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는 순간, 떠나고 싶게 했던 책을 추천해 주세요!
느린 희망 유재현 온더로드 6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 어느해 여름, 몽골에 발을 디뎠다. 1990년대 사회주의 체제를 버린 몽골.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는 개발에 여념이 없었고, 혼란스러웠다. 체제 변화의 과정에서 완충장치가 없었던 탓에, 내가 만난 몽골인들의 가치 또한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흔들린다는 표현보다는, 돈독이 오를 대로 올라있는 상태였다. 모든 판단기준은 돈이었고, 곳곳에 파헤쳐진 개발의 흔적은 움푹 파인 그들의 마음 같았다.

뭐 그거야 그렇다손치고 당시, 내 손에 들린 책은, 소설가 유재현의 《느린 희망》. 몽골에 가면서, 왜 '쿠바'책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냥 우연찮게 그랬다. 당시, 몽골 외에 쿠바도 마음에 품고 있었고, 아직도 사회주의를 버리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사회주의를 버린 국가에서 읽는 사회주의라. 나름 재밌는, 아이러니한 조합이지 않나. 그렇다고, 여행의 즐거움을 포기할 것도 아니었으면서 말이다.  


당시 나는, 사진에 나온 바와 같이 책에 이렇게 써놓고 있었다. 

뭐랄까. 굼벵이처럼 몽골을 느리게 탐닉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주의 체제를 버린 국가의 개발이란, 사람들에게 좀더 악독해지기 마련이지만, 한편으로 몽골은 그러지 않길 바랐던 심정이었던 걸까. 나는 몽골의, 정확하게는 울란바토르의 개발에는 치를 떨었지만, 초원, 그 끝간데 없이 펼쳐진 초원 앞에서는 단발마같은 탄성을 지르고 감탄을 숨기지 않았었다. 


그때, 나의 여행 단상은 이랬다. 

바람이 멈췄다. 나는 돌아와야만 했고, 일상은 바람이 불기 전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그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 주는 것이 일상을 버티고 견디는 자의 예의.

이번 여행길에서 읽었던 소설가 유재현의 《느린 희망》에서 인상적인 구절 중 하나.

“...아바나. 그 문턱을 앞두고 줄곧 보아왔던 탓에 이제는 익숙하기 짝이 없는 선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시경계 표지판이다.

'어서 오세요. 서울입니다.'

이런 말인 셈인데, 정확하게는 이렇게 씌여 있다.

'모든 쿠바인들의 수도에 오셨습니다.
Usted ha Llegado a La Capital de todos Los cubanos'

'쿠바'의 수도 아바나가 아니라 '쿠바인'들의 수도에 온 것이다. 국가가 아니라 사람을 앞세운 발상이 신선하다.

자유, 조국, 혁명과 사회주의가 난무하는 쿠바에 또 하나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인간'이다. 현실에서는 조화를 이루기 쉽지 않은 단어들이다. 인간적 자유, 인간적 조국(국가), 인간적 혁명, 인간적 사회주의.”

한국인의 나라에 들어오면서 봤다. 거기에는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Dynamic Korea"라고 씌여져 있었다. 그렇지. 국가가 늘 우선이었더랬지. 아니 사람이란 애초 없었던 것인지도.

그래서 다음 여행길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쿠바로 정했다. 바람이 불면 떠나야 할 곳.

쨌든, 이번 바람에 나는 몽골인들의 나라에 다녀왔고, 생각보다 혼란스러운 풍경과도 맞닥뜨렸다. 자본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빌어 욕망을 표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은 끝도 없이 나 있는 것 같았다.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길. 나는 그 길을 달릴 때가 가장 좋았더랬다. 길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어쨌든, 당시 나는 쿠바도 그리면서 몽골을 누비는 단기 노마드였다. 낮에는 몽골, 밤에는 쿠바. 낮과 밤의 이중생활. 밤은 그렇게 상상을 돋궜다. 밤 11시 이후, 무서운 10대들이 많으니 나가서 돌아다니지 말라는 몽골 아우의 충고도 한몫했다. 소심밴댕이 가슴의 이방인인 나는 그말을 충실히 따라야했으니.  

