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에서 2년만에 돌아온 조카들도 있고, 

재민이 보러오신 큰형님과 아주버님이 이사한 고모네 들러 저녁 드시고 간다셨고, 

엄마가 창원 가시고 안 계시니 아버지도 찬이  마땅치 않으실 듯 하고, 

미니아빠도 좋아하고, 

저녁에 장만하지 않으면 김치냉장고에서 사흘을 난 양과 곱창이 냉동실로 들어가야 할테고 

이런저런 이유로 인터넷을 뒤져서 레시피를 이것저것 비교해 보고 곱창전골을 끓이기로 했다.  

 

결혼 7년 차인데도 불구하고  

요리, 청소와 정리정돈, 육아, 가정경제관리 기타 여러 방면에서 매우 비전문적인 나로서는 

어쩌다가 그런 마음을 냈는지 신기한 순간이었다. 

아뭏든 며칠 전부터 우리 집 물탱크에 어딘가 이상이 생겨서 물이 안 나오는지라

미니 머리도 못 감기고 밥 짓는 물도 길어다 먹는 이런 비상시국에  

평소에는 해달라고 온갖 회유와 협박, 간청을 해도 미루고 버티던 일을  

어찌하여 냉큼 시작하게 되었는지 처음부터 일이 그리되려던 모양이었다. 

  

양은 밀가루와 소금으로 바락바락 주물러서 씻어 30여분 술이랑 후추랑 마늘이랑 넣고 삶고 

곱창은 죽죽 훓어내려 열심히 씻고  

대,중,소 전골냄비를 좌르륵 늘여 놓고

호박,당근,양파,염통,버섯,대파,두부를 썰어 색색으로 돌려 담고  

삶아진 양을 꺼내 칼집을 곱게 넣고 한 입 크기로 먹기 좋게 썰어

그 사이 조카의 도움으로 만든 양념장에 조물조물 무쳐서 전골냄비 가운데 담으니 

웬일인지 그럴 듯 한 것이 맛있겠다는 기대감이 폴폴 솟아 올랐다. 

미니도 옆에 앉아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어서 먹었으면 좋겠다고 성화였다.  

 

월요일이라 바쁜 탕전실 일을 마치고 퇴근하여 미처 저녁 준비할 새도 없었을 아가씨는 

세 조카들이랑 아주버님,형님이랑 둘러앉아 올케 요리솜씨를 칭찬하며 정다운 한 때를 보내고,

아버지도 조카들이랑 흐뭇하게 저녁을 드실 것이며, 

미니아빠도 모처럼 안주다운 안주가 생겼다고 기뻐하며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고 

미니도 역시 엄마 요리가 최고야 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는 것을 상상하니 

배시시 입가에 웃음이 났다. 

 

물이 안 나와서 겪는 온갖 번거로움과 배고파서 앵앵거리는 막내의 울음소리를 극복하고 

아주버님 출발하실 때 육수와 함께 한 냄비를 보내고, 

시간이 더 늦기 전에 아버지 댁에 한 냄비를 올려보내고, 

부르릉거리며 올라오는 차 소리를 듣고 우리 냄비도 가스렌지에 올려 보글보글 끓여냈다.   

 

육수를 부어 끓이자니 왠지 냄새가 썩 개운하지는 않았지만 

설마 이게 소위 누린내라는 건 아니겠지 하고 애써 외면하면서 소금 좀 넣고 간을 보았다. 

기대와는 달리 국물 맛은 개운하고 고소한 것이 아니라 

평소와 다름 없이 이상 야릇한 것이 싱거운 건지 짠건지 분간이 되지 않고 냄새조차 개운치 않은

큰형님이 자주 쓰시는 표현으로는 니 맛도 아니고 내 맛도 아닌 역시나 그런 맛이었다. 

순간 좀 실망스럽긴 했지만 어디 이런 일이 한 두 번이었던가?! 

다음 순간 기운을 내어 기다리다 지쳐 잠든 미니도 깨우고  

씻고 나와 밥상머리에 앉은 신랑 앞에 냄비를 대령하였다.  

 

나는 역시 기다리며 울다지친 막내에게 젖부터 물리고 마주 앉았는데  

미니아빠가 젓가락으로 양을 집어 입 속에 넣고 씹는 순간 "와드득!" 하는 것이다. 

말랑말랑 쫄깃쫄깃해도 밍숭맹숭한 국물과 먹을까 말까 한데 질겨서 씹을 수가 없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코 끝이 찡 하더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아가씨며 아버지며 나보다 훨씬 음식을 맛깔스럽게 하는데 

공연히 하지도 않던 짓을 해가지고 시댁이랑 친정이랑 그 수 많은 식구들 저녁을 망쳤구나 생각하니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정말 엉엉 울고만 싶었다.   

