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이 별다른 것을 추가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저자 역시 세번째 장에서 '모든 사람은 이미 독서법을 알고 있다'고 제목으로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말이다. 정말 그러나... 정말 알고 있을까?

저자 소개란을 보니 박/민/영 인문작가. 문화평론가로 소개되어 있다. 지은 책만 봐도 솔솔치 않다. 

<인문학, 세상을 읽다> <이즘:인간이 남긴 모든 생각> <즐거움의 가치사전:인간의 욕망하는 모든 것> <공자 속의 붓다, 붓다 속의 공자> <논어는 진보다> <행복한 중용> <논어로 배우는 한자> 등이다. 책 제목을 들여다보니 공자. 논어, 가치, 인문학, 중용 등의 중국고전과 인문학 관련 용어들이 눈에 띈다. 아마도 인문학자가 맞는 가보다. 
























처음 접하는 저자라 이 책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발행년도 찾아가 보았다.

초판은 7쇄까지 나갔고, 이번판은 2판 1쇄본으로 2012년 6월 5일 발행본이다. 이런책을 두고 스테디셀러라고 한다. 2005년에 초판이 나와 7쇄까지 인쇄되었고, 2판에서 다시 발행되고 있으니 저자로서는 여간 기쁜일이 아닐 것이다. 다 아는 책 읽는 법을 소개한 책이 이토록 오랫동안 인기를 누리고 2판까지 나올 정도면 일반독자들은 책 읽는 법을 알지 못한다는 반증은 아닐런지... 그러나 알고는 있어야 한다. 책 읽는 법을 배운다고 해서 책을 읽어지지는 않는 다는 것.. 공자는 논어에서 아는 것이 좋아하는 것보다 못하고, 좋아하는 것이 즐거운 것보다 못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독서를 하려면 독서가 즐거워야 한다. 즐겁지 않는 독서... 도파민이 분비되지 않고, 엔돌핀이 나오지 않는 독서는 따분하고 지겨운 노동일 뿐이다. 아예 쓸모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 스러운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아무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모티머 애들러의 <독서의 기술>에서 소개한 연애편지 읽기를 소개한 부분이 공감백배다. (애들러의 책은 사서 모을 필요가 있다. 특히 교사나 강사들은 더욱 그렇다.)














사랑에 빠져서 연애 편지를 읽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실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읽는다. 그들은 단어 하나하나를 세 가지 방식으로 읽는다. 그들은 행간을 읽고 여백을 읽는다. 부분적인 관점에서 전체를 읽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부분을 읽는다. 문맥과 애매함에 민감해지고 암시와 함축에 예민해진다. 말의 색체와 문자의 냄새와 절의 무게를 곧 알아차린다. 심지어 구두점까지도 그것의 의미하는 바를 파악해 내려 한다.

연애편지 읽기는 독서의 거의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다. 애들러가 언급하지 않는 '다시 읽기'도 연애편지 읽기의 중요한 수단이다. 또한 '사랑하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읽기'도 뺄수 없는 방법이다. 박민영은 연애편지 읽기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연애편지를 읽어 본 경험을 잘 상기하면, 독서의 원초적인 필요와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연애편지는 글이 개인과 내밀한 관련을 가질 때, 사람을 얼마나 감격시키고 흥분 시킬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32쪽)

독서의 방법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독서에 대한 동기부여이다. 왜 책을 읽어야 하고, 책을 읽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그려주어야 한다. 방법은 논리가 아닌 '스토리텔링'으로 말이다. 논문식의 강압된 주장은 오히려 부작용이 일어난다. 요즘 유행하는 귀납법적인 설득 또는 넛지 또는 간접적 권면의 방법을 쓴다면 좋을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잘 간파하고 있는 것 같다. 8장에서 소개한 어떤 거지의 에피스도는 필자에게 감명을 주었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어느 가난한 시인이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구걸하는 거지를 발견한다. 적선하고 싶지만 돈이 없다. 그래서 미안한 생각에 가지고 있던 책 한 권을 주었다. 자신이 읽고 있던 '인생론'이었다. 거지는 어떨떨하게 책을 받았지만 읽을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한 달 후 시인은 그곳에서 가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심심해하던 거지가 책을 한 두장씩 읽다가 삶의 용기를 얻어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이다. 거지가 거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몸의 장애가 아니라 마음의 장애 때문이었다. 그는 한 권의 책을 통해 마음의 장애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얻게 된 것이다.(59-60쪽 요약 정리)

