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귀 맞은 영혼 - 마음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방법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장현숙 옮김 / 궁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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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상함’에서 벗어나기




  한 여자 여기 있다. 붉은 벽을 배경으로, 검고 긴 어깨머리를 한 여자. 황소 눈망울을 한 여자의 시선은 오른쪽이다. 오른 뺨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길은 가늘고, 얼굴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황량하다. 짐짓 생각에 잠긴 듯한 여자, 실은 상처받았다. 그녀는 따귀 맞은 제 영혼을 그렇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 여자는 배르벨 바르데츠키가 쓴 ‘따귀 맞은 영혼’(궁리,2002)의 표지 인물이다. 원 그림 제목은 ‘생각에 잠긴 여인’이라지만 어쩌면 그녀도 제 깊은 상처 때문에 생각에 잠겼을지도 모른다. 영혼이 따귀 맞았으니 얼마나 아플까? 놀란 여자의 눈망울과 황망한 표정이 절묘하리만치 이해가 된다. 
 


  누군가 나를 거부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  자존감 다친 그 부위에 생채기가 난다. 불안정, 무력감, 분노감에 이어 자기불신에까지 이른다. 이렇게 마음 상한 상태에서 우리는 상대에게 완강히 고개 돌려버린다. 이 책은 그 아픈 마음을 다독여주고 위로해주는 치유서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은 따귀를 맞는다. ‘마음상함’으로 번역된 이 주제는 ‘과거’의 심리 상태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과거에 해결되지 않은 욕구나 감정, 상처 등이 현재와 부딪치는 순간,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 상함’은 누구나 겪는데, 가까운 사람일 때 그 상처가 크고 깊다는 사실에 공감이 간다.  
 

 

  이 책에서 나는 두 가지 사실에 매우 흥미를 느꼈다. 마음상함의 원인을 남 탓으로 돌리는 ‘투사’라는 개념과, 자기 안에 남의 말을 그대로 담아 내 탓으로 돌리는 ‘내사’라는 개념에 관해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생긴 자기반성이 이 리뷰를 쓰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필름과 화면은 다르다. 필름이 실체라면 화면은 필름이 만들어낸 현상 즉, 투사일 뿐이다. 예를 들자. 오랜만에 만난 친구, 얼굴이 굳어 있고 하품까지 한다. 단지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뿐인데, 우리는 친구가 화가 났거나 나를 거부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그 현상을 친구 탓으로 돌리는 일이다. 내사 또한 마찬가지다. 네 노래는 들어줄 수가 없어. 정색하고 던진 노래 잘 하는 친구의 한마디에 우리는 노래방,이라는 간판만 봐도 알레르기가 생긴다. 그게 굳어져 어느새 자신은 노래 못하는 인간이란 굴레를 스스로 씌워 버린다. 사소한 오해가 투사를 거치면서 커다란 갈등이 되고, 작은 말 한마디가 내사를 만들어 심각한 자기연민에 이르게 한다.  



  이처럼 남 탓과 내 탓만 극복해도 마음상함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투사와 내사는 실체가 아니라 허상일 뿐이다. 다른 사람이 주는 자극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면 상처를 쉽게 피해갈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마음상함에서 벗어나는 작가의 충고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마음 상한 타인과의 관계를 끊기보다 마음이 상했다는 것을 타인에게 고백하는 것이 우선이란다. 이때의 고백은 상대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라야 성공할 확률이 높다. 대부분의 경우 그런 줄 몰랐다고 딴전을 피우거나 상대를 재공격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 다음 상대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섣불리 예전처럼 돌아가겠다고 서두르다 보면 관계 회복에 실패하기 쉽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감정과 직접 대면하는 연습을 한다. 다시 말하면 투사와 내사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과 사물에 대해 과거와 다른 시각을 가져 보는 것이다.  



