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파는 상점 -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5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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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내리게 그릴 수도 있다니. 흘러내린다는 상상을 할 수도 있다니. 시계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장면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은 그 어떤 작품을 보았을 때보다 강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중학교 1학년 과학 <분자 운동과 상태 변화>단원에서 액체의 성질을 설명하면서 교과서 한 구석에 그려져 있던 그림이다. 그림을 제시한 이유는 흐를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졸다가 번쩍 눈을 뜬 순간처럼 얼떨떨한 기분이 오랜 여운으로 남았다. 일 분 일 초가 철저하게 지켜지는 크로노스의 시간은 한 예술가에 의해서도 깨뜨려질 수 있었다. 그것은 용기이며 고정 관념을 향한 과감한 도전이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달리의 상상력은 바로 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담고 있었다.

 

카이로스의 시간이 가지는 의미를 가슴 찡하고 따뜻하게 그린 소설을 만났다. 소설 속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기억의 지속>을 떠올렸다. 그림 속으로 빨려들어가 시계 아래에 묘사된 눈을 감고 있는 인간이 된 듯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계 안에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의 시간이 담겨있었다. 그들과의 시간을 천천히 음미했다. 왜 이제야 이 소설을 만났을까 싶다가도 이제라도 만나서 얼마나 다행이냐며 배시시 웃었다. 바싹 마른 식물의 뿌리가 물기를 흠뻑 빨아들이듯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내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추리 기법을 사용해서일까. 처음 얼마간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떠올렸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등장하는 각각의 에피소드처럼 피카레스크식 구성으로 전개되리라 예측했다. 그런데 미묘하게 달랐다. 이 소설 속 이야기들은 모두 시간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향했다. 옴니버스 식의 구성도 담겨있었다. 모든 이야기에는 시간이 배경 음악처럼 흘렀다. 그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들은 캐논 변주곡처럼 다양한 리듬을 타며 조금씩 변주되었다. 겹겹이 스며든 시간들은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우르르 끓어 넘쳐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처럼 시간을 왔다 갔다 하는 판타지적인 요소가 없어도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로웠다. 요즘은 책을 읽다 며칠 간격을 두고 다시 펼쳐보면 읽었던 내용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도돌이표를 찍곤 한다. 이 책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가 도무지 상상이 안 되었다. 어느 부분에서 읽던 호흡을 멈추었는지 금세 기억이 났다. 주인공 온조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궁금한 까닭에 이틀 만에 다 읽어버렸다.

따라잡느라 허둥대는 것보다 내 식대로 내 시간대로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p59)’ 내 시간이라는 말. 얼마나 뭉클한 말인가. 시간이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40대 후반으로 달려온 많은 시간동안 나는 자주 숨이 찼고 늘 헉헉대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올해가 되어서야 겨우 내 걸음으로 시간을 걸어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출근하는 순간 퇴근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시간, 퇴근 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나로부터 서로를 방해하지 않을 만큼 적당한 간격으로 앉아 듬성듬성 그들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어폰에서는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와 목도리처럼 뒤통수를 감싼다. 온전한 내 시간, 스스로에게 주는 뭉클한 행복이다.

기계 대신에 사람이 들어오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미덕들이 살아나. 시간이 나를 위해 움직인다고 해야 하나? 시간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 뒤로 물러나 있는 듯한 느낌 같은 거야.(p65)’ 휴대폰도 연락처도 없는 강토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친정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휴대폰이 없다. 괜히 구속받는 것 같다 시며 일부러 마련하지 않으신다. 여행이라도 다녀오실 때면 정작 당신은 태연하고 여유 있는데 주변에서 조바심을 낸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 채 여사의 시간은 분명 당신을 위해서 움직이는 듯하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관계들이 과속방지턱처럼 불쑥 불쑥 튀어나왔다. 책을 읽다 잠시 덮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흐르던 시간을 생각했다. 시간은 마냥 앞으로만 흐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한순간도 같은 강물이 흐르지 않듯이 흘러가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과거에 울컥했던 시간들은 그대로 떠내려가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질 때 번번이 되살아나 현재의 시간들을 아프게 했다. 어느 순간은 아무렇지 않다가도 다른 순간이 오면 바늘처럼 쿡쿡 나를 찔렀다. 그런 시간들이 다가오는 이유를 스스로를 향해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답을 찾았다. 이전보다 확장된 개념으로 시간을 바라보니 실타래처럼 얽혀있던 관계의 시간들을 내 방식대로 차분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모든 관계는 일대일이다. 여러 명과 서로서로 알고 있는 관계라 해도 거미줄처럼 방사상의 구조를 가질지언정 정작 나와 연결된 각각의 선들은 한 줄씩이다. 나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간들을 생각했다. 관계에는 각기 다른 시계가 존재하는 걸까. 달리의 그림에 등장하는 상황처럼 각각의 시계들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멈춰있거나 현재와 같은 속도로 바늘을 움직이는 시계도 있는 걸까. 상대와 다른 시간을 바라보며 관계를 맺고 있다면, 현재 내 위치로부터의 간극이 멀다면 쓰라리거나 아득한 마음이 들 터이다.

