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여행기(2005년 8월 9일~8월 14일)


1.준비

이번엔 대만이다. 7월 16일에 시작되는 여름 방학은 너무나 길다. 47일간이다. 늘 35일 내외에서 머물던 여름 방학에 익숙했던 터라 갑자기 늘어난 열흘이란 시간이 나에게 뭔가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가를 저질러야할 것 같은 답답함에 몸서리치다가 계획에도 없던 대만 행을 감행한다. 이유는 단 하나. 항공권이 저렴하여 세 식구가 무리 없이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십이 년 전 처음 여행할 땐 여행지 먼저 돈은 나중이었는데 어디 인생이 늘 그렇게 황금빛인가, 이젠 경비 먼저 생각하고 여행지를 나중 선정하는 합리적이고 계획적인 생활인이 될 수밖에. 지갑 속에 들어있는 액수 먼저 확인하고 점심 사 먹듯 이번 여행은 한마디로 한 끼 점심 같은 여행이었다. 가볍다. 위에 부담이 되지 않는다. 먼 훗날 돌이켜보면 먹었던 메뉴도 생각나지 않을 지도 모르는 그런 점심일 수도 있겠다 싶어 이렇게 또 기록을 남기기로 한다.

먼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던 중 <비취랑>이라는 Daum 카페를 발견한다. 회원 가입하고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어본다. 어라, 나 보다 앞지른 사람들이 많구먼. 늘 나 보다 못한 사람도 많고 반대로 나 보다 더 잘 난 사람도 무지 많다는 내 지론(?)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런데 원 세상에, 이렇게 자세할 수가 없다. “호텔을 나와 왼쪽으로 가면 웨딩숍이 나오고 다시 왼쪽으로 꺾어져 쭉 가면 민관서로 전철역이 나옵니다.”(포츄나 호텔로 3일간 머물렀음) “선도사역 2번 출구에서 나와 맥도날드를 마주보고 서 있는 기린 그림의 빌딩을 지나 갈색 건물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면 요렇게 생긴 간판이 걸린 호스텔이 나옵니다.”(타이페이 호스텔인데 2번 출구는 불편하므로 1번으로 나오면 훨씬 찾기 수월함. 여기서 이틀 묵음) 누군가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기록이다. 줄을 지어 등산할 때처럼, 눈길에 난 발자국처럼 그저 앞질러 걸어간 자들의 발자국만 따라가면 되는 여행이라니. 일단 참고하자. 뭐 대단한 탐험도 아닐 텐데.

가이드북으로는 세 권을 준비한다. 한글판, 영문판 Lonely Planet, 타이완관광진흥청에서 발간한 64쪽짜리 한글판(이 책은 6월초 코엑스에서 열렸던 여행박람회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얻어왔었음).

캐세이 퍼시픽 항공의 <비지트 타이페이>는 항공권+호텔1박을 기본으로 한 에어텔 상품이다. 호텔비가 제일 저렴한 포츄나 호텔로 2박 더 연장하여 예약한다(기본 314,000원+1박 추가당 34,000원, 아동 기본 225,000원+1박 추가당 15,000원, tax 1인당 61,900원) 4일 째 밤은 화련에 가 있을 테니 그건 그 때 직접 부딪히고 마지막 날은 돌아올 때를 대비하여 다시 타이페이에 있는 저렴한 호스텔에 직접 이메일을 보내 예약한다. 얼마 후 답변이 온다. OK. 준비 완료.

공항 데스크에서 직접 받은 전자항공권이 좀 낯설다, 쿠폰 형식의 빨간색, 파란색 줄이 있는 그런 모양새가 아니라 그냥 A4용지다. 간편하구먼. 세 식구용 배낭으로 손잡이 달린 끌랑 하나(35L)와 작은 배낭 2개가 전부라서 그냥 기내로 들어갈까 하다가 휴대용 칼 하나 때문에 이미 통과했던 출국 수속 대 첫 관문을 다시 빠져나온다. 세 식구 우루루. 그전엔 칼 하나 정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탑승수속 대에 올려놓은 우리 배낭은 8kg정도. 이렇게 가방이 가볍기로는 여행 중 처음이다. 홀가분하기 이를 데 없다. 어린 딸아이의 먹거리와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비상사태에 대비해 옷도 바리바리 싸들고 다녔는데 아이가 자라니 너무 간편하다, 얘야, 어서 무럭무럭 자라서 이 에미 배낭 좀 네가 들어주렴.

