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정정희 지음 / 세계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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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크리스, 이곤, 혜리, 미나 각각의 시점을 이동하며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데, 이렇다 할 스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때 그때 감각적인 사고와 몸짓들이 나열된다. 

이들의 공통점이라 하면 뿌리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일까. 크리스는 미국인 양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밑에서 컸고, 혜리는 고아원에서 자라다 입양되었다. 이곤과 혜리는 어머니쪽에서 적극적으로 바람을 피운 케이스이다. 특이한 점은 넷 다 출생으로 부터 비롯된, 어찌보면 불행한 유년기라고 해도 무방한 가정사를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애정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진지하지 못하다. 기껏 관계의 끈을 유지하는 것은 성적 욕망의 냄새를 풍기는 동물적인 것일 뿐. 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세련되게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듯 하다. 어쩌면 욕망은 고통과 번민 속에서 갈고 닦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품 속에서 중국음식, 마리화나, 재즈와 같은 감각적인 이미지는 고향, 할머니, 결혼과 같은 전통적인 이미지와 동등한 권리를 주장한다. 덕분에 모두 같은 크기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무가치하게 보인다. 오직 남는 것은 현재와 찰나이다.

96년도 제5회 작가세계 문학상 수상작으로 세기말을 앞 둔 남한 땅에 일시 불었던 퇴폐적이고 감각적인 분위기를 제법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하지만 시간을 견뎌내는 힘도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오렌지>는 작품이 포착한 당시 세태와 같이 빠르게 읽히고, 빠르게 잊히는 소설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40049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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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밴드왜건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4
쇼지 유키야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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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은 도쿄 - 진보초 인근으로 추정되는 곳- 에 자리잡은 헌책방이다. 메이지 시대부터 3대째 이어오는 이 헌책방 이름은 <도쿄밴드왜건>, 당주는 올해로 79세가 된 훗타 칸이치다. 

훗타 칸이치의 아내 훗타 사치는 76세로 사망했지만 성불하지 못하고 이 헌책방 주위를 떠돌며 가족들 이야기를 들려준다.(화자)

칸이치와 사치의 외아들 가나토는 올해 60이 되었고, 긴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로커이다.

가나토는 정실부인에게서 아이코와 콘을 낳았고, 밖에서 아오를 낳아왔다.

아이코는 화가이자 미혼모로 초등학교 6학년인 카요를 키우며 혼자 살아가고 있고, 콘은 34세로 한때 대학강사를 했지만 지금은 자유기고를 생업으로 삼고 있다. 아내는 동갑이자 전직 스튜어디스인 아미이고, 둘 사이에 4학년 남자아이 켄토가 있다. 마지막으로 26살이 된 아오는 여행사 투어가이드이다.


작품은 도쿄밴드왜건을 잠깐 소개한 뒤, 사계절로 이뤄진 네 개의 장을 할애하여 소소한 에피소드를 연속으로 엮어 나간다. 


매일같이 헌책방에 두 권의 두꺼운 백과사전을 두고 학교로 가는 초등학교 1학년 소녀의 비밀(자동문이 감압식이라 무게를 얻기 위한), 그 소녀를 안아서 올려주겠다며 매일같이 기다리는 수상한 경비(사실은 친할아버지), 바람둥이 아오를 찾아온 마키하라 미스즈라는 미모의 아가씨는 운 이유(그녀는 카요와 배다른 자매인데 나중에 아오와 결혼), 우연히 양로원에 기증한 오래된 수필집을 읽고 가출을 감행한 노부인(작가와 노부인은 서로 아는 사이였는데 어렸을 적 작가가 노부인을 질투한 나머지 그녀의 브로치를 신사 나무에 던져버렸다는 이야기를 읽고 찾아나섬), 마지막으로 아오의 친어머니가 깜짝놀랄 만큼 유명한 여배우였다는 이야기 까지 소설은 연속극 대본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드라마적 스토리텔링을 이어간다. 실제로 작가는 "그 시절 많은 눈물과 웃음을 거실에 가져다준 텔레비전 드라마에"라고 헌사를 바치고 있다.


