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존재와 부재로서의 철학
우스꽝 스럽게도 중세철학은 철학사가들이 주장한 것처럼 신학의 하녀일뿐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똑똑해 신을 멋지게 증명해낸 르네 데카르트의 사유철학 때문에 신을 추방하는 꼬투리를 잡았다. 이뿐 아니라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란 멋진 이론 때문에 합리성과 인간 자율성을 만들어낸 18세기 합리주의자들이 득세할 수 있었다. 권력의 헤게모니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 숙주처럼 기생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철학에서 무슨 '신'을 거론하느냐고 따져 묻는 이들이 있다면 "그대여 진정한 철학은 신학이라네"라고 말하고 싶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대가로 불리는 소크라테스의 사형 이유는 신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무신론이 그의 사형 이유인 것이다. 플라톤은 스크라테스의 변명을 기술하면서 이 부분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유명한 말을 남긴다. '악법도 법이다.' 이 말의 저의가 무엇일까? 많은 철학자들과 법학자들은 이 고매한 문장을 풀려고하고 우려먹으며 수천년을 지내왔지만 아직도 모호한 문장이다. 진정한 철학은 결국 신논쟁이다. 이것은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구의 철학만을 한정하지 않는다. 영국은 아직도 신의 대리자가 있다. 일본도... 중국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무너지기는 했지만 지금까지의 역사는 신의 역사이다. 태국도 아직도 신의 아들이 다스리고 있다. 그러니 신을 빼고 철학하는 것이야말로 무식하기 그지 없는 발상이다. 그러니 제발 신을 빼지는 말게나.
중세철학의 근간은 신종재증명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이미 존재하는 신을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덧입혀지는 은총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신학대전>에는 신존재증명을 피하지 않았다. 이유는 신학을 피하고서 철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퀴나스의 신존재증명은 현대적 언어를 빌리면 '합리적 방법'을 사용했다. 순차적 논리를 따라 신을 증명해 내는 방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론을 빌려와 증명했다. '우주론적 증명'이라 불리는 이 방법은 세상의 모든 존재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 첫 이유 또는 원인은 '신'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신'에 의해 파생된 것이다. 논리적으로 더듬어 올라가다보면 제일원인으로서 '신'이 존재할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합리론적 증명은 후대에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경험주의를 여는데 기여를 하게 된다. 즉 무신론의 이론적 기반을 이루는 것이 신이 있다는 신존재증명이라는 아이너리다.
중세철학에서 한 명더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프로슬로기온>을 쓴 컨터배리 안셀름(라티식으로는 안셀무스)이다. 안셀무스의 철학은 단순 명료하다. 그러나 그의 신존재증명은 합리적 추론을 넘어 비약을 사용한다. '그 이상 사유될 수 없는 것'으로 신을 최종적 존재로 규정한다. 즉 신을 넘어 설 수 있는 이성은 없다는 것이다. 합리적추론을 통해 신에게까지 접근하지만 결국 신존재증명은 인간의 이성을 넘어선 것임을 증명한다. 이러한 안셀무스의 신존재증명은 후에 일어난 실존주의 그 아버지인 키에르케고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비약은 이미 안셀무스 안에 있었던 것이다. 비약은 신에 대한 경배와 찬양으로 나타하게 되고, 종교적인 것이 철학적인 것이 된다. 안셀무스의 철학은 앎-지식과 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알 수없다면 신이 나이고 신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약이 들어설 수 없어 보이는 존재증명이지만, 결국 이성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그는 주장하게 되는 모순을 담고 있다.