2. 간략한 일정

<8월 9일 화요일>

호텔 투숙-대만의 호텔들은 신용 카드나 현금으로 보증금을 받는데 체크아웃시 되돌려준다. 여러 여행자들이 이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데 그냥 카드를 주니까 영수증도 따로 내밀지 않는다. 사인도 하지 않으니까 거래가 성립되는 것도 아니고 이를테면 예방차원인 것 같다.

고궁박물관- 75만 점의 보물을 보유하고 있는 대박물관으로 세계4대 박물관중의 하나라고 하나 실제 참관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소수다. 물론 전시되고 있는 보물들은 무척이나 귀하고 아름답고 세계의 다른 유수의 박물관처럼 남의 것을 벽 째 뜯어온 것 같은 무지막지함도 보이지 않고(이 부분은 잘 모름) 나름대로 알차고 훌륭하나 그 수가 너무나 적다. 그래서 구경도 하다가 만 것 같은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세계 4대 박물관이라기에 루브르나 대영 박물관 비슷한 것을 기대하고 지레 겁을 먹었는데 덕분에 힘은 부치지 않았다.

스산위안- “미술관 옆 동물원”은 아니고 박물관 옆 공원이다. 아담한 규모로 아기자기하다. 연못에서는 내 허벅지만한 잉어들이 서로 먹이를 먹겠다고 아우성이다. 한 젊은 엄마와 어린 남매가 열심히 먹이를 주고 있는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 젊은 엄마가 우리 유진이에게 물고기 밥을 한 줌 나누어준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그 눈빛이 참 선하고 적극적이다. 세상 엄마들의 눈빛이다.

타이페이역-흔히 말하길 인도의 여행은 기차에서 시작하여 기차에서 끝나는 것처럼 대만 여행은 타이페이역에서 시작하여 타이페이역에서 끝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화련행 열차표를 예약할 겸 찾아간 타이페이역은 마치 미로와 같다. 현기증마저 인다. 우여곡절 끝에 창구에서 표를 끊는 데 표가 없단다. 근처의 여행사에 가서 패키지를 알아보니 내겐 천문학적인 비용을 요구한다. 다시 안내 창구로 가서 앳된 아가씨에게 물어보니 버스가 City Hall 근처에 있단다. 그래 내일을 기약하리.

<8월10일 수요일>

家樂福-화련(이렇게 “화련”이라고 말하면 절대 못 알아듣는다. 화리엔~비스므레 발음해야 되는데 ㅎ이 /p/도 /f/도 아닌 것 같다.)행 버스를 알아보기 위해 City Hall까지 갔으나 정거장 팻말이 보이지 않는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는 데 결국에는 화련행 버스를 운행한다는 대유버스영업소까지 찾아간다. 그런데 운행하지 않는단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태풍으로 길이 끊어져 한시적으로 폐쇄된 상황이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대만의 시외버스 정류장이 수시로 바뀐다고 하는데 이 점만 빼고는 대만의 대중교통은 나름대로 체계를 갖추어 여행하기에 편리한 편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웬 가락복?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어떤 현지인이 가르쳐준 대로 근처에 있는 무슨 기차역으로 가본다. 또 열심히 걸었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따가운 햇볕 속을 생수 한 병으로 식혀가면서, 다리 아프다고 투덜거리는 유진이를 살살 달래 가면서, 열심히 길을 건너고 또 묻고 다시 걸어 찾아갔으나 역시 화련행 기차표는 없단다. 그러면 그렇지, 서울역에서 매진된 표가 노량진역에서 있을 리가 있겠어? 혹시나 했던 우리가 미련한 게지. 허탈한 심정으로 역사를 빠져나오니 반가운 기업 로고가 눈앞에 보인다. 바로 대형 할인점 까르프. 이미 다국적 기업의 판매 전략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눈에 익을 대로 익은 그 기업 로고가 마치 이국땅에서 만나는 친지와도 같아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몹시도 힘들었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간 가락복. 물건이 천정 높이 까지 그득 쌓여있는 모습이 우리네 진열 방식과 대비된다. 유진이가 갑자기 달려간다. 어느 판매대에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타월 손수건이 그득하다. 한 장에 9원. 친구들에게 주고 싶다기에 열장을 산다. 남편도 작업화로 신을 운동화 한 켤레를 산다. 다양한 간식거리에 잠시 감탄한다. 그런데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향이 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나도 이곳 대만 음식에는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점심-가락복을 나오니 벌써 점심시간이다. 아이 쇼핑은 잘 했지만 허망한 기분이 드는 건 또 왜일까? 점심부터 먹고 보자. 가만히 보니 근처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어딘가를 열심히 향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이 저들만 따라가면 될 것 같다. 드디어 성공. 먹자골목에 당도한다. 동네 이름? 모른다. 음식점 이름? 굳이 따질 필요도 없다. 마치 사은품을 타려는 사람들처럼 줄을 선 사람들 뒤를 우리가 나란히 잇는다. 일회용 도시락에 밥을 담아주면 그걸 들고 뷔페식처럼 차려진 반찬을 기호대로 덜고 값을 내면 된다. 먹을 만하다. 아니 대만 여행 중 입맛에 제일 맞는 맛이었다. 상호라도 기억해둘걸. 동네라도...

