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삶의 터전이었던 베네치아(지도)는 매우 감각적이고 시적인 회화를 발달시켰습니다. 유럽 내륙의 강대국들과 힘을 견제하였지만 베네치아의 재력은 동방무역권에서 얻어졌습니다. 바다에 연한 물위의 도시에서 이루어진 그들의 문화는 동서 교류를 통한 이국적인 문화의 수용이 자유로웠습니다. 베니스회화의 전통은 죠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26-1516)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작품 <성 프란체스코의 황홀경> (도1)를 봅시다. 지금까지 우리가 르네상스 그림으로 보아온 작품들과는 매우 다르죠? 우선 인물보다 자연이 더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흔히 프란체스코의 엑스타지는 십자형에 매달린 예수 형상의 세라피노로부터 오상을 받는 이야기로 그려집니다만 죠반니 벨리니는 이를 따르지 않고, 마치 프란체스코 성인이 자연으로부터 환희를 얻는 모습으로 그려냈습니다. 자연의 형상들은 섬세하게 묘사되었으면서도 석양의 빛을 받아 함께 어우러지는 톤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도1 죠반니 벨리니 <성 프란체스코의 황홀경>, 1480-85년
패널에 유채, 120×137㎝, 뉴욕, 프릭컬렉션
 
 
 
 

죠반니 벨리니의 제자였던 죠르지오네(Giorgione: 1477-1510)는 서정적인 톤을 자아내는 벨리니의 화법을 이어받아 르네상스 회화개념에 큰 변화를 보여줍니다. <폭풍>(도2)이라고 일컬어 온 그의 작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회화를 이해하는 종전의 방법과는 사뭇 다른 태도가 필요합니다. 오른쪽엔 누드의 여인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고, 왼쪽에 목동복장의 젊은이는 여인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화면에서 빗겨나 있으며, 먼 곳에서 폭풍이 이는 어두운 풍경이 화면전체에 펼쳐져서 詩的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주제는 매우 모호해서 학자들에게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어떤 이는 원죄 이후의 아담과 이브라 하고, 어떤 이는 비너스와 마르스라고도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젖을 먹이는 여인이 이브라면 옷을 입고 있어야하고, 비너스라 하면 아기가 없어야 하니 어느 학설도 충분히 납득할 만큼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림에서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불길한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징후 뿐 입니다. 이 그림은 이야기로 설명하기보다 느낌으로 전달하고 있지요. 죠르지오네에게 있어서 회화는 특정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회화만이 할 수 있는 감성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습한 개울과 천둥이 번쩍이는 원경의 도시, 알 듯 모를 듯한 모호한 인물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검푸른 나무들, 이 모든 것은 어떤 암시적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림이 이야기 내용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워진 것은 19세기말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내용이 없는 듯한 죠르지오네의 회화는 실로 현대적인 회화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2 죠르지오네 <폭풍>, 1505년경, 캔버스에 유채
82×73㎝,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죠르지오네의 <잠자는 비너스>(도3)는 아마도 여성누드를 관람자 눈앞에 대담하게 펼쳐놓은(?) 첫 번째 회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석양빛에 물든 황갈색 공기에 감싸인 듯한 풍경은 눈을 감고 있는 비너스와 함께 우리를 그림 안에 젖어들게 합니다. 화면아래 대각선으로 길게 누운 비너스는 잠들어 있으므로 보는 이는 아무 제재를 받지 않고 그녀의 몸을 음미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잠들어 있지만 보는 이의 시선을 이미 알고 있는 자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 시대에 살펴본 <크니도스의 비너스>(제4주, 주제2, 도6 )처럼 말입니다. 이 그림을 가지고 있던 지롤라모 마르첼로(Girolamo Marcello)는 1507년에 결혼하였는데 옆으로 긴 이 그림은 아마도 신혼의 침실에 놓인 가구 안쪽에 붙여있던 그림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이 그림은 성적인 감흥을 일으켜 다산으로 이어지게 하니까 침실에 적합한 그림일 것입니다.