그래서, 몽골에서 나의 밤은 쿠바를 뒤졌다.  

쿠바에서 가장 좋은 담배를 생산한다는 피나르 델 리오의 부엘타바호에서 담배를 돌돌 말아 그 향미를 맛보고, 쿠바혁명의 기념비적 도시인 산타 클라라에 발길을 멈추고 숨을 들이키고, 트리니다드의 춤꾼들에 어우러져 추지도 못하는 살사의 향연에 빠졌다.

그뿐이랴. 시에라 에스캄브라이의 길가 커피농가에 들러 숯불에 들들볶은 뜨거운 물을 와라락 부어 커피 한잔의 향미에 취하고, "어떤 사내라도 처녀가 내미는 잔을 받아 담긴 물을 마시면 종내는 돌아오고야 만다는 도시 카마구에이"에서 짜릿한 '로맨스'를 만들었다.

무엇보다, 쿠바혁명(1959)과 체 게바라. 혁명의 어떤 시작지점이었던, 시에라 마에스트라.
"1956년 11월25일 83명의 사내들이 25명 정원의 그란마(GRANMA)란 이름의 보트를 타고 멕시코의 툭스판을 떠났다. 12월2일 그들은 예정보다 사흘을 늦게 콜로라도 해변에 도착했고 대기하고 있던 바티스타군의 공격을 받았다. 12월18일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깊은 산중에 도착했을 때 12명이 살아있었다. 그들을 이끌었던 피델카스트로가 남은 11명에게 말했다. "동지들, 우린 승리할 것이오. 싸움을 시작합시다."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무모해 보이는 혁명이 시작되었다." (p135)

물론, 그전에 쿠바혁명 발화점이 된 '7.26운동'(1953)의 지점, 산티아고. 역시나, 혁명의 표지.
 

SANTIGO(산티아고)
REBELDE AYER(어제는 반란의 도시였고)
HOSPITALARIA HOY(오늘은 친절한 도시)
HEROICA SIEMPRE(항상 영웅의 도시)
 

'뉴타운' 건설이 아닌, 혁명의 건설. 유재현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혁명은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며 잠깐의 전복과 영원한 건설이다. 건설자들은 변함 없는 끈기와 신념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아아, 어쩌란 말이냐. 한국의 건설자들 역시, (뉴타운을 향한) 변함 없는 끈기와 신념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이토록 다른 건설자들의 목적 혹은 가치.

아울러, 아바나. 사르트르가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칭송했던, 체게바라가 새겨진 혁명광장. 
""승리할 때까지 Hosta la victoria Siempre"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작별 인사였다.
그럼으로 그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세상의 모든 사람과 만날 수 있었다." (p214)
 
바로 그 혁명광장에 선 내 모습. 체 게바라는 진짜, 쿠바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궁금했다. 그가 아무리 혁명영웅이지만, 어쩌면 누군가는 그 때문에 궁핍하다고, "이게 다 게바라 때문"이라며 언성을 높이진 않을까. 그러면서도 또 어떤 이들은, 승리할 때까지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쿠바를 제외한 다른 모든 세계의 무위와 폭력으로부터.

그러나 나는, 관념적으로는 천만번백만번 동의하면서도, 의문을 지울 수는 없었다. 정치가이자 혁명가인 호세 마르티의 얘기.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잠을 잘 권리가 없다." 혁명의 시절엔 충분히 선동적이고 피를 끓게 했겠지만, 사실 나는, 몸으로 흡수할 수 없었다. 나는 내 하나의 혁명에도 벅차하는 찌질남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밤마다 쿠바를 꿈꿀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가 허물어진 나라의 밤길이 무서웠기 때문에.^^;;;

