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 프로젝트 - 남자들만 모르는 성폭력과 새로운 페미니즘 푸른지식 그래픽로직 5
토마 마티외 지음, 맹슬기 옮김, 권김현영 외 / 푸른지식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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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현 가능한 환각의 출현 :

 

 

 

 

 

 

 

 

 

​악어 이야기

 

                                             

                                                                                                                   훌륭한 이야기에는 항상 " 악어 " 가 등장한다. 만약에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책에서 악어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버려도 좋다. 그런 책은 재미없어 !

악어가 등장하는 유명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유명한 재담'이다)  :  침대 밑에 악어가 산다고 불평하는 여성 환자가 있다.  여자는 악어가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말한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에게 그것은 단지 환상에 불과하며 침대 밑에는 악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와, 악어 있다니까요 ~    왜, 내 말을 안 믿냐고요 ~    나, 이대 나온 여자라고요 ~   하지만 의사는 도시에서 악어 출현은 " 실현 불가능한 환각 " 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무시한다.  두 번째 상담에서도 그 환자는 여전히 똑같은 불평을 하지만 남자는 지난번 진단과 같은 처방을 내린다. 와, 악어 없다니까요 ~    왜, 내 말을 안 믿냐고요 ~     나, 정신과 의사라고요 ~               

세 번째 상담이 있던 날,  약속했던 환자가 나타나지 않자 의사는 환자의 망상이 사라졌다며 기뻐한다.  만약에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난다면 이 이야기는 매우 지루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며칠 뒤, 의사는 환자 친구인 k를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환자의 안부를 묻는다. k가 말한다.  그 악어한테 잡아먹힌 그 사람 말하는 겁니까 ?  침대 밑에서 악어가 살았다고 하더군요.                         이 이야기에서 < 악어 > 는 현실 공동체 질서 안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환각'에 불과했지만,  현실 속에서 " 실현된 환각 " 으로 나타나면서 서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이처럼 악어는 스토리텔링1)에서 매우 중요한 오브제이다.

이명박 스토리와 박근혜 스토리가 매우 흥미진진했던 까닭도 인간의 눈에서 악어의 눈물이 흐른다는 데 있다. 아, 아아아아아악어의 눈물이라니. 그것은 싱크대 수도꼭지를 틀었더니 맥주가 쏟아지는 것과 같은 꼴이다. 쇼킹하다.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며 흘린 박근혜의 눈물을 보았을 때 우리 모두는 당황했었다. 어, 어어어어어어...... 닭이 아니라 악어였어 ???!!!!  이처럼 훌륭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항상 악어 한 마리 정도는 비장의 카드로 숨겨놓아야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어느 하드보일드 작가는 글을 쓰다가 막히면 권총을 등장시키면 된다고 충고했다.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글을 쓰다가 막힌다 싶으면 악어 한 마리를 등장시키라구.

그런데 악어가 한 마리가 아니라 악어가 떼로 등장하는 만화가 있다.   바로 << 악어 프로젝트 >> 라는 프랑스 만화'이다.  이 책에서 남자는 모두 초록색 악어로 등장한다.   악어 떼가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사는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차별과 성폭력을 그리고 있는데 양성 평등 국가로 알려진 프랑스에서도 이 문제만큼은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초록색 악어들은 호시탐탐 여자들을 잡아먹을 궁리만 한다.  " 남자는 모두 다 늑대(악어) " 라는 말은 세계 어디를 가나 만국공통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특히, 남성 입장에서 보면 모든 남성을 포식자인 초록색 악어로 묘사해서 읽는 내내 불편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다.  잠재적 가해자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불편한 느낌이 드니까.


작가 토마 마티외는 " 악어라는 이미지를 통해 남성 우월주의,  성차별주의,  성적 고정관념,  남성의 성적 욕망,  그리고 실제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도 거리에서 마주친 남성에게 느끼는 두려움 같은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 " 고 한다.  남성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초록색 악어는 " 실현되지 않은 NON·REAL(IZE) " 환영에 불과하지만,  여성에게 있어서 초록색 악어는 " 실현된 환각 NON·ILLUSION(ED)" 으로써 라캉의 실재 the Real  2)에 가깝다. < 초록색 악어 > 는 남자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여자에게는 존재하는 공포의 대상이다. 리얼리티 없는 리얼이다.  이처럼 the Real(실재계)은  the reality와는 다른 개념으로 실제(實際)도 아니고 실재(實在)도 아니요, 실체(實體)도 아니다. 

