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소년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
다케우치 마코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자전거 소년기(다케우치 마코토, 비채)

*가볍게 읽었다. 역시 자전거! 단순하고,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굴리다가 그냥 하고...별로 복잡하지 않은 주인공이 내 속에 있는 인물이랑 닮아서 더 편하게 읽었다.

8
떠날 때는 자전거로 간다. 어느새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10
잊을 리가 없다. 처음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자마자 나는 무서운 체험을 한 것이다. 신이 나서 달리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가속이 붙어 서지도 못하고 쌩 달려 내려가 비탈 아랫집 산울타리에 처박혔다. 그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그리고 그때 그 마당에 있던 것이 그 집 외아들 소타였고, 그때부터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때문에 처음 자전거를 탄 즐거움도, 몸이 얼어붙는 공포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만난 이야기를 했다. 아주 어릴 때 산비탈을 내려와 고물상 같은 데가 있었는데 거기를 들어갔더니 그 애가 마당에 혼자 놀고 있었다고. 그냥 간단한 이야기인데 난 그 장면이 눈에 딱 그려진다. 사실 내 머릿속에서 과장되어서 푸른 비탈길을 달려서 내려오는 5살짜리랑 고물상 마당에 앉아 흙장난을 하던 꼬마를 생각나게 한다. 난 그 기억이 참 마음에 들어서 이따금은 내 기억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쇼헤이처럼 부딪히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 장면이 참 마음에 들어서 내 기억인양 굴 것 같다.

14
우리가 다닌 가제가오카 초등 학교에는 1학년은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면 안 된다는 묘한 교칙이 있었다. 그 전까지 아무 문제없이 탔는데 초등학생이 된 순간 금지당한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게 너무 많다. 그런 걸 규칙을 배우는 거라고 하는데, 이따금씩 이해가 안 간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학교 밖은 대낮에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랐다. 교문과 담은 거대했다.

51
그러던 어느 날, 아사미는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명백히 여자 머리카락인데 아사미 것은 아니었으니 당연히 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의심받았다. 게다가 사실이었으므로, 나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바람이 별 거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게 자기가 바람피운 사실을 쓴 게 재밌다. 뭐랄까, 바람 좀 폈다고 죽네사네 할 정도의 문제는 아닌 것같다.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일 때!

80
먼저 일어난 사람은 나였다. 자는 동안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부풀어오른 탓인지 모른다.

86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고, 페달을 밟아 자기 세계를 넓혀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렸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바다까지 자전거 타고 가자고 했을 때, 소타는 먼 곳까지 가면 거기까지가 자기 영역처럼 된다고 했다.

110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친구가 재미있어 보이는 놀이를 시작하면 신경이 쓰이는 법이다.

134
누군가의 마음을 이어받아 달리는 기분은 혼자일때와는 전혀 달랐다. 길을 잃어도 계속 달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144
어떤 시점을 경계로 세계가 달라져 보이는 경험은 인생에 몇 번쯤 있을까.
나도 지금까지 그런 순간을 경험한 적이 몇 번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전거를 탔을 때에는 갑자기 세계가 넓어진 것 같았고, 새벽 바다에서 벌거숭이가 돼서 헤엄치던 때에는 파도와 바람과 하나가 된 느낌을 맛볼 수 있었다. 그 순간에 내 안의 뭔가가 달라지고 세계의 뭔가가 달라졌다. ...편지처럼 뭔가를 표현하는 행위도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 내가 쓴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조금이나마 세계를 움직인 것 같은 기분조차 들었다.
잘 설명을 못 하겠지만, 그런 다양한 경험이 겹쳐서 내 아들을 자전거에 태워주고 싶다는 소망으로 이어졌다. 호쿠토가 바람을 가르고 달리는 기분을 맛보기를 원했고, 너른 세계로 나아가기를 원했다. 그 아이가 자기 힘으로 세계를 바꾸는 쾌감을 알기를 원했다.

