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영원한 타자로서의 인간


절대타자는 신을 두고 한 말이다. 쉽게 풀면 절대 가까이 할 수 없는 멀리 있는 존재란 뜻이다. 그래서 절대타자이다. 철학자들은 '절대타자'라는 말로 인간과 신의 존재를 격리 시켰다. 인간의 언어란 알고보면 별다른 의미도 없는 것도 많다. 에피쿠르스학파처럼 말장난만 잔뜩 늘어 놓기도 한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 문장으로 발신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령할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9


"적이 임진강을 건넜으므로,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종묘와 사직단 사이에서 머뭇거리다 도성이 포위되면 서울을 버릴 수 없을 것이고, 서울로 돌아올 일은 아예 없을 터여였다. ... 하지만 적들은 이미 임진강을 건넜으므로 그 말의 크기와 높이는 보이지 않았다." 19


말말말.... 말로 나를 세우기도하고, 엎기도하고 사람을 죽이기도하고 살리기도 한다. 그 말이 무엇이길래... 1636년 남한산성에서 말은 그렇게 돌았고, 또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말은 먹을 것이 없어 민초들의 초가지붕을 벗겨 삶아 주어 민초들에게 고통을 주었고, 생명을 앗아갔다. 그 말쟁이들이 타고온 말 때문에 말이다. 


"김류가 안주 한 점을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안주를 씹는 입놀림이 목소리에 섞여 들었다. 

-두 대감께서 참으로 고생이 많소이다." 237


고독에도 치유법이 있다. 그것은 말이 아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입은 살아 나불거렸던 남한산성의 말쟁들과는 다르다. 인간의 본질은 '고독'이다. 고독 때문에 태어났고, 고독으로 인해 살아간다. 고독은 삶의 에너지이다. 고독 속에서 인간은 창조적 능력을 갖게 되고, 그리고 태어난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이 쓸쓸함을 지우고 싶어한다. 어이러니하게도 '고립'이 '커뮤니케이션'의 원동력이 되는 셈이다." 8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사랑하면 고독해지는 법이니, 그녀에게 러브레터를 쓰기 위해 수많은 밤을 세우지 않았던가. 그러면 그럴수록 인생은 더 고독해지고 존재의미는 상실되는 것 같다. 


"증오로 마음을 불태우고 질투로 몸이 달아오를 동안은 고독감이 사라집니다. 사실 그런 감정 속에 

다음 고독'의 씨앗이 점점 자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게 바로 덫이죠. 이 덫에 걸리면 증오나 질투는 마음의 습관이 되어버립니다." 35


결국 고독을 피하는 것이 해답은 아니다. 고독은 피할수도없고 피하지도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고독은 본질인까.

셰리 터클은 문명의 이기를 통해 고독을 잠재우려는 것을 염려한다. 즉 이런 식이다. 직접 만나 이야기할 수 없으니 전화나 카톡을 통해 대화를 한다. 전화상으로 정말 좋은 인상을 갖게 되어 직접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무슨일이 일어난 것일까? 직접 만나고 나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기기를 매개로한 만남은 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직접 만나자 소통이 불가능해지고 만 것이다. 


소통의 도구였던 문명의 이기들이 이제는 소통의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매개체를 통해 간접적이고 피상적인 소통만을 추구하는 소통의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진작 중요한 실제적 소통은 불가능해진 것이다.



데이비드 리스만은 '고독한 군중'이란 아이러니한 문구를 만들어 냈다. 고독은 홀로 있는 것이다.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군중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군중은 고독한 개인들의 병렬구조일 뿐이다. 동일한 개인이 여럿이 모이는 결과 밖에 초래되지 않는다. 

군중은 피상적이고, 배타적이다. 개인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기보다 암묵적으로 알려진 보편적 행동양식을 취하고, 서로의 다름만을 확인할 뿐이다. 그래서 군중은 고독한 것이다. 고독한 군중은  사랑하거나, 공유하거나, 치유하지 않는다. 오직 일관된 목적과 행동양심만을 가지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으로 군중이 된다. 




빅터 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서에서>라는 책에서 운명에 관한 슬픈 이야기를 접한다.

"나는 우리 수용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수용서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았다. 그날 밤 자유를 향해 간다고 믿었던 우리 친구들은 트럭에 실려 그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막사 안에 갇힌 채로 불에 타 죽었다. 사진으로도 군데군데 불에 탄 동료들의 시선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또 다시 테헤란에서의 죽음을 생각했다." 115


"일요병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한 주일을 보내고 내면의 공허감이 밀려올 때,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람이 겪는 일종의 우울증이다. 자살의 상당수가 바로 이런 실존적 공허 때문에 일어난다.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우울증과 공격성, 중독성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면 그 저변에 깔려있는 실존적 공허에 대해 먼저 이해해야 한다." 179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홀로 서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아무도 책임져 주지 못한다. 우울증은 고독으로 인해 일어난 병이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하지만 고독은 인간의 본질이기에 답을 얻지 못한다. 우리는 늘 죽음의 수용서에서 살아가는 고독한 군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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