 

도3 죠르지오네 <잠자는 비너스>, 1510년경, 캔버스에 유채, 108×175㎝
드레스덴, 게말드 갈레리에
 
 
 
 

회화 기법의 면에서 이 그림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화면 전반에 펼쳐진 은은한 톤과는 맞지 않는 다른 기법의 부분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즉 화면 아래쪽에 놓인 흰 천은 명암의 대조가 강하여서 배경과 인물에 펼쳐진 서정적인 톤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죠. 이 부분은 죠르지오네의 제자 티치아노의 솜씨입니다. 그럼 이번엔 티치아노(Tiziano: 1490-1576)의 초기 작품 <나를 건드리지 마라>(도4)를 <잠자는 비너스>(도3)와 비교하여 보십시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는 강한 색조의 티치아노 화법인데 오른쪽 뒤의 배경엔 스승이 그린 집들의 모습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도제 교육으로 이어지던 스승과 제자의 작업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그림들입니다.

 

도4 티치아노 <나를 건드리지 마라>, 1512년경
캔버스에 유채, 109×91㎝, 런던, 내셔널 갤러리
 
 

이렇게 시작한 티치아노는 베네치아 화풍을 서양회화사에 자리매김 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의 회화가 갖는 선명한 색채감과 빛의 작용, 붓 터치, 내용의 암시적인 표현, 관능성, 인물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 등은 실로 거대한 회화 업적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초기작품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도5)은 옆으로 긴 화폭이어서 이 또한 결혼을 위한 그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라우라 바가로토(Laura Bagarotto)와의 결혼을 계기로 남편인 니콜로 아우렐리오(Niccolo Aurelio)가 주문한 것이라고 추측되며 석관 위의 방패와 은그릇은 그들의 것이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 또한 많은 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도상과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죠. 석관 뒤에 큐피트가 있는 것으로 보아 누드의 여인은 비너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에 의상을 잘 차려입은 지체 높은 여성으로 무장한 듯한 여성은 세속의 사랑을 뜻합니다. 비너스의 신성한 사랑은 자연스러운데 반해 세속적인 사랑은 꾸미고 드러내며 또한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뒤쪽엔 우리가 도3과 4에서 본 바 있는 집들의 배경을 좌우를 바꾸어 다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엔 알 수 없는 상징들이 가득합니다. 왜 석관 위에 앉아있으며 석관의 부조는 무엇을 나타내는지, 양쪽 배경에 그려진 말 타고 달리는 인물들은 무엇을 뜻하는지 많은 학자들이 여러 해석을 하였지만 아직 명확하진 않습니다. 단지 세속적인 사랑이 머리에 쓰고있는 화관과 손에 든 꽃은 풍요를 뜻하며 그녀의 왼쪽에 그려진 토끼는 예로부터 다산을 상징하니 주문자는 그의 결혼이 풍요와 다산의 결실을 맺기를 기원한 것 같습니다. 또한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의 여인을 같은 얼굴이니 신부가 관능적인 사랑과 세속의 결실을 함께 지닐 것을 암시하는 듯 합니다. 더구나 이 그림은 신혼의 침실 가구 부분이라고 짐작되므로 이러한 연관은 충분히 가능한 것 같습니다.

 

도5 티치아노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 1514년경, 캔버스에 유채, 118×279㎝, 로마, 보르게제
 
 
 
 
 

위의 그림보다 24년 뒤에 그린 일명 <우르비노 비너스>(도6)는 죠르지오네의 <잠자는 비너스>(도3)와 위에 살펴본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도5)와 맥을 같이하는 그림입니다. 풍경이었던 배경은 실내모습으로 변하고, 멀리 있는 듯 하던 <잠자는 비너스>는 바로 내 눈앞에 누워있는 듯한 실제의 여인으로 바뀌었습니다. 배경의 여자가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고있는 옆으로 긴 가구는 이 그림들이 그 안쪽어디에 붙어있었던 가구형식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여기 보이는 침실에 있었다고 상상할 수도 있죠. 그림을 바라보는 이를 마주 쳐다보면서 보는 이의 시선을 그녀의 알몸으로 유도하고있는 그녀의 포즈는 이후 여성 누드 와상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종래의 미술사에서는 예술영역을 신성하게 여겨서 이에 대한 속된 해석을 금기시하였습니다. 위에서 본 여성 누드 상을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만 본 것이지요. 그러나 그림의 당시 역할이나, 실제 효과를 솔직하게 묻는다면 이러한 여성누드는 성적인 자극제였을 것입니다.