어찌된 일인지, 쿠바 이야기에도 '이건희'가 등장했다. 세금 수천억원을 내지 않고, 회사에 수천억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를 받으면서도 불구속 기소될 것으로 예견(!)되고 있는 그 이건희. 유재현이 쿠바서 만난 꼬마친구의 장래희망인, 달고나 만드는 아저씨랑 평등한가, 아닌가의 문제. 유재현은 간단하고 명쾌했다. 평등! 땅땅!!. 이건희의 덕(德)과 달고나 아저씨의 덕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같지 않은 것은 우열로 비교할 수 없다는 명명백백한 논리. "우리 모두 서로 다르다. 우린 모두 평등하다. 이 평등을 깨뜨리는 덕은 이미 덕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독을 마실 만했다."(p259)  



쿠바가 나의 'Must-visit'가 된 것은, 그렇게 《느린 희망》의 영향이 컸다. 얼마전 읽은, 2개의 신문 각각에는, 우연찮게도 '쿠바'가 언급되고 있었다. 전혀 다른 내용들이었지만, 나는 그동안 묻어두고 있던 '쿠바'를 꺼냈다. 이들은 내게, 다시 '쿠바'를 꿈꾸게 하고 있다. 쿠바쿠바. 암세포와 같은 성장 일변도의 사회에서 나 같은 사회부적응자는 다른 세계의 바람이 필요하기도 하니까.
[김선주 칼럼] 아바나를 떠나며…

물론, 쿠바라고 모든 것이 행복하냐. 아닐 것이다. 이중경제와 암시장은 쿠바 사회주의의 시험대가 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그들의 행복을 이방인이 부풀린 관념으로 잣대를 들이댈 순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만 계속 혁명을, 사회주의를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들 역시 어쩌면 힘겨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 더 나은 세상이 쿠바에 있다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이미, 우리는 루비콘 강을 건넜지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나. 지속가능한 사회, 지속가능한 지구, 지속가능한 인류를 위해. 아니, 지속가능한 나를 위해서라도.  

그럼에도, 나는 쿠바가 부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교육과 의료 시스템 때문에라도. 

"한국도 쿠바도 9년의 의무교육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의무교육이라면 최소한 교복과 학용품 그리고 급식 정도는 국가에서 무상으로 제공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쿠바라는 나라에서는 그렇게 한다... 쿠바에는 학생 수가 10명 이하인 학교가 2천 개가 넘는다. 한국의 농촌에는 폐교가 널려가고 있지만 쿠바에서는 가르칠 학생이 있는 한, 산꼭대기에도 학교를 짓고 교사를 보낸다."(p293)

"예방의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의료비용을 절감하고 있다. 예방의학의 중추를 이루는 1차 진료기관은 10~20 가정을 담당하고 가정의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쿠바인들이 평생 같은 가정의와 함께 지낸다는 것이다. 가정의는 담당 가정에 대해 지속적으로 병력을 관리할 수 있다. 모든 지역에 의료 인력을 배치함으로써 효율적인 의료교육을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담배와 알코올에 대한 보건교육 등이 일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p299)

나는, 솔직히 '빨리빨리'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장점도 있다는 말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때문에 이모양 이꼴이다. 니가 못나서, 앙탈이냐고. 맞다. 나는 내가 못났음을 안다. 그러나, 그 못남을 인정하고 포용하고 내치지 않는 것이, 인간이 사는 세상이라고 믿는다. 지금-여기의 땅은 그렇지 않지만. 같은 뜻임에도, 나눔과 분배를 구획짓는, 안드로메다적 개념에 나는, 치를 떤다. 그것이 쿠바를, 내가 발디디지 못한 땅을, 품고 있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권좌에서 물러난, 카스트로 이후의 쿠바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카스트로의 이 말에 한표를 던진다.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1차 지구환경회의에서 행한. 쿠바 국내적으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토건국가 대한민국에서는 안드로메다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인류를 이 같은 자기파괴에서 구해내려 한다면 세계의 부와 기술을 더 많이 나누어야 한다. 일부 국가들은 덜 사치스럽고 덜 소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으로 세계의 대다수가 덜 빈곤하고 덜 굶주리게 될 것이다... 인간의 삶을 보다 합리적으로 만들자. 정의로운 국제경제질서를 만들자. 모든 과학지식을 환경오염이 아닌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사용하자..." (pp.65~66)

혹시, 쿠바를 가고 싶다면, 쿠바가 궁금하다면, 혹은 그냥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세계의 어떤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면, 당신에게도 이 책을 권한다.  