  자연스레 모든 문제는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마음상함의 해결점 또한 내 마음 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유를 가지고 마음 한 자락 열어 놓을 때 여러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상처로 온밤을 지새운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마음상함은 결국 내 안에서 시작해 내 안에서 끝난다는 것을 알게 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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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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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함도 다정으로




  내가 그미를 알게 된 것은 오래지 않다. 책 읽는 모임에 친구 소개로 나타난 그녀는 한마디로 멀티패셔니스트였다. 작은 두상에 어울리는 시원한 망사 두건, 눈썹에 닿을 것처럼 날아오른 인조눈썹, 옷 색깔에 맞춰 단 귀걸이, 길고 가지런하게 손질된 손톱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는 완벽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엣지있는 그녀의 멀티 패션은 예쁜 얼굴과 날렵한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우리 독서팀의 독보적인 인기인이 되어버렸다. 독서 토론 후, 점심을 겸한 친목 자리에서 이어진 그녀의 패션 강좌(?)는 책 읽는 즐거움을 앞질렀다. 귀걸이는 윗옷 색깔에 맞춰 달아 보세요. 머플러는 매는 방법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요. 패션의 완성은 신발과 가방이니 소홀하면 안 돼요. 그녀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다 보면 몇 술 뜨지 않았는데도 배부른 느낌이었다. 패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얘기인데도 그녀의 한마디는 사람을 몰입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녀에겐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녀를 매혹으로 이끈 건 그녀의 패션 감각이 아니라 그녀 자체였던 것이다.  

 

  그녀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밝았다. 바둑, 에어로빅, 노래교실, 종교 활동, 산악모임 등 그녀의 활동 반경이 넓은 만큼 그녀의 매혹 또한 커보였다. 그녀의 긍정적인 인품을 높이 산 우리는 급기야 독서회 부설 산악모임까지 결성해 그녀를 등반대장으로 임명해버렸다. 리더가 된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산행, 초보자들을 배려한 장소를 물색하고, 자세한 산행코스를 설명해주고, 운전까지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번거로운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찌푸린 적 없고, 진심으로 멤버들을 챙겼다. 그녀 덕분에 우리는 몇 달 동안 경주 용장골에서 양학산, 도움산, 봉좌산을 거쳐 동대산 정상까지 오르는 희열을 맛보았다.  

 

  산행 중 담소를 나누며 찍은 사진에서, 일행의 시선은 하나같이 그녀를 향해 있다. 그녀를 향한 무한한 신뢰의 눈빛들, 그것은 그녀 긍정의 리더십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아량, 그 어떤 불편함도 만들지 않는 천성적 관용이 그녀에겐 습관이 되어 있었다. 마음이 태산인 사람에겐 까칠함도 다정이요, 마음이 지하 감옥인 사람은 다정도 까칠함이 되기 쉽다. 그녀를 보며 마음의 감옥을 생각한다. 내 좁은 식견에서 오는 강박과 욕망을 질책하고 반성한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공중그네’(은행나무, 2005)는 강박이나 욕망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세상 범부들 대개, 욕망은 높으나 노력은 제자리걸음이다. 그 와중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커져가고, 그 두려움은 크고 작은 강박이 되어 자신을 괴롭힌다. 이런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을 두고 작가의 처방은 명쾌하기만 하다. 사람들아, 인생은 길고 욕망은 순간이란다. 그 인생 즐기려면 단순하고 낙천적이 되어라. 정신과의사 이라부를 등장시켜 무거운 삶을 가볍게 메친다. 쓸 데 없이 집착하고, 고민하고, 아파하지 않기. 내 영혼이 피폐해지는 건 과욕에서 오는 강박 때문이다.  

 

  단순하게 살고 싶은 독자들은 기꺼이 이라부가 주는 유쾌한 비타민 주사 한 방을 맞는다. 제 안에 갇힌, 검붉고 탁한 욕망의 핏줄 밀어내고, 맑고 푸른 낙천의 비타민 온몸으로 휘돌게 하고 싶은 것이다. 때론 공중그네 같은 삶의 곡예에서, 맨바닥에 나뒹굴더라도 그건 파트너의 잘못이 아니다. 내 손목을 놓친 것은 상대가 아니라 내 안의 내가 스스로를 놓아버린 것임을 알자.  

 

  무시로 흔들리는 삶, 원한다면 비타민 주사 처방을 위해 책속의 이라부에게까지 달려갈 필요도 없다. 곁 돌아보면 패션리더이자 인생리더이기도 한 숱한 그녀들이 담백한 인생 처방전을 들고 손 흔들 터이니. 그들이 내미는 처방 또한 정신과의사 이라부와 다르지 않다. - 무거운 게 삶이니 가볍게 건너라고. 까칠함도 다정이니 타인에게 제 맘 덜어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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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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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친구 되기  






  눈꽃이란 닉네임을 가진 분이 메일을 보내왔다. 딱히 보낼 곳도, 애타게 기다리는 소식도 없는 나날이라 메일 계정을 방치하다시피 했는데, 수신확인을 기다리게 한 게 미안해 서둘러 개봉했다. 첨삭을 부탁한다는 인사말과 함께 수필 네 편이 첨부되어 있었다.  