그것은 the Nothing에 접근한 공허(空虛, the void)에 가깝고, 슬라보예 지젝이 언급한 히치코크의 얼룩이자 오점에 해당된다.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가졌다면, 남성인 당신은 지난날에 대하여 반성할 기회가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고,  읽는 내내 불쾌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면 당신은 a son of a bitch crocodile'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말머리에서 소개한 침대 밑에 악어가 산다는 여자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이 익살스러운 재담에서 환자를 여성으로, 그리고 의사를 남성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  그리고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신과 의사는 침대 밑에 악어가 산다는 여자의 말을 왜 일고의 가치도 없는 무의미한 진술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   세상의 절반이 악어인데 말이다.  혹시...... 그도 또 다른 악어 한 마리는 아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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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에 개봉한 영화 << 도어락 >> 은 침대 밑에 악어가 산다고 말하는 히스테릭한 여자 이야기의 변주'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 원룸 안에 누군가 있다고 말하는 경민(공효진 분)은 침대 밑에 악어가 산다고 말하는 여자와 동일인이다. 그리고 경민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이 형사(김성오 분)는 정신과 의사'이다. 또한,  혼자 사는 여성만을 노리는 범인은 악어'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남성 - 들'은 예외 없이 모두 경민의 히스테릭한 반응에 대하여 " 실현 불가능한 환각 " 이라고 말하지만 < 실현 불가능한 환각 > 은 < 실현 가능한 환각 > 이 되어 관객 앞에 출현한다.


2)   " 라캉의 실재(the Real)는 현실(the reality)이 아니다. 라캉의 실재는 상징계의 밖에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현실 밖에 있는, 현실이 아닌, 현실 너머의 어떤 것이다. 라캉의 실재는 경험적 실재와 구별되고, 초감각적 세계의 추상적 실재와도 구별되는 개념이다. 경험적 실재란 우리 주변의 모든 구체적 물건들을 뜻하고, 추상적 실재란 ‘자유’, ‘정의’ 같은 추상 명사들을 뜻한다. 그러나 라캉의 실재는 이것들 중 그 어떤 것과도 상관이 없다.상징계가 언어적 세계라면 실재계는 언어를 초월하는 언어 밖의 세계이다. 우리의 현실은 언어로 된 세계인데, 실재는 언어로 매개되지 않는 세계이다. 그것은 언어에 포함되지 않고, 언어 외부에, 또는 주체 외부에 있는 성(性)과 죽음의 차원이다. 결국 실재계는 불안의 대상이다. 그 세계 앞에 서면 모든 단어들이 얼어붙고 모든 범주들이 추락하는, 그런 불안의 대상이다.  상징화를 거부하므로 즉 도저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실재계는 표상이 불가능하다. 상상할 수 없고, 상징계 안에 통합시킬 수도 없어서, 우리는 도저히 그 곳에 도달할 수가 없다. 현실 속에서는 결코 제시될 수 없지만 우리가 현실과 밀착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현실 끝에 한계가 있고, 그 한계 너머로 속이 텅 비어 있는 심연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실재다. 실재는 우리가 결코 접근할 수 없는 끔찍한 한계, 즉 그것을 건드리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한계이며, 동시에 그 너머의 공간이다.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를 생각해 보자. 연인 유리디체를 지하세계에서 구출해 나오는 오르페우스에게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가 내려졌다. 돌아서서 뒤에 따라오는 연인을 바라보는 순간 연인이 죽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 중간에 오르페우스는 참지 못하고 뒤돌아보았고, 연인 유리디체는 죽었다. 실재의 은유로 이것만큼 적당한 것이 없다. 실재에 가까이 가는 것은 치명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현실과 실재를 가르는 한계는 근본적 불가능성의 표지이다. 우리는 그것을 결코 넘을 수 없고, 거기에 가까이 가기만 해도 죽는다. 그리고 그 너머는 금지되어 있다. 실재는 그러니까 실체도 없고, 물질성도 없다. 일체의 상징화를 거부하므로 그 어떤 말로도 표상할 수 없다. 그러나 굳이 표현하자면 그것은 공허(空虛, the void)이다. 실재는 텅 비어 있는 빈 공간이다 "

ㅡ 박정자 칼럼에서 부분 인용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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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는    왜    타  자  인  가  : 

 

 

 





욕망이냐 요구냐



 

                                                                                                                   어린이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한 아이가 울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방긋 웃던 또래아이들도 함께 따라 우는 장면이다. 이것을 공감(共感)이라고 한다.