나는 다시, 내게 바람이 불어주길 바라고 있다. 다시 꺼내든 《느린 희망》은 내게, 쿠바를 권하고 있다. 화가 사석원은 "쿠바는 한번 중독되면 헤어나지 못하는 독이다."라고 했단다. 나는 독배라도 꿀꺽꿀꺽 들이키고 싶다. 골속골속 속물인 내가, 알량한 기득권 하나 제대로 포기하지 못하는 소시민인 내가, 쿠바에 간다손 바뀔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쿠바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세대 새판짜기
우석훈 지음 / 레디앙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인기 탄탄대로의 드라마, <선덕여왕>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먹고살 게 없는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는 건 절규지 폭동이 아니다.” 

혁명은 그렇게 마지막 순간의 선택이다. 참다참다 못해, 견디다견디다 못해, 그렇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귀결이다. 또한 그것은 말 그대로 절규다. 폭동이라는 말로 가치 전복을 시켜선 안 된다. 그것은 살기 위한 것이지, 어떤 이권이나 권력 교체를 위한 목적이 개입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프란츠 파농도, “혁명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면에서 혁명은 좀 시끌벅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석훈 박사의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를 처음 대하고선, 그 제목이 왠지 조심스러운 듯해서 뭔가 석연찮았다. 하지만, 읽어가면 마냥 그렇지 않다. 제목 뒤에는 '시작되었다'라는 말이 생략됐다는 것부터, '혁명'이라는 레토릭을 좀더 넓힐 것을 요구한다. 혁명을 좁게 가두어선, 안 된다!

그렇다. 잔혹하고 엄한 시대다.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사회에서 최고의 경구가 된 어처구니 없는 시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착각하진 않지만, 행복의 조건으로서 돈의 힘을 절감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대. 도저히 인간 세상에선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상처럼 일어나는 시대다.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봐라. 열 이면 여덟아홉은 지금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알면서도 그들은 묵묵히 참고 걸어간다. 스스로를 억누르고 시선을 회피하면서. 그것이 또한 일상화된 시대다. 괴로운 시대다.   

이상했다. 아직은 견딜 만 하다는 건지. 우석훈 박사는 임계치를 지났다고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얘길하지! 어느덧 20대 전문가로 낙인(?)이 찍힌 그는 학원강사들의 삶에서 이 책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들은 이른바 '루저'들의 세계다. 사교육을 책임진다는 수사는 그저 사기를 북돋기 위한 알랑방귀다. 스스로도 안다. 이미 나락은 진행되고 있음을. 스타 강사? 억대 강사? 그건 돈에 미친 놈들이 만들어낸 착취적 수사다.     

20대들은 철저히 꼰대들의 울타리에 감금됐다. 누구도 그들을 대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조차도. 꼰대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스펙 늘리기에만 몰두한다. 다른 어떤 이유도 없다. 그것은 자아실현도 아니다. 단지 그들은 광대가 됐을 뿐이다. 

우 박사는 '혁명'을 일단 입에 올리라고 말한다. 혁명은 울림이, 에너지가 큰 단어다. 어머니나사랑과 같이. 물론 그것을 과거 군사놀이를 통해 구현하라는 것, 아니다. 20대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을 통해 혁명을 꿈꾸란다. “움츠리고 웅크려 있는 20대들에게, 특히, 대학생들에게, 나는 ‘혁명’이라는 단어의 생동감을 돌려주고 싶다. 아, 걱정 마시라. 혁명하라는 거 아니다. 군사놀이 하라는 것도 아니다. 내가 혁명가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혁명이 일어난다면, 내가 정말로 혁명의 일원이 된다면 따위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져 보는 건 어떠냐고 말하는 것이다.”(p.35) 그리곤 그 일례는 코코 샤넬. 20세기 여성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킨 샤넬처럼 문화혁명자가 돼라! 

