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있었나? 처음엔 분명 길이 있어서 자동차로 진입했었다. 길이라고 해야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에 높낮이가 제멋대로인 자갈투성이였지만 그래도 그런 길이나마 있어 작은 오두막도 지을 수 있었다. 이 시원찮은 길을 몇 번 쯤(몇십 번이 아님.) 이용하고 그럭저럭 오두막도 정리가 될 무렵, 태풍이 불어닥쳐 계곡 옆에 간신히 붙어있던 진입로를 갉아먹어버렸다. 길이 날아가버린 것이다.

 

오두막에 닿으려면 원래의 길이 있던 오두막쪽으로 가던가, 개울 건너에 있는 길로 들어와서 개울을 건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두 갈래 길이니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오두막쪽으로 가려면 옆집을 통과해야 하는데 옆집분이 사유재산권에 대한 인식이 높은 분이라 함부로 그 땅을 밟을 수가 없다. 처음엔 그래도 옆집분의 넓은 아량으로 옆집 앞마당에 차량을 대고 물건을 내릴 수 있었다. 물건이란, 며칠 분의 식량, 책장에 들여놓을 열댓 권의 책, 세면도구 등인데 많을 땐 남편이 지게로 실어나르곤 했다.

 

몇년 후, 인심이 바뀌었다. 옆집 앞마당에 차량을 대는 일은 이제 상상속의 일이 돼버렸다. 이제는 멀리 떨어진 공터에 차를 대고 물건을 들고 타바타박 걸어들어와야 했다. 길은 계곡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자갈제방길이라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넘어지기 일쑤였다. 캄캄한 밤중에 이 길을 걸으려면 길도 길이지만 칠흙같은 어둠에 지지 않으려고 심장이 부풀대로 부풀어올랐다. 혼자라면 무서웠겠지만 여럿이 걸으면 마음이 하나로 모여 서로를 아끼고 서로에게 고마워하는 애틋한 결속감도 생겼다.

 

몇년 후, 옆집의 주인이 바뀌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이 새로운 주인은 아예 집을 철옹성으로 만들어버렸다. 도시에나 어울릴 듯한 철대문으로 진입로를 완선 페쇄해버렸다. 전에는 그래도 걸어서 옆집 앞마당을 가로질러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들어갈 수조차 없다. 견고한 대문을 보는 순간 가슴이 턱 막혀버리고 맥이 풀린다.

 

방법이 그래도 하나는 남아 있다. 개울 맞은 편 길로 들어와서 개울을 건너면 된다. 돈을 좀 들이면 포크레인을 불러 개울에 커다란 바위를 굴려 임시 징검다리를 놓으면 된다. 그곳에 사는 지인분의 노력으로 겨우 징검다리를 놓아서 불편하고 아쉬우나마 개울을 건너 오두막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지난 번 일이다.

 

지난 토요일. 여름 장마로 불어난 계곡의 수량때문에 애써 돈을 들여 놓은 징검다리가 이제는 쓸모없게 되어버렸다. 길이 없어진 것이다. 한여름이니 놀이삼아 개울을 건너면 될 것 아니냐, 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물에 닿으면 망가지는 카메라, 목숨과도 같은 딸아이 스마트폰이 있고, 망가진 데크를 손 볼 목재와 학교에서 빌린 무거운 절단기 등이 있었다. 지게를 지고 두세 번 개울을 건너는 남편이 듬직하면서도 안쓰러웠다. 남편 허벅지까지 닿는 빠른 물살의 개울물을 겨우 건너고나니 이제는 오두막에서 나올 일이 걱정이다.

 

이제는 퇴각이다. 밤에는 비까지 내려 개울물 소리가 우렁차 잠을 설쳤다. 수량도 불고 유속도 빨라졌을 텐데 저걸 어찌 건너가나. 속으로 빌었다. '비야 더 내려라.'라고. 차라리 고립되면 119에 도움을 요청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19를 부를 정도는 아니어서 조금 실망이었지만 그렇다고 개울물을 건널 엄두는 나지 않았다. 방법은 하나, 옆집을 통과해야 한다. 다시 대문 앞에 서니 개인주의에 화가 나고 서러움에 목이 멘다. 철올성 같은 철대문에 감시카메라까지 달려있고 저 위쪽 사방댐(하천에 흙이나 모래가 흘러내리지 못하도록 만든 댐)까지 넘을 수 없는 담이 빼곡히 둘러처져있다.

 

그때 길이 보였다. 두 갈래 길이었다. 하나는  대문옆 나무 울타리를 넘는 방법이고 하나는 철재대문밑 공간을 개처럼 드나드는 방법이었다. 나무 울타리라고 하니 낭만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이건 개울옆 낭떠러지 위라서 자칫 실수하면 십여 미터 아래 개울로 곤두박질할 수도 있으니 몸이 둔하거나 심장 약한 사람은 쉽게 도전하지 못한다.

 

길은 두 갈래였으나 나에게는 선책의 여지가 없다. 개가 되는 길이다. 감시카메라가 있건 어쩌건 일단 대문밑에 누워 시도해보니 단박에 통과다. 드디어 집에 돌아올 수 있다. 머뭇거리던 딸아이, 나보다 겁이 많고 몸도 나보다 더 둔하니 역시 선택의 여지가 없다. 모처럼 입은 새하얀 원피스자락을 바닥에 깔며 기어나오는데 표정은 더없이 해맑다. 역시 내 딸이구나. 자존심 센 남편은 이 짓은 도저히 못하겠다며 나무 울타리쪽을 향한다. 먼저 각종 물건을 하나씩 건네받고 제일 무거운 절단기는 합동 작전으로 겨우 담을 넘긴다. 민첩한 남편이 나무 울타리를 넘는데...아차 발이 공중에 뜬다. 순간 내가 손에 들고 있던 쇠몽둥이 지팡이를 나무틈에 대주었더니 그걸 발판삼아 무사히 담을 넘어온다.

 

무사통과를 기뻐하며 자축이라도 해야할 성 싶은데 어젯밤 먹다 남은 독일산 밀맥주 6캔을 동네에 거주하는 지인에게 주었다. 우리의 탈출기를 듣던 지인이 그런다. 인터넷으로 군청에다 글을 좀 써보라고. 사유재산 보호차원에서 대문은 그렇다쳐도 사방댐까지 울타리를 치는 건 불법이니 그에 대한 것을 민원 넣으라는 얘기다. 울타리로 인해 유사시에 산을 드나들 수 없기 때문에 법에 저촉된다는 것이다. 또한 가을이 되어 송이버섯철이 되면 주민들이 불편해할 것은 분명할 일이다.

 

민원을 넣겠다고 말은 했으나...했으나...철대문집은 우리 이웃집이 아니던가. 남편이 말린다. 그러지 뭐.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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