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광인 - 상 - 백탑파白塔派, 그 세 번째 이야기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열하일기>를 읽지 못했습니다. 이 한마디를 스스로에게 고하는 길이 이토록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열하광인>을 읽으며 흥분했고, 열하를 고개 쳐들며 보게 되었으며, 감히 내 손으로 그 책을 만질 수 있는 현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느 한 시절에는 그 책을 읽는 것이 숨쉬는 것만큼이나 소중했음에도 마음대로 숨쉬며 읽을 수 없었음에도 읽는 이들이 있었는데 요즘 세상에 <열하일기>를 읽는 것은 숨쉬는 것보다 쉬움에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슴을 죄어오는 것은 책 속의, 아니 시간의 흐름 속 그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지는 까닭이다.
 

 시대를 되짚다 보면 특별한 책을 만나게 될 때가 있죠. 세상에 이런 책도 있구나! 라는 감탄도 부족할 것 같은, 그 책을 만나기 전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믿어도 될 것처럼 새로운 세상을 열며 그 세상에서 벗어나면 죽을 것 같은 중독을 만드는 책이 한 권 있죠. 조선 후기 정조대왕 시절 그 책의 이름은 <열하일기>. 그 책 속에 담긴 사람들의 감탄과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새로움을 향한 갈망은 무엇으로도 들지 못할 수도 있어요. 당신이 그 책을 들 수 있다면 당신은 열하를 읽지 않은 사람일 거예요. 그 책은 그렇거든요. 그 책을 읽은 사람은 그 책을 절대 손으로 들 수 없어요. 가슴으로 마음으로 눈물로 한숨으로 열망으로 그리고 목숨으로 들 수 밖에 없죠.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가 한 번 우연찮은 기회에 우물에 내려 온 두레박을 타고 세상을 나온 후에 세상으로 높이 뛰지 않고 다시 우물 속에 들어갔다. 왜? 우물 밖 세상에서 살고 싶기보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우물 안 개구리들에게 우물 밖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만을 위해 살기 보다는 남을 위해 살아가기를 택하 것이었다. 그 개구리로부터 바깥 세상을 들은 개구리들은 다른 세상이 있었음을 그 세상에는 지금 그들의 세상을 바꿀만한 개혁의 요소를 가진 것이 많음을 알고 그 놀라움에 하루종일 개굴개굴 울어된다. 그들은 다른 세상에서 살기를 꿈꾸는 것이 아니다. 현재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조금 더 잘 살게 모든 개구리가 잘 살게 만들고 싶은 것이다. 혼자가 살아남기 위함이 아님에도 언제부터인가 그 개구리들은 바깥 세상을 이야기 할 수 없다. 그 이야기는 금기시 되었기에. 하지만 그렇다해도 한 번 본 세상은, 누군가의 눈을 통해 유리창 밖을 보듯 그 세상은 버릴 수 없는 것이다. 한 번 본 이후로 그것은 삶을 다시 살게 해주었기에.

 

 이 책은 정조대왕이 금서로 정한 <열하일기>를 사랑하는 열하광들이 모인 백탑파를 둘러싼 추리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정조대왕은 <열하일기>를 금서로 정했을까? 무엇보다 개혁을 주장했던 정조대왕이 두려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금서임에도 열하광인이라 불러도 무색하지 않을만큼 열하에 빠진 사람들은 왜 열하에서 벗어나오려 하지 않은 걸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스스로 열하를 더럽히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게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내가 열하를 읽는다면 그 까닭을 알 수 있을까.

 

 내 짐작의 짐작을 뒤엎으면서 이야기는 진행되었고 내 짐작이 틀릴 때마다 나는 혀를 차기는 커녕 감탄하고 만다. 작가가 파놓은 함정에서 허우적 되면 어떤가. 그 함정마저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되어가는데. 사실과 허구, 어느만큼이 그 둘 사이의 선인지는 내 스스로 역사를 공부해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읽는동안 세세한 주석에도 불구하고 낯선 단어들이 많아 고생하면서 참 역사를 모르고 살았구나라는 생각에 부끄러움마저 들었다. 이 부끄러움은 작가가 적어놓은 참고문헌의 방대함에서 더하였는데 작가가 한 편의 소설을 적기 위해 쌓는 지식의 양과 노력에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쾌한 하녀 마리사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작가의 책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의 책으로 내가 받았던 감정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는 것? 책을 읽고 난 후 마음 속으로 응원했던 작가의 성장을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일까?
 