보다 쉽게 설명하자면 공감 = 동감(同感)이다. 공감과 동감은 모두 타인의 감정, 생각, 욕망을 모방하려는 현상이다.  집에서는 거식에 가까웠던 외동 아이가 유치원에서는 폭식에 가까운 행동을 하는 것도 타자에 대한 모방 심리로 설명할 수 있다. 어른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코미디 프로그램 제작진이 웃음소리를 효과음으로 넣는 것도 감정 공유 본능 습성을 이용하여 더 재미있게 하려는 전략이다. 집에서 티븨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과 영화관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다른 체험인 이유이다. 울음소리도 웃음소리와 비슷하다. 장례를 지낼 때 일정한 소리로 우는 곡(哭)은 조문객의 슬픔을 유도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곡비(哭婢)라 하여 장례 때 우는 게 직업인 노예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이 모오든 희노애락은 타자의 욕망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한 것일까 ?  라캉은 YES ! _ 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것이다. 지첵도 OF COURSE ! 라고 대답할 것이다. 욕망이란 < 내 감정 > 에 충실한 갈망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 네 감정 > 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당신은 왜 루이비통을 욕망하는가 ?  그것은 남들이 루이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 욕망은 오롯이 네 욕망을 copy한 사본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로빈손 크루소에게는 욕망이 작동하지 않는다. 로빈슨 크루소의 허기는 머리에서 신호를 보내는 욕망(desire)이 아니라 몸의 단순한 신체 반응 요구(needs) 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desireneeds 를 구별해야 된다는 점이다. 로빈손 크루소는 배가 고플 때만 밥을 먹는다. 이 허기는 needs 에서 파생된 반응으로 진짜 허기'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허기는 desire 에서 파생된 가짜 허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자가 몸이 반응한 결과라면 후자는 뇌가 공모한 반응이다. 가짜 허기는 결핍이 주요 요인'이다. 신체적 허기의 대표적 반응은 꼬르륵 소리'이다. 꼬르륵 소리는 위에서 음식물이 완전히 비워질 때 나는 소리이다. 양 손바닥을 펴서 서로 붙였다가 뗄 때 공기 유입으로 인해 소리가 나는 원리와 같다. 위장에서 음식물이 깨끗하게 비워지는 시간은 평균  9시간 30분( ~ 12시간)이 소요된다. 이때 밥을 먹으면 걸인의 찬이라 해도 꿀맛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가짜 허기는 위장에 음식물이 가득 차 있는데도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보낸다. 이 가짜 신호는 입이 짧은 아이가 유치원에만 가면 밥그릇을 싹싹 비우는 행위와도 맥락이 통한다. 현대인의 허기는 대부분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먹방을 시청하기 전까지는 허기를 느끼지 못했다가 먹방을 보기 시작하자 허기를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포방터의 돈가스가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진짜 허기에서 오는 효과'이다. 맛은 굶주림에 비례한다. 이곳에서 돈가스를 먹기 위해서는 평균 9시간은 기본이다. 돈가스를 먹기 위해 17시간을 기다렸다는 고생담도 널리 퍼져 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것은 모든 이들이 경험을 통해 터득한 진리이다.

또 다른 이유는 백종원이라는 대타자를 흉내 냈다는 만족감이다. 그들에게 백종원은 " 킹 " 이다. 이 두 가지 요인이 섞여서 돈가스 맛을 향상시킨다. 그들은 백종원의 팔루스를 빨고 싶은 것이다. 이 욕망은 개인의 취향이라기보다는 집단적 욕망이기에 몰개성적 입맛이며 체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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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7 15: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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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7 16: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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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 :

 


 

 


 

 

 

가만히 계세요 !