말하자면,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는 혁명의 레시피를 제언한 책이다. 그 레시피를 택하건 택하지 않건 그것은 자유다. 젊은 세대들을 사육하고 훈육하고 싶어하는 꼰대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선택이다. 하지만 20대의 그 선택은 중요하다. 앞선 꼰대들이 잘못 빚어낸 이 사회의 고통 부담자로서, 앞으로 다른 사회를,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 또한 그들이다. 20대.  

“이들은 외롭다. 그 이유도 알고 있다. 이런 사실은 수업이나 책을 통해서 알려 줄 수 있다. 그러나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말해 줄 수가 없다. 그건 존재론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걸음은 경쟁과 평가로 움직이는 사회가 아닌 다른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p.54)   

과연 혁명이 가능할까, 의심하기보다 혁명의 일원으로 꿈꾸는 것이 더 행복한 일임을. 20대가 꿈꾸면 다른 세상이 열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이 책은 조심스레 권한다. 혁명이라는 말에 쫄지 말고, 혁명의 레시피를 만든다면, 우리는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다. 이 책은 20대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마냥 그렇지 않다. 우정과 환대의 마음으로 함께 꾼다면, 혁명은 충분히 가능하다.  

조한혜정 교수가 ‘이 시대의 수다쟁이, 언어의 연금술사’인 우박과 함께 꾸는 꿈처럼 말이다. “나와 우박이 맺은 ‘우정’의 품앗이가 ‘환대’의 두레 마을로 둔갑하는 꿈, 청년들이 맺은 무수한 품앗이와 두레 공동체들이 돈의 순환 체계가 지배하는 사회를 무력화하는 ‘개벽의 새벽’을 상상해 본다. ‘우박과 그 아이들’을 통해 혁명이라는 불씨를 선물 받은 친구들, 그들이 부는 피리 소리를 들은 이들이 함께 춤추는 꿈을 꾼다. 부모가 돈이 없다고 해서 세 탕의 알바를 뛰어야 하고 수업시간에 졸아야 하는 일이 없는 세상, 남자도 여자도 모두 돌보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세상, 하고 싶은 일로 돈도 벌고 사회에 좋은 일도 하는 20대 사회적 기업가들로 세상의 빛깔이 달라져 버린 날을 상상한다. 누림, 멈춤, 마을, 환대 등의 주문을 외우면서, 경쟁과 가시적 성과라는 주술에서 벗어나 정의와 아름다움의 세상을 발견한 이들이 사보타지의 신체를 바꾸어 내면서 새벽을 맞이하는 모습을 꿈꾼다.” (p.17 ‘추천글’ 중에서)

나는 혁명한다, 고로 존재한다. 혁명을 꿈꾸는 당신과 나, 우리를 위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나의 한살매
백기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늙은 젊은이, 백기완 선생님은 요즘 세상에 대해 일갈하신다. “요즘 벗나래(세상), 그 돌아가는 꼴을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이것도 사람 사는 벗나래든가?’ 그런 휫딱(착각)이 들 때가 있다. 대통령이라는 이명박이가 앞장서 뻔한 거짓을 참으로 바꾸고, 또 참짜 참은 아예 죽이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땅불쑥하니(특히) 갈마(역사)라는 걸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는 저희들 마음대로 갈마를 거짓꾸리고 있음을 본다.”(p.190)

백 선생님의 지금-여기에 대한 현실인식은 명확하시다. 지금의 현실은 늙은 젊은이의 철학과 당최 조응을 할 수가 없다. 아니 정반대다. 백 선생님의 일생을 관통하는, 아들딸을 키울 때 이르시던 새김말(좌우명)은 이렇다. “모두가 어려운 때 제 배지(배)만 부르고 제 등만 따스고자 하면 키가 안 크니라.”(p.13) 아니, 말로는 서민을 내세우지만, 돈 있고 힘 있는, 이른바 가진 자들의 이익과 이권을 위해서만 작동하는 지금에, 시대착오적인 생각 아닌가!