185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씩 마음 속에 바람이 부는 느낌이 되살아난다. 잘 숙고해서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듯이, 바람에 몸을 맡겨야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가정이 있으니 무모한 짓을 하면 안 되는 것이 정론이겠지만, 가족 덕분에 모험에 나설 수 있다면 그만큼 고마운 일도 없을 것이다.
..자전거는 자기 힘으로 바람이 될 수 있는 탈것이다.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은 바람이 되는 기쁨을 다시금 가르쳐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내일도 자전거로 달려 나간다.

218
자전거를 타면 왜 기분이 좋을까.
어린아이와 오래 같이 있다 보면 그런 근본적인 의문을 생각해보는 버릇이 생긴다. 없는 지혜를 쥐어짜 글을 쓴다는 작업을 매일 계속하다 보면 더욱 그렇다. ...
바람처럼 될 수 있으면 왜 기분이 좋을까. ...자기 몸을 써서 속도를 높여가는 느낌은 자전거가 아니면 느낄 수 없다.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기분 좋은 일이니, 자기 힘만으로 달리는 자전거는 역시 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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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14
필리파 피어스 지음, 수잔 아인칙 그림, 김석희 옮김 / 시공주니어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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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44

“신경쓰지 마라, 톰. 이모부는 옳고 그른 것에 유난히 민감한 분이란다. 이모부 자신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너도 자라면 그렇게 될 거야.”

그웬 이모가 말했다.

난 지금도 그래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안 그렇다구요!

톰이 발끈해서 외쳤다.

톰은 앨런 이모부를 제쳐놓고 그웬 이모만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그건 신사적인 행동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너그러운 결심은 조금만 압력을 받아도 쉽게 무너지는 법이다. 게다가 상대편이 짜증스럽게 굴면 그런 결심은 깨끗이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지금 톰은 몹시 짜증이 났다. 정말 억울한 기분이었다. 나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이모랑 이모부 때문에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한 기분이 들잖아.

-어렸을 때 도덕심에 더 충실한 것 같다. 나만 봐도 그렇고.




55

밤과 낮 사이에는 풍경이 잠드는 시간이 있다. 가장 먼저 일어나는 사람만이 그 시간을 볼 수 있다. 또는 밤새 여행하는 나그네가 객차 창문의 블라인드를 올리고 밖을 내다보면, 쏜살같이 지나가는 정지된 풍경을 보게 될 것이다. 나무와 덤불과 식물들은 모두 잠들어, 꼼짝도 하지 않고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서 있다. 나그네가 간밤에 외투나 담요로 몸을 감쌌듯이, 바깥 풍경은 잠에 감싸여 있다.

톰이 정원으로 나간 것은 아침이 오기 전의 이 고요한 잿빛 시간이었다. 톰은 분명히 자정에 층계를 내려와 현관을 지나서 뒷문으로 갔다. 그런데 톰이 그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갔을 때는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이었다. 휘영청 달 밝은 밤이든, 깊은 어둠에 싸인 밤이든, 정원은 밤새도록 깨어 있었다. 그렇게 밤새 불침번을 서고 나서, 이제 정원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새벽이나 밤은 남들이, 다른 풍경이 다 잠들어있어...꼭 내 것 같은 시간이라 놓쳐버리기가 아깝다. 아이들이 자기 싫어하는 것이나 일찍 일어나서 놀고 싶어 하는 것도 그 시간이겠지.




147

해티와 다툰 날 오후, 톰은 해티가 따지고 드는 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물론 톰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해티는 소녀답게 옷차림에 민감해서, 톰과 말다툼을 할 때 옷차림새를 무기로 이용했다. 톰은 자기도 그런 관찰력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톰은 정원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도 그저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이의 사생활’에 나온 것처럼 남녀 아이들의 차이가 드러나는 장면.




170

피터는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을 자면서도 얼굴 표정이 변했기 때문이다. 미소를 짓다가, 금세 한숨을 쉬기도 했다. 한번은 넋이 나간 듯이 보여서, 롱 부인은 아득히 먼 곳에 가 있는 피터를 이곳으로 다시 불러 오고 싶었다.

