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 홍승희 에세이
홍승희 지음 / 김영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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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를 감싸고 있는 초록색 옷을 벗긴다. 가방에 책을 넣고 뺄 때 물건들에 걸리면 찢길까 신경 쓰여서이다. ! 홀딱 벗고 다리를 벌린 채 물구나무를 선 여인의 그림이 가운데 떠억 버티고 있다. 슬그머니 다시 덮는다. 무엇이 부끄러워서였을까. 무엇을 감추고 싶었던 걸까, 나는.

 

웅크리거나 몸을 반으로 접거나 거꾸로 서있거나 어딘가에 매달려 있다. 중간 중간 실린 그림 속 여인들의 자세이다. 전부 옷을 입고 있지 않다. 프리다 칼로가 스친다. 피 철철 흐르는 강렬한 색상도 아니고 전체적으로 섬세한 선인데 무엇이 그녀를 연상시킨 걸까.

몇 점 감상하다보니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자유. 왜 하나같이 옷을 입고 있지 않은지 알 것 같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감추고 있는 외피를 벗어던짐으로써 세상과의 경계를 없애고자 했던 걸까.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이 뿜어져 나온다. 자유라는 과녁을 향해 쏘아 올린 화살처럼 강렬하다.

 

자살을 시도한 이야기, 감옥에 간 이야기, 가정사 등 민낯의 이야기들이 담담하게 담긴 책이다. 삶에 대한 허무가 짙게 깔려 텅 빈 듯 보이지만 투명한 공간에는 무언가 담겨있다. ‘살면서 느끼는 감정을 압축적으로 몽땅 뱉고 나면 다 살아버린 것 같아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진다. 기분 좋은 허무다.(p54)’ 광섬유처럼 넘실거리는 허무의 끄트머리에서 삶이 섬세하게 반짝인다. 켜켜이 담겨있는 감수성을 조심스럽게 따라간다.

작가에 대하여 더 알고 싶어서 인터넷 자료를 찾아본다.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장면 중 이 책에 관한 작가의 답변이다. 나의 글은 아직도 몇 겹의 옷을 입고 있는데 거추장스러운 옷 따위는 훌훌 벗어던져버린 듯 거침이 없어 보인다. ‘애국이란 태극기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효녀연합 퍼포먼스를 하는 그녀의 미소가 당당하게 빛난다.

 

나는 미디엄 레어를 좋아하는 가끔 채식주의자다. 가끔 고기가 당기는 날도 있고 회식을 하면 고기에 몰두하며 본능적으로 흡입한다. ‘서툴러도 채식주의자이고 싶다 / 조금이라도 내 존재가 덜 가해할 수 있도록(p28)’ 고기 먹는 모순된 채식주의자라 채식주의자라 말을 꺼내기가 다소 민망하지만 저변에 깔려있는 마음은 채식주의다. 고기를 조금 덜 먹으리라 다짐한다. ‘덜 가해할 수 있도록이라는 말이 마음을 툭툭 건드린다.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알아야 아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과 아픔과 기쁨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걸까. ‘같은 언어로 소통하면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 쉽다.(p151)’는 말에 공감한다. 사람들이 나를 잘 모르는 것처럼 나 역시 그들을 잘 알지 못한다. 일부만을 보고 전부를 아는 양 착각하는 지도 모르고. 속단은 오만이다. 3, <당신을 모른다>를 읽고 나니 사람들을 대하기가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핸드폰에 저장된 주소록을 천천히 넘겨본다. 벌써 마지막 목록이다. 예상은 했지만 당황스럽다. 어설피 아는 사람들뿐이다. 자신 있게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니. 어떤 사람을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생각한다. 그림과 같은 글을 쓰는 사람이구나. 그림에서 벗어던진 가식이 글에도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색상의 그림에 마음이 몰랑몰랑해지더니 글도 비슷한 느낌이다. 울어도 전혀 창피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랄까. 울면 안아주는 게 원칙인 남신 라도 만난 듯 책장을 넘기다보니 눈물이 핑 돈다. 작가의 이야기가 슬퍼서도 연민이 느껴져서도 아닌데. 어느 순간 책을 통해 나를 바라본다. ‘눈물은 무능이 아니라 열린 감각의 증거다.(p80)’ 단단하게 누르고 있던 덮개가 스르르 벗겨진 듯 마음이 촉촉해진다. 논바닥처럼 갈라진 감자 껍질을 벗기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속살을 마주한 기분이다.

 

책 표지를 덮고 있던 껍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진초록의 머리칼에 그믐달이 그려진 여인의 뒷모습이다. 그믐달. 해 뜨기 전 새벽에 뜨는 달이다. 어깨에 그려진 문신 부근 지평선 아래에는 태양이 있다. 이제 곧 태양이 떠오를 거라 속삭이는 것 같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누드가 야하다는 생각은 편견이었다.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존재 자체를 말하는 것인데 야하다는 발상이야말로 이상한 것을. 두 번째 읽을 때에는 껍데기를 훌러덩 벗기고 당당하게 카페로 갔다.

 

글에도 누드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가식과 허울을 다 벗어던지고 인간 본연의 감성과 허무와 죽음을 그린 글. ‘그런데 아파도 돼.(p5, 들어가며)’라는 작가의 말이 아픈 마음을 드러내도 괜찮아, 괜찮아라 말하는 것 같다.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글들이 이제 곧 연두 잎이 돋아날 거라며 마음을 토닥인다.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자신을 드러낸 글이 주는 위안이란 이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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