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먹는 것과 잠자는 것 빼면 뭐가 남을까, 싶을 정도로 이번 여행은 먹기와 잠자기에 충실했다. 우선 먹는 얘기부터 해야겠다.

 

딸아이가 어렸을 땐 여행에 제일 어려운 게 먹는 문제였다. 현지 음식을 잘 먹지 못하기 때문에 배낭에는 늘 누룽지와 라면, 고추장, 전기코펠을 챙겨넣었다. 10일~30일 분량의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서 여행 전  수 개월 전부터 누룽지를 굽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딸아이가 10대 중반을 넘어선 지금, 그동안의 노력(?) 덕택에 딸아이는 고수를 넣은 음식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아직도 남편은 고수에 인상을 쓰지만 말이다. 아이가 어른보다 새로운 것을 쉽게 받아들인다는 예증이 될까. 아니면 향이 있는 음식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다국적인 내 입맛과 취향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일까.

 

다국적인 입맛과 달리 나나 남편이나 평소에 먹는 것을 그리 탐하는 편이 아니다. 맛집을 찾아 다니는 일 따위, 차라리 경멸하는 입장이다. 텔레비전의 맛집 기행 관련 프로그램은 질색이다. 그냥 대충 먹으면 되었지 저렇게 극성를 떨까 싶다.

 

한번은 딸아이가 어렸을 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도 다른 집처럼 평범하게 훼밀리레스토랑에 가서 스테이크 같은 것 먹으면 안돼?" 뭐가 평범한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기준이 애매하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식구끼리 스테이크를 먹어 본 적이 없으니, 하여튼 우리는 분명 평범한 사람들은 아닐 터이다.

 

그러니 여행안내서를 읽어도 '맛집 찾아 삼십리' 따위의 얘기는 거의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러면 먹는 재미 빼고 뭔 재미로 여행다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에 대한 대답은 앞으로 가보지 못한 땅을 한참 더 다녀본 뒤에나 할 수 있겠지 싶다. 먹는 것 빼고도 세상은 무지무지 재밌고 신기한 것 투성이니까.

 

이렇게 먹는 것에 초연한 우리에게도 말레이시아는 단연 '음식의 천국'이었다. 다양한 음식의 배경에는 또한 다양한 인구 구성- 말레이인 60%, 중국인 30%, 인도인 !0%-이 그 원인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수세기 동안 네덜란드, 포루투갈, 영국, 일본의 식민지를 거쳐오면서 삶의 양태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이다.

 

8박 9일 동안 수도인 쿠알라룸푸르와 역사 도시인 말라카에 머물면서 한번도 같은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으니 우리는 본의 아니게 어느 새 식도락가가 되어있었다. (딱 한 번 있긴 했다. red bean soup 라는 말레이시아식 팥죽을 남편이 좋아해서 두 번 먹어보긴 했다. 비교하자면 우리나라의 팥죽보다 훨씬 공이 덜 들어간 음식이어서 그냥 푹 삶아서 설탕이나 꿀을 넣어 간을 하면 되는 간단한 음식이다.)

 

여행 가기 전에 읽었던 박종현의 <말레이시아>에도 이런 표현이 나온다. '말레이시아에 살면서 쿠알라룸푸르 음식점에서 파는 음식을 종류별로 먹으려면 일년으로는 부족할 정도이다.' 이럴 정도이니 우리같은 '맛집 혐오가'(?)도 단 며칠 동안 머물면서 온갖 다종다양한 음식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세 끼 꼬박 챙겨먹고도 늘 입맛을 다실 수밖에. 게다가 음식 값은 대체로 저렴한 편이었다.

 

인상적인 음식 얘기 한 가지. 말라카에는 역사적인 도시답게 음식도 혼혈(?) 음식이 많았다. 다양함에 맞춰 이름도 많았다. 하루종일 줄 서서 먹는 음식점도 여러 군데였다. 한 끼 먹자고 긴 줄에 서는 일, 별로 해본 적이 없는 우리였다. 그러나 조그마한 동네에서 3일씩이나 묵으며 유명한 곳에서 한 끼도 먹지 않는 일은, 그렇게 무심 초탈하게 지내기에는, 사실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작정하고 새벽같이 찾아간 음식점이 있었다. 이른 아침 식당 문을 열기도 전이었는데 이미 여러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벼르고 별러 왔을 터이다. 며칠 전부터 눈에 띄어 식욕과 호기심을 자극하던 chicken rice ball을 드디어 먹게 되었다. 유달리 우리 테이블만 주문을 늦게 받는 것 같다며 초조해하고 있을 때 퉁퉁한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얼마나 벼르던 음식이더냐, 얼마나 맛있으면 사람들로 늘 붐비더냐, 그래 우리가 먹어주마.

 

탁구공보다 작은 크기여서 먹어도 얼마 안 될것 같다며 chicken rice ball 30개를 주문하고 더불어 반찬으로 채소요리 한 가지와 바베큐 돼지고기 한 접시를 시켰다. 음식을 기다리며 옆 테이블을 보니 보통  chicken rice ball 을 한 사람당 5개 정도 먹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에고, 우리는 세 사람인데.

 

하여튼 다 먹어치웠다. 주먹밥 모양의 chicken rice ball 이 딱히 맛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약간 특이했을 뿐 기억에 남을 만한 맛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우리는 아니 남편은 음식에 대한 예의를 최대한 지키려고 애썼고 그 예의를 지키는 일은 음식을 남김없이 먹는 일이었다.

 

인도의 라다크 지방 여행 후에는 몸의 신경 세포가 교란되는 듯한 후유증을 남겨 힘들었는데, 이번 말레이시아 여행은 영양 과잉으로 몸의 혈관 하나하나에 기름이 낀 듯한 포만감 짙은 후유증을 남겼다. 과연 말레이시아는 음식의 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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