101빌딩-타이페이에 새로 생긴 명물이라는 101빌딩. 5층 매표소에서 89층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37초.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엘리베이터”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단다. 전망대에선 커피가 제격. 한 잔 마시고 나니 비로소 여행 온 실감이 난다. 남편과 유진이는 열심히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도깨비 방망이같이 생긴 일회용 스푼이 버리기 아까워 가방 속에 챙긴다. 나는 이따금 이런 사소한 것에 매료된다.

여행은 뭐니 뭐니 해도 눈을 혹사시킬 정도로 많이 봐두어야 포만감을 느끼는 법, 아니면 몸을 혹사시키든가. 하여튼 101빌딩을 보고 나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우리나라의 63빌딩도 못 가봤다.

용산사- 조금 넉넉해진 마음으로 용산사에 간다. 무료로 나눠주는 향을 한 줌 받아 그네들처럼 향로에 넣고 흉내를 내 보지만 별로 기도할 게 생각나지 않는다. 뭘 기도한다는 게 결국은 뭘 좋게 어떻게 해달라는 것 일 테고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 혼잣말일게 분명할 테고, 내가 너무 세상을 재미없게 살고 있나? 닭 벼슬 같은 머리에 야하게 옷을 입은 한 청년이 너무나 진지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다. 무엇을 기도하고 있을까? 영화 속 주인공처럼 주위의 수많은 인파는 차라리 그 청년을 돋보이게 하는 엑스트라처럼 희미하게 비쳐진다.

시먼띵-우리나라의 명동 같은 곳. 젊은이 거리다. 여기저기 기웃거려보지만 딱히 할 만 한 게 없고 수많은 인파에 치여 몸만 피곤하다. 어느 의류 상가 빌딩으로 들어가니 카페 하나가 한 구석에 조용히 숨어있다. 역시나 옷은 그림의 떡이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일단 목부터 축인다. 베트남에서 말로만 듣던 얼음 넣은 맥주를 마셔본다. 맛이 괜찮다. 한 나라의 문화나 풍습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바퀴 벌레를 먹는 다는 어떤 나라도 개고기를 먹는 우리네와 다를 바 없다.

스린야시장-대만에 다녀온 사람들은 누구나 얘기하는 야시장. 정말 그럴 만했다. 동네 사람들 다 나와 있고 세상에 있는 생물/무생물은 물론 온갖 도박기구(소박하지만)까지 다 나와 있는 것 같다. 밤이라서 그런가, 더 풍성하고 더 그럴 듯하게 보인다. 좌판의 음식도 푸짐해 보인다. 유명하다는 어와젠(굴달걀부침)도 먹어본다. 동물 가게가 늘어선 모퉁이에선 유진이가 눈과 발을 떼지 못한다. 웬만한 애완견 이름은 꿰고 있지만 가까이 가지는 못하는 유진이를 위해 잠시 더 구경한다. 어라, 카멜레온까지 있네. 진짜 눈이 360도 회전일세. 대만의 야시장이 눈을 360도 돌아가게 만든다. 나도 카멜레온? 정말 재밌다.

