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다가 피아노 학원 문지방을 넘었다. 그 뒤로 악착같이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있다. 이사오 사사키의 곡을 완벽하게 치고 싶다라던가 멋있게 피아노 연주를 하고 싶다, 혹은 반주를 제대로 하고 싶다는 목표나 바람도 없이 말이다. 그 날 저녁은 동생이 쉬는 날이라 여유가 있었다. 바람이 차가웠지만 어디든 페달을 굴려 돌아다니고 싶은 날이었다. 몇년 전에 레슨했던 선생님과 다르게 이번 선생님은 내가 피아노를 칠 때마다 노래를 부르고 신나게 장단을 맞춘다. 지난 번 선생님이 전문적이고 세심했다면 이번 선생님은 기운을 북돋아주는 느낌이랄까.
목표도 바람도 없었지만 저녁 시간을 쪼개서 다니다보니, 연습할 시간도 없다보니 한번 자리에 앉았다하면 쉬지도 않고 내리 연습을 한다. 이렇게 열심인 내가 나도 좀 신기하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선생님이 자꾸 나를 열심히 한다고 추켜세우니까 안 되는 집중력 발휘하며 더 열심인척을 하는거겠지만.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전에는
이 책으로 공부했다. 그냥 코드표만 보고 막 치던 것에서 멋진 반주를 하고 싶던 바람에서 보기 시작한 책이다. 메이저와 마이너 코드의 차이를 자세하게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르겠지만 혹시 반주를 처음 시작하는 분이 있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전문가도 아니고 초보가 적극 추천하는 것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겠지만 초보가 추천하는만큼 쉽다는건 보장하는 것 아니겠냐는 맘.
학원에 다니면서 재즈 피아노나 소곡집을 칠줄 알았는데
어린이 피아노 반주완성을 친다. 너무 쉽고 시시할줄 알았다. 웬걸, 조금 어려운 코드가 나오거나 곡에 변화가 많이 생기면 헷갈리기 일쑤다. 처음엔 선생님이 내 수준(그런게 어디 있다면)을 낮게 보고 이걸 치라고한줄 알았다. 그런데 계속 레슨을 받다보니 악보와 코드를 보는 실력이 좀 나아졌다. 아, 그런거였구나. 행여나 처음부터 왜 이렇게 쉬운걸 치냐고 궁시렁대지 않은걸 얼마나 다행으로 여겨지던지.
일이 끝나고 피아노 학원에 가기 때문에 내가 레슨을 받는 시간에는 아이들은 대부분 집에 가고 없다. 어느 날엔가 선생님은 아이들도 없고 심심해선지 피아노 열심히 치니까 대학 가서 피아노학과 나오면 선생님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피아노가 예전만큼 인기는 없지만 열심히 하면 여자 직업으로는 괜찮다며. 뒤쪽 문이 닫히지 않았는데 앞쪽 문이 열린다. 열린 문을 열고 들어가는건 내 몫. 어떤 문에 머무는게 더 좋을지 아직 모르겠다. 늘 그렇듯 내가 할 수 있고 할만한지는 뒷전.
강약을 조절하고 곡의 흐름에 따라 감정을 실어본다. 아직 잘 모르겠다. 왜 피아노를 잘 치고 싶고 왜 예전에 피아노를 배우다 말아버린 사람들을 위한 '잃어버린 피아노'란 기획의 콘서트를 열고 싶은지. 그렇지만 하루 일과를 마감하는 즈음에 뭔가 열심히 했다는 그저 그런 자기만족이 나쁘진 않다.
피아노를 좀 더 치다보니 내가 진도를 빨리 빼려고 악착같이 애를 쓰는거다. 진도 빼서 피아노 콩쿨이라도 나가보려고? 그냥 욕심이었다. 퇴근 후 퍼져있는 시간에 피아노를 치는거니까, 저녁도 안 먹어서 배가 고픈데 피아노를 치니까. 아무래도 선생님의 칭찬이 독이 된 것 같다. 더 칭찬받으려고 집중은 뒷전, 무작정 치기만하니 말이다.
계속 피아노를 치다보니 목표같은게 생겼다. 바로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쳐보는 것.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작은 아씨들 비디오 테잎이 있었다. 비디오 테잎은 그거 하나라 자주는 아니어도 종종 볼 때가 있었다. 베스였나, 셋째가 피아노를 너무 치고 싶어 옆집에 몰래 들어가 피아노를 친적이 있다. 그때 베스가 쳤던 곡이 쇼팽의 즉흥환상곡이었다. 베스가 뭔가에 홀린 듯 치던 피아노 곡, 커서도 계속 그 곡이 귓가에 맴돌았다. '쇼팽의 곡을 칠 때까지 피아노를 치는거야'라며 의지를 불살라보지만 가늠되지 않는 어지러운 음표를 보니 현기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