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표 뒤쪽의 풀은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우표 뒤쪽에는 아라비아고무를 물에 녹인 용액과 글리세린을 섞은 것이 칠해져 있다. 아라비아고무는 아카시아의 일종인 아라비아고무나무껍질에서 흘러나온 유액을 굳혀서 만든 것으로 물에 잘 녹아, 종이에 발라서 말렸다가 물을 칠하면 잘 붙는다. 그러나 이 수용액은 건조해지면 우표의 종이가 쪼그라들기 때문에 글리세린을 첨가한다. 글리세린은 지방 또는 유지를 분해해서 만드는 무색투명한 끈끈한 액체로, 공기 중에 떠다니는 적당량의 수분을 흡수하기 때문에 우표가 쪼그라드는 것을 막아준다.

◈ 주사와 엉덩이의 관계는?
주사는 약이 투입되는 위치에 따라 표피와 진피 사이에 소량을 주사하는 피내주사, 진피 아래 피하지방에 주사하는 피하주사, 엉덩이, 팔 등 근육에 놓는 근육주사, 혈관에 직접 주사하는 정맥주사, 동맥주사 등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근육주사는 빠른 효과를 원할 때 이용되는데 근육에는 혈관이 풍부해 피내주사, 피하주사보다 흡수 속도가 빠르기 때문. 또 같은 근육주사라도 팔보다는 근육이 많은 엉덩이 쪽이 보다 빠르게 약을 흡수하기 때문에 대개 병원에서는 근육주사를 엉덩이에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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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과학향기에서 퍼왔어요. 주사를 엉덩이에 많이 놓는 것이 덜 아파서가 아니었군요^^;;;;

오늘자 과학향기 여러모로 유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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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스승의 몸에 칼을 댈 수 있습니까?”
심하통(心下痛)에 걸려 죽은 유의태의 시신 앞에서 허준이 망설이자, 삼적대사는 “스승의 숭고한 뜻을 그르칠 셈이냐”고 다그친다. 이윽고 전신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허준이 떨리는 손으로 칼을 들어 카데바(실험용 시체)의 배를 그어 인체 내부를 들여다본 후 그림으로 옮겨, 이른바 ‘신형장부도’라는 것을 완성하게 된다. 이는 국민 드라마로 기억하고 있는 ‘허준’의 하이라이트 부분으로 탕약과 침술이 전부였던 조선 시대에 사후 시신 기증으로 ‘외과 수술’이라는 획기적 의료 기술에 첫 발을 내딛게 되는 장면이다.

보통은 임상 실험 전 동물을 실험 대상체로 이용하지만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과학자들도 있다. 허준의 스승 유의태처럼 말이다.

오늘날 마취제가 없다면 치과에서 이를 뽑는다거나 외과 수술을 받는 것이 가능할까? 이런 고통스런 상상으로부터 해방 시켜준 사람이 호레이즈 웰즈이다.
19세기 중반 상류층 사이에서 은밀히 이뤄지던, 웃음가스(아산화질소, N2O)를 마시고 향락에 빠지는 파티에 치과의사였던 웰즈는 우연히 참석하게 된다. 아산화질소는 질산암모늄(NH4NO3)을 열분해 할 때 생기는 무색의 투명한 기체로 신체에 흡입되면 웃거나 낄낄거리며 기분이 매우 좋아지고 넘어지거나 물체에 찧어 피가 나고 멍이 들어도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환각제의 일종이다. 이를 본 웰즈는 직업적 정신을 발휘하여 치아를 뽑을 때 웃음가스를 흡입하면 고통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해 웃음가스를 흡입한 후 자신의 썩은 이를 고통 없이 뽑았고 이후 용기를 얻어 공개 실험을 감행했다. 하지만 마취를 시키기 위한 아산화질소의 양을 정확히 몰랐던 이 날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 방법은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웰즈는 인체의 전신 및 국부 마취를 위한 아산화질소의 표준량을 알아내기 위해 자신의 몸에 계속적인 아산화질소를 투여하여 약물중독과 정신이상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됐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웰즈의 이러한 업적은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택한 후 22년이 지나서야 미국 의학회에서 인정 받을 수 있었다. 자신의 몸을 내던진 생체실험을 통해 의학사에 있어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순간이었지만 웰즈는 생전에 그 빛을 볼 수 없었다.