이 글을 읽고 가슴이 뭉클 해지면서 책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새삼 배우게 된다. 275쪽까지 있는 작은 책이다. 그러나 내용은 작지 않다. 수천권을 읽은 나에게도 감회가 새로운 흥분을 선사해준 책이다. 책 읽는 방법이야 책 안에 가득 담겨 있으니 읽어 보니 알 것이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책의 가치를 아는 것이다.


오늘 문득 공자의 논어 학이편이 생각난다.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공자가 말했다. 이미 배운 것을 때때로 반복하면 이 또한 기쁜 일이 아닌가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人不知而不온이면 不亦君子乎아.

인불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화내지 않는다면 이 또한 군자라 하지 않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가 온다 리쿠(恩田陸)


64년생이다. 참 특이한 그녀의 작품들에는 매력이 있다. 어찌보면 일관성도 없어 보이는 글인데도 읽고 있으면 지루하거나 따분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 뭔가에 홀린듯한 매력적 글이 혼을 빼어 놓는다.  아직 몇 권을 읽아보지 않아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앞으로 이분의 책을 더 많이 읽게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의 존재와 부재로서의 철학


우스꽝 스럽게도 중세철학은 철학사가들이 주장한 것처럼 신학의 하녀일뿐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똑똑해 신을 멋지게 증명해낸 르네 데카르트의 사유철학 때문에 신을 추방하는 꼬투리를 잡았다. 이뿐 아니라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란 멋진 이론 때문에 합리성과 인간 자율성을 만들어낸 18세기 합리주의자들이 득세할 수 있었다. 권력의 헤게모니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 숙주처럼 기생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철학에서 무슨 '신'을 거론하느냐고 따져 묻는 이들이 있다면 "그대여 진정한 철학은 신학이라네"라고 말하고 싶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대가로 불리는 소크라테스의 사형 이유는 신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무신론이 그의 사형 이유인 것이다. 플라톤은 스크라테스의 변명을 기술하면서 이 부분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유명한 말을 남긴다. '악법도 법이다.' 이 말의 저의가 무엇일까? 많은 철학자들과 법학자들은 이 고매한 문장을 풀려고하고 우려먹으며 수천년을 지내왔지만 아직도 모호한 문장이다. 진정한 철학은 결국 신논쟁이다. 이것은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구의 철학만을 한정하지 않는다. 영국은 아직도 신의 대리자가 있다. 일본도... 중국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무너지기는 했지만 지금까지의 역사는 신의 역사이다. 태국도 아직도 신의 아들이 다스리고 있다. 그러니 신을 빼고 철학하는 것이야말로 무식하기 그지 없는 발상이다. 그러니 제발 신을 빼지는 말게나. 















중세철학의 근간은 신종재증명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이미 존재하는 신을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덧입혀지는 은총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신학대전>에는 신존재증명을 피하지 않았다. 이유는 신학을 피하고서 철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퀴나스의 신존재증명은 현대적 언어를 빌리면 '합리적 방법'을 사용했다. 순차적 논리를 따라 신을 증명해 내는 방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론을 빌려와 증명했다. '우주론적 증명'이라 불리는 이 방법은 세상의 모든 존재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 첫 이유 또는 원인은 '신'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신'에 의해 파생된 것이다. 논리적으로 더듬어 올라가다보면 제일원인으로서 '신'이 존재할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합리론적 증명은 후대에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경험주의를 여는데 기여를 하게 된다. 즉 무신론의 이론적 기반을 이루는 것이 신이 있다는 신존재증명이라는 아이너리다.


