 



                                                                                                                  한국어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단어 두 가지를 뽑으라 한다면 나는 < 아무 > 와 < 가만 > 을 뽑을 생각이다. < 아무 ㅡ > 에 대한 단상은 틈틈이 써놓은 글이 있기에 제외하고 오늘은 < 가만 ㅡ > 에 대해 내가 그동안 이 녀석을 스토킹 한 소회를 밝히고자 한다. 일종의 관찰 일기'인 셈이다 . 양 양(ㅡ壤)과 불미스러운 일로 고성이 오간 적이 있었다. 나도 쉽게 물러나는 성격은 아니어서 나중에는 고성이 철원까지 들릴 정도였다. 이 문장에서 웃는다면 당신은 내 유머 코드를 정확히 이해하는 몇 안되는 사람이다 

그때 양 양'이 나에게 협박을 하며 했던 말이 " 이대로 가만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 " 였다. < 가만 > 이라는 부사가 움직이지 않거나 아무 말 없는 상태를 지시하는 단어이니 이제부터는 분주히 움직이며 사람들에게 아무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아니나 달라, 그녀는 분주히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아무 말(흉)이나 해서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동분서주, 발품을 팔며 흉을 보는 이를 이길 재간은 없었다. 아, 흉보는 일도 부지런해야 하는구나. " 가만히 있어 ! " 라는 말은 " 자리를 지켜( 혹은 분수를 지켜) ! " 라는 말과도 맥락이 통한다.

남의 일에 나서지( ㅡ stand up) 말고 자기 자리에 앉아( ㅡ sit down)서 일이나 해, 라는 의미이다. < 가만 > 은 장소와 분수를 내포하는 것이다. 이 언어의 욕망을 이해하면 남성이 여성을 비하할 때 흔히 사용하는 " 집에서 밥(이나 빨래, 애, 설겆이, 청소)나 해 " 라는 말의 행간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다. 여자의 자리는 집안'이요, 여자에게 집 밖 나들이는 분수도 모르고 주제 넘는 월경인 셈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여자답다, 아이답다, 어른답다, 처녀답다 _ 라는 말속에는 자신이 소속된 자리에 가만히 있을 때 얻게 되는 칭찬이다. 여자의 자리, 엄마의 자리, 아내의 자리, 며느리의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소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토포스(topos)이다.

토포스를 구수한 한국말로 번역하면 " 가만(히 있는 삶) " 이다. 그리고 토포스(topos)의 반대말이 아토포스(atopos)이다. 아토포스는 어떤 장소(자리)에 고정되지 않은 것, 정체를 알 수 없는 것, 특정 지을 수 없는 것을 뜻한다. 여자의 자리를 벗어나서 여자다움에서 벗어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 아토포스'이다. 자유인이란 토포스에서 아토포스로 월경한 사람이다. 그런데 국가와 자본이 바라는 인물상은 토포스적 인간이라는 점에서 불온하다. 그들은 남의 일에 나서지 말고 자기 자리에 앉아 일이나 하는 일꾼을 바란다. 이 정언명령은 세월호가 침몰할 때조차 가만히 있으라 _ 라고 명령했던 무자비한 폭력을 닮았다. 최초의 아토포스적 인간은 소크라테스'였다. 아토포스의 유래도 바로 소크라테스에서 비롯되었다.

 

플라톤의 << 항연 >> 에서 사람들은 그를 아토포스라고 불렀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나는 진리를 모른다. 하지만 내가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너도 진리를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여, 나는 당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 " 그렇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람보다 항상 앞선다. 히치콕 영화가 위대한 지점은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는 데 있다. 앨프리드 히치콕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 누명 " 이다. 그래서 히치콕 영화에는 " 누명 쓴 사내 " 가 자주 등장한다. 그는 특정 사건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뿐만 아니라 아무 관련도 없는 사내이지만 악당으로부터 "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내 " 라는 오해를 받아서 그들로부터 쫓기게 된다.

 

악당은 <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내 > 보다 <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내 집단 > 이다. 그래서 악당은 주인공이 도착하는 것보다 항상 먼저 도착한다. 모른다고 하소연해도 통하지 않는다. 어찌하오리까 ?  아무 것도 모르는 남자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내라는,  누명을 뒤집어쓴다는 이야기 구조는 히치콕이 즐겨 다루는 아이러니'이다. 얼핏,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악당의 대결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지만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이다.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니 이길 방법이 없다고 한탄했던 진중권의 고백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어떻게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는 자'를 이길 수 있을까 ?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를 호명해야 한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잠을 자다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목소리를 듣는다. " 세상에서 네(소크라테스)가 제일 똑똑하다 ! "  소크라테스는 이 목소리를 의심한다. 환청인가, 신탁인가 ?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저잣거리에서 똑똑하다는 명성이 자자한 명사들을 찾아 나선다.  경주에 사는 유시민도 만나고, 월계동에 사는 진중권도 만나 논쟁을 펼치는 식이다. 그런데 그들은 논쟁을 펼칠 때마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에 진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 나는 진리를 모른다. 하지만 내가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당신도 진리를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여, 나는 당신보다 많이 안다. " 그러니까 소크라테스의 힘은 <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앎 > 이다.