 천명관, 그의 신간이 나왔다는 기사를 봤을 때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래>에서 보여줬던 몽롱한 안개가 나를 휘감는 기분과 함께 그의 글을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감은 인터넷 서점의 배송기간도 견디지 못할만큼의 안달을 나게 만들었고, 달려간 책방에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말에 먹고 싶었던 과자가 팔려버린 가게 문을 나서던 어린이의 발걸음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와 주문을 하고 말았다.

 

 '기다리고 아 기다리던' 이 말을 쓸 수 있는 책이 <유쾌한 하녀 마리사> 였다. 주문을 늦게 한 나를 원망하며 수도권에 살지 않기에 당일 배송이 되지 않는 우리집을 원망하며 기다린 책이 손에 온 날 분명 책을 다 읽어야 했을 갈망이었것만 책은 사흘이 지나서도 내 손에 있었고, 나흘이 되어서야 손에서 놓을 수 있었다.

 

 왜일까? 그의 책을 읽는 동안 다른 책은 하나도 읽지 않았음에도 단편에서 다른 단편으로 넘어가는 휴식 시간은 매우 길었고, 그동안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헤매였다. 글을 어렵지 않을뿐더러 유쾌하면서도 놀랍고, 놀라우면서도 섬뜩했다. 그렇다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작가? 아니면 나? 혹은 소설 속 주인공들?

 

 <고래>와 만나게 해 준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투덜거린 것은 책을 반밖에 읽지 못했다는 느낌때문이었다. 다 읽었음에도 책에서 기린이 튀어나와 내 책을 먹어버려 나머지 절반을 읽지 못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나만이 아님을, 이 책은 원래 11 권의 책이었는데 그만 누군가의 실수로 바람에 원고가 날아가고 남은 원고르 추려 만든 것이 이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내게 그 원고의 행방을 알려달라고 말도 안되는 투정을 부렸다. 지인과의 대화에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11 개의 소설들이 구조를 만들며 하나의 집이 되어간다. 그 집에 무엇이 있는지, 구조물은 어떤 것인지는 순전히 나만의 것이라는 것을, 혹은 이미 만들어진 현실적이지 않은 집을 집이라고 믿는 것도 나만의 몫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야 나는 책을 다 읽은 것 같다.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작가는 내게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생각대로 상상하고 열린 결말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독자가 되어야 함을, 현대는 어쩌면 능동적인 작가를 넘어 능동적인 독자의 시대가 열리는 시대가 아닐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함은 작가만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걷어낸 안개 속에 있는 것인 아름다운 성일지? 잔혹한 꿈일지는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님을 책을 덮고서야 알았던 것이다. 책 속 제목을 하나씩 살펴보며 드는 생각들은 맛있게 내 앞에 차려지고 후식까지 먹은 기분으로 책을 덮는다.

 

 이번 책의 제목들과 등장인물들을 보며 색다른 분위기를 느낀다. 등장인물 이름이 외국사람이라는 것만으로 책은 한국적인 정서를 굳이 의식하지 않게 되었고 그 덕분에 책 내용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내게는 이런 점이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섣불리 단정지을려고 하지 말것, 믿을까? 말까?로 고민하지 말 것, 책 속에 빠져들기도 하고 혹은 책 밖에서 책을 파헤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것. 그렇다면 이 책은 당신에게 기대 이상의 상상을 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밖에 춥다고 옷 단단히 입고 다니라는 엄마의 말을 어릴 때나 커서나 잘 듣지 않는 건 자식들의 공통점일까? 부모님의 말씀 중 틀린 것은 겨우 한 개 뿐이었는데 -내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낫다는 말씀- 왜 부모님의 말씀을, 사랑을 자주 잊거나 귀찮게 생각하는 걸까? 그 보다 큰 사랑을 알지도 못하면서 왜 부모님의 사랑을 귀찮다고, 원래 부모는 그런거라고 말하게 되었을까? 내 부모님처럼 절대로 자식을 사랑하지도 못할거면서.

