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갔다가 무심코 제목에 끌려 데리고 온 책이 있었다. 오영욱의 <중국인은 왜 시끄러운가>. 충칭, 청두, 베이징 등을 여행한 기행기인데 그중 관심이 있는 상하이 편을 먼저 읽었다.

 

 

 

 

 

 

 

 

 

 

 

 

 

 

 

 

 

길지 않은 내용 중에서 재미있는 구절을 발견하고 친구들과 남편에게 퍼 날랐다. ‘저명한 학자였던 그가 가정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남긴 명언으로 100년 전에 확립했다고 한다. 여기서 는 후스(胡適 1891~1962).

 

 

후스의 34

 

부인이 외출할 때 꼭 모시고 다녀라.

부인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라.

부인이 아무리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해도 맹종해라.

 

부인이 화장할 때 불평하지 말고 끝날 때까지 기다려라.

부인의 생일을 절대 까먹지 마라.

부인에게 야단맞을 때 쓸데없이 말대꾸하지 마라.

부인이 쓰는 돈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이중 다른 건 몰라도 첫 번째와 일곱 번째를 어느 정도 실현하는 남자가 내 남편이지만 이 분 따라가려면 아직 가야할 길이 멀고도 멀다.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진리의 말씀을 남긴 이 분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글의 원전을 급히 도서관에서 찾아보았다. 30여 분을 단숨에 걸어가서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1>을 데리고 왔다. 다른 건 제쳐두고 후스가 실린 부분부터(부분만!) 읽었다.

 

 

 

 

 

 

 

 

 

 

 

 

 

 

 

 

 

 

후스는 국민당의 주구라며 손가락질을 당했지만 혁명가들처럼 불공대천의 적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언론의 자유와 민주헌정, 인권의 보장을 죽는 날까지 장제스에게 요구했다. 투기성이 다분한 지식인들처럼 곡학아세로 관직을 탐하지도 않았다. 장제스가 수많은 자리를 제의했지만 베이징대학 교장과 중앙연구원 원장 등 교육과 관련된 것 외에는 거절하며 최고 권력자의 쟁우를 견지했다. 관직은 중·일전쟁 기간 주미대사로 봉직한 것이 유일했다. 장세스도 오만상을 찌푸릴 때가 많았지만 쟁우의 신랄한 비판을 견디며 평생관계를 유지했다.  -167

 

  

후스의 부인 장둥슈는 전족에 문맹이었지만 집안은 장제스나 쑹메이링과는 비교도 안 되게 번듯했다고 한다. 이들의 결혼은 미소년의 후스를 본 장둥슈의 어머니의 성화와 추진력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이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사주보는 사람들을 전부 매수한 뒤 제발 부탁이니 사주팔자라도 한번 맞춰보자며 후씨 집안사람들을 2년간 설득했다나.

 

전족에 문맹의 장둥슈였지만 기질은 결코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던가 보다. 민국 4대 미남의 한 사람을 남편으로 두었고, 조강지처를 버리고 신여성과 결혼하는 풍조가 만연했던 시절에 끝까지 결혼을 유지했으니 말이다. 후스가 단 한 번 이혼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는데 좋다. 그 전에 할 일이 있다며 주방에 들어가 식칼을 들고 나와서는 아이들도 죽여버려야 관계가 완전히 정리된다며 두 아들이 자는 방을 향했다고 한다. 기겁을 한 후스가 그만 기겁을 하고 무릎 꿇고 싹싹 빌었다나.

 

후스가 주미대사로 나갈 때 지식인 사회에서는 이렇게 쑤군댔다고 한다.

장둥슈가 대사부인이라니 말도 안 된다. 의전은커녕 영어와 중국어도 구분 못한다. 미국 상류사회 사람들 앞에서 중국 망신 톡톡히 시킬 테니 두고 봐라.”

평소 후스의 월급봉투를 거의 음식에 쏟아부었던 장동슈는 주방에 있는 날이 밖에 있는 날보다 많았다고 하는데 덕분에 미 국무부의 고급관원과 각국 대사들의 입맛을 휘어잡았단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입맛을 다시며 속으로 후스를 부러워했다나.

 

정사正史 보다 야사野史가 재밌는 법. 후스라는 사람, 파고들수록 흥미가 당겼다. 이번엔 걸어서 1시간 30분 걸리는 또 다른 도서관으로 버스를 타고 갔다. 그의 목소리가 담긴 책이 궁금했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라는 책이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으나 그의 사상의 편린을 조금이나마 맛을 볼 수 있었다. 다만 그가 목소리를 내던 시절을 감안해야 하니 계몽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지금 시각으로 보면 당연한 말씀이 대부분이어서 크게 감흥은 없지만 그의 근본 기질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었다.

 

후실로 들어간 후스의 어머니는 정실의 두 며느리보다 나이가 어렸는데 이 며느리들이 늘 의견이 달라 다투었다고 한다. 화를 내는 일도 많았는데 이를 통해서 후스는 어떤 통찰을 얻게 된다.

 

 

"처음에는 그걸 잘 몰랐지만, 나중에는 나도 점점 남의 안색을 살필 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사람의 화난 얼굴이며, 세상에서 제일 수준 낮은 일은 옆 사람을 향해 화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임을 그때 알았습니다. 그것은 대놓고 욕하는 것보다 더 참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51~52쪽  

 

 

어떤 고상한 이론이나 사상보다 실천하기 힘든 게 이런 게 아닐까싶다. 아마도 후스는 평생 이 깨달음을 놓치지 않고 살았을 성싶다. 기질이 강한 부인과 끝까지 해로했으니 말이다.

 

 

 나는 네가 당당한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

  나의 효자가 될 필요는 없다.“

 

  

 

내 부모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는 건 분명 앞서갔다는 얘기다. 이분이 아직 살아계신다면 지금은 어떤 말씀을 하실까? 이 생각을 뛰어넘는 생각엔 어떤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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