그것이 히치콕 영화에서 <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 > 가 <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악당 > 과 대결하여 이길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방식은 자크 랑시에르의 << 무지한 스승 >> 과도 맥락이 통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학생에게 설명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랑시에르는 스승은 학생에게 지식을 주입시키는 < 설명 > 보다는 본질에 대한 < 질문 > 을 던지는 것이 올바른 교육법이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히치콕의 unknown, 랑시에르의 무지한 교수법'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은 많이 안다는 것의 허구'이다. 그것은 지식의 허구'이다.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전문가 집단이다. 그들은 사태와 세태를 분석하고 전문가의 이름으로 해결책을 내놓는다.

이들은 때론 독설을 내뱉는 언니가 되고 형이 되기도 했으며, 멘토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는 힐링이랍시고 상처를 치유하는 영혼의 정신적 스승이 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외양과 이름으로 불리지만 같은 얼굴이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무지한 제자를 가르치려고 하지만 진짜 무지한 자는 바로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지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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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아행행



 

 

                                                                                                                   그는 새벽 3시에 겨울 밤거리에 서서 서성거렸다(고 한다). 전날 밤 10시부터 기다렸으니 5시간째'다. 하지만 이 기나긴 기다림은 계속된다.

낮 12시가 되어야 가게 문을 연다고 하니 앞으로 9시간은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가 돈가스를 먹기 위해 기다린 시간은 총 17시간이다. 고생 끝에 낙이라 했던가 ! 한겨울 시베리아 칼바람을 견딘 끝에 가게 안으로 입성한 그는 날숨을 쉴 때 입김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동한다. 오, 주여. 주문한 음식이 나온다. 한 입 베어 문 돈가스 맛에서 기쁨을 맛보았고 마지막 한 조각을 삼켰을 때에는 고깃덩어리를 삼켰다기보다는 슬픔의 한 편린을 삼킨 것처럼 느껴졌다. 때마침 처량하게도 식당 안에서 흘러나온 라디오 방송은 그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세밑 한파에 오늘도 마음고생 많으셨죠 ?  김광진이 부릅니다. 편지.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나는 이제 돌아서겠소.

하지만 그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치는 대신 주먹 쥐고 일어서며 다짐한다.  맛있는 돈가스를 8,000원에 먹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수지맞는 장사인가, 이런 게 소확행이야 ! 대한민국에서 유통되고 있는 소확행에 대한 정의는 " 가격 대비 가성비 " 다. 포방터 돈가스보다 맛있는 돈가스를 맛볼 기회는 얼마든지 많다. 강남 고급 일식 돈가스 전문점에서 오만 원짜리 돈카츠를 사 먹으면 되니깐 말이다. 다만, 비쌀 뿐이다. 그런데 포방터에서 주먹 쥐고 블루스를 추던 그가 소확행을 얻기 위해 투자한 비용은 비단 8,000원이 전부였을까 ? 그는 8,000원짜리 돈가스를 먹기 위해 17시간을 투자한다. 이 시간에 돈을 벌 수 있는 부업을 한다면 << 최저시급 8,350 x 17시간 = 141,950원 >> 을 벌 수 있다. 