-꿈을 꾸고 있는 아이. 어렸을 때 읽은 책에서 아이들은 꿈을 안 꾸고 어른이 되면서 꿈을 꾼다는 말이 있어서 그 말이 날 너무 가뒀다.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아이들이 꿈을 안 꾸다니....틀린 말임에 분명.




236

톰은 문득, 그 시계를 처음에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중에는 크게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던 그날 밤, 오래 전 그날 밤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시계를 보고 톰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뒷문까지 갔다가 다시 이층으로 올라오는 데는 몇 분이 걸렸지만, 정원을 돌아다니는 동안에는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정원에서 아무리 오랜 시간을 지내도 부엌 시계는 그 시간을 전혀 헤아리지 않았다....아마도 그것이 괘종시계가 열세 시를 치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열두 시 이후의 시간들은 통상적인 시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 통상적인 시간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 시간, 통상적인 60분 안에 끝나지 않는 시간, 끝이 없는 시간이었다.

-시간에 대한 고민...어떤 순간이 영원같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시간이 일직선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게 어른이 되는 것인가. 하지만 어렸을 때 그런 기억이 더 많다.




266

달각거리는 말발굽 소리를 뚫고 해티와 바티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톰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그건 어른들의 대화여서 재미가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도 모두 따분한 것들뿐이었다...아니면 해티가 이제는 자기를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다는 야릇한 느낌 때문에 깨어서 활동하고 있다는 기분이 별로 들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289

“내 나이쯤 되면 누구나 대부분의 시간을 과거 속에서 보내게 된단다. 과거를 추억하기도 하고, 과거를 꿈꾸기도 하면서…….”

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원에서는 왜 날씨가 항상 화창했는지, ‘시간’이 왜 앞뒤로 왔다갔다했는지, 그 이유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몇 주 동안 밤마다 정원이 나타난 게 꼭 바솔로뮤 부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인이 정원을 그토록 자주 꿈꾼 것은 올 여름이 처음이라고, 어린 시절의 느낌, 함께 놀 친구와 장소를 애타게 찾던 그 기분을 그토록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던 것도 올 여름이 처음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제가 올 여름에 여기 와서 간절히 바란 것도 바로 함께 놀 친구와 장소였어요.”




295

“톰이 미친 듯이 뛰어올라가더니, 둘이 얼싸안지 뭐예요. 오늘 아침에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니라, 오랫동안 사귄 친구 같더라니까요. 그보다 더 신기한 일도 있었다구요. 당신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하겠지만…… 바솔로뮤 부인이 꼬부랑 할머니이긴 하지만, 몸집이 톰과 비슷하잖아요. 그런데 톰이 바솔로뮤 부인을 조그만 소녀라도 되는 것처럼 두 팔로 껴안으며 작별 인사를 하더라구요.”




*홍역을 피해 이모집으로 갔다.

이모집은 같이 놀 친구도 없고, 멋진 정원도 없는 심심한 곳.

현관에 있는 낡은 괘종시계는 종을 멋대로 치고 밤 12시가 넘은 어떤 시간에 열세번 종을 친다.

어느 날 밤 시계 종소리를 듣고 뒷마당으로 나간 톰은 멋진 정원을 발견.

거기서 해티라는 꼬마애랑 친구가 되고, 넓은 정원에서 마음껏 뛰어논다.

톰의 존재를 아는 아벨...이게 실제인지 꿈인지 불안하고 긴장감이 든다.

해티가 넣어놓은 스케이트가 실제 톰에게 전해지는 장면. 아, 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바솔로뮤 부인 꿈-오래전 행복했던 정원에서 논 기억.

톰 꿈-놀 친구와 장소가 필요해.

피터 꿈-나도 형이랑 같이 정원에 가고 싶어.

이 세 사람의 꿈이 만나려면 여기는 꿈 속. 그러면서 현실과 선은 이어져있다.

재미있게 읽었다. 중간중간 이야기가 어떻게 풀릴지 긴장.