중세철학에서 한 명더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프로슬로기온>을 쓴 컨터배리 안셀름(라티식으로는 안셀무스)이다. 안셀무스의 철학은 단순 명료하다. 그러나 그의 신존재증명은 합리적 추론을 넘어 비약을 사용한다. '그 이상 사유될 수 없는 것'으로 신을 최종적 존재로 규정한다. 즉 신을 넘어 설 수 있는 이성은 없다는 것이다. 합리적추론을 통해 신에게까지 접근하지만 결국 신존재증명은 인간의 이성을 넘어선 것임을 증명한다. 이러한 안셀무스의 신존재증명은 후에 일어난 실존주의 그 아버지인 키에르케고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비약은 이미 안셀무스 안에 있었던 것이다. 비약은 신에 대한 경배와 찬양으로 나타하게 되고, 종교적인 것이 철학적인 것이 된다. 안셀무스의 철학은 앎-지식과 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알 수없다면 신이 나이고 신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약이 들어설 수 없어 보이는 존재증명이지만, 결국 이성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그는 주장하게 되는 모순을 담고 있다.


















근대로 넘어 오면서 신존재 증명은 곁길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계몽의 주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추방당하기 시작된 신학은 신을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합리주의자들은 경험될 수 없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는 추론을 통해 신을 추방할 이론적 근거를 닦았다. 그러나 신을 증명하고 싶었던 이들은 합리론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감정'이다. 감정철학의 대변자는 당시 독일 귀족 사교계를 이끌었던 슐라에르 마허이다. 그는 <종교론>이란 책에서 종교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지금까지 신을 합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을 반대하고, 비합리적인 방법 즉 느끼는 신으로 슬쩍 바꾸어 버린다. 그에게 있어서 '경험'은 매우 중요한 단어인데, 감정으로 신을 경험하는 것이 진짜 신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부터 신은 합리론을 버리고 감정적인 영역으로 도망쳐 들어간다. 슐라에르마허가 살았던 시대는 합리주의 사고가 철학을 주도하고 있었다. 철학사의 거장으로 알려진 헤겔은 슐라에르마허와 동시대인으로 두 사람은 서로 견제하며 경쟁했다. 그러나 헤겔은 당시에 알려지지 않는 무능한 약자에 불과했다. 

슐라에르마허 이후 철학은 두 갈래로 분명하게 갈라서고 종교에서 철학이 독립하여 독자적인 학문으로 자리를 잡게 되고, 이후에 철학과 과학은 늙은 영감이 되어버린 신학을 구석진 방에 가두고 맹공격을 퍼붓기 시작한다. 몇달 전에 출간된 도킨스와 몇몇 사람들이 공저한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하는가>에서 종교를 무식하고 오류범벅인 무식한 이야기로 치부해 버린다. 
















19세기는 진화론과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축이 철학사와 경제사를 이끌어간다. 세상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 되었다는 주장을 통해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철학적으로 확인하려 한 것이다. 진화론의 바닥에는 신을 존재를 부정하려는 무신론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창조라는 비약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산물로서의 인간을 강조했다. 또한 신의 완벽한 창조가 아닌 서서히 진화함으로 인간은 완벽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진화론은 우생학을 만들고, 덜 진화한 아프리카와 아시아인들을 2류 3류 종으로 만들어 놓는다. 제국주의 확장을 위한 적절한 이론을 다윈에 제공해준 셈이다. 다윈 덕분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양심의 가책 없이 동물같은 존재로 자위하면서 노예로 잡아 팔기 시작했다. 아픈 역사이지만 하나의 이론이 가져온 파귀적인 힘이다. 
















