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을 돌리다 모금행사를 하는 프로그램을 볼 때면 돌리던 채널을 멈추고선 가만히 화면을 응시하게 된다. 나는 이토록 편하게 소파에 자리하고 있는데 화면 속 이들에게는 참으로 가혹하고 안타까운 사연들만이 이어지고 있는 바, 화면을 보면서 가만히 전화를 하게 된다. 몇 분 걸리지 않는 이 시간으로 그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이렇게 함으로써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일상을, 그들을 대신해서 보내고 있는 나를 위한 위안이면서도 면죄부이기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특히나 아픈 어린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아이들에게 대체 왜 이토록 가혹한 병을 안겨 주시는 것인지, 나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라도 오랜 시간 이들을 마주하는 것을 애써 외면하곤 했다. 아픈 아이들을 보면서 나에게 밀려드는 왠지 모를 죄책감을 회피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이렇게 나마 외면하면 그 아이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잊어버릴 수 있어서였을까? 딱히 어떠한 이유는 없다손 하더라도 왠지 그 아이들을 그저 마주하면 안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이 함께 울어 주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제 난 더 이상 그런 환자가 아니에요. 골수이식 수술이 끝난 후 느꼈어요. 내가 더 이상 의사 선생님들을 기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요. 매일 아침 뒤셀도르프 선생님이 날 진찰할 때마다, 선생님을 기쁘게 해줄 마음이 없는지 난 실망만 안겨 드리곤 해요.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날 쳐다봐요.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것처럼요. 하지만 난 열심히 수술 받았다고요. 난 얌전하게 있었어요. 마취할 때도 가만히 있었고, 아파도 소리 지르지 않았고, 주는 약도 다 받아먹었다고요. –본문
이 책 속 주인공인 오스카가 딱 그러한 아이였다.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백혈병이 걸렸고 현대 의학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모든 것을 해보았지만 더 이상의 가망이 없는 아이.
이 아이의 존재만으로 눈물을 글썽이게 만드는 이야기는 오히려 오스카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담담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니 살아있는 동안 우리 모두의 인생을 장미 빛으로 물들여 가면 된다고 말이다.
“장미 할머니, 할머니가 좋아하는 하느님은 왜 페기와 나 같은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걸까요?”
“정말 잘하시는 일이잖니, 오스카. 너희가 없으면 삶이 이토록 아름답지는 않을 테니까.”
“아니 내 말을 오해하셨네요. 하느님은 왜 우리처럼 아픈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거냐고요. 이유는 둘 중 하나일 거예요. 타고난 심술이 많거나 병을 고칠 능력이 없거나.”
“오스카, 병이란 건 죽음과 마찬가지란다. 정해진 사실일 뿐이야. 천벌이 아니지.” –본문
12월 19일부터 하루를 10년처럼 살고 있는 오스카는 10대가 되고 20대가 지나 그의 첫사랑을 마주하게 되고 때론 그 사랑에 대한 오해가 발생해서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또 다른 하루 동안은 병원에서의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 어느 날은 부모님을 미워하기도 하며 그의 나이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훌쩍 지나 있었으며 그러면서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오스카는 마치 100년을 산 사람처럼 자신을 둘러싼 주위의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심지어 그를 통해서 세상을 빛나게 하고 있었다.
오늘 날 백 살이 되었어요. 장미 할머니처럼요. 계속 잠이 쏟아지지만 기분은 좋아요.
난 엄마랑 아빠에게 삶이란 참 희한한 선물이라고 얘기를 해줬어요. 사람들은 처음에 이 선물을 과대 평가해요. 영원한 삶을 선물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중엔 과소평가해요. 지긋지긋하다느니 너무 짧다느니 하면서 내동댕이치려고 하죠. 그러다 결국 선물받은 것이 아니라 잠시 빌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빌린 것이니 잘 써야죠 –본문
처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오스카에게 장미할머니가 있어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스카가 살아갈 120여년의 시간을 오롯이 그의 곁에서 함께 해줄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든든할까, 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책을 덮는 순간 오스카를 만난 것 자체가 행운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그럴 것이다. 오스카카 남긴 열 통 남짓한 편지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오스카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서 곱씹어 보게 된다. 원망과 비난이 아닌, 그렇다고 자신에 삶에 대한 막연한 체념이 아닌 나름대로의 진리를 남기고 간 오스카는 오늘 내가 이렇게 멍하니 보내고 있는 것에 대해 ‘오늘은 정말 별로였어요’라고 이야기할 지 모른다. 내가 남길 수 있는 편지가 얼마나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간 동안에 최대한 많은 날들을 장미 빛으로 물들여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그들에게 무언가를 해줘야 할 것 같다는 무거운 마음에서 시작된 책은 오히려 그들에게서 삶의 경건함에 대해 배우며 편안해지는 기분이다. 짧지만 그 안의 따스한 인생의 조언이 담겨 있는 오스카의 편지 덕분에 오늘을 더 힘차게 보내봐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