<8월 11일 목요일>

양명산- 타이페이역에서 조금 헤맨 끝에 양명산행 버스에 오른다. 하나라도 더 봐야지 하고 열심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딘가 낯익은 곳이다. 벌써 현지인이 되었나 했더니 바로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 앞을 지나고 있다. 저런, 이걸 몰랐네. 좀 더 눈여겨 봐두었으면 타이페이역에서 버스 정류장 찾느라고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변명이라면 더운 날씨 탓이다. 꿀컥 꿀컥 생수 들이키다 보면 평소의 한가한 기분을 전혀 되찾을 수가 없게 된다.

서울의 남산 쯤 생각했던 양명산은 생각보다 훨씬 넓다. 가이드북을 열심히 읽어 보지만 어떻게 답사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럴 땐 먹고 생각하자. 리어카 위에 바나나 잎으로 싼 주먹밥이 눈에 들어와 간이 의자를 하나씩 차지한다. 퉁퉁한 우리네 시장 골목 아줌마 같은 주인아줌마가 중국어로 무어라 인사를 하는 데 우리가 외국인으로 보이지 않는가보다. 하기야 도착 첫날 전철역에서 겨우 교통카드를 물어가며 끊고 났는데 우리에게 길을 물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생긴 게 아무리 비슷해도 다른 점이 분명 있을 텐데 그러면 우리가 너무 현지 적응을 잘해서?

처음 가는 곳은 일단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살필 것, 역시나 버스 팻말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두어 명 있다. 108번 순환버스가 있다. 무한승차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니 중간에 여러 번 내려 구경하고 다시 탈 수 있는가 보다. 일단 타고 보는 데 중간 중간에 사람들이 두엇 내리는 것이 보이는가 싶더니 도저히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는다. 꾸벅 꾸벅 조는 잠이 무척이나 달콤하다. 그러다보니 다시 버스가 원점에 와 있다. 이럴 땐 쉬자. 근처의 스타벅스에 들어가 시원한 바람 쏘이고 커피 한 잔 마시니 다시 원기가 회복된다. 다시 밖으로 나가기가 두렵다. 그늘도 없다.

단수이- 양명산에서 내려오는 길(올라갔던 길이 아님)에 베이터우 온천박물관에 잠시 들려본다. 잠시 옛 건물이 간직한 나름의 분위기에서 땀을 식히고 단수이로 향한다. 인천의 월미도 같은 곳으로 해안선을 따라 상가가 쭉 늘어서 있는데 원주민 기념품 가게, 옷가게, 가방 가게 등 볼거리가 제법 있다. 여기서 다시 배를 타고 어인마두라고하는 유원지에 다녀온다. 역시나 덥기만 하고 이렇다 할 볼거리는 별로 없는 것이 연인끼리 온다면 그럭저럭 분위기가 나련만 더위에 지쳐 대낮부터 시원한 생맥주를 찾는 중년의 우리에겐 몸에 맞지 않는 곳이다. 다시 단수이로 향한다. 시원한 맥주와 오렌지 주스를 시키는 데 이 오렌지 주스 장난이 아니다. 캔에 들어있는 데 족히 1리터는 넘지 않을까 싶다. 유진이가 마시다 남은 것을 빈 생수 병에 담아 와서 나중에 먹었으니까.

