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 101주년.

글쎄, 사실은 축하할 날인지는 모르겠다.
여성의 권리와 지위가 충분히 보장되고 향상됐다면,
진즉에 없어졌어야 할 날이 아닌가 싶어서.
그만큼 이 세계의 여성들은 여전히 억압받고 불익을 받고 있다는 것 아니겠나.

멀리 볼 것도 없다.
지금-여기의 현실만 봐도 여성들이 처한 상황은 '악'소리가 난다.
우리나라 여성의 평균 임금은 남성의 61%에 불과하고,
비정규직의 70%가 여성이다.
지난 1월 남성 취업자는 1만9000명 줄었으나,
여성 취업자는 8만4000명이 줄었다.(통계청)
(☞ "일하는 아줌마·할머니 '악' 소리 낼 힘도 없어요"
[3·8 여성의날] 구조 조정·임금 삭감 1순위…여성 노동자의 비애
)

지금의 공황이 빌미다.
사정없이 칼날을 내치는 수컷들의 비겁함은, 아무래도 역사적 전통인가.
마초노가다 출신 '박쥐(주. 거꾸로 읽을 것)'는 한결 더한 놈이다.
여성 인권이나 사회 참여는 여느 부문에서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마냥,
한참을 돌려놓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뒤떨어진 부분인데 더욱 매몰차다.
약자를 긍휼히 여기고 돌보는 것이 진정한 보수주의적 색채이거늘,
이 텐버드들은 무슨 '보수보수' 따라지 합창만 늘어놓지, 꼴통수구수컷들이다.
뇌 구조를 전면'보수(補修. 고쳐 수리함)'해야만 하는 보수주의자들이긴 허지.

어쩌다가, '본투비마초'가 세상을 움직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연재했었다.
별 대수롭지 않게 시작한 일이었지만, 한마디로 '놀랐다'.
그 여성들이 지닌 힘과 능력부터,
그것을 억눌렀던 시대나 사회(정확하게는 남자)의 흉포함까지.
나는 수컷들이 얼기설기 짜놓은 이 세상이,
얼마나 허구인지, 부시 같은지, 박쥐 같은지, 좀더 깨닫게 됐다고나 할까.

이 연재를 통해 나는, 빈말이 아니라,
가능하면 여성(여성의 탈만 쓴 '바끄네' 같은 여자수컷마초들 말고)들이 세상에 좀더 큰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고 확신하게 됐다.
이 모든 전쟁과 분쟁, 피는 온통 수컷들에게서 비롯된 것 아닌가.

할리우드 배우에서 지금은 사회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미아 패로'의 이말.

 

그리하여,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수컷이라면, 공감해야 할 이말.


남자는 맞아야 한다.
부제는, 성차별과 편견에 대한 수컷 반성기

아는 분이 낸 책이다.
양성평등 카툰모음집.
많이 사 주시라.
아, 그런데 맞아도 정신 차릴까.
맞아서 정신이라도 차리는 수컷은 그나마 가능성이 있으니,
여성들이여, 거둬주시라.

그리고 이 엄혹한 시대.
여성노동자가 일궈논 '여성의 날'.
여성들이 다시 들고 일어설 때,
나는 당신들 편에 서서 돌을 던지겠다고 약속한다.
 

☞ '여성의 날'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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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고도, 차갑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핫함과 쿨함을 아우르는, 열정과 냉정이 교차하는, 이것은 ‘역사’의 기록이다. 석유(자본)의 역사, 문명의 역사, 인류의 역사, 종교의 역사, 피의 역사, 그리고 한 인간의 역사. 그러니 당연하게도 뜨겁고, 차가운 기운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것의 실체는 검은 액체에서 비롯된다. ‘석유(Oil)’라 불리는 검은 액체. 인간은 석유를 발견했지만, 그것은 장대한 비극의 서곡이었다. 되레 인간을 지배한 것은 석유가 되고만 비극.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석유 제국’을 건설한 미국의 한 자본가를 다룬 영화다. 시대극이다. 석유로 인해 블랙러쉬가 이뤄지던 1900년 전후의 미국 캘리포니아. 석유는 인간에게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자본가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불굴의 의지와 분별없는 열정 사이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속 시원히 결론부터 말하고 보자. 한마디로 ‘석유가 잉태한 분별없는 열정이 불러온 파국’. 영화는 석유와 인간(혹은 종교까지 곁들여)의 협잡이 얼마나 환멸을 불러일으키는지를 보여준다.
 