정원....숲이라고 해도 될만한 정원에 대한 묘사가 아이들이 자연에서 노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를 보여줬다. 아무런 도구가 없어도 자기들이 스스로 만들어 내어 몇 시간이고 빠져들 수 있는 무수한 놀이. 그리고 상상의 세계. 참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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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의 기묘한 몽상 익사이팅북스 (Exciting Books) 27
이언 매큐언 지음, 앤서니 브라운 그림, 서애경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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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같이 일하는 작가랑 어린시절 이야기를 했다. 어떤 어린이였어요?
그냥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아이. 난 지금도 그런데 불꺼진 집에 혼자 들어가는 게 참 좋아요.
방 안에 우산 펴서 집 같이 만들어놓고 그 안에 있는 게 좋았어요. 쇼파 뒤 같은데 들어가 있는게 편하고 좋았어요.
거기서 그냥 헛생각 하는거요. 그냥 그렇게 특별한 생각은 아닌데, 엄마가 여우면 어떡하지. 하는 그런 상상, 별로 과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 그냥 그런 헛생각 하는 거요. 일곱 살때쯤에는 밤마다 벽 쪽을 보면서 울면서 잤어요. 슬픈 상상하다가요.
지금은 소리내서 우는 것도 할 수 있는데 그땐 소리 안 내고 눈물만 쭉 흘리는 걸 잘했어요. 스스로 그렇게 우는 내가 기특했고. (아, 이런 이야기는 실제 내가 한 것 같지는 않다. 지금 덧붙여지는 것.)
그러고보니 혼자서 동네 돌아다니는 것도 좋아했다.
낯선 나라를 여행할 때 낯선 도시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고 씻고, 정리 좀 한 다음에 숙소에서 나와 그 도시를 쭉 걸어보는데
난 그게 참 좋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가이드북에 나온 식당이나 그냥 맛있어 보이는 식당에 가서 밥도 먹고, 시장 구경도 하고, 어슬렁어슬렁 다니기. 내가 지금 게으른 점을 가지고 있다면, 혹시 내가 지금 부지런하다면 그건 다 이십대 초반 그 여행에서 얻은 습관이다. 부지런하기도 하고 게으르기도 한...그리고 지금 당장은 아닌 언젠가...다시 그런 여행을 꿈꾸고 계획하니까.
어렸을 때부터 이사가서 새 동네에 적응하는 시간이 좋았다. 학교가는 길을 오늘은 여기로 가보고, 내일은 돌아서 가보고, 모레는 다른 길로 가고.
동생한테는 미안한 짓이었겠지만 이런 동네돌아다니기를 동생이랑 한 적도 거의 없는 것 같다. 항상 혼자였던 것 같은 기억.
그리고 나서 이 책을 읽었다. 앞부분 피터 묘사에서 깜짝 놀랐다.


피터

피터 포춘은 이따금 어른들한테 ‘어려운’아이라는 소리를 듣는 열한 살 먹은 소년이었다. 피터는 어른들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뭐가 어렵다는 말인가? 마당 담벼락에 병을 내던진 일도 없고, 이마에 빨간 케첩을 묻히고 피를 흘리는 척해 본 일도 없고, 장난감 칼로 할머니 발목을 친 일도 없는걸. 이런 장난은 어쩌다 머릿속으로만 해 본 생각들이다. 감자만 빼고 다른 야채는 먹지 않아도, 생선이든 달걀이든 치즈든 뭐든 가리지 않고 먹었다. 아는 사람을 다 떠올려 보아도 어느 누구보다 시끄럽지도 않고, 지저분하지도 않고, 아둔하지도 않았다.

...

나중에 어른이 되고 알았지만, 어렸을 때는 도무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들은 피터가 너무 말이 없어서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린애가 말이 없는 게 신경쓰였던 것이다.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피터가 혼자 있기 좋아하는 아이라는 것이다. 물론 아무 때나 그런 것은 아니다. 날마다 그런 것도 아니고. 하지만 대개 하루에 한 시간은 어딘가로, 예컨대 자기 방이나 공원 같은 데로 사라지는 버릇이 있었다. 피터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자기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를 좋아했다.