빈속이나 다름없는 위장에 맥주가 들어가니 잠시 기분이 들뜬다. 역시 술은 낮 술이 제격이라니까. 해가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며 제방에 앉아 카메라로 장난을 하고 있자니 어떤 예쁘장한 아가씨가 다가와서 가족사진을 찍어주겠단다. 그러고 보니 셋이 함께 찍은 사진이 없다. 먼저 말을 건네준 이 아가씨가 고마운데 게다가 잠시 후 조화 두 송이를 가져다준다. 속에는 장미 대신 초콜릿이 쏙 박혀있다. 오늘이 Lover's Day라고 한다. 상점마다 즐비하던 인형 송이(꽃이 들어갈 자리에 대신 각종 동물 인형이 들어가 있음)가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오늘이 바로 우리로 치면 칠월칠석인데 그네들은 이렇게 연인의 날로 즐기고 있었다. 하여튼 술기운에 이 아가씨가 천사처럼 보이는 거다. 이 은혜를 어찌할꼬. 그런데 순간 수년간 입고 다니던 내 바지의 왼쪽 안쪽 허벅지 부분이 10cm 가량 솔기가 뜯어져 나가 허연 살이 훤히 보이는 거다. 엉덩이 부분 짜깁기 수술 두 차례, 오른쪽 바깥 쪽 허벅지 부분 박음질 수술 한 차례, 인도 산 엉터리 박음질 옷도 아닌 값비싼 백화점 바지인데 두 해 여름 내내 이 바지만 입다보니 헤질 대로 헤져있었다. 마침 이 아가씨가 좌판에 옷을 열장 정도 펼쳐놓고 팔고 있다. 한창 직장에 다닐 번듯한 아가씨인데 꾸미지도 않은 가게 한 모퉁이에서 좌판을 벌인 모습이 좀 애처롭다. 과거의 내 백수 시절이 떠오른다. 치마를 한 장 팔아준다. 집에 가서 입지도 않을 옷이 분명하지만.

<8월 12일 금요일>

예류-원래 내 계획대로라면 이날은 화련에 있어야한다. 명성이 자자한 타이루꺼 협곡을 내 보리라 작정했던 곳이다. 그런데 갈 방법이 없다. 물론 뒷감당 생각 안한다면 방법은 있겠지만 그건 아니고.

“바람 부는 제주에는 ~” 어쩌구 하는 혜은이의 <감수광>노래가 생각나는 곳. 바람이 세다. 몹시 세다. 걸음이 걸어지지 않는다. 정신 차리기 힘든 이 세찬 바람 덕분에 딸아이와 제 아빠 사이가 가까워진다. 평소 겁이 많은 유진이, 제 아빠 곁에 꼭 달라붙어있다. 바람아 더 불어라.

기암괴석이라.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집트의 여왕이라고 붙인 어떤 바위는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우리도 간단히 카메라에 담고 이내 이곳을 떠난다.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 눈을 버린 우리 눈에는 별 감흥이 없다. 항생제에 길들여진 상태에서는 더 강력한 항생제가 필요하듯이.

디화지에- 타이완관광진흥청에서 발행한 가이드북에 따르면 이곳은 꼭 가봐야 할 곳처럼 소개되어있다.“이곳은 타이완 전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재래시장이다. 거리 양편에는 타이완 전역에서 올라온 여러 가지 물건들과 약재로 가득하며, 모은 상품을 신선함과 고품질로 승부한다. 이곳은 평소에도 많은 인파로 유명한 곳이지만, 특히 매년 구정 때가 되면 물건을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거리에 늘어선 상점들 중에는 100년 이전에 건축된 건물들도 있어 전통재래시장의 풍미를 더욱 진하게 느끼게 한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사람이 없다. 오래된 가게들에선 말 그대로 재래시장의 풍미가 느껴지는 데 오가는 사람들이 드물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인가?

두 집 건너 하나라고 해도 될 만큼 수없이 깔린 편의점인 세븐일레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서 먹는데 주인 남자가 반갑게 이야기를 걸어준다. 가족끼리 왔다니 무척 반색한다. Welcome이라 던져주는 말 한 마디에 심심했던 마음이 다시 밝아진다. 이방인에게 던져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눈물겨울 때가 있는 법이다. 이곳 스러져가는 분위기의 재래시장에선.