진화론의 현대적 의미는 인종청소라 불리는 제노사이드이다. 인종청소의 근거는 생물학적 이유에 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의 근거는 그들이 중세에 게토라는 한정된 공간에 머물렀다는 것이고, 인종학적으로 아리아인이 가장 탁월한 민족이라고 생각한데 있다. 휴스턴 스튜와트 쳄벌린(Houston Stewart Chamberlain)과 같은 19세기 인종차별주의적 사상가들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세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영향력을 미쳤다. 보스니아 사건뿐 아니라 나치, 유럽의 아메리카 인디안 공격 등 수많은 제노사이드는 존재한다. 처절하고도 슬픈 역사의 단편들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인간은 다른 인간을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뉴욕대학의 심리학 교수로 재직중인 폴 비츠가 재미난 책 한권을 출간했다. <무신론의 심리학>이 그 주인공이다. 폴 비츠는 전통적인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지만 기독교를 버리고 출세를 향해 세상으로 나아간다. 독립적이고 존경받는 학자가 되기위해 열심히 살아간다.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심리학 내면에 숨겨진 무신론적 심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프로이트 등 심리학의 대가들의 아버지를 연구하게 되면서 치명적인 결함을 알게 된다. 그들의 아버지는 '결함이 있는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들은 아예 처음부터 아버지가 없었거나, 폭언과 폭력과 음주로 인하여 차라리 없으면 더 좋을 아버지들이었다. 이러한 아버지에 대한 왜곡된 부정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의 인상을 갖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주장은 단지 무신론에대한 이론적인 비평이나 왜곡이 아니다. 아버지로서의 왜곡된 삶을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진정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신존증명으로서의 철학,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의 아버지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그대는 참다운 아버지상을 던져주고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따뜻한 마음으로 일기 읽기


난중일기를 읽었다. 무패에만 집중하느라 사소한 일상은 잊어버린 인물이 이순신이다. 난중일기에는 영웅 이순신이 없다. 책을 다 덮고 나면... 위대한 영웅은 다르다고 말하게 될 것이지만, 한 장 한 장의 일기 속에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속내가 드러나 있다. 김구의 <백범일지> 역시 사소한 풍경의 연속이다. 그러나 약간의 과장된 표현이 눈에 들어온다. 시간이 지나면 사실은 역사가 되고, 역사는 전설이 되고, 전설은 신화가 된다. 이들도 그렇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신화가 되기까지의 평범한 삶은 그들에게도 있었다는 것이다.



유성룡의 징비록,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특이한 책들이다. 그저 조선의 일상을 보고 그 당시의 시대상을 볼 수 있다는 자료로만 참고하려했던 나에게 누군가는 '그 사람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며 읽어야 한다'고 충고해 주었다. 순간 깜짝 놀랐다. 아 맞다. 그 사람도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이구나. 세속을 벗어난 도인이 아니구나. 그 한 마디가 징비록을 편견에 사로잡힌 전혀 다른 책으로 보게 했다.




안네의 일기는 순수하고 수수하다. 자신은 나중에 글을 써서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일기에 적었다. 그리고 그는 나치에 발각되어 온 가족이 죽임을 당할 때 같이 당해야 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녀는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미 그 꿈은 이루어졌다. 다른 글이 아닌 바로 자신의 일기가 후에 '대박'을 일으킬 밀리언 셀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이 사실을 알고 웃고 있을 것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조선을 읽는 중요한 사료이다. 조선인의 눈으로 중국의 선진문물과 풍경을 글로 담아냈다. 좁다란 한반도에서 태어나 자란 박지원에게 중국은 도전이자 운명이었다. 시대의 지성을 대표할만한 그의 눈에도 중국은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일기는 기록되어 갔다. 