막내 여동생 표현을 빌리자면 " 윽, 분하다!" 인 상황이었던 거다.

 

그러자 보통 때는 간도 하나 제대로 못 맞추니 정성이 부족하니 어쩌구 저쩌구

온갖 타박에 까탈스럽게 구는 남편이 사태를 제대로 파악했는지 

애 젖 먹이면서 울기는 왜 우느냐고 짐짓 버럭거리면서 

태민이에게는 두부랑 호박이랑 당근이랑 건져주고 자기는 열심히 전골(?)을 먹기 시작했는데 

급기야 3~4인 분 전골냄비에 가득 담긴 것을 국물만 자박하게 남기고 다 먹는 것이었다. 

" 오늘 턱운동 한 번 자~알 했네. 내일은 여기(남은 국물)다 밥 볶아 먹으면 맛있겠다." 

이러고는 양치질을 하러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지난 여름 남편에게 반가음식을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이 

다른 요리전문가 선생님 여러 분들과 함께 다니러 오셨다가 

온갖 장아찌며 젓갈을 좋아하는 남편이 내가 그런 음식에 환상적인 솜씨를 보여서 

때마다 나는 나물이며 풋잎새들을 그렇게 갈무리 하여 두었다가 

귀한 손님이 오실 적에 깔끔하고 맛깔스러운 상차림을 하길 꿈꾼다고 말씀드렸더니 

손사래를 치며 이러시는 거다. 

" 그럴 필요 없어요. 그러다 일찍 죽어요!" 

 

나도 이번처럼 뜬금없이 발동 걸려서 오히려 큰일내지 말고 

여느 때처럼 생긴대로, 분수를 알고 오래 살 길을 도모해야 할까보다. 

곱창전골이여, 영원히 안녕! 

 

그런데 한편으론 

이 다음 번엔 여봐란 듯이 근사한 곱창전골 한 냄비 만들어내고 말리라  

이런 오기가 가슴 속 한 구석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은 또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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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8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18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나무집 2009-03-18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리 솜씨는 한 가지음식을 끈질기게 여러 번 해봐야 느는 것 같더라구요.
저도 신혼 초에 돼지갈비찜 하는 데 주물럭할 때처럼 고추장 잔뜩 넣고 시뻘겋게 해서
결혼한 아들집에 처음 오신 시어머니랑 시아버지를 대접한 일이 있어요.
울 시어머니 조리사자격증까지 있는 분인데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싶어요. 하지만 이젠 열심히 돼지갈삐찜 공략한 끝에 달인 수준이 되었어요. 돼지갈비찜 했는데 소갈비찜 맛있다는 말까지 듣는답니다.

조선인 2009-03-19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자신있게 잘하는 건 감자전 하나에요. 아예 곱창전골이니 돼지갈비찜이니 이런 건 엄두도 못 낸답니다.

순오기 2009-03-22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궁~ 나까지 공연히 눈물 났다고요.ㅜㅜ
난 결혼 2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곱창전골 한번 안해봤어요.
마지막 오기가 또아리를 틀고 있단 멘트에 급방긋~~
그래야 요리의 달인이 되는 듯해요.^^

>>sunny 2009-03-24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핫....
걱정마세요!!!
항상 해주신 음식 정말 맛있어요!!!^^
 

의정부 발 참담한 사건의 소식을 듣고 미니아빠와 짧은 얘기를 나누었다. 

엄마: 그렇게 인생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피해만 주는 마누라라도  

        내치지 못하고 함께 사는 것도 팔자라더라. 

        어떤 사주를 보면 이 사람은 차라리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사는 게 나을텐데 싶어도 

        그러지 못하고 온갖 애 먹이는 배우자를 참고 견디면서 산다더라고... 

아빠: 그러게, 참.

미니: 그럼 이혼하면 되잖아? 

아빠: 엄마 아빠가 이혼하면 너는 기분이 어떻겠어?  

        엄마 아빠 헤어지는데  엄마랑 살래 아빠랑 살래 하면 좋겠어?  

미니: 아니.... 그럼 아이들이 없는 사람은 이혼해도 되겠네? 

엄마: 그래도 같이 다정하게 살던 사람들인데 헤어지면 마음이 아프잖아. 

미니: 처음엔 좀 슬프겠지! 

        (그러나 좀 있으면 괜찮겠지 뭐 어때? 하는 반응)  

 

이걸 쿨하다고 해야하나?  