시작부터 그랬다. 산맥과 황야를 조망하면서 들려오는 기계음은 비극의 전조와도 같았다. 라디오헤드의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이 관객의 오감을 붙들었다면, 거의 10여분 이상을 거의 대사 없이 꿈틀대는 플레인뷰(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퍼포먼스가 뒤를 이었다. 단 한마디 대사, “드디어 찾았어”를 제외한다면, 은광을 채굴하는 그의 모질고 험한 분투가 이어진다. 그것은 어떤 경외심까지 불러일으켰다. 노동에 대한 단순하면서도 숭고한 경배 같은 것.
 
플레인뷰는 혼자 끊임없이 갱을 오르내리다가 사고를 당한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는다. 은광에 이어 석유까지 채굴에 나선다. 은광이 종잣돈이라면 그의 욕망은 검은 액체로 향해 있다. 그것만이 ‘성공’의 모든 것인양, 그는 앞으로만 달려나간다. DNA에 그렇게 각인돼 있는 것 같다. 왜 석유에, 돈에 집착하는지 끝까지 알 순 없지만, 그는 그런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저 자신이 자발적으로 뛰어든 게임에 몰두하는, 광기 그 자체. 

성공가도를 달리는 플레인뷰에게 하나둘 사람이 붙지만, 그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에게 유일신은 ‘석유’ 하나뿐이다. 석유사업을 위해 그는 포장과 기만도 서슴지 않는다. 그는 유정사업의 장소에서 해당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은 ‘패밀리맨’이며, 유정사업은 ‘패밀리 비즈니스’라고 선전한다. 양아들 H.W.를 사업설명회 등에 데리고 다니는 것도 그런 목적이다. 그러나 사실은 다 거짓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석유(혹은 돈)만이 그의 ‘유일신’이다. 그것은 ‘대운하’에 모든 것을 걸고자 하는, ‘지금-여기’의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플레인뷰는 석유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던 사나이였다.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시기, 일찍 그 속성을 간파한 플레인뷰가 사람들을 현혹할 기제를 찾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속임수라기보다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그는 ‘패밀리’라는 포장을 통해 ‘꼼수’를 부리긴 해도, ‘패밀리’라는 피붙이 앞엔 약한 모습을 보인다. 역시나 어떤 강력한 불도저도 ‘형님’앞에선 그저 작아지고 마는 현실과도 겹친다. 어찌 할리우드의 20세기 초반 시대극이 21세기에도 기시감처럼 나타나고 마는가.  


말이 잠시 다른 길로 흘렀다. 다시 돌아가자. 석유는 자본(주의)의 동력이었다. 결국 지금 석유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플레인뷰는 지금의 자본가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그가 때론 감정적인 모습을 보였다손, 그것은 사업과 실용에 근거하고 있다. 검은 액체는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가 원래 검은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동색의 석유를 향해 애정을 발산한 것일까. 갑작스레 석유가 분출된 장소에서 청력을 잃은 아들이 플레인뷰를 향해 가지 말 것을 애원하지만, 그는 멈출 수가 없다. 석유 앞으로 달린다. 얼굴 찌푸리고 있는 동업자에게 말한다. 석유가 쏟아져 벼락부자가 될 텐데 왜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냐고.
 
그것이야말로 자본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동정 없는 자본의 가장 적나라한 광경. 플레인뷰의 표정에서 나는 자본을 향한 숭고함(!)을 엿본다. 석유가 인간을 집어삼킨 광경. 석유 없이 자본주의는 절대 가속을 붙이지 못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의 동력 또한 석유에서. 당신이 보고 있는 인터넷의 근간에도 석유는 있다. 가만 둘러보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석유와 관계를 맺고 있다. 기름값이 오른다고 걱정되는 것은 단지 차 때문이 아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석유 없이 돌아갈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석유(자본)은 그것을 철저히 이용했다. 플레인뷰는 좋게 말하자면 한없이 똑똑한 친구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이른바 ‘막장’ 혹은 ‘끝장’의 영화다. 플레인뷰의 마지막 읊조림, “I'm finished”가 불러온 자폭의 느낌이 그렇다. ‘자본 불리기’에만 몰두하고 ‘신성 전하기’에만 매달리던 성공의 이면. 그 모든 ‘분별없는 열정’의 종국을 암시하는, 그 외침은 참으로 강렬하다. 석유를 캐냈으나, 결국 석유에 지배당하고만 작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회한 섞인 피로감의 토로. 석유가 당신을 파멸케 하리라. 플레인뷰에게 미리 알려줄 걸 그랬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타임머신이 없는 세상이다. 안타깝다. 