 

세상에는 갚아도 절대 다 갚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부모님의 사랑이다. 부모님의 사랑을 갚을 수 없는 까닭은 그 사랑은 보상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보상을 바라지 않고 베푼 사랑에는 우리를 살게하는 진리가 담겨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랑이기에 그 사랑을 잘도 받아쓰면서 갚을 생각은 커녕 나 하나 잘살기만 신경쓰느라 바쁘다. 시간이 흘러서야 알게 된다, 내가 한 그루의 나무라는 것을. 또한 내 나무 옆에는 늙은 나무 두 그루가 서 있음을.

 

나라는 나무는 태어날 때도 나무였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마치 아기였을 때의 나, 부모의 손이 필요했을 때의 나는 없었던 것처럼 나뭇가지를 흔들며 푸르른 나뭇잎을 자랑하며 햇빛이 좋은 곳으로 이동하느라 바쁘다. 알고 있는가? 부모가 되기 전의 나무는 자유롭다. 내 뿌리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뿌리와 얽혀 있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더 많은 것을 바라고, 더 많은 것을 즐길수록 땅 속에 곧게 박혀있던 부모의 뿌리는 땅으로 나와 말라간다. 내 뿌리를 감싼 채 자식을 위해 이곳 저곳으로 뿌리를 뻗어야 한다. 뿌리를 더 길게 하기 위해 부모는 피를 판다. 내 자식이 원하는 것을 해주기 위해 가고 싶은 곳을 데려다 주기 위해 피를 판다. 그렇게 부모의 나무는 말라가고 자식의 나무는 행복하게 푸르른 젊음을 과시한다. 부모의 상처 입은 뿌리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뿌리에 난 얇은 상처에 호들갑을 떨며 아파하는 젊은 나무에게 딱딱구리 의사 선생님이 이 책을 놓고 간다. <허삼관 매혈기>라는 책을.

 

<허삼관 매혈기(許三觀 賣血記)>는 제목 그대로 허삼관이란 인물이 피를 파는 이야기이다. 1950년대의 중국,  생사(生絲)공장에서 누에고치를 대주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활달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청년 허삼관이 등장한다. 

 

 

#첫번째 매혈-가정을 이루다.

허삼관은 건강한 남자는 피를 팔아야 한다는 말에  물을 배가 터질만큼 마시고는 피를 판다. 그 돈으로 그는 공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허옥란과 결혼을 한다. 이렇게 그는 피를 팔는 삶을 시작한다. 피는 몸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을 판 돈이니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돈이겠는가! 그 돈으로 부모님들은 가정을 이룬다. 그 돈의 양은 중요치 않다. 그저 그 돈이, 혹은 그 마음이 피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두번째 매혈과 세번째 매혈-내 자식이 아닌가벼?!

알뜰한 허옥란과 행복하게 살며 허삼관은 세명의 아들 일락, 이락, 삼락이를 두게 된다. 하지만 일락이 아무리 봐도 자신과 닮지 않았다는 사람들의 말에 의심을 하게 되는 허삼관은 일락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허옥란의 말에 허탈함을 느끼고 일락의 친 아버지 방철장의 아들의 때려 크게 다치게 만들고 만다. 방철장의 아들 치료비로 인해 집의 가구들이 모두 실려나가자 허삼관은 두번째 피를 팔러간다. 피를 팔아 치료비를 대고 가구를 찾아온 허삼관은 허옥란에게 화가 나고 일락이가 미워진다. 그렇지만 일락이를 온전히 미워할 수 없음에 더 마음이 아파진다. 허옥란에게 화가난 허삼관은 바람을 피고 그녀를 위해 피를 팔아 맛있는 음식을 그집으로 보내지만 남편에게 들키고 말아 망신을 당하고 만다.