2006년 작품이 발표된 후 독자들이 후속편을 읽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하자 2007년에는 <쉬 러브스 유 - 도쿄밴드왜건>가 발표된다. 따뜻하고 소소한 이야기들이라 부담 없이 읽힌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선의와 아름다움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고 싶은 날 읽으면 적당할 것 같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396253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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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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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낮과 밤, 아침과 저녁 해서 넉넉하게 스물네 시간이나 되는 하루가 다 가도록 아파서 죽거나, 자동차 사고로 죽거나 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문득 깨닫는다. 그 다음 날이 되어도 사람들은 죽지 않았다. 죽음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지 않기로 한 듯 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오래지 않은 시점이었다.

곳곳에서 정체와 혼란이 시작되었다. 먼저 병원과 요양원의 방들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장례업계는 당장 할 일이 없어졌다. 종교계 역시 당혹스러워했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는 것이고, 부활이 없으면 그 종교의 근간도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보험업계와 가입자도 곤란해졌다. 결코 죽지 않는다면 생명보험에 계속 돈을 지불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죽어가긴 하지만 죽지 않는 사람들이 차곡차곡 한 켠에 쌓이면, 연금도 고갈될 터였다.  

그 때 누군가가 국경 밖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데리고 나가면서 해결의 물꼬가 트인다. 국경을 나가는 즉시 죽음이 찾아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국경 밖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고, 이웃 국가들은 격렬히 항의했다. 마피아는 돈 냄새를 맡고 '죽어가는 사람 실어 나르기'를 독점적인 사업 영역으로 삼기 위해 정부와 협상을 벌였다.


몇 달이 흐른 어느 날, '죽음'이 방송국 사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보라색 편지에는 '죽음'이 일시 일을 멈췄었다는 것, 이제 다시 '죽음'을 가동시킬 것이라는 것, 대신 일주일 전에 통보해주겠다는 것 등이 쓰여 있었다. 보라색 편지는 우편배달부의 손을 거쳐 사람들에게 배달되었다. 사람들은 죽음을 예고하는 편지를 받고 불안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음에게 편지 하나가 반송되어 되돌아오는 사건이 일어난다. 죽음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다시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편지는 되풀이하여 돌아왔다. 죽음은 편지 수신인에게 흥미를 느낀다. 그는 그저 그런 첼리스트였다. 죽음은 그를 스토킹하고, 그를 분석했다. 하지만 왜 그에게 죽음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지는 알 수 없었다. 결국 죽음은 뼈만 앙상히 남은 자신의 모습을 살로 감싸 여자의 모습으로 변화시킨 후 남자 곁에 나타난다. 죽음은 남자에게 연주를 부탁한다. 연주를 끝낸 첼리스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이 그렇게 훌륭한 연주를 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여자를 바래다 주겠다고 했지만 죽음은 거절하고 남자와 몸을 섞는다. 남자가 잠든 후 죽음은 보라색 편지를 태워 없앤다. 죽음은 침대로 돌아가 두 팔로 남자를 안았다. 한 번도 잠을 잔 적이 없는 죽음은 잠이 자신의 눈까풀을 살며시 닫는 것을 느꼈다.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의 눈이 멀고, 또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이 눈을 뜬 것처럼, 이번 <죽음의 중지>에서는 이유 없이 죽음이 사라졌다가, 별다른 개연성 없이 다시 나타난다. 


작가는 비트겐슈타인의 다음과 같은 말을 권두에 인용해 놓았다.


예를 들어 죽음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해 보라.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언어적 영역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정말 이상한 일일 것이다. 


죽음이란 존재의 종말이다. 존재의 종말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유전자의 명령대로 새로운 씨앗을 뿌리고 잉태하고 낳아서 기르지만, 어쨌든 개체의 소멸은 부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개체의 소멸은 그 자체로 존재의 無化로서, 알 수 없으므로 공포스럽고, 설명할 수 없으므로 절망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체의 죽음을 사회의 죽음으로 확장시킬 때, 죽음은 다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개체의 죽음이야 말로 사회의 영속성을 담보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다.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의지했던 종교가 사실은 죽음을 전제로 구축된 불완전한 건축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죽음과 관련한 끊임없는 변증법적 아이러니가 반복되며 삶이 무엇인가 하는 역설적 의문이 솟아난다. 