 

  첫 편부터 눈길을 끌었다. 몸과 마음을 열어 이웃을 품는 글쓴이의 진심이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가게에 드나드는 이웃을 관찰한 일상사인데, 그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한없는 이해와 사랑이 깔려 있었다. 가게를 열자마자 분식점을 하는 옆집 친구가 커피 마시자고 건너오면, 예쁜 딸을 둔 방앗간 안주인도 합세한다. 정담이 무르익기도 전에 문지기 역할을 하는 수다쟁이 할머니가 끼어들면 본격적인 인간사 희로애락이 변주된다. 그들이 풀어놓는 음악 같은 일상사는 필명 눈꽃의 눈을 거치는 동안 따뜻한 동화가 되고 마침내 거룩한 신화가 된다.  

 

  사는 동네가 공단 주변이라 외국인 노동자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그들조차 누나라고 부르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움을 요청한단다. 캄보디아의 젊은 새댁이 진통을 하자 생업인 가게 일마저 팽개치고 병원으로 한걸음에 내닫는 장면에선 눈물이 핑그르르 돈다. 눈꽃의 고백처럼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그렇게 못할 것이다. 누가 말하기 전에, 눈꽃은 스무 살을 갓 넘긴 캄보디아 새댁이 되어 있거나, 새댁의 친정 엄마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다. 하루 종일 순산을 기원하며 병실 앞을 서성이다 돌아와 허기진 배를 이웃과 채우는 모습은 부럽기까지 하다. 울다 웃다, 를 반복하며 네 편의 진솔한 글을 읽는 동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반성문이 이 글을 쓰게 했다.  

 

  언젠가 한 모임에서 어떤 이가 얘기했다. ‘내겐 진정한 친구가 없어. 요즘 같은 세상에 친구 한 명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마음 터놓을 사람이 없어.’ 그 때 다른 친구가 말했다. ‘좋은 친구가 곁에 없다고 푸념할 필요가 없어. 좋은 친구가 되어주면 니는 절로 좋은 친구가 되어 있는 거야.’ 좋은 친구를 원하기 전에 좋은 친구가 되어 주라는 그 친구는 몇 해 전 이사를 갔다. 나는 그 전에도 그 친구를 좋아했지만, 그 평범한 말을 확신에 차서 말하던 그 친구가 더욱 좋아졌다. 그 후 재주 많은 그녀가 손수 갈무리한 그녀의 새 아파트에 내가 선물한 시계가 걸려있을 때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 친구는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주라, 는 자신의 명언을 내가 엿듣고 되새겼음을 지금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눈꽃의 글에서 나는 좋은 친구를 갖고 싶다면 좋은 친구가 되어주라, 는 내 친구의 ‘말씀’ 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나 그렇게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나 같이 개인적이고, 자발적 격리를 자청하고, 때론 사회적 관계를 피곤해하는 스타일은 대체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 부러워하되 실천하지 못하는 이 천성적 불관용을 나는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마침 주중에 읽은 책은 장영희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샘터, 2005)였다. 독서 토론 과제 때문에 읽었지만, 그 주요 내용 역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관용 즉, 좋은 친구 되기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글은 곧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어쩌다 한 번 착한 척하거나, 어찌하여 그럴싸한 관용을 이야기할 수는 있다. 하지만 초지일관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되는 건 천성과 환경과 노력의 세 박자가 가져다 준 축복이다. 넘어져도 웃고, 따돌림 당해도 씩씩하고, 아파도 견뎌라. 끝내 아름다운 것들이 승리하는데, 그 아름다움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너그러움이다, 라고 장영희는 말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눈꽃의 글에 내가 할 첨삭은 없었고, 그미가 내 인생에 첨삭할 것은 많은 하루였다. 나는 조심스레 답장을 썼다. 글이 사람을 울게 한다는 걸 믿고, 사람이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는 걸 확신한다고. 이 두 가지 명제를 체험하게 한 당신이 있어서 오늘 하루 충만하다고. 그리고 허락 없이 이 잡문에 당신이 등장한 것은 당신 인품의 승리이니 용서하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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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습작 - 김탁환의 따듯한 글쓰기 특강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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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읽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쓰는’ 계절이기도 한가 보다. 이맘때면 ‘쓰는 것’에 관심 가진 이들의 고충을 들을 기회가 많아진다. 연중 문학 활동의 결실을 준비하는 때이기도 하고, 계절적으로도 글쓰기로 내면적 욕구를 충족하기를 요청하는 때이기도 하다. 가끔 입문자들이 글쓰기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놓을 때면, 쓴다는 것에 그럴듯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잘 쓰고 싶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 건 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장통과 내면세계를 속속들이 알 수 없으므로 어쭙잖은 내 충고는 겉돌기에 지나지 않는다. 고작 한다는 얘기가 맞춤법이나, 문장 호응 관계나, 비문을 걸러 내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돌아서면 허탈하기 그지없다. 문장에 대한 그런 기본적인 공부는 누구나 조금만 신경 써서 읽거나 쓰다 보면 자연스레 터득할 수 있는, 그야말로 ‘문장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글쓰기의 진정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왜 쓰는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 서늘한 매혹 때문에 한 계절이 힘겨운 적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진심이 요청하는 글쓰기 때문에, 이 갈 노을빛에도 가슴 타는 고통을 느끼는 자에게 위안이 될 만한 책 한 권이 여기 있다. 김탁환의 ‘천년습작’(살림, 2009)은 여타의 글쓰기 기법을 강조하는 책에서 벗어나 진심으로서의 글쓰기를 말하는 책이다. 겉표지부터 ‘따듯한 글쓰기 특강’이란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따듯한’이란 형용사에 노란색 옷을 입혀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따듯하다 - 감정, 태도, 분위기 따위가 정답고 포근하다. ‘따뜻하다’보다 여린 느낌을 준다, 라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다. 그가 말하는 글쓰기의 핵심은 바로 '잔재주 보다는 마음'이라는 걸 알려 주는 문구 같다.  