 

도6 티치아노 <우르비노 비너스>, 1938년, 119×165cm
 
 
 
 

티치아노는 종교화의 구도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가 페사로(Pesaro) 가문을 위해 제작한 <페사로 제단화>(도7)는 이 시대 피렌체의 제단화와는 매우 다릅니다(도8). 우선 주인공인 성모자가 오른쪽으로 비켜나 있고, 구도상의 중앙엔 베드로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모자에게 시선을 집중하게 되는데 이는 바로 색채와 빛의 작용에 의한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회화에서 중앙집중적인 구도와 소묘를 중요시 여기던 피렌체의 프라 안젤리코의 제단화(도8)와 비교하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베네치아에서는 죠반니 벨리니 때부터 빛과 색채의 요소를 회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겼는데 티치아노는 이를 대담하게 진일보시킨 것입니다.

 

도7 티치아노 <페사로 제단화>
1519-26년, 캔버스에 유채, 485×269cm
피렌체, 산타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도8 프라 안젤리코 <성인들과 함께 있는 성모자>
1438-40년, 나무패널에 템페라, 220×227cm
피렌체, 산 마르코 박물관
 

티치아노는 성자들을 거대한 기둥을 배경으로 한 층계 위에 배치함으로써 기념비적인 느낌을 주고 있으며 아래 양옆엔 주문자인 페사로 가족을 배치하였습니다. 왼쪽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가 이 그림을 주문한 야코포 페사로(Jacopo Pesaro)입니다. 그는 교황청 군대의 리더로서 1502년에 교황 알렉산더 6세(Pope Alexander Ⅳ)를 위해 터키군을 멸하였는데, 그의 뒤에 서 있는 이에게 알렉산더 6세의 문장기를 들게 하고, 터번을 쓴 항복한 터키군을 묘사함으로써 이를 기념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엔 페사로 가문의 수장인 프란체스코 페사로(Francesco Pesaro)와 다른 가족들을 그려 성 프란체스코가 이들을 마리아에게 인도하는 형식을 취하였습니다.

 

티치아노가 구사한 빛과 색채의 효과와 관능적인 감각은 신화그림에 더욱 적합해 보입니다. 티치아노는 베네치아에서 내륙 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페라라의 에스테(Este)가문의 주문으로 세점의 바카스 신화이야기를 그렸는데 도9에서 보는 <바카스 축제>(도9)는 그 중 하나입니다. 주제와 티치아노의 회화기법이 잘 어울려서 밝고 경쾌하며 또한 질펀한 쾌락의 축제를 보여줍니다. 쾌청한 날 나무그늘에서 벌어지는 장면으로 선택함으로써 티치아노는 원경을 밝게, 근경은 오히려 아주 어둡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공기 원근법을 적용한, 앞에서부터 점차 뒤로 물러나는 원근법적인 공간과는 아주 다르죠. 남녀는 서로 어울려 술 마시고, 춤추고, 또 한껏 취하여 널브러져(오른쪽 언덕 위) 있습니다.

 