어이구... 아이 말이지만 내가 뭘 잘못 가르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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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3-09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러서 좌르르 근황을 살펴봤어요.^^
처음엔 슬프겠지~~~ 그러다 잊고 잘 살겠지~~~ 이게 진실 아닐까요?ㅋㅋ

2009-03-15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재민이가 태어난 후 너덜이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터라 

시장보는 일은 미니아빠가 맡아한다. 

어느 날 주먹만한 해초덩어리를 사가지고 왔는데  

색깔은 틀림없이 파래 같은데 분위기는 김 같기도 하고 

너무도 결이 고운 것이 도무지 정체를 알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색깔이나 모양새가 김보다는 파래 쪽이길래 무채를 곱게 썰어 새콤달콤 무쳤다.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맛은 영 아니었지만 어쨌든 상에 올라갔다. 

그랬더니 미니아빠랑 조카 승욱이가 씩 웃으면서 이건 국을 끓이는 건데 무쳤느냐고 한다. 

알고보니 그것은 매생이였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오늘 낮에 굴이 없는데도 꿋꿋하게 국을 끓였다. 

마늘이랑 국간장, 참기름 넣고 들들 볶다가 멸치 다시국물 조금 넣고 보그르 끓였더니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인터넷에서 찾은 레시피에 김이 다 나가도 무척 뜨거우니 데이지 않게 조심하라는 충고가 있어서 

미니아빠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옆에서 읽고 있는 미니가 요청한 문구^^;;) 

한 그릇 떠놓고 들여다보고 있으니 참기름의 고소한 냄새와 함께 코 끝에 감겨드는 향기가... 

어릴 때 외갓댁에 가면 할머니께서 <김 국>이라고 이름하며 끓여주시던 바로 그것인 듯 하다. 

내 기억엔 훨씬 검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진짜 생김으로 끓인 국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렇게 곱고 부드럽게 목을 넘어가는 느낌과 향은 똑같은 것 같다. 

아흔 넷 생을 마치고 돌아가실 때까지 너댓번 밖에 뵙지 못했던 할머니지만 

겨울엔 찹쌀떡이랑 식혜, 당면이 많이 든 포장마차표 군만두, 

담 너머 골목을 누비던 아줌마한테 새벽아침 사주시던 재첩국 한 그릇, 

십원만 주세요 하고 내밀던 손아귀에 쥐어주시던 동전으로  바꿔온 꼴덕, 

여름방학이면 맛이라도 보고가라고 항아리에 넣어 익힌 설 익은 초록 풋감, 

윗 채 옆, 허리만 굽히면 손에 닿을 듯한 낮은 우물에  

오렌지색 박 모양 플라스틱 그릇에 담겨 더위를 나던 시큼한 김치, 

생전 처음 먹어본 손콩국수의 고소한 맛 

외할머니는 이런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떠올리게 만들어주신다.  

이생에는 다시 뵐 수 없는 할머니처럼 절대로 다시 만날 수 없는 그 맛들.  

 

바닥에 머리가 닿을만큼 굽어서 움직이기 불편하게 하던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서 

참빗으로 백발을 곱게곱게 빗어내려 쪽져 올리던 할머니의 은비녀와 

화투로 하루 운을 떼보다가도 바깥 기척을 살피시려  

창호지 문에 달아놓으신 아기손바닥만 하던 할아버지의 유리창과 활과 화살. 

군민관 옆을 지나 어이어이 지나가던 높다란 꽃상여의 슬픈 소리와 

차가운 공기 속에서 알싸하고 매캐한 기분 좋은 연기를 만들어내던 겨울 새벽 장작, 

마당 한가운데 납작하니 엎드려 피던 채송화와 변소 문 앞에서도 고운 빛을 자랑하던 분홍 분꽃. 

 

백일도 지나지 않아서 덜컹덜컹 차를 타고 추운 길을 가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다고 

너덜이 집에서 통유리 창 밖에 펄펄 날리는 함박눈을 한가로이 바라보고 있자니 

그런 것들이 모두 무척이나 그립고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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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 2009-01-25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생이국!!! 나도 매생이국 좋아하는데!!!
엄마가 종종 끓여줘서 숭이모가 왔을 땐 같이 먹었다능..ㅎㅎ
쩝... 이모... 매생이도 몰랐단 말이야?!?!? 헛ㅋㅋㅋ
함 무쳐본거 먹어보고 싶기도...ㅋㅋ

2009-01-26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9-01-26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적한 너덜이에서 추억여행을 하셨군요~~ 알싸하게 감겨듭니다.
아마도 할머니가 끓여주셨던 김국은 매생이가 아니고 김으로 한 것일 듯...^^

2009-02-02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설 2009-02-09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할머니가 끓여주신건 매생이 아니라 김국입니다.ㅋㅋㅋ
김국은 김국이고 매생이국은 매생이국... 우리 어렸을적엔 매생이 거의 안 먹고 자랐어요~

miony 2009-02-09 11:30   좋아요 0 | URL
오호~, 그렇군요. 그럼 그렇지...^^;;

소나무집 2009-02-10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완도도 매생이가 많이 나와요.
저도 이곳에 살면서 처음으로 매생이국을 먹어봤는데
굴 넣고 잘만 끓이면 참 맛있어요.
아이고, 먹고 싶어지네요.
 