 

 

  글쓰기와 이야기 만들기의 핵심은 그럴 듯한 흉내가 아니라 ‘진심 그 자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는 글쓰기를 테크닉으로만 파악하는 관점에 반대한다. 경험한 것만 쓴다는 아니 에르노처럼, 집필실이 곧 절대 고독의 감옥이었던 발자크처럼, 쓰기만이 가장 좋은 친구라고 여기는 폴 오스터처럼, 글은 곧 자신의 또 다른 삶이어야 한단다.  



  여러 작가들에 기대어 글쓰기의 숭고함에 대해 들려주고 있는데, 그 중에 카프카의 ‘불안’과 ‘매혹’이 공감하기가 쉬웠다. 밤 새워 글을 쓰면서도 욕망의 키 닿기에 미치지 못하는 불안의 시절들이 쓰는 자들에게는 있기 마련이다. 쓴다는 것의 매혹과 자기연민에 대한 불안의 미묘한 줄타기 끝에 작품은 생산되는 것이다. 아이러니는 자신이 생각하는 매혹의 시절과 독자가 생각하는 매혹적인 작품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는 분명 <선고>를 쓰면서 매혹되었는데, 독자들은 <변신>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진정성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쓴다는 것의 진심이 중요하지 작품성 때문에 고민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작품성은 자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또 쓴다는 행위의 개념이 무엇인가도 이 책은 가르쳐 주고 있다. 백년학생, 천년 습작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글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쓴다고 다음과 같이 확실히 말해준다. <발자크처럼 손으로 쉴 새 없이 집필하는 것, 과잉으로 소설 세계에 빠지는 것만이 뛰어난 소설가가 되는 길입니다. 소설은 '노동'이라고 믿습니다. 소설이 유희라면, 기분 좋을 때만 즐기고, 기분 나쁠 때 하기 싫을 때 하지 않아도 되는 놀이라면, 소설에 헌신할 까닭이 없겠지요. 적당히 즐기다가 떠나면 그만입니다. 따듯함을 지니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열린 마음이겠지요. 편견 없이 내 앞에 놓인 문장을 하나하나 음미할 여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관심 역시 따듯한 품기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 가을 쓴다는 것 때문에 나처럼 맘 졸이는 그대들아, 김탁환의 글쓰기 특강을 읽어보자. 그가 무엇을 말했느냐고? 백년학생, 천년습작이라면 그 답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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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워칭 - 보디 랭귀지 연구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김동광 옮김 / 까치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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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몸으로 말한다