심장 카테테르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독일의 젊은 수련의 베르너 포르스만 역시 자신의 몸으로 실험한 과학자의 또 한 사람이다. 포르스만은 늑막강, 복막강 혹은 소화관이나 방광 등의 내용액 배출을 측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고무 또는 금속제의 가느다란 관인 카테테르(Catheter)를 혈관을 통해 심장 속까지 찔러 넣어 심혈관계의 혈압과 성분을 측정하는 심장병 검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의학계에서 사람의 목숨과 연계된 심장에 이러한 바늘을 꼽는다는 것은 시도는 물론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도 말이다.
결국 포르스만은 자신의 심장에 가늘고 긴 관을 64cm나 찔러 넣는 무모한(?) 실험을 감행했다. 그러나 심장까지 이어진 카테테르는 생명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통 또한 없었다. 그는 심장까지 이어진 도관의 불편함을 뒤로 하고 자신의 흉곽과 심장의 엑스선 촬영을 통해 심장 카테테르가 안전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시술을 성공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한 포르스만의 세계 최초 심장 카테테르는 심장학에 새로운 기원을 열었고 오늘날 심장계통의 질병으로 고통받는 수 백 만 명의 생명을 구하고 있다. 이러한 노고를 인정받아 포르스만은 그로부터 27년이 흐른 1956년 노벨의학상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인간의 체온은 항상 36.5℃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127℃의 뜨거운 방 안에 들어가 화상을 입는 것도 마다하지 않던 조지 포다이스, 식물의 소화 과정을 알아내기 위해 천주머니에 음식물을 꽁꽁 싸서 삼킨 후 ‘배설된’ 천주머니 속의 음식 맛을 봄으로써 위액을 밝혀냈던 라차레 스팔란차니,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간 질병 ‘베루가 페루아나’를 연구하기 위해 환자의 혈액이 묻은 외과 수술용 메스로 자신의 피부를 네 차례 찔러 스스로를 감염시켰던 다니엘 카리온 등 이렇게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더 나은 인류의 삶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그리고 희생하고 있는 과학자들이 많다. 그들의 순수한 열정에 조의를 표하는 바이다. (글 : 과학향기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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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태 이야기는 둘째로 치더라도 다들 대단한 희생 정신이고 또 직업 정신을 가졌군요. 숭고하다고 밖에 할말이 없습니다.
이 글은 과학 향기에서 퍼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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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기사 3
김강원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1999년 12월
평점 :
절판


김강원을 주목한 것은 '바람의 마드리갈' 때부터다. 신일숙의 추천이라는 한 문장 때문에 집어들었던 그 책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중세물이었는데, 시대물이었고 추리물이었고 여러 중첩된 사연과 사건의 교차가 진행되는 내용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아쉽게도 1부만 완성하고 그 후 깜깜 무소식이다. 놀랍게도 그 작품이 데뷔작이라고 해서 눈 크게 뜨고 봤던 기억이 나는데, 그 후 십년 정도 뒤에 나온 여왕의 기사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일단 아동물이었고, 그림은 지나치게 길어졌고(12등신은 될 거다. 아마...;;;;), 은유보다는 직설에 더 가까운 전개를 갖췄다. 아마 아동물이라고 하는 현실적 제약이 있기 때문이겠지만, 이전보다 훨씬 쉽게, 그러나 진부하지만은 않게, 그리고 순수한 이야기의 진행이 나를 더 즐겁게 기쁘게 만들어 주었다.

완결 되기까지 꽤 오래 걸린 셈이지만 그래도 잡지 폐간 안 되고 완결 본 게 어디냐며 위안을 했었던 나다.  한국의 만화 잡지들은 수명이 너무 짧다..ㅠ.ㅠ  그 사이 작품은 유명해져서 유럽에까지 수출이 되고 하여간 용 됐다^^;;;

독일어 단어들의 생소함과 약간은 거친 느낌들이 오히려 파릇파릇한 신선함을 더해 주었고, 그들 나라의 봄을 유지해주는 것은 여왕이 품고 있는 '사랑'의 마음이라는 설정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여왕들은 모두 세속적인 사랑을 하였고, 그 사랑에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 나라 판타스마에 겨울을 가져왔다.  늙지도 않고 마음을 열지도 않는 리이노는 또 다시 여왕을 찾아오고 여왕은 다시 그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의 사랑을 가져간 여왕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한국에서는 평범한 중학생이었을 유나는 정해진 순서처럼 리이노를 사랑하지만, 리이노 역시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된다. 진부하다고? 음, 그렇지만 작품을 보면 그리 진부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유나를 지키려는 기사들, 시작은 정략적인 목적에 의해서, 혹은 종족을 보호하려는 사명감에 의해서였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우정과 사랑을 고귀한 이름으로 지켜내었고, 그만큼 또 성장했다. 성장은 리이노와 유나도 함께 받은 선물이었다. 유나가 가져온 봄이 기존 여왕들이 가져다 준 봄과는 질적으로 다를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리이노뿐 아니라, 판타스마 그곳 사람들과 그 나라 자체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랑과 봄에는 세속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머리카락이 자라버리고 2차 성징의 모습처럼 여성스러워지고 자라는 여왕들. 이런 설정들이 이 책을 보았을 학생들의 마음을 얼마나 콩닥거리게 했을까. ^^ 이미 다 자란 내 마음도 설레이고 그랬는데..

제목은 또 얼마나 문학적이고 감수성을 자극하는가. 솔직히 난 제목에서 50점 이상 따고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엔딩은 비교적 전형적인 편이었다.  그렇지만 그 이상의 좋은 결말도 아마 힘들었으리라. 나는 만족했고 또 만족했다.

그나저나, 바람의 마드리갈은 과연 완결을 볼 생각이 있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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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곰 왑의 삶 - 시튼의 야생동물 이야기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장석봉 옮김 / 지호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사실 책의 구성은 소설이지만, 동물들의 생태를 생생하게 관찰하고 연구한 뒤의 작업물이기 때문에 어쩐지 픽션의 영역으로 이 책을 분류하고 싶지가 않다.