도9 티치아노 <바카스 축제>, 1525년경
캔버스에 유채, 175×193cm,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도10 죠르지오네 <전원의 합주곡>, 1508-09년
캔버스에 유채, 110×138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이 그림을 죠르지오네의 <전원의 합주곡>(도10)과 비교해 보면 티치아노의 변화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죠르지오네는 여성의 누드와 음악, 야외라는 소재를 갈색톤으로 어우러진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광경으로 다루고 있다면 티치아노는 경쾌하고 관능적인 한 바탕의 축제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티치아노는 초상화가로서도 크게 환영받았습니다. 유럽 각국의 유명인들은 그에게 초상화를 주문하기 위해 서로 다투었으며, 그를 높이 대우하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로스 5세도 여러점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티치아노가 그의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붓을 떨어뜨리자 황제가 주워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가 그린 <손자 알렉산드로 추기경과 오타비오와 함께 있는 교황 파올로 3세>(도11)를 봅시다. 당시 교황들은 자기가문의 조카나 손자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니포티즘(Nipotism)이라는 정책을 써서 가문의 권력을 키웠는데 이 그림과 또 함께 비교하고자 하는 라파엘로의 <교황 레오10세>(도12)는 이 정책을 잘 보여주는 예들입니다. 교황 파올로3세는 로마의 파르네제(Farnese)가문 출신이며 교황 레오10세(Leox)는 피렌체의 메디치 출신입니다. 레오 10세의 왼쪽 뒤에 있는 줄리오 추기경은 나중에 교황 클레멘테 7세가 되었죠.

 

 

그러나 제가 이 그림들을 택한 이유는 정치상황을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베네치아의 회화기법과 우리가 지난 2주 동안 보았던 피렌체의 회화기법을 비교하기 위한 것입니다. 두 그림 모두 두 조카를 대동하고 있는 교황의 모습이지만 인상은 매우 다릅니다. 우선 라파엘이 그린 <레오10세>는 근엄하고 안정적인데 반해 티치아노가 그린 <파올로3세>는 날카롭고 즉흥적인 느낌을 줍니다. 교황은 오른쪽에서 막 다가오는 인물에게 고개를 돌리고 있는 순간적인 동작의 표현이어서 마치 스냅사진 같습니다. 배경에 걸쳐놓은 듯한 커튼도 이러한 동세에 기여하고 있죠. 피렌체전통의 회화방식과 베네치아 전통의 회화방식이 가장 두드러지게 대조되는 곳은 교황의 붉은 망토부분입니다.

도11 티치아노 <손자 알렉산드로 추기경과
오타비오와 함께 있는 교황 파올로 3세>
1546년, 캔버스에 유채, 200×174cm
나폴리, 카포티 몬테 국립미술관
도12 라파엘로 <추기경 줄리오와 루이지
데 로시와 함께 있는 교황 레오 10세>,
패널에 유채, 155×119cm, 피렌체, 우피치
 

라파엘은 붉은 벨벳의 밝은 부분은 붉게 하고 어두운 부분은 검게 함으로써 상체의 양감을 나타내고 있는 반면에 티치아노는 밝은 부분을 흰색으로 어두운 부분을 붉은 색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라파엘의 방법은 소묘와 고유색을 중요시한 화법이라면 티치아노의 방법은 햇빛을 비춘 벨벳의 인상을 중요시한 화법입니다. 티치아노는 짧은 기간의 로마방문기간에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이 그림의 붓터치가 더욱 빠르고 즉흥적이었다고 하는데 티치아노는 오히려 이 방법을 즐긴 것 같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이러한 효과를 살리고 그와 함께 예리한 통찰력을 발휘한 초상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우리가 지난 7, 8, 9주에 걸쳐서 살펴본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어온 르네상스의 전통은 많은 부분이 피렌체와 로마에 치우쳐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10주에서 살펴보고 있는 베네치아와 북유럽의 회화 또한 그와 비견되는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티치아노의 <박카스 축제>(도9)에 묘사된 남성근육을 보면 미켈란젤로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으며 다음 주에 다룰 매너리즘회화는 티치아노의 빛과 색을 과감히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전통의 화법은 이후 17세기 바로크시대의 회화에서 함께 융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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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巖 2004-10-10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죠르지오네作 <잠자는 비너스> 그림이 어디 갔는지 기억에는 없지만 일본판 미술전집에서 저 그림 액자로 만들어 놓고 방에 걸어 논 적이 있었는데, <모나리자의 미소>와 함께. 여기서 보니 너무 반갑군요. 판다님, 고마워요. 퍼 갈께요.

panda78 2004-10-10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는 매달 1일 피카소 달력 넘기는 것이 큰 기쁨이랍니다, 수암님. ^ㅡ^
얼마든지 퍼 가 주세요. 그리구 혹시 또 보시고 싶으신 그림 있으시면 알려주시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