그러니까 그가 먹은 돈가스는 8,000원짜리가 아니라 149,950원짜리 돈가스'인 셈이다.  소확행의 핵심이 가성비라고 했을 때 150,000원짜리 돈가스를 두고 가성비가 훌륭하다고 말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얻은 소확행은 진짜 소확행인가, 아니면 아행행인가 ?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대한민국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소확행(가성비를 기준으로 내린 가치 판단)이 사실은 좆도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좆도 아닌 일상을 마치 예술의 일상성으로 포장하는 인스타그램 감성과 맞물리면서 소확행은 오로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전시하는 자위 기구로 사용되고 있다.  포방터 새벽 밤거리에서 주먹 쥐고 블루스를 추던 그가 욕망하는 것은 인스타그램에 전시할 사진 한 장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

그는 자신이 취득한 작은 행복을 홍보하기 위해 인증-샷을 남긴다.  백종원 열풍의 핵심도 가성비에 있다.  박권일 셰프는 백종원 열풍에 대해 " 최고의 재료를 숙련된 기술로 요리한 음식이 우리(셰프)의 로망이라면, 최소한의 재료와 노동으로 ' 있어 보이는 ' 식탁을 차려내는 것은 우리(소비자)의 needs 다. 한국에서 그걸 가장 잘하는 사람이 백종원이다 " 라고 말했다. 이 말을 알기 쉽게 번역하면 " 없어 보이는 재료 " 로 " 있어 보이는 식탁 " 을 차리는 것이다. 그런데 < 백종원의 집밥 > 이라는 프레임은 모순된 표현이다. 왜냐하면 백종원이 시청자에게 알려주는 음식 백서는 오리지널 홈메이드 집밥이 아니라 외식 요리'를 흉내 낸 홈메이드 집밥이기 때문이다.

그의 요리 백서가 선보이는 음식은 집안에서 해 먹는 " 집 밥 " 이라기보다는 " 집 밖 " 에서 사 먹는 음식 맛을 흉내 내는 요리'이다.  방점이 매식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음식을 만드는 장소가 (식당 가게가 아닌) 집 부엌일 뿐이지 결과물은 유사 매식 음식이다. 내가 백종원을 비판하는 지점이 바로 그것이다. 백주부의 핵심은 매식을 copy 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작동하는 심리 기저는 가성비'다. 박권일이 지적했듯이 백종원 서사의 핵심은 < 없어 보이는 재료 > 로 < 있어 보이는 식탁을 꾸미는 것 > 이다. 훌륭한 원본을 복제하여 사본化하는 것은 원본에 대한 오마쥬이다.  하지만 복제할 가치 없는 원본을 copy하는 것은 짝퉁이다.

그렇기에 백주부의 요리 백서는 짝퉁이다. 그것은 일종의 시물라시옹이며 copy food 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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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5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6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언더 더 씨 호밀밭 소설선 3
강동수 지음 / 호밀밭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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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덩 이 와   히 아 신 스   :




 

 



문학적 영감에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꽃, 김춘추



 


 


          학을 가르치던 교수가 A 제자를 꽃에 비유하며 A에게 카카오 메시지 500건과 문자 45건을 보냈다가 학교로부터 교원 품위 훼손에 따른 징계로 정직 3개월 결정을 내린 사건이 있었다. 교수가 지속적으로 보낸 문자가 성희롱에 해당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해당 교수는 극렬히 반발하며 문학적 영감(시 창작 수업)일 뿐이라고 행정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근엄한 목소리로 영감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_ 라는 지청구를 날렸다.

이 늙은 영감은 A에게 가장 좋아하는 꽃( : 그녀는 히아신스라고 답했다)이 무엇이냐고 물은 후에 < 히아신스 > 라는 제목의 시를 보낸다. " 엉덩이 속에 다 녹아들어가 있다 / 그녀는 엉덩이가 전부다 / 엉덩이로 생각하고 엉덩이로 꿈을 꾼다 / 엉덩이로 말을 하고 / 엉덩이로 사랑할 줄 아는 히아신스 "  히아신스를 보며 여자의 엉덩이가 떠올라 몸이 달아오른, 이 문학적 영감 머릿속에는 온통 엉덩이, 엉덩이, 엉덩이, 엉덩이. 오오오오오 !  엉덩이가 자리잡고 있다. 그에게 엉덩이는 뮤즈인 셈이다. 이 얼마나 아스트랄한 문학의 변증법적 상상력인가 ! 웃지 않을 수 없어서 웃는다. 그런가 하면 평창올림픽 때 전문 인력-들이 여성 자원봉사자에게 " 꽃은 물을 줘야 한다 " 며 성희롱을 일삼아서 논란이 된 적도 있다.