한때 너무도 거침 없이 오름세를 거듭하던 석유를 기억하는가. 그게 불과 몇달 전이었다. 차츰 깨닫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제 분별없는 열정을 버릴 때라는 것을. 플레인뷰를 통해 그 파국을 경험했다면 말이다. 비약하자면, 석유 아닌 대체재가 필요하다. 혼자만의 열정으로 석유발굴에 나서던 초기 자본가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유가폭등의 전후, 어쩌면 감독이 의도하지 않은, 대체 에너지의 개발을 촉구하는 영화로도 읽힐 수 있다. 그것은 영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될 수 있겠다. 놀라운 일이다. 저 영화를 보는 일도 석유와 연관됐음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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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좋아, 음악과 함께라면! <로큰롤 인생(Young@Heart)>

늙어도 품위 있고, 아스라한 추억을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늙은’ 록스타의 귀환이 아니다. 그저 아마추어 ‘노인네’ 밴드(영앳하트)다. 언니네도, 오빠네도 아니다. 직장인 밴드도 아니고. 은퇴한 실버족들로 구성된 밴드란다. 밴드 멤버들 평균 나이가 무려 81세. 그 연세에 제대로 된 음악이 나오겠느냐, 그것도 로큰롤이라니, 싶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은퇴한 노인네들의 호사취미를 찍은 다큐멘터리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렇게 콧방귀 끼다간 크지도 않은 코가, 뭉개질지 모른다. 시큰하게 감동 먹고 코가 벌개 질 일이다. 오~ 마이 갓!

이 할머니, 할아버지들, 정말로 음악에 목숨을 바친다. 얼마 남지도 않은 생인데, 음악이 좋아 죽는다. 아니 다 늙어서 무슨 일인가 싶겠지만, 이들은 병들고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음악을 하고, 음악을 생각하는 순간만큼은 유쾌하고 즐겁다. 조 할아버지가 그랬고, 빌 할아버지도 그랬다. 두 할아버지는 <Alive & well>이라는 공연을 앞두고 연습을 거듭하지만,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밴드를, 이승을 떠난다. 그럼에도, 밴드는 멈추지 않는다. 아니 되묻는다. “어떻게 공연을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또한, 말한다. “쇼는 계속돼야 한다.”




이 노인네 밴드를 끊임없이 고개를 넘나든다. 영화는 <Alive & well>공연 6주를 앞둔 밴드의 리허설 과정과 밴드에 얽힌 개개인의 사연을 간간히 담는다. 보기에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가사는 죽어라 외워지지 않고, 리듬을 따라가기에 벅차다. 아파서 연습에 빠지고, 언제 누가 쓰러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비록 갈라진 음성에, 엇박자가 될지라도, 노래를, 공연을 완수하겠다는 의사는 분명해 보인다. 그 모습, 뻑적지근하다. 단순히 노인네들이 로크롤을 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정말로 음악과 함께 유쾌하다. 보는 사람에게도 그 유쾌함이 전이될 정도로. 그들은 정말로 음악을 사랑한다. “(건강 때문에라도) 공연을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닌가요?”라고 묻는 감독에게 산소호흡기를 걸치고 있는 밥 할아버지는 말한다. “앞으로 노래를 못하게 된다면 참담할 것 같다.” 또 그들은 이미 즐거움을 알고 있다. 관객이 박수치고 환호할 때, 황홀경을. 그게 마약 같은 것임을 알고, 그것이 죽음보다 강력한 인생의 즐거움임을 안다. 경이로움, 그 자체다. 