 

 

#네번째 매혈-나는 못 먹어도 자식은 먹이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맘.

허삼관은 피를 팔아서 생활을 연명하는 그런 엉터리 가장이 아니었다. 가장 열심히 일을 했고 알뜰했다. 하지만 그는 가난한 노동자였기에 극심한 기근이 찾아오자 가족을 위해 허약한 몸을 이끌고 피를 판다. 가족들과 피를 판 돈으로 국수를 먹으러 가는 허삼관은 일락이를 두고 가자고 한다. 일락이는 내 자식이 아니므로 피를 판 돈을 쓰고 싶지 않다는 허삼관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지만 허기에 지친 일락이를 등에 업고 국수를 사주러 가는 허삼관의 뒷모습에 코가 시큰해진다. 기른 정이 낳은 정보다 더 크다는 말은 어쩌면 진실인지도 모른다. 아니 진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허삼관과 또 다른 부모님을 보면서.

 

#허삼관의 매혈여행-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 하겠소!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농촌으로 일락과 이락이 떠나자 아들들을 위해 허삼관은 피를 판다. 피를 판지 한달도 되지 않아 피를 판 허삼관은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졌다. 그가 어지럽다고 했을 때 손에서 땀이 날 지경이었다. 이렇게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살아난 허삼관은 나의 심장을 더 내려놓는다. 그가 일락의 병원비를 위해 매혈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그를 보며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 얼마나 한참을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모른다.

 

#더이상 피를 뽑을 수가 없다니 그건 너무 슬픈 일이야.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는 허삼관은 문득 다시 피를 팔고 싶어한다. 평탄한 생활이었으니 돈이 필요했다기 보다는 피를 판 후에 먹는  '돼지간 볶음과 황주'를 위해서 였을 것이다.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위해서 피를 팔고 싶은 허삼관은 늙은 몸으로 피를 팔러간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허삼관은 피를 팔 수 없다는 말에 눈물과 함께 울음을 터트린다. 더이상 젊지 않다는 것, 온 가족을 구해주던 피를 팔 수 없다는 것만큼 무서운게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허삼관 매혈기-웃어야 하나요? 울어야 하나요?

허삼관의 감정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 이 책을 처음에는 웃으며 읽어내려갔다. 재치있는 허삼관의 말투와 아내 허옥란의 행동이 나를 웃게 했다. 하지만 책을 읽어내려가며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하는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슬픈 상황에서도 슬픔을 드러내지 허삼관을 보며 나는 대신 아파야 했다. 자꾸만 내 부모님의 얼굴과 그의 얼굴이 겹쳐져서 울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으면 웃음과 눈물을 함께 얼굴에 나타나게 할 수 있다는 말을  이제야 알게 된다.

 

#부모의 사랑, 자식들은 그것을 알아봐주어야 한다. 

부모의 사랑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말 보답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해도 보답이 되지 않을 것을 안다고 해도. 잘 자라주었으면 하는 것이 모든 부모의 바람이라고 한다. 단지 그 하나의 바람을 위해 부모들은 뿌리를 내놓으며 자식의 나무를 키워준다. 아프고 힘들다고 해도, 피를 팔아서라도. 그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며.

 

부모가 되지 않으면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그 아픔을, 그 답답함을, 마음 속에서 삭히는 방법을 알 수 없으므로. 자식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뿌리를 땅 속으로 내리면서, 자식을 위해 땅 속에 있는 뿌리를 햇볕이 강한 지상으로 내놓으면서 부모들은 행복해한다. 그들이 움직일 수 없음에도, 그들의 뿌리가 말라간다해도 자식만 행복하다면 그들도 행복하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부모님의 나무를 한번쯤은 될 수 있으면 자주 찾아뵈야 한다. 우리이 푸르름을 부모님께 보여드리며 당신들이 만들어준 것이라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그 분들의 삶이 허탈하게 하지 않기 위해! 아무리 보답을 원치 않는 사랑을 갚을 방법은 당신도 부모가 되는 것이라는 잔소리를 듣는 다해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리야, 바리야. 내 귀여운 우리 바리야......
 