무료한 토요일 당직을 이 책 덕분에 잘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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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문
제임스 패터슨 지음, 임정희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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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는 금융가 코너, 베스트셀러 작가 제프리 등과 연애를 하면서 결혼 약속을 받아낸 뒤에 어김없이 그들을 살해했다. 보험금은 역외 계좌를 이용해 세탁했다. 일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그녀의 행동이 FBI의 의심을 불러 일으켰고, 크레이그 레이놀즈 요원이 보험설계사 오하라로 신분을 위장해 접근한다. 하지만 오하라 역시 노라의 외모에 반해 정신을 못 차리는 상황이 발생한다. 직속 상관이자 전처인 수잔의 노련함 덕에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크레이그는 그녀를 체포해 기소하려 하나, 그녀가 개설한 역외 계좌에 엮여 있는 검은 돈들의 주인이 힘을 써서 풀려나고 만다. 하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복수심에 불타는 코너의 여동생 리찌였다. 


놀라운 미모를 앞세워 부유한 남성에게 접근한 뒤 차례로 살해하는 냉혹한 살인마 노라와, 그를 추적하는 FBI 요원 크레이그 레이놀즈에 관한 이야기이다. 


국내에서는 그다지 인기가 높지 않지만 제임스 패터슨은 전 세계에서 가장 책을 많이 팔아치우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소설을 발표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특정 작품이 압도적인 찬사를 받는 경우는 없지만 킬링 타임 용으로 일정 수준 이상은 판매되기 때문에 인세 수입이 한 때 축구선수 메시의 수입을 넘어섰다는 말도 있었다. 

우먼스 머더 클럽 시리즈인 <해프문 베이 연쇄살인>의 밋밋한 구성과 전개 때문에 좋은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허니문> 역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없다. 이렇다 할 반전 없이 밋밋하게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도 그렇고, 구성에 공을 들인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385821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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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의 그림자
스테파니 핀토프 지음, 이영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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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경찰인 사이먼 질은 제네럴슬로컴 호 사고로 약혼녀 해나를 잃는다. 극심한 고통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한해 뒤 사이먼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한적한 시골 마을인 뉴욕 주 돕슨으로 전근을 신청한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친척 집에 묵으러 온 세라 윙게이트라는 20대 초반 여성이 처참히 살해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녀는 바너드 칼리지를 졸업한 뒤 컬럼비아 대학 수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논문을 2편 완성했고, 최근에는 리만 가설에 매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건 현장 주변을 조사하던 사이먼은 범인이 그녀에게서 전리품으로 빼앗았다가 도주 과정에서 놓친 것으로 보이는 목걸이 로켓을 습득한다. 로켓을 여니 거기에는 중년 남성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사진은 5년쯤 전부터 잘 쓰이지 않는 우드베리형 제판법으로 인화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단서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뒤 전보가 한 통 도착한다. 돕슨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알고 있다는 내용이었고, 서명은 엘리스테어 싱클레어로 되어 있었다. 엘리스테어 싱클레어는 컬럼비아 대학 범죄학자였다. 그는 마이클 프롬리라는 범죄자를 갱생시키는 일종의 실험을 진행중이었는데, 프롬리가 평소 품었던 망상과 사건 현장이 매우 흡사하다는 것, 그리고 그가 최근 실종이라는 점에 비춰볼 때 프롬리의 범행이 아닐까 하는 의심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작가 스테파니 핀토프는 자신이 졸업한 컬럼비아 대학과 뉴욕대학을 공간적 배경으로 1905년도의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재현해냈다. 1904년에 일어난 제네럴슬로컴호 사건, 시장 선거와 관련한 부정, 사진 인화 기술의 변화, 리만 가설에 대한 학계의 관심, 범죄자의 행동과 심리를 학문적으로 해석하려는 움직임 등에 대한 충실한 고증은 소설을 더욱 사실적으로 만들어준다.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점이 높이 평가 받아 2010년 에드거 상 신인 상과 워싱턴 어빙 상, 애거서 상, 앤서니 최우수 신인 상을 수상했고 매커비티 상 최우수 히스토리컬 픽션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소설은 엘리스테어가 연구하던 프롬리를 유력한 용의자로 삼아 전반부를 이끌어 간다. 하지만 그가 시체로 발견되면서 사건은 일시 미궁에 빠진다. 하지만 엘리스테어의 연구비가 어디론가 새나가고 있었다는 것과, 도박에 빠져 그 돈을 횡령한 것으로 의심되는 연구원이 나타나면서 혹시 사망한 세라는 횡령을 알아챈 것 때문에 살해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이 떠오르면서 사건이 해결된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383475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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