친정 엄마를 생각하면 종종 마음이 아리다. 정작 당신을 만나면 즐거움이 넘치는데 돌아오면 마음 한 구석이 먹먹하다. 당신을 바라보는 나의 시계는 가난하고 힘겨웠던 시절에 멈춰있는 걸까. 당신을 향한 생각의 출발점이 과거의 그 시각이라서 자주 마음이 아픈 것일지도 모르겠다.

큰 아이를 보아도 마음이 아프다. 그 아이를 바라보는 시계는 방황으로 인해 아이를 내팽개쳤던 20대 후반과 30대에 머물러있다. 그래서 더 많이 웃기려고 노력한다. 웃기는 능력은 근육과도 같다. 노력을 하면 업그레이드된다. 운동을 계속 할수록 복근이 생기듯이 응장군(큰 아이 애칭)을 향한 나의 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둘째 아이는 더 어린 모습에서 멈춰있다. 아이들이 6살 터울이니 아마도 비슷한 시기일 것이다. 마우스 반만 한 손가락을 꼬물거려 하늘을 가리키며 군늠, 군늠하던 모습에 눈물이 핑 돌던 마음이 생각난다. 얼마 전 내 키보다 더 자란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삐까(둘째 아이 애칭)만 보면 옛날에 군늠 군늠 하며 구름보고 좋아라 하던 생각이 나염.” 말하며 팔짱을 끼고 엉겨 붙으면 몸을 피하며 쉬크하게 말을 내뱉는다. “~ 지금도 군늠 군늠하면 정신 지체임.” 이런 무드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메마른 17세 청소년 같으니라고!

남편을 바라보는 나의 시계는 행복했던 20대에 멈춰있다. 그 온도차로 인해 가장 아득한 시간이다.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무거운 시계. 이 시계가 조금씩 다시 움직일 언젠가가 온다면 그 시간들에 담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인간의 본능 중 행복한 행위를 함께 하고 싶은 욕구, 그게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을 나누는 것이 아닐까? 그 시간이 하나의 의미로 남는 것.(p66~67)’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내게 일어난 사건들을 공유하는 관계들이 있다. 몇 달 만에 연락해도 어제 전화하다 만 이야기를 이어가듯이 부담이 없는. 가끔 생각한다,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그들과 즐겁게 밥을 먹는 시간들이 카이로스의 시간이겠지.

 

관계의 시계들은 제각기 움직인다. 나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시간들을 공유하며 흘러간다. 수많은 시계들이 머릿속에서 마그리트의 <골콩드>처럼 떠다닌다. 부유하는 존재는 어디로 흘러갈지 짐작하기 어렵다. ‘시간은 지금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이 순간을 또 다른 어딘가로 안내해준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그 시간을 놓지 않는다면.(p219)’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이제껏 멈춰있던 모든 시계들이 째깍째깍 움직이는 듯 했다. 그 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 내 기억이 지속되는 한 그 시간들을 놓지 않으련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시계들이 묵직하고 의미 있게 다가온 시간들이었다. ‘우리가 맞이하는 시간이 늘 처음인 것처럼.(p220)’ 내게 다가온 관계들이 물컹하고 따뜻하게 나를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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