겨우 3개월이다. 어느 시골 마을 신부로 부임한 신부는 가난과 욕망, 육체적 정신적 나태에 빠진 마음의 모습을 목격하고 깊은 고뇌에 빠져든다. 그리고 '악'과 싸우기 위해 용기를 얻을 양으로 일기를 써 내려간다. 교회의 부패와 관료주의를 비판했던 베르나노스는 이 책을 통해 나약하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 고결한 인간의 본성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서른에 대학교수가 되고, 딸이자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길지 않았던 삶을 살았던 위지안. 그녀의 영혼의 일기가 책으로 나왔다. 가슴을 저미게 만드는 영혼의 기록들...... 사치스럽다고 말하던 그 많은 것들이 꿈처럼 흩어져버린 



병원에서 암으로 판명되어 수많은 검사를 받을 때의 일이다. 

CT(컴퓨터 단층촬영, computed tomography)와 MRI(자기공명영상, magnetic resonance imaging) 같은 첨단 장비로 온몸의 구석구석 검사를 마친 뒤 이동용 응급침대에 실려 병실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남편의 얼굴이 천장을 가리며 나타났다. 

남편과 간호사들이 시트를 한 자락씩 들어 나를 침대로 옮기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첨단 장비 위에서 한참 동안 오들오들 떨며 누워 있다가, 푹신한 침대로 돌아와 이불까지 덮으니까 겨우 살 것 같았다. 그런데 침대의 어딘가가 이상했다.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 입원실 온도가 낮지는 않았지만, 침대 속에는 그 이상의 안온함이 있었다. 흡사 누군가가 누워 있다가 방금 빠져나온 듯한 감촉. 바로 짚이는 게 있었다. 남편에게 물었다. 

“이봐, 당신. 내 침대에 누워 있었지?” 

남편이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집에서 하던 장난을 병원에 와서까지 하다니.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끼어들었다. 

“조금 아까 침대에 눕는 걸 보고 제가 경고를 했죠. ‘보호자가 환자 침대에 눕는 건 규정 위반’이라고요.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하시더군요. ‘집사람이 유난히 추위를 타기 때문에 내 체온으로 미리 덥혀놓아야 한다’고요.” 

그 순간, 나는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신혼시절부터 최근까지의 일들이 말 그대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렇게 구박을 받아가면서도 내 자리에 누워 있던 남편. 그의 마음을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거의 매일, 그런 따뜻한 마음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을까.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을, 장난이라고 단정해버리고는 짜증만 냈다니. 

어쩌면 내 마음의 문이 좁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결혼기념일이나 생일에 그럴듯한 선물이나 받아야 남편이 나를 생각해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를 앙다물었는데도 자꾸 눈물이 흘러내렸다. 



일기... 나를 써내려가는 나의 역사.. 그리고 그들의 역사

나는 오늘도 일기를 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독, 영원한 타자로서의 인간


절대타자는 신을 두고 한 말이다. 쉽게 풀면 절대 가까이 할 수 없는 멀리 있는 존재란 뜻이다. 그래서 절대타자이다. 철학자들은 '절대타자'라는 말로 인간과 신의 존재를 격리 시켰다. 인간의 언어란 알고보면 별다른 의미도 없는 것도 많다. 에피쿠르스학파처럼 말장난만 잔뜩 늘어 놓기도 한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 문장으로 발신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령할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9


"적이 임진강을 건넜으므로,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종묘와 사직단 사이에서 머뭇거리다 도성이 포위되면 서울을 버릴 수 없을 것이고, 서울로 돌아올 일은 아예 없을 터여였다. ... 하지만 적들은 이미 임진강을 건넜으므로 그 말의 크기와 높이는 보이지 않았다." 19


말말말.... 말로 나를 세우기도하고, 엎기도하고 사람을 죽이기도하고 살리기도 한다. 그 말이 무엇이길래... 1636년 남한산성에서 말은 그렇게 돌았고, 또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말은 먹을 것이 없어 민초들의 초가지붕을 벗겨 삶아 주어 민초들에게 고통을 주었고, 생명을 앗아갔다. 그 말쟁이들이 타고온 말 때문에 말이다. 