그들은 그렇게 불러 제친다. ‘I Got You’(제임스 브라운), ‘Schizophrenia’(소닉 유스), ‘Life During Wartime’(토깅 헤즈)은 물론, Can이 무려 71번이나 나와 진짜 can이 될 런지 조마조마하던 ‘Yes We Can Can’(앨런 투세인트)도. 더 있다. 콜드플레이의 ‘Fix You’까지 마스터한다. 콜드플레이의 노년버전 ‘올드플레이’라고 불러도 무방해질 정도다. 같이 연습하다가 먼저 떠난 멤버를 위해 밥 할아버지가 무대에서 홀로 부르는 ‘Forever Young’(밥 딜런)은 그냥 눈물을 쏟아낸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있다. ‘Yes, You Can’이라는 환호 한마디, 외쳐주고 싶다. 그리고 살아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한다. 거참, 노인네들, 다 늙어서 웬 주책이람. 젊은 사람 울리고 말이야. 킁. 아,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후기. 시사회였다. 별 기대, 없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로큰롤을 연주한다는 자극적 소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겠거니했다. 어르신들이 아마도 젊은이들의 무엇을 흉내내는 그런 것. 시방새(SBS)의 <스타킹> 같은 프로그램 등을 통해 보아왔던 꼴불견 퍼포먼스 아닐까, 우려했다.

보면서 처음에는 조마조마했다. 그들 나이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더 쭈글쭈글하고 병색 짙은 노인네도 있다. 누군가가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뭐 이래, 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이 노인네들, 음악이 단순 취미가 아니다. 한발자국만 걸어가면 돌뿌리에 걸려 죽음을 맞닥뜨릴 지긋한 연세. 그런데도, 그들은 죽음에 짓눌리지 않고 있었다. 음악을 통해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 감정은 그들이 연주하는 로큰롤을 어느덧 따라가고 있었다. 오~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결국 진심으로 바랐다. “20년 안엔 노래를 더 잘 부를 수 있겠지”라 말하던 할아버지의 결코 이뤄지지 않을 그 소망이, 이뤄지길. 20년 안에 노래를 더 잘 부르는 영앳하트를 만날 수 있길... 눈물이 방울방울 또르르, 뺨 위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있었다. ㅠ.ㅠ

그랬다. 이 영화, 나이듦에 대한 사유를 하게끔 만든다. 과연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늙어서 나는 무엇을 하고 싶고 그 일을 하고 있을까. 품위있고 아름다운 노년은 어떤 모습일까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노인네들이 부럽다. 절로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롤모델이랄까. 나도, 밴드하고 싶다. 늙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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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영욱아. 넌 늘 까불거렸지만, 그건 어쩌면 외피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너의 마음엔 늘 외로움이 웅크리고 있었고, 네 이야길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겠지. 가끔은 어떤 추억들을 꺼내 그것으로 널 희화화하면서도 그것을 공유하길 바랬다는 것, 그땐 몰랐다. 영욱이 네가 그렇게 외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 그시절처럼 노닥거리고 치고받는 정도는 아니었더라도, 좀더 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 그땐 그것을 왜 몰랐을까, 라고 나는 후회하지만, 글쎄, 변명을 하자면, 그 당시 나의 한계이자 현실이었을 것이다. 고향을 떠난 나로서는, 그 전만큼 너와 붙어다닐 시간도 없었을 뿐더러, 삶의 환경과 주변 모든 것이 바뀌었으니까. 그러나, 어쨌든 나는 네게 미안하다. 좀더 네 이야길 들어주지 못해서,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나는 그냥 네 소식을 들었을때, 날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영욱아... 그때 그시절엔, 너와 보낸 시간이 내 세계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음에도... 미안하다, 혼자 널 내버려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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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내린 빗방울 수 만큼의 기다림이나, 우주를 수놓은 별들의 수만큼의 그리움,
은 당연 아니다. 이런 기다림과 그리움은, 아주 지독한 사랑을 할 때나 가능한 일이고.

그럼에도, 그 이름이 호명될 때면,
나는, 가뭄 끝에 내리길 바라는 짧은 비만큼의, 어떤 기다림을 품는다.

그 이름, 왕가위.
신작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기다리고 있다.
마침내, 그런 왕가위가 내린다. 비처럼.

이름하여,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언제나처럼, 그 속엔, 어떤 '사랑'과 '이별'의 풍경화가 펼쳐지리라. 기억과 상처 역시 품은.
(왕)가위 감독이 미국 할리우드에서 찍은 첫 장편영화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 작품.
주드 로, 노라 존스, 나탈리 포트만...
양조위, 장만옥, 장국영 등이 아닌, 새로운 조합이 만들어놓을 가위's World는 어떨까.
블루베리 파이와 함께, 어떤 밤들을 지새우면 '블루베리 나이츠'로 명명될까.