타이페이 아이(Taipei Eye)- “이곳으로 말할 것 같으면~”무성 영화에 나오는 변사의 말투가 어울리는 곳인 이곳은 중국식 오페라 하우스이다. 인형극, 원주민 민속 공연 등과 함께 경극을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여행가면 전통공연 보기를 다이아몬드처럼 생각하는 지라 밥 한 끼 굶는 한이 있어도 볼 것은 꼭 보리라 생각하는 내게 제일 설득하기 힘든 사람은 다름 아닌 남편이다. 입장료가 일인당 880원. 어린이 할인도 없단다. 도합 2,640원(약9만원). 공교롭게도 우리는 이날 <타이페이 아이> 길 건너에 있는 <포츄나호텔>에서 나와 하루 숙박비가 700원인 저렴한 <타이페이 호스텔>로 숙소를 옮겼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룻밤 편히 잘 수 있는 비용을 탐탁지 않은 경극 관람에 소비를 하게 된 셈이다. 게다가 밤늦게 공연이 끝나 어제까지 머물던 호텔 앞을 지나 전철을 타고 모기가 들 끊는 호스텔로 터벅터벅 가야하니 순간 마누라의 허영심이 밉기도 하겠지만, 다 유진이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요. 고맙게도 여행 후에 재차 확인해본 결과 유진이가 꼽은 베스트 1위가 경극 관람이었다. 물론 만화 캐릭터 같은 손오공과 저팔계가 한 몫 했지만.

원주민의 민속 공연에 대한 생각 하나. 무대에 올리는 원주민 민속 공연은 쓸쓸하고도 안쓰럽다. 분명 성인 남자가 맡았을 역을 10대의 어린 청년들이 제 딴에는 열심히 춤추고 노래하지만 본래의 맛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인 남자들로 이루어진 공연이 박력이 있고 또 제 맛이 나느냐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경우 분명 연륜이 느껴지고 남성다움이 넘치는 공연이긴 한 데 또 제 맛을 느낄 수 없는 걸 보면 제한된 무대공연이라는 한계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삶의 현장에서 분리되지 않은 제대로 된 원형의 민속춤을 한 번 접해 보고 싶다. 욕심이겠지만.

<8월 13일 토요일>

주펀- 잠시 우리 가족의 취향을 밝혀본다.
내가 뽑은 베스트 여행지 1위-주펀, 2위-스린야시장, 3위-단수이
남편이 뽑은 베스트 여행지 1위-단수이, 2위-주펀, 3위-스린야시장
유진이가 뽑은 베스트 여행지 1위-타이페이 아이, 2위-예류, 3위-까르프

주펀은 한 마디로 참 사랑스러운 곳이다.
원래는 탄광도시로 번성하다가 채광 산업이 시들해지면서 관광도시로 탈바꿈했다한다.

온고이지신이라고나 할까. 옛것이 그대로 살아있는 곳으로 생각되는 이 곳은 멋진 세밀화로 짜여진 한 폭의 시원한 풍경화이다. 골목에 들어찬 상점에선 색색갈의 먹을거리가 넘쳐나고 고풍스러운 찻집은 작은 간판 하나부터 집기까지 눈을 끌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인데 주변 풍경 또한 한 폭의 그림 그 자체다. 우리는 어느 옛 찻집에서 동방미인차를 마시며 해발 588m의 지롱산을 우러르며 그 배경을 이룬 푸른 바다를 마음껏 담아왔다.

이곳은 특히 영화<비정성시>의 배경이 되어서 유명해졌다고 하는 데 꼭 한 번 봐야지.

지엔구어 휴일 옥시장, 꽃시장- 휴일에만 열리는 옥시장, 꽃시장. 이것까지 볼 수 있으니 우리는 운이 좋은 셈이다. 비록 시간이 늦어 꽃시장은 문을 닫았지만. 규모로 승부를 거는 중국인답게 <옥>이라는 주제 하나로 이렇게 큰 시장을 열 수 있다는 게 참 중국인답다.

옥과 관련된 제품이 많기도 하다. 딸아이에게 분홍색 옥팔찌를 하나 사준다. 반투명으로 예쁘긴 한 데 얼마 후 실밥 한 오라기가 풀려 느슨해져 버렸다. 옥에 티라고 해야 하나 뭐라 해야 되나.

