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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 (2disc)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알렉산드르 카이다노프스키 외 출연 / 영화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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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운석이 떨어진 이후 방문하는 사람의 소원을 이뤄준다고 알려져 있는 금지구역 내 비밀의 방. 국가에서는 그곳을 폐쇄하고, 소원을 성취하려는 사람들로부터 대가를 받고 그 금단의 장소로 안내해 주는 자를 '스토커'라고 일컫는다. 스토커와 시인, 과학자는 나름의 소명과 목적의식으로 비밀의 방에 접근하는데, 서로 가치관의 충돌로 갈등하는 과정에서 자신 내부의 심연과 대면하는 사색의 여정을 거치게 된다.


주인공들의 대화를 통해서 이전에 잠입자 역할을 하던 선대 스토커의 일화가 소개된다. 그는 금지구역 비밀의 방에서 죽은 형제를 살려달라는 소원을 빌었으나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간절했다고 하나 자신의 내면 깊숙히 자리한 욕망은 사실 동생이 살아나기를 진정으로 바라지 않았다는 것. 혹은 금지구역 비밀의 방이라는 실체가 꾸며진 허구이며 사실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 결국 그 스토커는 자살했다고 한다.


기나긴 우회와 심리적 방황 뒤에 그들은 비밀의 방에 도달한다. 교수는 누군가에 의해 악용될 수 있는 그 방을 파괴하는 목적을 드러내나 이내 조립하던 폭탄을 물에 던져 버린다. 무엇을 그토록 추구했는지, 무엇을 진정으로 갈망하는지 모른 채 혼란 속에서 그들은 금단의 방에 들어서기를 포기하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솔라리스>와 마찬가지로 원작이 따로 있으며 표면적으로 SF적인 설정을 빌리지만, 타르코프스키 영화답게 인간과 세상에 대한 심오하고 다의적인 성찰로 확장된 작품이다. 삶의 본질은 무엇이며 인생에 있어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끊임없이 질문한다. 금지구역 내 비밀의 방으로 향하는 험난한 여정은 인간이 헤쳐나가야 할 실존적 삶의 과정이다. 비밀의 방 자체는 궁극적인 진리 혹은 구원일 수도 있고 구전으로 진화되어 왔으나 실제로는 부재(不在)하는 신(神)에 대한 메타포일 수도 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관념적 영화일 수도 있고 구체적으로 인류 보편적 주제들을 탐구하는 영화일 수도 있다.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신비주의적 분위기에 매료되어 피상적인 사변으로 그칠지, 가변적인 삼라만상 속에서 치열하게 요동치는 인간 내면과 마주하게 될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영화의 마지막, 진실을 외면하고 존엄성을 상실한 채 구원받지 못하는 타인들에 대해 괴로워하며 스토커는 가족의 품에서 미완의 안식을 얻는다. 아내는 카메라를 직시하며 스토커와 결혼하기 전에 그의 원죄와 불행을 알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하는 삶이 좋았기에 내린 선택이었노라고 독백한다. 딸은 표도르 츄세프의 욕망에 관련된 시를 읊으며 탁자 위의 컵과 접시들을 응시하고 물건들은 염력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실존의 원형 속에 인생유전은 면면히 이어져 갈 것이다.  (2006년 가을에 남긴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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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스 (2Disc)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니콜라이 그린코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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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부질없다. 우리에게 우주 정복의 야망 따윈 없다. 지구의 영역을 우주로 확대할 뿐이다. 더 이상의 세계는 필요 없다. 자신을 비춰볼 거울이 필요할 뿐이다. 인간에겐 인간이 필요할 뿐이다.  - 영화 [솔라리스 (1972)] 중 스나우트 박사의 대사 -

 

바다에서 발생하는 생체 전류가 인간의 두뇌에 영향을 준다고 알려진 혹성 솔라리스로 심리학자 크리스 켈빈(도나타스 바니오니스)이 파견된다. 솔라리스의 우주 정거장에서 십 년 전 자신의 냉정함과 무심함에 괴로워하며 자살한 아내 하리(나탈리아 본다르추크)를 대면하게 된 크리스는 소환된 기억의 고통에 노출된다.
 
솔라리스 혹성의 표면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스스로 사고하며 대기권의 생물체로부터 잠재 의식을 받아들여 그 기억 속 존재를 물질화하는 하나의 유기체다. 솔라리스의 바다가 형상화해낸 하리의 모사체는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토로하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뇌하는 실체로 묘사된다. 그녀는 단순한 모사체가 아닌, 크리스 자신의 기억과 자의식의 투영이며 죄책감과 양심의 일부이다.


회피와 연민을 넘어 무의식 속 자아까지 대면하고 직시하며 성찰하는 장(場) 솔라리스에서 그들 부부는 진정한 화해에 이른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크리스 자신 내면과의 화해이다. 그리고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가 끊임 없이 복제해 보내오던 하리는 더 이상 오지 않는다.
 
스웨덴의 거장 잉그마르 베르히만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대해 '거울로 가득한 미로에서 어떤 길로 들어설지 모른 채 무수히 많은 열쇠를 들고 문 앞에 서있는 듯한 체험'이라 했다. 아마도 어느 길로 들어서든 자아 성찰과 심오한 철학적 명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솔라리스]는 결코 SF라는 장르 안에 가둘 수 없는 영화다. 인간에게 있어서의 사랑과 기억, 존재 본질과 심연을 사색하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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