전반적인 평이 그닥 좋은 것 같진 않다만, (☞ 의아할 정도로 가볍고 퇴행적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
이같은 평 또한, '왕가위'라는 이름값에 붙은 기대값 때문에 그러하지 않겠는가.
사실 중요한 건, '왕가위'를 만난다는 사실.
지난 <2046>때처럼, 다시 4년을 기다린 끝의 만남.
나는, 그저 '블루베리'를 냉큼 베어먹을 준비가 돼 있다.
설혹, 그것을 먹고 배탈이 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있나.
'블루베리'를 선택한 건, 결국 나인걸.

이번엔 어떤 사랑과 기억이, 스크린을 지배할까. 궁금하다.
그런 면에서, 내게 가위 감독의 최고작은, <동사서독>이다.
그 황량한 사막에서 펼쳐진 서사시의 운율을, 상처에 할퀸 외로운 군상들의 사랑에 대한 기억과 슬픔을,
나는 환상처럼 품고 있다. 어쩌면, 실제보다 기억 속에서 더 부풀려졌을 영화의 감흥.
간절하고, 또 간절하면서도,
누르고 묻을 수밖에 없었던 어떤 사랑과 기억 한자락.
마시면, 지난 기억을, 지난 일을 모두 잊게 해준다는 술, 취생몽사(醉生夢死 : 본뜻은, 술에 취하여 자는 동안에 꾸는 꿈 속에 살고 죽는다는 뜻으로, 한평생을 아무 하는 일 없이 흐리멍덩하게 살아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그리고 그들만의 농담. 잊으려 하면 할수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기억임을 아는 두 사람만의 어떤 언어.

그렇다고,
<동사서독>의 슬픔 한잔이, 머그잔 한잔을 넘칠만큼은 아니었다.
딱 그만큼만. 넘치지 않을 만큼만. 그저 한잔으로 충분히 목너울이 적셔질만큼만.

어쨌든,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가 내린다.

가위가 녹슬진 않았는지,
함께 가위 한번 잡아볼까?
그리고, 우리 함께, 블루베리 파이 한번 시식해볼까? ^.^*

아래는, 4년 전, <2046>을 기다리면서, 읊조린 일종의, 왕가위 찬가(?).





엇갈린 갈지자를 그리는 연인들의 스쳐감...
언제고 떠남을 염두에 두고 있는 그 누군가...
부지불식간 다가와 소용돌이치고 있는 감정의 물결...
걷잡을 수 없는, 그러면서도 꾹꾹 눌러 담는...
그것이 왕가위였다...
문 꼭 잠그고...
지독한 외로움에 스스로를 던진 뒤...
온몸은 최대한 늘어져 있어야 한다...
담배와 술도 곁에 있다면 금상첨화다...
담배연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창문은 꼭꼭 닫아두고...
술잔은 언제든 입 속으로 들락거릴 수 있도록 늘 손에 쥐여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견딜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늘 왕가위와 그렇게 마주 대했다,
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사실은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
골방에 처박혀 담배연기에 질식당하고 술에 찌들어 왕가위를 잘근잘근 씹어대고 싶었다...

연출 작품  (장편)
· 열혈남아(1987), 아비정전(1990), 중경삼림(1994), 동사서독(1994), 타락천사(1995), 해피투게더(1997), 화양연화(2000), 2046(2004)
 
한 남자가 있다

내뿜은 담배연기 마냥 갈 곳 몰라 공중에서 흩뿌려지는 음악과 영상들로 나의 감성을 애무해주던 그 남자.(그래서 오르가슴을 느끼게 만들고...)
영상마다 끈적끈적한 감정의 행로를 심어놓곤 갑자기 나 몰라라 해 버리던 무책임한 남자.(그래서 더욱 슬프도록 안타까운...)
때로는 영화 이야기를 하는 건지, 우울하고 니힐한 우리네 인생을 들쑤셔보는 건지 알 수없게 만드는 아리송한 남자. (그래서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 한편 만들면서 온갖 똥 폼은 다 잡고 시간은 시간대로 걸려서 팬들을 지치게 만드는 괘씸한 남자.(그래서 다시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하는...)
그러면서도 그가 온다는 소식만으로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섹시한 남자.(그래서 설렘을 안겨다주는...)