 책을 덮었음에도 바리의 할머니의 음성이 들려온다. 바리데기 공연이나 소리를 들은 것도 아님에도 바리데기 설화를 알게 된 것도 그림책으로 본 <바리공주>가 전부인데도 살아난다. 바리공주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생명수를 봤냐며 두 눈에 슬픔을 가득담고 쳐다보는 바리의 얼굴이 살아나고 바리의 꿈 혹은 현실에서 나와 바리를 인도해주려 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살아난다. 이것은 작가의 힘인가? 들어보지 못한 소리의 정체는 정말 바리의 할머니일까!

 

 #바리데기, 현대로 돌아온 설화-그 절묘함.

 

 설화 속의 바리공주는 바리데기로 불렸다. 왕의 일곱째 딸로 태어나 살아있는 것이 죄여서 버려진 공주, 그래서 바리데기로 불렸다고 한다. 버렸음에도 세상이 살리려 했고 숲 속 깊은 곳 꽁꽁 감춘 듯 살아야 했던 바리데기. 바리데기 버린 슬픔이었을까 왕이 몸져 눕자 저승에 있는 생명수가 낫게 할 수 있다는 의원의 말에 왕비는 여섯 딸을 모두 부르지만 아니간다 하니 믿을 곳은 바리데기 뿐이라 바리데기를 찾아 물으니 바리데기 세상에 낳아준 부모를 찾아 간다 한다. 그 길 멀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 길 아픔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책 속 바리는 북한에서 부유한 고위 관리 집 일곱째 딸로 태어나 버려지지만 역시 바리공주처럼 살아난다. 영특함과 따뜻함을 가슴에 가진 아이, 바리. 가슴 속에 별을 품고 있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가 바리가 아닐까? 설화 속 바리에 고된 길을 걷게 하는 것은 아버지의 병이었으나 책 속에서는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과 외삼촌으로 인한 집안의 몰락이다. 그 몰락 속에서 걸어가야 하는 바리는 설화 속 바리공주처럼 불쌍하되 빛이 나고 안쓰럽지만 강인하다. 부드러운 강인함, 바리는 생명수를 얻을 수 있을까.

 

 북한이란 장소, 바리가 태어나고 자랐을 때의 시대가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시대가 내게는 충격이다. 나는 음식을 남겨 버렸고 그 시대의 북한은 먹을 것이 없어 강을 넘다 죽고 걸어가다 죽었다. 바리데기의 설화를 현대에 이끌어 오는 길에 북한이란 공간적 배경은 작가가 말하는 바와도 잘 맞아 들어간다.

 

#바리, 함께 걸어가요, 할머니가 인도해주는 길로......

 

  책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바리의 이야기는 이상하리만치 축약된 것처럼 읽힌다. 그저 살아감을 문장으로 정의 내린 글들은 감흥을 주기에는 부족한 듯 보였다. 그런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 바리가 꿈 속에서 (어쩌면 꿈이 아닌) 칠성이의 안내로 찾아가는 하얀 길 위에서 만난 할머니와의 이야기이다. 그 문장들로 인해 바리가 겪는 아픔과 삶의 추악한 진실 그럼에도 우리가 버리지 말아야 하고 지켜내야 할 것들이 보인다.

 

 할머니의 말은 꼭 타령을 듣는 것처럼 내 귀를 울리고, 바리의 절규는 마음을 애인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바리는 자신의 슬픔을 꿈에서 풀고, 자신이 안아야 할 것들을 꿈에서 깨닫는다. 그 시간은 어쩌면 꿈이 아닐거란 생각이 든다. 제대로 읽기 힘든 부분이었음에도 술술 읽힌 것은 아마도 눈길보다는 귀로 그 부분을 읽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바리데기, 당신이 알려준 생명수...나는 어찌 해야 할까요?

