와촌에서 태어나 천재적인 머리로 도쿄대에 입학한 뒤 지금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시마자키 구니오의 형이 사망한다. 그 사건이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근간부터 뒤흔들게 될 사건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시마자키 구니오의 형 하쓰오는 건설 인부로, 수도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했다. 어느 날, 그가 취직한 야마신 흥업에서 전보가 날아든다. 하쓰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야마신 흥업에 따르면 하쓰오는 두 타임 연속 일하는 '통 일'을 반복하다가 심장마비에 걸렸다고 했다. 고향의 노모와 형수는 도쿄에 와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시마자키가 형의 유골을 수습해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른다. 

그런데, 시마자키의 형이 기거하던 합숙소는 고향 아키타 출신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취업한 곳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는 남편 소식을 묻는 고향 아낙의 요청으로 시마자키는 그 합숙소를 찾아가게 된다. 

합숙소의 열악한 노동조건에 다소 충격을 받은 시마자키는 충동적으로 그곳 현장에서 여름 한 철 일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자신의 학비를 대기 위해 형이 했던 고생을 조금이라도 체험해야한다는 의무감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도로서 실천을 통해 사상을 검증하겠다는 호승심 등이 더해진 결과였다. 

일은 쉽지 않았다. 일륜차를 끌다가 블록을 엎기 일쑤였다. 게다가 건설 현장 내에는 '히에라르키(계층간 차별의식)'가 만연해 있었다. 하청 회사 직원은 원청 회사 직원에게 찍소리도 못 했고, 원청 회사에서도 대학을 나온 먹물과 노동자는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노동자들끼리의 착취도 있었는데, 히구치라는 반 야쿠자가 건설현장에 신참이 나타나면 도박참여를 강권한 뒤 사기도박으로 돈을 빼앗아갔다. 시마자키도 여기에 당해 1만 6천엔의 빚을 지게 된다. 한달을 꼬박 일한 돈 전액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차츰 올림픽이 민중에게 강요하는 바가 무엇인지, 도쿄라는 중심도시가 주변도시로부터 빨아인 부가 왜 핏빛을 띠는지, 정직하게 노동하는 사람이 왜 가장 밑바닥에서 허우적대다가 필로폰과 같은 마약에 중독되어 끝내 '심장마비사' 처리 되는지 알게된다. 철도 전문 소매치기(하코시) 무라타씨와 만나 동료를 얻게되고, 다이나마이트 12발까지 손에 쥐게 되자 시마자키는 도쿄대 졸업으로 보장된 미래를 거부하고 단독으로 혁명의 대열에 참가하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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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성분은 일본 최하층 계급이지만 가스미가세키의 한 자리를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도쿄대생 시마자키 구니오. 그가 가정사를 계기로 일본 자본주의의 모순을 깨닫고 급기야 테러리스트로 변모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출신 성분만큼이나 모순된 과정을 거치는데, 시마자키는 안보투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면서도 강단 사회주의자 교수 밑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배우는 대학원생이었다. 그는 이론적으로는 전학련 투쟁가들보다 훨씬 세련된 면모를 갖췄지만, 이를 혁명 운동에 접목시켜야 한다는 관념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 중반, 일본의 급진파는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요요기파(공산당사가 요요기역 인근에 있었다)와 반요요기파로 완전히 분화되어 대립하던 시기였다. '공산당 무오류'를 주장하는 요요기파를 급진적 학생들은 극도로 경멸했고, 반대로 요요기파는 이들을 '극좌 트로츠키스트'로 매도했다. '극좌 트로츠키스트'로 매도된 이들도 실상 내부를 보면 그들의 헬멧 수만큼이나 다양한 섹트가 있었고, 대립, 심지어는 살인까지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분화 정도만 따지자면 세계 어느 급진 진영보다도 다양했다.


이들은 1960년 안보투쟁을 필두로, 1961년 정폭법 반대, 1962년 대관법 투쟁, 1963년 원자력잠수함 기항 저지투쟁, 미소핵실험 항의, 1964년~65년 한일협상 저지투쟁(그렇다, 일본 좌익은 한일협상이 자본주의적 이해에 기반한 반민중적 협상이라고 평가했다) 등 다양한 투쟁을 벌였다.

언뜻 초식동물처럼 보이는 현재의 일본 급진세력이 사실 아사마 산장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스탈린주의자부터 적군파테러리스트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사회 곳곳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좌익으로 분류되는 이들의 활동에 유독 '올림픽 반대 투쟁'은 없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을 오쿠다 히데오는 파고들어 소설화했다. 2권에서 시마자키 구니오는 도쿄대의 좌익 동아리와 조우하는데, 이들을 오쿠다 히데오는 '유치한 수준에서 혁명 놀이 하는 그룹'으로 평가한다. 좌익 동아리 리더는 올림픽이야 말로 일본 자본주의 상부구조 완성에 있어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올림픽'이라는 프로파간다를 해체하려다 역풍을 맞으면 좌익은 100년 동안 미움을 받을 것이라며 전략과 전술을 혼동한다. 그러면서도 다이나마이트를 요구하는 소아병적 발상을 보인다. 이런 소아병적 발상이 적군파로, 그리고 아사마 산장의 살인 사건으로 이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외로운 혁명을 수행하던 시마자키 구니오는 평범한 대학을 나와 보통의 사고방식을 갖춘 형사의 총에 맞아 쓰러진다. 시마자키 구니오가 공안부 형사의 총에 맞는 것이 아니라는 점, 이것이야 말로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룬 일본은 좌익들의 저항을 70년 초 완전 분쇄하고 거품경제로 접어든다. 전공투로 칭해지던 그 거대한 저항은 그 후 50년간 침묵하게 된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411688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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