...

그랬다. 피터가 혼자 있는 것, 어른들은 그것도 언짢아했다. 어른들끼리도 혼자 있는 어른은 싫어한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면, 사람들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에 나도 관심을 보여야 한다. 혼자만 따로 노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 기분을 망친다. 피터는 딴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남과 어울리는 것도 적절한 자리에서는 나름대로 잘했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지는 않았다.사실, 우리 모두 각자 다른 사람하고 어울리는 시간을 줄이고 날마다 조금이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내어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할 시간을 갖는다면, 세상은 더 행복해질 테고 전쟁 같은 것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피터의 생각은 그랬다.

*인형들, 고양이, 지우는 크림, 주먹 대장, 도둑, 아기, 어른...
피터의 몽상 속 세상이 낯설지 않으면서 또 기발해서 재미있었다.
어렸을 적 내가 한 몽상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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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날이 소중하다 - 한 뉴요커의 일기
대니 그레고리 지음, 서동수 옮김 / 세미콜론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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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었다. 아내가 갑자기 하반신 마비가 됐다. 그리고 삶이 변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상황도 흥미롭지만, 편하게 그린 그림, 손글씨 모두 다 잘 어울린다. 글도 좋고.
부인 이야기가 궁금하지만.....남편이...이 정도까지 본 건.....그림을 그려서가 아닐까....
그림도 그리고 쓰고, 글도 쓰고 싶고, 더 씩씩하게 살고 싶어지게 하는 책이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는 얼마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내 삶과 나를 둘러싼 세계를 깊이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발견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이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패티와 잭과 프랭크와 나는 그리니치 빌리지의 한 괜찮은 아파트에서 아마도 평범한 생활이라고 불러야 할 삶을 살고 있었다. 스타일리스트인 패티는 사진촬영을 위한 옷과 소품을 찾아 온 맨해튼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바쁜 광고쟁이였던 나는 회의와 촬영으로 정신이 없었다. 태어난지 이제 겨우 10개월된 잭은 열심히 걸음마를 배우고 있었다. 프랭크는 여덟 살 먹은 개인데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느긋하게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존재였다.
만일 당신이 그때 우리를 만났더라면, 아마도 우리는 행복하지만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지금 좀 바쁘다고 말했을 것이다.
어느 덥고 바쁘던 아침, 패티는 잭을 베이비시터에게 맡겨두고 집 근처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사진 촬영에 쓸 케이크를 구하러 업타운의 유명제과점에 가는 길이었다. 전철을 기다리는 도중, 그녀는 플랫폼에서 떨어졌고 하필이면 그때 역으로 들어오던 9번 열차가 그녀를 치었다. 운전사가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지만 너무 늦었다. 열차 세 칸이 패티의 몸 위로 지나가면서 척추뼈를 부서뜨렸고 그녀는 허리 아래가 마비되어 버렸다.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패티는 쾌활하고 귀엽고 멋진 여자였으며, 이제 막 엄마가 된 참이었다. 우리같은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병원에서 패티는 내게 물었다.
"왜지?"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하는 걸까? 나는 말했다. "그런 건 상관없어." 이것이 신의 교훈이든, 전생의 업보이든 글쎄, 나는 관심없었다. 어차피 내 마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설명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혼란스러웠고 미칠듯 화가 났다. 알고 싶은 것은 "이제 어떻게 하나." 뿐이었다. 어떻게 다시 살아가며 어떻게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지?

내가 삶의 의미를 찾아 발버둥치고 있는 동안 패티는 자신의 삶을 되찾고 있었다.
그녀는 일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잭과 시간을 보내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해 온 모든 것에 새로운 용기와 결단력이 더해져, 내게 그녀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내게 놀랍고 어쩌면 두려울 정도였는데, 그래서 나는 더욱 슬퍼졌다. 결국 사고는 그녀 자신의 것이었으며 나는 제3자일 수밖에 없었으므로.

