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의 말 : 모든 색에는 이름이 있다 컬러 시리즈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지음, 이용재 옮김 / 윌북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빨강, 다홍, 주황, 귤색, 노랑, 노란연두, 연두, 풀색, 녹색, 초록, 청록, 바다색, 파랑, 감청, 남색, 남보라, 보라, 붉은보라, 자주, 연지. 초등학교 때 외웠던 20색상환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내 가슴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게 노란연두냐 연두냐 실물을 들이댄다면 당연히 구분도 못할 거면서 어째 아직까지 이름만은 생생하단 말이냐. 주입식 교육의 결과물이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그 이유만은 아니다.

켜켜이 접혀있던 무지개가 한껏 기지개라도 편 것처럼 좍 펼쳐진 색의 스펙트럼. 볼 때마다 마냥 좋았다. 한참 바라보노라면 심장이 살짝살짝 뛰면서 은은한 음악이 들리는 듯했다. 가지런히 누워있는 크레파스 앞에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잘 사용하지도 않는 색연필 세트를 바라볼 때면 아직까지도 흐뭇해지는 내게 색깔은 이런 의미였다.

 

모든 색에는 이름이 있다니. <컬러의 말>이라는 책제목과 부제와 먼셀의 20색상환을 연상시키는 표지만으로 책을 구입할 이유는 넘쳤다. 책이 도착한 날 옆모습을 보고 한 번 더 반했다. 화려한 공작새의 날개 같기도 한 종이들을 손끝으로 훑어 내리는 나는 멋들어지게 채색된 피아노 건반을 연주하는 음악가처럼 의기양양했다.

75가지 색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이에 얽힌 역사와 문화가 담긴 책이다. 이토록 많은 이름이 존재했던가. 꼴랑 20개만 들어있던 나의 색채 월드가 팝콘처럼 튀겨졌다. 색이란 화가의 전유물이며 미술사의 영역에서만 다뤄지리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해왔나. 오징어 집 스낵을 베어 물기라도 한 듯 색에 대한 편견이 바삭 깨졌다. ‘색은 주관적인 문화의 창조물로 받아들여야 한다.(p27)’ 벌레에서 추출한 염료에는 생물학이 얽혀있었으며, 연금술사들이나 독극물과 관련된 화학이 담겨있었으며, 특권 계층의 의복으로 점유된 이력이 있는 문화였으며, 경쟁적으로 차지하려는 전쟁을 발발시키거나 막대한 자본이 오고 가는 등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역사였으며, 인간들의 정신적인 영역을 지배한 심리학이었으며, 많은 이들의 삶과 죽음이 얽힌 철학이었다.

 

색이 주는 심리적인 효과나 상징적인 의미는 이 책의 곳곳에서도 드러난다. ‘빛은 색이니, 그림자는 색의 결핍이다.(p12, J.M.W.터너, 1818)’ 빛은 에너지이니 색에도 고유의 에너지가 있다. 인간마다 지닌 자체 에너지와 공명을 일으키는 파장의 빛도 존재할 것이라 생각한다. 36.5도에 해당하는 적외선 말고 사람마다 뿜어내는 기 같은 것 말이다. 어떤 이에게 유난히 어울리는 색이 있다면 이 에너지들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입은 옷이나 지니고 있는 물건의 색감만으로 왠지 자신감이 생기고 기분 좋아지는 때가 있는 것을 보면.

<소셜 컨트롤>이라는 네이버캐스트의 칼럼에도 색이 등장한다. 사람들의 행동이 바뀌면 세상도 바뀐다는 부제로 짤막하게 나오는 3개의 동영상 중에는 색과 관련된 흥미로운 실험이 하나 있다. 자연계에는 블루베리를 제외하고 먹거리의 색으로 파란색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이용하여 과식을 억제하는 환경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한 실험이다. 뷔페식당의 절반을 식탁보, 조명, 의자, 벽면에 이르기까지 온통 파란색 환경으로 만들어준 다음, 나머지 평범한 공간에서의 식사량과 비교한다. 실험의 결과는 놀라운 수치로 드러난다. 음식을 더 먹으려 왔다 갔다 하는 횟수가 줄어들고 식사량 역시 감소한다. 실제로 접시 색깔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식사량을 줄일 수 있다는 팁으로 실험은 결론을 맺는다.

 

컴퓨터 안에서 구현되는 몇 백 개의 색상 안에는 얼마나 많은 세월들이 켜켜이 담겨있는 걸까. ‘디지털 사진 기술의 발전으로, 그저 클릭 몇 번이면 갓 찍어낸 생생한 이미지에 한 세기의 세월을 불어넣을 수 있다.(p255)’ 한글 화면의 글자색을 클릭하다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든다. 존재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알았던 컬러.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발색의 과정에는 지난하고 치열한 인내가 담겨있었다. 구현해내기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색의 탄생은 치열한 땀방울의 결과물이다. 색에 관한한 무에서 창조된 유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완독하는 데 한참 걸렸다. 몇 번이나 집어던지고 싶었다. 색의 이름 자체도 생소하였거니와 색의 역사를 말하는 내용이다 보니 발음도 어려운 외국인들의 이름과 문화적인 용어가 설겅설겅하게 씹혔다. 첫 문장을 들여 쓰지 않고 앞부분에 맞춰 정렬한 편집 체계도 문단을 구분하여 내용을 파악하려는 데 방해가 되었다.

가장 난감했던 부분은 번역이었다. 원어민 선생님 앞에서는 과묵한 외국인이 되며 간혹 마주치면 오른손을 들고 하이!”만을 일관되게 외치는 내가 꺼낼 말은 아닐 듯싶지만, 많은 문장들이 갈치 가시처럼 자꾸 목에 걸렸다. 유용한 정보가 듬뿍한 것은 알겠는데 당최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는 거다. 세계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이들에게라면 뒷동산을 산책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저자 역시 서문에서 색의 깊은 역사를 다루지 않는다. (중략) 간략사와 성격 묘사 중간의 어딘가에 속하는 이야기를 썼다.(p11)’라고 했으니. 다만 지극히 얄팍한 지식을 보유한 나란 인간은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기라도 한 듯 헐떡였다는 거다. 원문에 최대한 가깝게 직역하려는 역자의 의도였겠지만 조금만 더 자연스러운 용어로 바꾸거나 몇 가닥 더 풀어헤쳤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얼굴에 바른 파운데이션이 군데군데 뭉쳐져 말라버린 느낌의 문장이랄까. 부드럽고 가뿐하게 펼쳤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해본다.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과속방지턱을 가까스로 넘어가며 간신히 완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이나 발상만으로도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미술 관련 책을 읽었는데 음악을 감상한 기분이다. 색깔을 상상하고 바라보며 읽어가는 내내 리드미컬한 음악이 눈 속에서 춤을 추었다. ‘리듬(rhythm)’이란 흐른다는 의미의 동사를 어원으로 하는 그리스어 ‘rhythmos’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무수히 많은 컬러가 마음속으로 계속 흘러들어와 리듬처럼 펼쳐졌다. 하루에 색상 하나씩 읽기로 정해두고 오랜 시간 곱씹는다면 의미 있는 맛이 날 것 같다. 무지개 너머 존재하는 색채의 드넓은 세상을 분명 보여줄 책이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