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마음으로 일기 읽기


난중일기를 읽었다. 무패에만 집중하느라 사소한 일상은 잊어버린 인물이 이순신이다. 난중일기에는 영웅 이순신이 없다. 책을 다 덮고 나면... 위대한 영웅은 다르다고 말하게 될 것이지만, 한 장 한 장의 일기 속에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속내가 드러나 있다. 김구의 <백범일지> 역시 사소한 풍경의 연속이다. 그러나 약간의 과장된 표현이 눈에 들어온다. 시간이 지나면 사실은 역사가 되고, 역사는 전설이 되고, 전설은 신화가 된다. 이들도 그렇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신화가 되기까지의 평범한 삶은 그들에게도 있었다는 것이다.



유성룡의 징비록,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특이한 책들이다. 그저 조선의 일상을 보고 그 당시의 시대상을 볼 수 있다는 자료로만 참고하려했던 나에게 누군가는 '그 사람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며 읽어야 한다'고 충고해 주었다. 순간 깜짝 놀랐다. 아 맞다. 그 사람도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이구나. 세속을 벗어난 도인이 아니구나. 그 한 마디가 징비록을 편견에 사로잡힌 전혀 다른 책으로 보게 했다.




안네의 일기는 순수하고 수수하다. 자신은 나중에 글을 써서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일기에 적었다. 그리고 그는 나치에 발각되어 온 가족이 죽임을 당할 때 같이 당해야 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녀는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미 그 꿈은 이루어졌다. 다른 글이 아닌 바로 자신의 일기가 후에 '대박'을 일으킬 밀리언 셀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이 사실을 알고 웃고 있을 것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조선을 읽는 중요한 사료이다. 조선인의 눈으로 중국의 선진문물과 풍경을 글로 담아냈다. 좁다란 한반도에서 태어나 자란 박지원에게 중국은 도전이자 운명이었다. 시대의 지성을 대표할만한 그의 눈에도 중국은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일기는 기록되어 갔다. 





겨우 3개월이다. 어느 시골 마을 신부로 부임한 신부는 가난과 욕망, 육체적 정신적 나태에 빠진 마음의 모습을 목격하고 깊은 고뇌에 빠져든다. 그리고 '악'과 싸우기 위해 용기를 얻을 양으로 일기를 써 내려간다. 교회의 부패와 관료주의를 비판했던 베르나노스는 이 책을 통해 나약하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 고결한 인간의 본성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서른에 대학교수가 되고, 딸이자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길지 않았던 삶을 살았던 위지안. 그녀의 영혼의 일기가 책으로 나왔다. 가슴을 저미게 만드는 영혼의 기록들...... 사치스럽다고 말하던 그 많은 것들이 꿈처럼 흩어져버린 



병원에서 암으로 판명되어 수많은 검사를 받을 때의 일이다. 

CT(컴퓨터 단층촬영, computed tomography)와 MRI(자기공명영상, magnetic resonance imaging) 같은 첨단 장비로 온몸의 구석구석 검사를 마친 뒤 이동용 응급침대에 실려 병실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남편의 얼굴이 천장을 가리며 나타났다. 

남편과 간호사들이 시트를 한 자락씩 들어 나를 침대로 옮기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첨단 장비 위에서 한참 동안 오들오들 떨며 누워 있다가, 푹신한 침대로 돌아와 이불까지 덮으니까 겨우 살 것 같았다. 그런데 침대의 어딘가가 이상했다.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 입원실 온도가 낮지는 않았지만, 침대 속에는 그 이상의 안온함이 있었다. 흡사 누군가가 누워 있다가 방금 빠져나온 듯한 감촉. 바로 짚이는 게 있었다. 남편에게 물었다. 

“이봐, 당신. 내 침대에 누워 있었지?” 

남편이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집에서 하던 장난을 병원에 와서까지 하다니.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끼어들었다. 

“조금 아까 침대에 눕는 걸 보고 제가 경고를 했죠. ‘보호자가 환자 침대에 눕는 건 규정 위반’이라고요.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하시더군요. ‘집사람이 유난히 추위를 타기 때문에 내 체온으로 미리 덥혀놓아야 한다’고요.” 

그 순간, 나는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신혼시절부터 최근까지의 일들이 말 그대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렇게 구박을 받아가면서도 내 자리에 누워 있던 남편. 그의 마음을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거의 매일, 그런 따뜻한 마음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을까.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을, 장난이라고 단정해버리고는 짜증만 냈다니. 

어쩌면 내 마음의 문이 좁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결혼기념일이나 생일에 그럴듯한 선물이나 받아야 남편이 나를 생각해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를 앙다물었는데도 자꾸 눈물이 흘러내렸다. 



일기... 나를 써내려가는 나의 역사.. 그리고 그들의 역사

나는 오늘도 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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