  학창 시절 동아리 멤버 중에 다독하는 후배가 있었다. 덜 읽어서 섬이었던 나는 많이 읽어서 섬이 된 그미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세상과의 불화를 즐길 수 있는 배짱도, 집단에 가린 개별자의 존엄에 대한 인식도 그미의 독서관이 내게 끼친 긍정적 효과였다. 습작에 관심이 있었던 내게 그녀는 자신이 선정한 권장도서 목록을 전해주곤 했다. 졸업하고 결혼한 뒤 서로가 못 만나게 됐을 때도 한동안 그녀는 내게 책 권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주곤 했다.  그 중 한 권의 책에 유독 눈길이 간다. 데즈먼드 모리스의 ‘맨워칭’(까치, 1994)이 그것이다. 책이든 뭐든 버리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그 책이 아직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책은 인간관계에 대한 섬세하고 밀도 있는 이해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 인간 행동, 특히 몸짓에 관한 관찰 보고서인데, 내 경우에는 소설 쓰는데 참고가 되었기 때문에 이 책이 온전하게 자리보전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쓰는 자는 눈썰미가 있어야 한다. 때론 빠르고 더러는 깊게 대상을 읽을 수 있다면 더 잘 쓸 수 있다. 소설 쓰기가 곧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봤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표출하는 행동이나 태도 등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훈련이 제대로 된다면 인간에 대한 오묘한 오해를 넘어 종내는 무한한 이해를 얻어낼 수 있다. ‘인간 행동을 관찰한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그래서 매혹적이다.  

  내가 갖고 있는 책 제목은 맨워칭인데, 요즘은 ‘피플워칭’이란 제목으로 바뀌었다. ‘맨워칭’이란 제목이 남성만을 가리킨다는 오해를 벗어 버리고자 피플워칭으로 개정 증보되어 나오는 모양이다. 동물학자인 데즈먼드 모리스에 의하면 인간성은 곧 동물성의 다른 이름이다. 그는 한 마리 새를 관찰하듯 인간의 행동, 특히 몸동작을 현장에서 관찰했다. 정류장, 슈퍼마켓, 공항, 만찬장 등 사람이 행동하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좋다. 인종이나 민족, 또는 개별자의 다양한 일상 행동이나 태도를 관찰하고 분석해놓았는데, 얼핏 복잡해 보이는 그 행동들이 본질적으로는 동물적인 보편성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가 흥미롭다.

  상대를 의식한다는 면에선 누구나 인간 관찰자가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맛없는 요리 앞에서 안주인이 자꾸 권하면 우리는 정중한 거짓말로 사양한다. 본심을 숨기는 대신 배가 부르거나 다이어트 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완벽한 거짓말을 한다는 건 어렵기 때문에 무의식적인 손사래나, 입술을 찡그리는 사소한 행동을 보고 안주인은 손님의 거짓말을 알아차린다. 안주인은 그런 상대가 민망하지 않도록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 예의 바른 손님 기분을 맞춰 주게 된다. 양쪽 모두 거짓말을 하고, 중요한 건 둘 다 그것을 안다. 말하자면, 상생의 거짓말인데, 많은 사회적 약속 중에 이런 행동 패턴이 은연중에 요구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는 불협화음이 되고 만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몸동작과 언어 신호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 진심을 발견하기 어렵다. 이 때 오해가 생긴다. 거짓말이 주는 이런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거짓말의 단서를 몸동작과 언어 신호에 실어 보내는 것이다. 협동의 거짓말이야말로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의 필수항목이므로.

  작가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동물로 간주하고 있다. 한데 이것이 사람에 대한 모욕이 아니라, 인간 사회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좋은 매개체가 된다는 것에 공감이 간다. 우리는 입으로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누구나 몸으로 더 말한다.

  타인에 대한 관용을 높이고 싶은 가을날을 꿈꾸는가? 그 사람의 말이 아닌 동작을 관찰해라. 그가 전하는 몸 언어를 통찰하다보면 어느새 인간에 대한 이해와 포용이 가을 하늘만큼 드높고 푸르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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