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과 순례자 - 가문비나무의 노래 두 번째 이야기 가문비나무의 노래
마틴 슐레스케 지음, 유영미 옮김 / 니케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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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은 배움과 훈련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현상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좌절은 아프지만 복이되어 우리가 가는 길에 동행합니다. 77쪽



지난 여름, 꽤 아팠다. 몸도 마음도 그리고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많이 힘든 시간을 보냈다. 책과 영화 그리고 사람마저도 내 마음의 어느 한 부분을 건드려주지 못했다. 간신히 기도만 붙들고 버텨냈던 시간이다. 물론 이 책을 읽을 무렵은 조금 나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어찌보면 그 순간이 가장 위태로울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아예 어둠으로 넘어갈 수도 있기때문이다. 그때 이 책을 만났다.  어느 날에는 무작정 책만 가지고 카페에 갔다가 무엇이든 적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밖에 비가 오는데도 비를 맞으며 근처 상점으로 뛰어가 메모지와 펜을 사가지고 와서 한 페이지를 빼곡하게 감상으로 채우기도 했다. 그래서 리뷰가 많이 늦었다.


아무래도 종교와 관련된 부분이 전면에서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신앙, 가톨릭 혹은 개신교인이 아니라서 불편하거나 어긋나는 부분은 없을 것 같다. 서두에 발췌한 문장만 봐도 그렇다. 고생 끝 행복, NO PAIN NO GAIN 이란 말은 종교와 상관없이 어릴 때, 학창시절에 여러차례 접하게 되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줄 알면서도 왜 정작 당신은 좌절했냐고 묻는다면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같은 내용을 조금씩 바꾼 수백권의 자기개발서가 출간되는데도 매번 다른 감동과, 다른 리뷰로 베스트셀러에 올라가는 까닭도 같은 이유지 않을까. 현명한 사람들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겠지만 나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은 입에 꼭 맞게 말해주지 않으면 잘 와닿지 않는다. 마틴 슐레스케가 내게 꼭 맞는 방식으로 말해준 사람인 셈이다.


우리가 무뎌졌다는 것은 소명대로 사는 일이 녹록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무뎌지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무뎌진 마음을 벼리려 하지 않는 태도가 나쁩니다. 아직 괜찮다고 혼잣말을 한 뒤, 슬픔이 밀려 왔던 까닭을 이제 알겠습니다. 20쪽


무뎌져 있었던 것이다. 고통에, 나는 괜찮다는 자만에 무뎌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상처가 곪아서 표면으로 드러날 때까지 모르다가 터져버린 것이다. 이럴 때 저자는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멈춰야지만 그 연장의 날을 연마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아주 빠르게 연마할 수 있을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는데 마치 맘에 드는 책 한권을 만났다고 해서, 한 편의 인생영화를 보았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는것을 착각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잠시 멈춘 상태에 머물러 기도해도 잘 되지 않을때가 있다. 끊임없이 좌절하면 나중이라는 희망보다 당장의 절망이 더 크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자꾸만 실패를 거듭한다면 어떻게 낙심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낙심으로 주춤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구하는 은혜가 '실패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99쪽


'실패의 은혜'. 실패의 경험을 알지 못하면 교만에 빠지기 싶다는 것을 안다. 과거, 무언가 일이 잘되고 있을때의 나를 보아도 그렇다. 그럴때는 감사합니다를 연신 외치면서도 진실된 감사보다 앞으로 또 어떤 행운이 나를 찾아올지에 급급하고, 저 혼자 잘나서 잘된거라는 착각을 하곤 했다. 실패했을 때, 크게 아파서 당장 한 걸음도 내 힘으로 내딛을 수 없을때 비로소 숨쉬는 것 마저 축복과 자비였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좌절하고 있는 나, 아파하고 있는 나, 실패한 것은 없지만 분명 성공이라고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다름아닌 '실패의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이었구나 생각하니 그제서야 조금 숨통이 트였다.


우리가 "하느님, 우리에게 어떤 은사를 주시려고 합니까?"라고 물으면

하느님은 "너에게 과제를 주어도 되겠느냐?"하고 되물을 것입니다. 131쪽


숨통이 트인뒤에야 내가 괴로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과제'를 회피하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은사는 받고 싶은데, 고통스런 과정은 생략하고 싶은 오만과 불순종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면 그처럼 고통없이도 많은 것을 주시는 분이셨으니 이번에도 그렇게 해달라고 떼쓰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만원짜리 장난감을 사준 엄마에게 그 다음에는 3만원짜리, 그 다음에는 10만원짜리를 사주겠지 하며 울부짖는 아이처럼 그렇게 말이다. 그렇게 한꺼풀 한꺼풀 고통을 벗겨내다보니 점점 더 아버지의 사랑과 은총이 가깝게 느껴졌다. 물론 이미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잊고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묻지 않으면 하느님이 무슨 말씀을 하겠습니까? 하느님은 둔한 가슴에 대고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서>는 "네가 마음으로 깨닫기를 간절히 원할 때 하느님이 너의 기도를 들으신다."라고 했습니다. 179쪽


아픈 와중에도 기도를 놓지 않았다고 했지만 정작 하느님께 지금 이 상황을 왜 주셨는지, 이 고통의 끝이 무엇인지는 묻지를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안주시는것이 아니라 내가 과제를 수행하기 싫어서 은사마저 포기하고 있음을 깨닫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물어야했다. 그리고 받아들여야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려는 은사는 내가 거부한다고 안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아버지께서는 최후의 방법, 고삐를 끄시고, 엉치뼈를 내리치시기 전까지 나를 끊임없이 기다려주고 계셨음을 알았다. 때로는 그것이 기도를 통해, 이때의 나처럼 묻지 않고 아파할 때는 우연찮게 손에 든 한 권의 책을 통해, 마틴 슐레스케라는 내 입에 꼭 맞는 작가를 통해 깨닫게 해주신다. 여름날의 나처럼 아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마틴 슐레스케의 <바이올린과 순례자>는 저자의 전작<가문비나무의 노래> 두번째 이야기다. 평소라면 분명 첫 번째 작품을 찾아 읽고 싶어졌을텐데 아직 이 책의 감동과 여운이, 작가가 들려준 조언이 체화되지 않아서인지 그럴 엄두가 나진 않는다. 분명 몇 달을 내내 책을 바라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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