중정기념당- 대만이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이곳은 장개석 기념관으로 엄청난 크기의 건물이 압도적이고 인상적이나, 일정 중 맨 나중으로 미루다가 볼 기회를 놓친다 해도 전혀 아쉬울 것 없는 곳. 우리나라의 독립기념관이나 현충사가 과연 외국인에게도 그 의미가 있을까. 조그만 시골 동네에서 고층 아파트 한 동 크기 만 한 교회를 만나는 기분이다. 건물의 크기와 그 큰 건물에 들어갔을 엄청난 비용만을 따져보게 될 뿐 내 상상력은 빈약해질 대로 빈약해져 버린다.

화시제야시장- 타이페이 시내에 있는 많은 야시장 중의 하나. 이미 스린 야시장에 매료당한 지라 감흥이 덜하다. 팥을 재료로 만든 젼주나이차를 마셔본다. 콩을 주 재료로 한 빙수도 먹어본다. 채워지지 않는 빈속을 역시나 세븐일레븐 편의점의 도시락으로 때운다. 세 권이나 들고 다니는 멀쩡한 가이드북은 이런 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이드북에 소개되어있는 식당을 찾아가는 일에 별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8월 14일 일요일>

마지막 날.

오후 5시 10분 비행기인데 마음이 급하다. 시간을 알뜰하게 쓰면 두 어 군데 섭렵할 수도 있는 시간인 데 마음이 무겁다. 그냥 남편이 가자는 대로 따라간다. 내가 시작한 여행이라 여행 중에는 될 수 있는 한 남편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준다. 먼저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 사람은 어쨌든 겸손이 미덕이다. 그래서 간 곳이 민속공예관. 제대로 된 곳이라 가격이 만만치 않다. 그래 오늘은 쇼핑이다. 기념품 좀 사고 이번엔 택시를 타고 “양장점”으로 향한다. 개량 중국옷을 디자인하고 판매하는 곳이라 한다. 그런데 이 택시 기사, 느낌이 좀 이상하다. 미터기를 꺾지 않아 지적을 해주었더니 간단히 무시해 버린다. 인상에서 불량기가 느껴진다. 순간 우리 가족 사이에 말없는 긴장감이 흐른다. 이번엔 지도를 펼치고 갈 방향을 가리켜도 또 간단히 무시해버린다. 긴장감으로 터질 지경이 된다. 어라, 요것 봐라.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미 비싼 수업료를 치른 경험이 있었다. 치욕의 이스탄불 택시 기사. 손놀림으로 만 원 짜리를 천 원짜리로 바꿔치기하여 어이없는 바가지를 씌우는 데는 도리가 없었다. 파리 몽마르뜨의 엉터리 화가. 중국인도 자기네 동족으로 착각하는 내 얼굴을 영화 속 서양 여인으로 만들어 놓고 자기가 정한 액수를 주지 않는 다고 험악한 인상을 지었었다. 마드리드의 에이즈 캠페인을 가장한 거리의 사기꾼. 서명 란에 쓴 Nationality: South Korea 때문에 나라 욕 먹히지 않기 위해 기부 아닌 기부를 했었다. 그런 남편과 나다. 우리도 지금까지 당할 만큼 당했다. 그런 우리를 몰라보다니. 남편이 단호한 목소리로 택시를 세운다. 순간 기세에 눌린 택시 기사, 기본요금만 받는다. 미터기만 사용했다면 분명 그 이상으로 요금이 나왔을 터인데. 자승자박이다.

허접한 택시 기사 때문에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하여튼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두 양장점으로 갔다. 간판도 확인했으나 셔터가 내려져있다. 시간이 너무 이른 탓이거나 일요일이어서 휴업인가보다. 이래저래 오늘은 무거운 날이다.

3. 또 다른 여행을 꿈꾸며

나는 헤어질 때 나누는 인사를 잘 못한다. 말이 서툴고 두서도 없을 뿐더러 간단한 인사치레조차 힘들어한다. 지금이 또 그렇다. 글을 마치려고 하니 그 착잡하고 무겁던 여행 마지막 날의 기분이 되어버린다. 그런 기분을 가볍게 날려 버리는 방법은 단 하나. 다시 여행을 떠나는 거다. (2005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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