"김류가 안주 한 점을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안주를 씹는 입놀림이 목소리에 섞여 들었다. 

-두 대감께서 참으로 고생이 많소이다." 237


고독에도 치유법이 있다. 그것은 말이 아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입은 살아 나불거렸던 남한산성의 말쟁들과는 다르다. 인간의 본질은 '고독'이다. 고독 때문에 태어났고, 고독으로 인해 살아간다. 고독은 삶의 에너지이다. 고독 속에서 인간은 창조적 능력을 갖게 되고, 그리고 태어난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이 쓸쓸함을 지우고 싶어한다. 어이러니하게도 '고립'이 '커뮤니케이션'의 원동력이 되는 셈이다." 8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사랑하면 고독해지는 법이니, 그녀에게 러브레터를 쓰기 위해 수많은 밤을 세우지 않았던가. 그러면 그럴수록 인생은 더 고독해지고 존재의미는 상실되는 것 같다. 


"증오로 마음을 불태우고 질투로 몸이 달아오를 동안은 고독감이 사라집니다. 사실 그런 감정 속에 

다음 고독'의 씨앗이 점점 자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게 바로 덫이죠. 이 덫에 걸리면 증오나 질투는 마음의 습관이 되어버립니다." 35


결국 고독을 피하는 것이 해답은 아니다. 고독은 피할수도없고 피하지도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고독은 본질인까.

셰리 터클은 문명의 이기를 통해 고독을 잠재우려는 것을 염려한다. 즉 이런 식이다. 직접 만나 이야기할 수 없으니 전화나 카톡을 통해 대화를 한다. 전화상으로 정말 좋은 인상을 갖게 되어 직접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무슨일이 일어난 것일까? 직접 만나고 나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기기를 매개로한 만남은 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직접 만나자 소통이 불가능해지고 만 것이다. 


소통의 도구였던 문명의 이기들이 이제는 소통의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매개체를 통해 간접적이고 피상적인 소통만을 추구하는 소통의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진작 중요한 실제적 소통은 불가능해진 것이다.



데이비드 리스만은 '고독한 군중'이란 아이러니한 문구를 만들어 냈다. 고독은 홀로 있는 것이다.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군중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군중은 고독한 개인들의 병렬구조일 뿐이다. 동일한 개인이 여럿이 모이는 결과 밖에 초래되지 않는다. 

군중은 피상적이고, 배타적이다. 개인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기보다 암묵적으로 알려진 보편적 행동양식을 취하고, 서로의 다름만을 확인할 뿐이다. 그래서 군중은 고독한 것이다. 고독한 군중은  사랑하거나, 공유하거나, 치유하지 않는다. 오직 일관된 목적과 행동양심만을 가지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으로 군중이 된다. 




빅터 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서에서>라는 책에서 운명에 관한 슬픈 이야기를 접한다.

"나는 우리 수용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수용서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았다. 그날 밤 자유를 향해 간다고 믿었던 우리 친구들은 트럭에 실려 그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막사 안에 갇힌 채로 불에 타 죽었다. 사진으로도 군데군데 불에 탄 동료들의 시선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또 다시 테헤란에서의 죽음을 생각했다." 115


"일요병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한 주일을 보내고 내면의 공허감이 밀려올 때,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람이 겪는 일종의 우울증이다. 자살의 상당수가 바로 이런 실존적 공허 때문에 일어난다.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우울증과 공격성, 중독성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면 그 저변에 깔려있는 실존적 공허에 대해 먼저 이해해야 한다." 179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홀로 서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아무도 책임져 주지 못한다. 우울증은 고독으로 인해 일어난 병이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하지만 고독은 인간의 본질이기에 답을 얻지 못한다. 우리는 늘 죽음의 수용서에서 살아가는 고독한 군중일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