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방
이강산 지음 / 실천문학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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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깊이가 두려웠던 걸까. 읽기 전에 앞세웠던 망설임이 쓰기 전에도 고스란히 옮겨졌다. ‘빈 문서 1’이 무거웠다. 1/1-1-1-1칸에서 나의 손가락을 기다리는 커서가 심장처럼 쿵쿵 뛰었다. 마음을 지그시 누르는 무게감은 돌덩이의 단단함이 아니라 태양의 그것에 가까웠다. 구석구석에 감추어두었던 마음의 조각들이 기체로 날아와 한꺼번에 심장을 향해 몰려들었다. 어떤 식으로든 내게서 하얀 종이로 쏟아질 묵직함이 버거워 잠시 숨이 막혔다.

짙은 회색이라 생각했다. 시집 모항으로, 소설집 황금비늘, 흑백 사진으로 들여다본 작가의 세계는 온통 무채색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첫 장을 펼치기가 어려웠다. 첫 걸음을 디뎠던 모항은 그런 이유로 내게 재미없는 책이었다. 두 번째로 접했던 황금비늘은 어느 정도 긴장된 마음으로 읽었다. 큰 호흡을 하며 나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스스로 위로하는 주문을 걸곤 했다. 이건 별 거 아냐, 나만 그런 건 아닐 거야,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얼마간은 있을 테지, 그래도 최악은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하고. 이 책이 애써 묶어두었던 봉인을 풀어버렸다. 깨진 거울 조각을 들여다보듯 곳곳에서 나를 보았다.

시린 공간과 시간이 오선지로 펼쳐졌다. 소설 속 인물들은 낮은음자리표에 맞춰 제각기 다른 선에 걸린 음표가 되어 삶을 찍어나갔다. 주인공에게도, 섬처럼 등장하는 많은 여인들에게도 조금씩 내 모습이 담겨있었다.

날카로운 말에, 눈빛에, 몸짓에 베이던 쓰라림을 아직도 나의 심장은 기억하고 있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흘러가는 장면이 작가의 문장에 묻어 따끔거렸다. ‘영영 바다로 떠나지 못하고 호수에 갇혀 살게 된 빙어(p53)’의 상실감을, ‘어디로든 떠날 수 있도록 사방이 트였지만 아무 곳으로도 떠날 수 없는 섬(p58)’의 막막함을, ‘따뜻한 사람의 체온이 그리운(p73)’ 이가 감내하는 한기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말 외엔 일체 하지 않(p83)’는 건조한 서러움을, ‘사람의 말(p88)’을 갈구하는 쓸쓸함을, ‘사랑과 결혼과 행복이라는 피사체가 (중략) 이미 그들의 과거가 되어버린 풍경일 것이었다.(p95)’ 말하는 허무함을, ‘냉소와 침묵(p161)’이 내는 아린 맛을 알 것 같았다. 외면하고 싶었다. 어떤 문장에 공명하였는지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커다란 진폭으로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움켜쥐며 다만 침묵하고 싶었다.

 

지난 주 토요일, <심야책방>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책으로 가져 간 책이었다. ‘편 김에 끝까지라는 부제로 저녁 8시에 첫 페이지를 펴기 시작해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어야 집에 갈 수 있다. 주관하는 독립서점 주인장이 내건 규칙이다. 낯선 환경에 나를 데려다놓고 싶어서 참여 신청을 했다.

작가의 성향으로 짐작해보면 묵직한 내용이 담길 테지만, 휘리릭 넘겨보았을 때는 대화도 많고 가독성이 좋은 문장을 구사해왔던 지라 만만하게 보았나보다. 더군다나 소설이라 완독하는 데 이리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9명의 신청자 중 제일 마지막으로 귀가했다. 화장실 한 번 안 가고, 의자에서 조금씩 자세만 바꾸면서 꼬박 읽었는데도. 새벽 310분에 귀가했으니까 7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중간 중간 멈추던 시간이 잦았다. 책을 읽으면서 나를 읽으려니 그토록 오래 걸린 걸까.

<빙어>의 눈물을 떠올리자 여전히 나를 관통하고 있는 추위가 새삼 뜨거워졌다. 나는 <하모니카를 찾아서> 나답게 살고 있을까. 모니터에서 마주보고 있는 나다운 글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나비의 방>에서 자유롭게 떠나는 나비를 그려보았다. 영혼을 뒤덮고 있던 무거운 껍질을 몇 번이나 벗겨내어야 비로소 가뿐해지는 삶. 시간의 무게를 견딘 후에야 홀로 얻어지는 나비의 자유를 상상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왠의 <오늘>을 들으며 이 글을 쓴다.

'새벽4시 잠들지 않아/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을 생각하곤 해/ 습관처럼 마음이 아려와/ 집으로 가는 길은 자꾸만 멀어지는데// 저만치 멀어지는 찾을 수 없는 잡을 수 없는// Take it easy/ 나만 왜 이렇게 힘든 건가요/ 오늘밤이/ 왜 오늘의 나를 괴롭히죠// 아무것도 한 게 없는 하루인데/ 나는 왜 이렇게 눈치만 보고 있는 건지/ 아쉬움은 나를 찾아 다가오네/ 창문 밖은 벌써 따뜻한데// Take it easy/ 나만 왜 이렇게 힘든 건가요/ 오늘밤이/ 왜 오늘의 나를 괴롭히죠// 한번만 다시 또 일어설 수 있나요 음음음/ 오늘도 슬픔에 잠겨 밤을 지우고 있나요// Take it easy/ 나만 왜 이렇게 힘든 건가요/ 오늘밤이/ 왜 오늘의 나를 괴롭히죠// Take it easy/ 왜 오늘의 나를 괴롭히죠'

슬픔이 슬픔을 위로하는 노래이다. 상처가 상처를 위로하는 이 책과 어쩐지 닮아있다.

 

얼어버릴 것 같은 냉기를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이토록 뜨거울 수 있을까. 차가운 얼음을 입에 물면 뜨거운 고통이 느껴지듯이, 이야기를 따라가는 나의 마음은 그의 글이 품고 있는 담담한 차가움에 내내 반응하면서 아팠다. 그냥 뱉어버리면 그만인 것을, 차마 뱉을 수 없는 이끌림에 어정쩡하게 물고 있었다.

새벽까지 책을 읽고 돌아온 날, 옷을 갈아입으면서 사타구니 양쪽이 붉어진 것을 발견했다. 한 자리에 7시간 내내 앉아있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부어오른 부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깨달았다. 한 호흡으로 책을 읽고 나서야 그의 글이 나타내는 색깔이 보였다. 무채색이 아니었다. 극적인 사건이나 입체적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소설도 아니건만 그 안에는 위태위태하면서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 삶이 투영되었다. 상처를 마주하는 글에서는 생명을 연상케 하는 핏빛의 붉음이 깊게 배어나왔다. 그 빛은 또 다른 상처를 마주했을 때 담담한 위로를 건네며 선명하게 붉어지고 있었다.

 

 

p160, 밑에서 5째줄 : 진도 7.8 규모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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