근대로 넘어 오면서 신존재 증명은 곁길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계몽의 주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추방당하기 시작된 신학은 신을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합리주의자들은 경험될 수 없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는 추론을 통해 신을 추방할 이론적 근거를 닦았다. 그러나 신을 증명하고 싶었던 이들은 합리론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감정'이다. 감정철학의 대변자는 당시 독일 귀족 사교계를 이끌었던 슐라에르 마허이다. 그는 <종교론>이란 책에서 종교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지금까지 신을 합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을 반대하고, 비합리적인 방법 즉 느끼는 신으로 슬쩍 바꾸어 버린다. 그에게 있어서 '경험'은 매우 중요한 단어인데, 감정으로 신을 경험하는 것이 진짜 신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부터 신은 합리론을 버리고 감정적인 영역으로 도망쳐 들어간다. 슐라에르마허가 살았던 시대는 합리주의 사고가 철학을 주도하고 있었다. 철학사의 거장으로 알려진 헤겔은 슐라에르마허와 동시대인으로 두 사람은 서로 견제하며 경쟁했다. 그러나 헤겔은 당시에 알려지지 않는 무능한 약자에 불과했다.
슐라에르마허 이후 철학은 두 갈래로 분명하게 갈라서고 종교에서 철학이 독립하여 독자적인 학문으로 자리를 잡게 되고, 이후에 철학과 과학은 늙은 영감이 되어버린 신학을 구석진 방에 가두고 맹공격을 퍼붓기 시작한다. 몇달 전에 출간된 도킨스와 몇몇 사람들이 공저한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하는가>에서 종교를 무식하고 오류범벅인 무식한 이야기로 치부해 버린다.
19세기는 진화론과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축이 철학사와 경제사를 이끌어간다. 세상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 되었다는 주장을 통해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철학적으로 확인하려 한 것이다. 진화론의 바닥에는 신을 존재를 부정하려는 무신론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창조라는 비약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산물로서의 인간을 강조했다. 또한 신의 완벽한 창조가 아닌 서서히 진화함으로 인간은 완벽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진화론은 우생학을 만들고, 덜 진화한 아프리카와 아시아인들을 2류 3류 종으로 만들어 놓는다. 제국주의 확장을 위한 적절한 이론을 다윈에 제공해준 셈이다. 다윈 덕분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양심의 가책 없이 동물같은 존재로 자위하면서 노예로 잡아 팔기 시작했다. 아픈 역사이지만 하나의 이론이 가져온 파귀적인 힘이다.
진화론의 현대적 의미는 인종청소라 불리는 제노사이드이다. 인종청소의 근거는 생물학적 이유에 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의 근거는 그들이 중세에 게토라는 한정된 공간에 머물렀다는 것이고, 인종학적으로 아리아인이 가장 탁월한 민족이라고 생각한데 있다. 휴스턴 스튜와트 쳄벌린(Houston Stewart Chamberlain)과 같은 19세기 인종차별주의적 사상가들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세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영향력을 미쳤다. 보스니아 사건뿐 아니라 나치, 유럽의 아메리카 인디안 공격 등 수많은 제노사이드는 존재한다. 처절하고도 슬픈 역사의 단편들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인간은 다른 인간을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뉴욕대학의 심리학 교수로 재직중인 폴 비츠가 재미난 책 한권을 출간했다. <무신론의 심리학>이 그 주인공이다. 폴 비츠는 전통적인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지만 기독교를 버리고 출세를 향해 세상으로 나아간다. 독립적이고 존경받는 학자가 되기위해 열심히 살아간다.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심리학 내면에 숨겨진 무신론적 심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프로이트 등 심리학의 대가들의 아버지를 연구하게 되면서 치명적인 결함을 알게 된다. 그들의 아버지는 '결함이 있는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들은 아예 처음부터 아버지가 없었거나, 폭언과 폭력과 음주로 인하여 차라리 없으면 더 좋을 아버지들이었다. 이러한 아버지에 대한 왜곡된 부정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의 인상을 갖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주장은 단지 무신론에대한 이론적인 비평이나 왜곡이 아니다. 아버지로서의 왜곡된 삶을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진정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신존증명으로서의 철학,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의 아버지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그대는 참다운 아버지상을 던져주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