수도관이 얼어버려서

아버지는 거의 이 겨울 내내 산에서 흘러내려 마당 한 쪽 작은 물 확에 고이는 물로

한낮에 설겆이나 빨래를 하고 세수한 물은 화장실에 붓는 식으로 불편한 나날을 보내셨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그런 겨울이었는데

엊그제 아침 설겆이를 하려고 밖에 나 앉았더니 공기가 온화했다.

대낮에도 덜덜 떨리는 찬바람 맞으며 그릇 몇 개 씻다가

고개들어 앞산을 한 번 바라보며 부르르 추위를 떨쳐내곤 했는데

하룻밤 사이의 변화라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5박6일 동안 동감의숙에 손님들이 다녀가고나서

모처럼 한가하게 평일 대낮에 온 가족이 가까운 온천에 갔다.

웬일인지 요일감각이 마비되어 주말같은 느낌이 자꾸 들었다.

씻기 좋아하시는 아버지가 더운 물이 안 나오니 답답해 하시다가

월요일에 어머니와 우리를 목욕탕에 데려다주셨던 터라 사흘 만이었다.

(이게 웬 호강인지!^^)

 

덕분에 약속한 한 시간 반도 못 되어 아빠보다 먼저 마치고 나온 아이들이

쏟아지는 햇살에 발바닥이 간지러운 듯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나간다.

보도블럭이 깔린 넓은 인도를 달리고 까르르 웃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무를 흉내낸 시멘트 벤치에 앉았다가 깜짝 놀랐다.

남향이라 너무나 따뜻하게 데워져 있어서!

 

어느 새, 바람 한 점 없이 맑고 따뜻한 봄날이었다.

아버지 댁 수도관도 다시금 녹아 흐를 날이 멀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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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8-02-22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그곳은 봄이군요. 올해의 첫 소식입니다. ^^

miony 2008-02-22 10:49   좋아요 0 | URL
저도 예상치 못했는데 단 이틀만에 봄이 왔습니다.
물론 꽃샘추위란 녀석이 어딘가에 웅크리고서 기회를 노리고 있겠지만^^
 

한밤중에 폭포수 쏟아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웬만해서는 누가 업어가도 깨지않는 나를 깨울만큼 물소리는 요란했다.

 

보름쯤 비워두었던 너덜이에 저녁 무렵에야 올라오니 집은 그야말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왜 그런지 지난 번부터 전기가 불안정하여 본의아니게 냉동실을 깨끗이 비우고 청소를 해야했고

김치냉장고는 어차피 회복불능일 듯 하여 열어보지도 않았다.

보일러는 뭔가가 시원치 않아서 방이 데워지는데 천년 쯤 걸리는 느낌이었고

2층의 나무보일러는 연통이 어찌 되었다나 불길이 거꾸로 치솟아 나오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하나 겨우 제대로 돌아가는 석유난로 앞에 손바닥만한 담요를 깔고

두 아이와 옹기종기 모여앉아 서너 시간을 오들오들 떠는데 낮부터 지끈거리던 머리가 어찌나 아프던지...

그 와중에 30분이나 한 시간마다 나무보일러에 땔감 넣으러 나가면 태민이는 그악스럽게도 울었다.

 

전쟁같은 한 나절을 보내고 겨우 온기가 도는 방에서 막 잠이 든 참이었는데

더운 물이 도니, 수도꼭지는 물론 변기 속 물까지 꽁꽁 얼어붙었던 2층 목욕탕 물이 녹았나보다

산더미 같이 모아 온 빨래를 내일은 다 할 수 있겠구나 좋아했는데

심상치 않은 물소리의 정체는 벽 속에서 얼어터진 수도관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미니아빠가 손전등도 없이 찬바람 속을 이리저리 뛰더니

어찌어찌 하여 흘러나오던 물은 멈추었다.