이처럼 꽃은 꼰대들의 문학적 영감'이다. 하지만 꼰대들에게 있어서 꽃보다 더 자극적인 성적 오브제는 과일이다. 속된 말로 남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 여자를 따먹다 " 에서 여자는 과일로 환유된다. 강동수 작가의 단편소설집 << 언더 더 씨 >>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단편 < 언더 더 씨 > 는 세월호 희생자(女)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소설이다. 문제가 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 내 젖가슴처럼 단단하고 탱탱한 과육에 앞니를 박아 넣으면 입속으로 흘러들던 새큼하고 달콤한 즙앱 " 누가 봐도 이 문장에 사용된 단어들은 성적 암시에 중요하게 쓰이는 단골 낱말들이다.

< 단단하다 > 는 형용사는 발기를, < 탱탱하다 > 는 젊은 피부를, < 과육 > 은 성욕의 식욕화를 환유하는 방식으로, < 앞니를 박아 넣었다 > 는 굳이 내가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은유이다. 그리고 " 박아 넣은 ㅡ " 결과 " 새큼하고 달콤한 즙액 ㅡ" 이 흘러나왔다는 것은 화장실 벽낙서에 자주 등장하는 남성 판타지의 전형이다. 이 문장을 읽은 많은 이들이 세월호 희생자를 성적 대상화했다며 반발하자 작가는 일부분만 발췌해서 전체 맥락을 훼손한다며 화를 냈지만 전체 문맥을 살펴도 달라질 것은 없다.


“ 지금쯤 땅위에선 자두가 한창일 텐데. 엄마와 함께 갔던 대형마트 과일 코너의 커다란 소쿠리에 수북이 담겨있던 검붉은 자두를 떠올리자 갑자기 입속에서 침이 괸다. 신과일을 유난히 좋아하는 내 성화에 엄마는 눈을 흘기면서도 박스째로 자동차 트렁크에 실어오곤 했는데...... 내 젖가슴처럼 단단하고 탱탱한 과육에 앞니를 박아 넣으면 입속으로 흘러들던 새큼하고 달큼한 즙액.”

 

나는 작가가 음흉한 생각으로 이 문장을 썼을 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가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부장 사회에서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고착된 여성성(성적 대상화)이 은연 중에 드러난 결과라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그는 이 논란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며 변명하기에 앞서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남성 욕망에 대한 반성부터 해야 했다. 남성 작가라면 남성 화자'가 1인칭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 심리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더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여성 화자가 1인칭 화자로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  그것은 17살 여성 < 나 > 와 남성 작가인 늙은 나를 접선(빙의)시켜야 하는 난이도 높은 기술인데 말이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작가는 1인칭 < 나 > 로 빙의하는데 실패한다.  여자라면 어느 누구도 자두를 먹으면서 내 젖가슴이 탱탱한 자두와 같다는 생각을 하며 앞니를 박아 넣지는 않는다.  같은 이유로 남자라면 어느 누구도 바나나 껍질을 벗기면서 포경인 자신의 성기를 상상하며 맛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만약에 미성년인 여자가 크기가 작은 자두를 자신의 젖과 동일시하면서 성욕을 식욕으로 변주하거나 미성년인 남자가 바나나를 자신의 좆과 동일시하면서 성욕을 식욕으로 변주했다면 그 심리적 기저에는 동성애적 성적 취향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추론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 자두에 대한 묘사는 어디까지나 남성 중심 시각에서 바라본 여성 신체에 대한 상상력일 뿐이다.  

여성을 꽃이나 과일에 비유하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여성은 여성 스스로 자신을 꽃이나 과일에 비유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의 1인칭 < 나 > 는 외피는 소녀이지만 내피는 문학적 영감의 늙은 목소리일 뿐이다. 이 소설은 소녀 목소리를 흉내 내는 늙은 남자 목소리'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진혼 굿을 차용한 애도라기보다는 오히려 핍진성이 제거된 불가능한 성대 모사에 가깝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완벽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실패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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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01-16 1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것처럼 오십대 후반의 작가가 (고도의 관찰력과 감응력 없이) 십대 소녀의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는 데서 이 소설의 문학적/윤리적인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고 봅니다. 작가 본인과 바라보는 대상에 대해서 솔직함과 진실성을 갖출 줄 알았다면, 이런 소설이 나오지는 않았겠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1-16 16:21   좋아요 0 | URL
남성이 여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저 오만함이 이런 비극을 낳았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