그랬다. 왕가위는 젊은 날이 지니고 있을법한 우울한 영혼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마약보다 위험하고 죽음보다 강렬한...
 
그와 함께라면 저주라도 좋다

왕가위는 저주다. 계절이, 혹은 가을이, 아픈 사람들에겐. 조금씩 부식돼 가는 마음의 시간을 그는, 불쑥 끄집어낸다. 그리고선 박박 긁어대면서 니힐함을 주입시킨다. 한결같은 슬픔의 정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나 늘 주춤주춤 거리는 주인공들. 언제고 떠남을 예고하고 있는 관계. 그 정서와 감정은 지독하게 슬프고 아프다. 조용하게 흐느적거리면서 고름을 짜내는 감정의 파편들...

예외적으로 <중경삼림>의 633(양조위)을 제외한다면 그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그 끝이 암울하고 비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태로운 관계에 발을 담든다. 처음부터 끝을 알고 시작한다는 것, 그 얼마나 지독한가. 그럼에도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을 수 없다. 그건 어쩌면 나, 우리의 모습이고 현대의 자화상이다.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연민이 공연히 마음을 휘저어 놓는다. 그건 일종의 저주다...

에고, 그 불온한 매력

어떤 식으로든 처방전이 필요하다. 그의 영화로 입은 상흔은 다시 그의 영화로 씻김굿을 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왕가위의 영상에서 굳이 의미를 따지려 해선 대략 곤란하다. 이유를 찾고, 근거를 요구하고, 이성에 의한 분석을 요구하는 이 까다로운 세상에서 그들은 하나같이 직관에 의존해서 세상을 부유한다.

하나같이 마음의 고름을 품고 있는 그의 페르소나들은 이성과 합리보다 '불끈' 즉흥과 충동에 어울린다. 그리고 불온한 매력을 품고 있다. 상처를 주고받고, 그 아픈 상처를 꽁꽁 품은 채 슬픈 기억 속에서 부유한다. 그 에고들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연가. 소화(유덕화, 열혈남아)가, 아비(장국영, 아비정전)가, 223(금성무, 중경삼림)이, 구양봉(장국영)과 맹무살수(양조위, 동사서독)가, 아휘(양조위, 해피투게더)와 보영(장국영)이 그랬고. 특히 <화양연화>의 차우(양조위)와 리첸(장만옥)은 이성에 지배당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는 마음의 격정을 이기지 못하는 멈칫거림을 너무도 절절하게 드러낸다. 그들의 작은 몸짓, 제스처 하나에도 내 마음은 하릴없이 서걱거렸다.

다시 돌아온 그에게

4년을 기다렸다. 앞서 그를 만난 것이 2000년이었다. <화양연화>, 반복과 시간의 건너뜀, 스쳐 지나가는 느낌들의 미묘한 연결, 찰나에 담아내는 그 감정들의 절절함. 그건 쉽게 말이나 글로 설명될 수 없는 이미지였다. 알아채기라도 할라치면 터질 것 같은 정염의 불꽃들을 거세한 채 차곡차곡 쌓아올린 미세한 감정들의 작은 요동이 오감을 팽팽히 잡아당겼다.

왕가위의 매력은 '거부'에 있다. 진지하고 엄숙한 듯 보여도 그의 속내에는 젠체하는 것들을 마음껏 씹어준다. 때론 시간의 흐름이나 기승전결 따위도 무시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거북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짜증을 낸다. 그러나 진짜 착하다면 모르지만 착한 척 할 필요는 없다. 강호의 협객들이 나오는 <동사서독>에서는 "칼은 필요없다"며 "무협은 죽었다"고 일갈한다.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화양연화>도 불륜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감싸 안고 동정표를 던지게 만들었다. 과연, 왕가위!

점점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현대의 태도와 감정을 놓고 왕가위는 모험을 한다. 세월에 깎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도덕, 윤리 혹은 관습에 도전장을 던진다. 그리고 규정짓지 않는다. '부재'와 '결핍'이 두려운 이들에게 왕가위는 슬며시 말을 건네는 듯 하다.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고독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법"이라고. 조용히 고독을 받아들이라는 듯. 그래서 <2046> 앞에서 나는 또 다시 묘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 끊임없이 먹어도 마셔도 채워지지 않고 타는 듯한 목마름에 시달렸던 그 때처럼 말이다... (20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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