정전이 되니 열선이 제 기능을 못해서 수도관이 얼고, 냉동실에 든 음식들은 상하고

보일러는 어딘가 밸브가 헐거워 물이 새어나가느라 제대로 작동이 안 되었나 보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면서 2층 수도 밸브를 열지 못하니 세탁기는 못 쓸테고

급한 빨래 몇 가지는 1층에서 손으로 빨면 어떻겠느냐고 한다.

온 가족 내복이며 여벌 옷이 전혀 없는 상태라 귀가 번쩍 뜨였다.

 

새해가 되었는데 예전에는 올해는 이래야지 저래야지 각오도 다지곤 했는데

올해는 심드렁하니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것이 좀 서글프기도 했었다.

신랑 말을 듣고 보니 올해는 상식적인 수준의 융통성을

다름아닌 나도 발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새해소망이 생겼다.

 

저것 참 보기 싫은데 어쩌지? 하면서도 치우면 된다는 간단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여벌 옷이 없는데 세탁기를 돌릴 수 없으니 손빨래를 해야겠구나 라는 단순한 해결책도 찾아내지 못하니

이것이 진정 꽉 막히고 굳은 생각 탓인지 게으름 탓인지 헷갈리기는 하지만

어쨋든 내게는 융통성이 절실하기는 한 것이다.

심지어 어젯밤 방을 데우는데 천년이 걸린 것도

2층방 밸브가 잠긴 것을 점검해보지 않은 탓이었다는 것 아닌가?

(신랑이 와서야 겨우 밸브를 열어주었는데 한 시간 남짓 만에 방이 따뜻해졌다.)

 

온 가족의 내의와 겉옷 한 벌씩을 빨간 고무함지에 담아놓고 보니 한숨부터 났지만

나도 올해는 융통성을 발휘해가며 효율적으로(?) 살아보자 마음 먹고

의욕적으로 빨래를 시작했다.

사이사이 틈틈이 온돌 아궁이와 나무보일러 양쪽에 땔감을 넣으러 푸르르 달려갔다오고

애들 밥 챙겨먹이고 온갖 요구에 부응해 가면서 어찌나 열심히 빨았던지

보일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까봐 온수 밸브를 잠궈놓아 찬물만 써야했는데도

저녁 무렵에는 다 마칠 수 있었다.

 

가지고 올라간 빨랫감 전체 양에 비하면 빨아놓은 것은 새 발의 피였지만

가슴에는 뭉게뭉게 뿌듯함이 소용돌이 쳤다.

내친 김에 조금 더 할까?

고민하다가 충분히 애 쓴 하루였다고 자평하며 저녁만 지어먹고 9시에 땔감넣기도 끝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난로에 석유를 붓다가 장갑에 묻는 바람에 손을 깨끗하게 씻어야 했는데

불도 다 꺼버린 1층으로 내려가기가 싫은 거였다.

그러다가 수도관 속에 남은 물로 손 정도는 얼마든지 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아니나 다를까 비누로 손을 다 씻을 때까지 물이 끊기지 않고 나와주었다.

흡족해하며 돌아서는데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어서 수도꼭지를 모두 열어보았더니

아니나다를까 럴수 럴수 이럴 수가!!!

변기, 세탁기를 포함하여 6개의 수도관 중 잠긴 것은 두 개 뿐이었던 것이다.

 

아침에 한 번 확인했더라면 힘들게 손빨래 안해도 되고 급한 빨래들 다 마저 할 수 있었을텐데

원대하지도 않고 소박하기 그지 없는 새해소망이 품어 본 첫날부터 와그르르 어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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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2008-01-28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큭큭큭...
웃어서 죄송해요.
어디 여행 다녀오셨나 봐요?
님의 사는 모습이 솔직해 보여서 너무 예쁘네요.
저도 기계치다 보니 보일러가 가끔 말썽을 부려도
서방님 들어올 때까지 마냥 떨고 앉아 있답니다.
집 이름이 너덜이인가요? 왜 그런 이름이 붙었나요?

miony 2008-01-28 21:20   좋아요 0 | URL
옛날에 저희 마을로 올라오는 길에 널빤지 다리가 있었답니다.
행정지명은 한자로 판교라고 하거든요. 널다리라는 말이 변한 것 같아요.^^

솔랑주 2008-01-2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부터 새해 시~작!' 하고 그 날부터 열공해요( 삼일에 한 번 한다는 ㅋㅋ)
꼭 새해가 아니라 '오늘부터 2월 시작' 뭐 이럴때도 있어요.

맘만 먹으면 내일도 새해가 될 수 있는거니까요^^

miony 2008-01-28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로해줘서 고마워. 새롭게 맘 먹어야겠다.^^

2008-01-29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1 1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