원래 어린이용으로 나왔던 책을 어른들이 볼 수 있는 책으로 완역판을 냈다고 한다.  사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재밌다~하면서 보긴 했지만. ^^

음, 아마 그런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어릴 적 읽었었던 파브르 곤충기... 같은 분위기를 다시 맛보리라고.^^

사실, 파브르 곤충기를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잘 기억이 안 난다. 파브르라는 사람이 참 대단하네.. 라고 감탄했던 것만 기억한다..ㅡ.ㅡ;;;;

이 책을 나이 들어 읽으면서는, 어느 세계든 그렇지만, 동물들의 세계도 참으로 치열하구나... 격정적이고 열정적이고 또 비정하기도 하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마치 저자가 동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동물을 의인화 해서 인간의 이야기를 빗대어 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내용의 전개가 보다 친숙하게 느껴지고 또 싸아하고 애틋한 기분마저 드는 것이다.

회색곰 왑이, 어려서 부모를 잃고 홀로 살아남는 과정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자수성가했다가 다시 외롭게 져가는 노년의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사람도 동물도 강한 자 앞에서 몸을 낮추는 그 습성을, 책을 보면서는 절대 비웃거나 비판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생존 본능이니까.

강하고 늠름했던 왑이 늙고 병들어서 자신보다 약했던 동물들에게까지 배척당하고 멸시 당하는 모습이 참 서러워 보였다.  역시 인간의 모습을 그 속에서 보았기 때문이리라.

자존심을 지키며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숫사슴도 인상적이었다.  자존심이란 스스로를 존중해주는 것인데, 그래서 더 멋지고 아름다워 보일 수 있나 보다.  여기서는 이솝우화에서 뿔을 자랑스러워 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다리를 비웃었던 그 사슴이 같이 생각난다^^;;;

이런 책은 어린 아이가 읽으면 어린 아이의 눈으로, 성인이 읽으면 성인의 눈으로 각자 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엄마와 아이가, 아빠와 아이가 같이 읽으며 함께 생각을 얘기할 수 있는 좋은 동기를 제공해 주리라.

그러 의미에서 이 책을 오늘도 강추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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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좋아하는 작가로부터 추천받은 책이었다.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고 접해보지 못했던 터키 문학이어서 호기심이 동했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색채의 강렬함과 표지에서 느껴지는 약간 기하학적이고도 추상적인 느낌의 이미지가 또 특별했다.

내 이름은 빨강... 이 책은 독특하게 시작한다. 서술 시점은 모두 1인칭이지만, 각 장마다 서술자가 바뀐다. 내 이름은... 나는... 나는.... 내... 이런 식으로, 나를 누구라고 지칭하는 자들이 모두 자기의 입장에서 글을 써 나간다.

16세기 이슬람 세계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 소설에서는 많은 세밀화가들이 등장한다. 우리로서는 낯선 이슬람 문화와 미술 양식인데, 낯선 것은 내용뿐 아니라 형식도 파격적이다. 시작부터 한 남자가 죽는다. 죽은 남자가 시체가 되어서 죽은 채로 이야기한다.(그렇다고 좀비는 아니다.ㅡ.ㅡ;;;)  희생된 사람을 죽인 이가 다시 얘기한다.  이제는 죽은 이들의 친구, 동료들이 등장한다. 그렇게... 이야기의 흐름을 여러 사람의 화자가 저마다의 입장을 토로하며 이끌어가는데, 이런 부분은 "사람아 아, 사람아"의 형식과 몹시 비슷하다.

또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가 어떤 세속적 재물이나 지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유지하고 있는 현상과 세계가 깨어질까 봐(이들 세밀화가들은 인간 중심적인 유럽의 화풍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한다. 동시대에 유럽은 르네상스 절정기를 지냈다), 그들이 전부라고 믿고 있던 체제를 고수하려고 하는 자들의 싸움이라는 것에서 "장미의 전쟁"도 같이 떠오른다.

등장인물들은 많이 배운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고, 말이 많은 사람도 있고 말수가 적은 사람도 있다. 그래서 그들이 1인칭 화법으로 이야기할 때는 각자의 캐릭터에 따라서 글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다. 마치 연극에서 독백을 소리내어 말하더라도 무대 위 다른 인물들이 듣지 못하는 그런 분위기가 연출된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그런데, 솔직히 나는 아주 탁월하게 재밌지는 않았다.  그것은 너무 낯선 것들이어서 쉽게 앞으로 뻗어나가지 못하는 장애를 만났기 때문이다. 작품이 부족해서라기보다 내가 낯가림을 한 것이다.  독특하고 신비롭고 특이하기까지 하지만 내 입맛에 착착 달라붙지는 않았다.  그래서 오르한 파묵의 다른 소설 책까지는 손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수작이지만 별 다섯까지 가지 못하고 넷에서 그쳐버렸다.

그래도, 날마다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 가끔 시고 떫고 짭짜름한 다른 메뉴도 즐겨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제목처럼 강렬한 소스를 듬뿍 쳐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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