나의 처음 시도들은 형편없었다. 그러던 어느 조용한 저녁, 나는 휠체어에서 내려와 소파에 앉아있는 패티를 그리게 되었다. 그 그림에는 내가 이전에 그렸던 어느 그림과도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어느 순간 나는 다른 세계로 빠져 드는 듯했다. 마음이 비워지고 호흡은 느려졌으며, 마침내 종이를 내려다 보았을 때 나는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데 놀랐다.
...
차이는 그리는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방법에 있었다. 나는 내가 그리는 대상을 눈으로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듯 했다. 내 시선은 모든 굽이와 도드라진 곳들에 정성스럽게 머물렀고 표면을 따라 그늘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렇게 바라볼 때,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고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신기하게도 이러한 경험은 언제고 되풀이되었다. 서두르지 않고 마음이 가는대로 내버려두면 아주 에로틱한 그 경험은 언제나 찾아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 이유는 실제로 보이는 것을 그리지 않고 생각하는 것을 그리기 때문이다. 코는 대체로 삼각형이다. 눈은 동그라미 안에 동그라미가 하나 더 있다. 귀는 주름이 있는 동그라미다.
사람은 머릿속에 사물에 대한 정리된 이미지를 담고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그리게 마련이다.
사람이란 원래 그렇다. 이미지와 기호를 사용해 모든 것을 나누고 구분한다. 이것이 우리가 짐승들과 다른 점이다. 불행하게도 이 상징들은 우리들이 세계를 보는 데 있어 하나의 장막이 된다.

나무그리기를 공부하는 좋은 방법은 가지들이 서로 연결되어 나간 모양새를 잘 관찰하는 것이다. 겨울엔 나무그리기 공부를 하러 손가락 없는 장갑이라도 사서 공원에 나가봐야겠다. 수은주가 떨어질 때도 펜이 부드럽게 움직여 줄지 모르겠다.

나는 영국에서 태어나서 호주, 파키스탄, 이스라엘...에서 자랐다. 어릴 때 하도 이사를 많이 해서 이내 여행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래서 직업상 여행을 꽤 많이 하면서도, 한번도 낯선 곳을 탐험한 적은 없다. 일본에 가서는 버거킹에서 식사했다. 멜버른에서는 호텔방으로 음식을 시켜다 먹었다. 하지만 이제 그림을 그리니, 새로운 곳들이 보고 싶어 못견딜 지경이다. 심지어 공항도 즐겁다!

나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내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헛된 생각들이다. 몽테뉴가 말한 것처럼, "나의 삶은 지독한 불행으로 가득한데, 그 대부분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이다." 중요한 것은 앞날을 예측하며 상념에 잠기는 것이 아니다. 이론을 세워 미래를 내다보는 것도 아니다. 이러면 어떡하지, 저러면 어떡하지 하고 궁리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이다. 내 삶의 충만함을 있는 그대로 360도 모든 방향에서 바라보는 것 말이다. 병원 대기실에도 아름다움이 있음을 나는 보았다. 장례치르는 집에도 묘지에도 아름다움이 있음을 나는 보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수많은 일들이 내게 일어났다. 하지만 내가 두려워하던 그 흉한 일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삶은 당신이 허락하지 않는 것을 당신에게 하지 못한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과 척추를 다쳐 불구가 된 사람들을 놓고 그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정도를 알아본 연구가 있다. 처음에는 두 그룹간에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예상할 수 있듯이, 백만장자가 된 사람들은 미칠듯 기뻐했고 장애인이 된 사람들은 절망했다.
그러나 1년 후의 조사에서는 두 그룹간에 통계적으로 의미있는 차이가 없었다. 불행한 백만장자와 행복한 불구자가 있는 것이고, 행복한 백만장자와 불행한 불구자도 또 그만큼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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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 - 행복한 오기사의 스페인 체류기
오영욱 지음 / 예담 / 2006년 7월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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