 

 바리가 구하려는 건 무엇일까? 인류, 세상? 아니면 자신? 바리데기 설화와 북한을 가져온 것은 작가가 생각하는 평화의 길을 보여주기 위함이란 생각을 했다. 그 뜻을 전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책의 뒷부분에서 가졌던 실망감을 감출 수 있기에.

 

 생명수는 우리 곁에 있다. 먹으면서도 먹는지 모르고, 곁에 있으면서도 있는지 모르고. 주위를 둘러보지 않는 우리들 곁에 언제나 존재했던 그것은 우리의 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먹어주기를, 사람의 손마다 전해주기를. 또 하나, 그것을 우리의 탐욕으로 덮어 보이지 않게 만들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배려와 타협은 평화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작가는 바리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 아닐까? 소재와 구성 또한 좋았음에도 무엇이 부족한 걸까? 스스로 평화를 지키는 생명수를 가지고 있음에도 마음의 파도가 일지 않는다. 알고 있음에도 행동하지 않으려함은 내 못된 성격 때문인걸까?

 

 바리의 힘든 여정만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힘이 들어 더욱 미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무
이순원 지음 / 뿔(웅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에게는 살다보면 특별한 나무가 한 그루 생기게 된다고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그 말의 의미를 눈치채기에는 너무 어렸던 나이였고 주변에는 나무들이 너무 많아 특별함을 찾기란 힘이 들었던듯 아마도 할아버지의 말씀에 그저 고개 한 번 끄덕이고 아이들이랑 놀러 뛰어나갔을 것이다. 그 모습이 할아버지께는 아쉬움을 남기지는 않았을지......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우리집 주변으로 할아버지께서 심어놓으신 나무들을 보며 그 말씀이 생각나 한참을 울고는 했다. 그제서야 내가 유독 말을 많이 걸고 그 나무 밑에서 울고 그 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며 행복하게 웃고는 했던 복숭아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미정이가 복숭아를 좋아해서 한 그루 더 가져다 심어야겠다며 텃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심어진 복숭아 나무에는 할아버지의 손길이 뭍어있다. 해마다 봄이면 예쁜 꽃을 피웠고 해마다 여름이면 주렁주렁 복숭아를 매달며 가지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듯 복숭아를 품에 안고 햇볕을 받는 나무 한 그루가 내게는 특별하다는 것을, 할아버지의 말씀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것이 나무와의 대화였다는 것도, 그 나무를 통해 할아버지의 생각을 읽게 된다는 것도.

 

 이순원 작가의 <나무>에는 저마다 자신만의 특별한 나무를 혹은 삶을 떠오르게 하는 '솨아아아--' 하는 바람이 분다. 이순원 선생님의 문체만큼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생명을 불어넣는 서정적인 문체를 아직은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 책을 읽기도 전에 기대를 하게 되었고 읽고 난 후에 주변의 풍경이 그 전과 달라보인다는 것을, 나무를 바라볼 때의 마음이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 밤나무가 손자 밤나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치 우리 할아버지께서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 같았다. 사람과 나무는 닮은 점이 참 많다는 것을, 나무의 삶도 사람의 삶처럼 인내와 고뇌를 견디어 내야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스스로를 사랑함으로써 다른 이를 사랑하게 되는 것과 존재의 의미를 찾아 깊게 뿌리 내리는 것이었다. 식물은 그저 우리에게 열매를 주고 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으며 저마다 스스로의 존재를 가치있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에 부끄러움 마저 들었다.   

 

 책을 다 읽고서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해진 복숭아 나무 옆에 가서 손으로 가지를 만지며 속삭여 본다. 겨울잠 잘 자고 내년에 또 만나자고, 너가 일어나는 날 나 역시 너를 알아보겠다고. 그리고 문득 드는 생각은 사람도 나무처럼 한 해를 마무리 하고 다른 한 해를 준비하는 겨울잠 자는 시간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것.

 

 가족들과 함께 읽고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나무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를 위한 동화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