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 무령왕릉 - 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
김태식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17년간 문화재 관련 학술기자로 활동한 저자 김태식의 [직설 무령왕릉]의 부제는 '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다. 바로 해답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전부 다 읽을 필요는 없다. 비단 이 책뿐만이 아니라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대부분 작가의 말과 뒷부분에 몰려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48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전부 읽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문화재 발굴과 문화재를 대하는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그동안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되고 있었는지에 대해 간략하게라도 알려주기 때문이다. 우선 책의 첫 시작은 고고학이 제대로 자리잡지 않았던 1920년대에 총독부의 지시로 유물을 발굴하는 상황으로 돌아간다. 우리나라의 고유 문화를 약탈하던 그들이 어째서 유물을 도굴이 아니라 '발굴'하려 했는지가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큰 의문을 품지 않을 것이다. 총독부가 처음 관심을 가졌던 곳은 이 책의 중심이 되는 '무령왕릉'이 있는 공주가 아니었다. 개성과 평양을 중심으로 대규모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고 참여자들은 모두 일본 도쿄대 출신의 능력있는 학자들이었다.

​송산리 6호분 유물은 다 어디로 갔을까? 62쪽


'가루베'라는 와세다 대학 출신의 학자는 주 전공이 고고학 혹은 역사학이 아니었던 등의 이유로 해당 작업에 참여할 수 없었는데 그때 가루베가 교편을 잡게 된 곳이 공주였고 그 덕분에 우리는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를 모두 가지게 된 송산리 고분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가루베는 총독부도 인정했을 정도의 '도굴'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비롯 여러 도굴꾼이 공주를 파헤치는 동안 무수히 많은 유물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루베에 의해 공주의 고분들이 발견된 후 총독부가 드디어 송산리 고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때마침 가루베의 도굴 행적이 드러나면서 '무령왕릉'이 하마터면 발견될 수 있었던 상황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가루베의 저서를 보면 송산리 고분들 중 6호를 통해 가까운 지점에 '무령왕'혹은 그정도 위치의 권력을 가진 이의 고분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었기 때문에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정말 간담이 서늘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무령왕릉이 가루베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면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대부분의 유물을 일본 혹은 아예 만나지 못했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령왕릉은 봉분의 원형을 알 수가 없다. 1971년 발견 당시에 봉분이 거의 허물어져버려 원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문화재관리 당국은 원형을 복원한다며 우람한 봉분을 얹었다. 177쪽

무령왕릉이 다행스럽게 가루베의 손을 피할 순 있었지만 저자가 이 책을 쓰는 내내 가슴아파했던 '졸속발굴', 도굴꾼들도 이렇게는 하지 않았을정도라고 안타까워 하는 상황은 피하질 못했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남한내에 제대로 된 고고학자가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북한과 비교해서도 그 실력과 관심이 뒤쳐져 있었다고 한다. 그나마 희망을 걸 수 있었던 남한에서 유일하게 관련 연구를 했던 김정기도 일본출장 일정과 겹쳐 1차 발굴 현장에 함께 하지 못했다. 무령왕릉 발굴과 관련 김원룡은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듯'했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안타까워 했다.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 속에 졸속으로 마무리된 발굴 작업을 외부에서는 크게 비판하지 않았다는 점도 의아 할 정도다. 무령왕릉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궁금할 수 있는데 저자는 크게 6가지로 이야기 한다. 첫째는 삼국시대 고분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매장된 인물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무령왕의 사망 연대를 통해 [삼국사기]의 정확성을 입증할 수 있었고 삼국사기 뿐 아니라 [일본서기]에 기술된 내용과의 일치성을 통해 이 문서를 다시 보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백제가 어느 나라와 교류했는지도 알 수 있는데 책의 다른 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긴 하나 우선 관재가 일본에서만 나는 '금송'임을 밝혀냄으로써 어떤 의미로 관재에 일본목재가 쓰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과 연구과제를 남겼으며 묘의 겉모습이 벽돌무덤이라는 '중국'문화였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뿐만아니라 묘 내부의 구조와 시신이 안치된 방향등을 미루어 백제인들의 내세관과 중국 및 일본의 내세관과 거의 일치하다는 사실도 밝혀낼 수 있었다.


이런 유물을 통해 관람객은 무의식적으로 위대한 왕이 구가했을 왕국을 떠올리게 되고, 나아가 현세의 독재자 출현에 대한 갈망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454쪽-


무령왕릉과 관련된 내용은 엄청나게 방대하지만 다시 처음 서두에 적은 것처럼 이런 내용들이 어째서 권력과 관련성이 있는지를 이야기하며 마무리 해야 할 것같다. 우리가 역사의 중요성을 깨닫고 배우려는 것과 권력자들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것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다. 특히 독재자들의 정세가 높았을 때 일수록 문화는 더더욱 화려해지고 역사에 대한 의미부여가 강력해질 수 밖에 없다. 무령왕릉 이후 천마총을 발굴하는 작업에 대통령이 직접 방문했다는 사실을 그저 역사에 관심을 갖고 문화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정도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이유도 이와 같다. 그때의 영광을 다시금 자신의 손으로 이뤄보려는 자가 어떤 정치를 펼칠 것이라는 것 또한 역사를 통해 우리는 배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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