하지만, 백 선생님은 그 가치를 절대 놓을 생각이 없으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에서 정말이지 단호하시다. 그것이 한 순간의 치기로 만들어진 개똥철학이 아니라, 일생을 관통하면서 차곡차곡 쌓아온 절대적 신념체계임을 알 수 있다. 너도 나도 올바로 잘 사는 ‘노나메기’. 그것을 위해 필요한 불쌈(혁명). 과거의 물리적 투쟁보다는 문화예술을 통해 만들어야 할 불쌈. 

책은 우리말로만 되어 있다. 읽기가 마냥 쉽지만은 않다. 눈에 익지 않은 것들이 많은 탓이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새롭게 알게 된 우리말을 입에서 곱씹어 보고, 기억에 저장하고자 하는 노력이 나름 의미있었기 때문이다. 책 읽기의 새로운 경험이다. 나는 순 우리말만 쓰기보다는 외래어를 충분히 받아들이면서 우리 언어의 외연을 확장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순 우리말로 외연을 확장하는 것도 괜찮았으니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에는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난 기억도 있다. 백범 일지는 봐도, 누군가 백범 선생을 만난 기억이라고 내뱉은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뵌 백범 선생’이라는 소제목으로 풀어놓은 이야기는 백범의 아우라와 포스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백범을 떠올려도 매칭이 되는 이야기.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에 세상을 늘 맨몸뚱이 하나로 부딪혀야 했던 어린 시절부터 재야 민주화운동의 투사로서 겪은 고초 등은 시대의 야만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증명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시대의 야만은 방법을 달리해 부메랑처럼 돌아왔고, 비열하고 졸렬한 방법으로 우리를 옥 죄는 것이 지금 시대다. 백 선생님 또한 이 시대에 대한 분명하게 일갈하지 않으셨는가 말이다.   

하지만, 젊은 날 백 선생님의 기백을 보자면 그냥 불끈불끈 힘이 솟기도 한다.  “그렇다, 나도 내 뼈를 갉아 애나무로 삼고, 내 피땀을 뽑아 거름으로 삼으며 온통 불을 지른, 젊은 한때가 있었다. 그렇다, 나는 그런 젊은 날에 마주해 요만큼도 뉘우침 따위는 안 한다. 도리어 모이면 으르고 뽑아대고 뜨거운 것이 빛나던, 그런 젊은 날의 눈물이 있었다. 이 새끼들아.”(p.142) 

백 선생님의 시(詩) 중에 「젊은 날」이라는 시가 있다. “모이면 논의하고 뽑아대고/ 바람처럼 번개처럼/ 뜨거운 것이 빛나던 때가 좋았다/…/우리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헐벗고 굶주려도/ 결코 전전하지 않았다/ 돈벌이에 미친 자는 속이 비었다 하고/ 출세에 연연하면 호로자식이라 하고/ 다만 통일논의가 나래를 펴면/ 환장해서 날뛰다 밤이 내려/ 춥고 떨리면 찾아가던 곳/…” 읽을 때마다 뜨거움이 불끈 솟는 시가 아닐 수 없다. 백 선생님은 그렇게 시대를 밝힌 시인이었고, 시대를 저항한 투사였다.  
 
무엇보다 나는, 이 책에서 이 말을 잊지 못하겠다. “자기 등만 따스면 썩습니다.” 너도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노나메기’가 선생님 혼자의 꿈이 아니어야 한다. 이 책은 시대의 야만이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고, 그것에 맞서 우리는 계속 꿈을 꿔야 한다는 것을 추동한다. 턱없이 없는 사람들 것을 뺏어대는 놈이 여전히 존재하고, 누군가는 주리고 깨지고 쫓겨난다. 이 어찌 내 처지가 아니라고 외면만 할 수 있단 말인가. 백 선생님은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봐, 용이 죽어라 하고 썩은 또랑에 엎드리는 까닭을 알아? 어떡하든 구슬을 하나 얻어 하늘로 올라가자는 거라고. 하늘에선 또 무엇을 하자는 건지 알아? 아무것도 해온 것이 없으니 돈장사, 땅장사, 사람장사, 사랑장사, 거짓장사, 됫싸게는(심지어는) 미국 놈 앞잡이 해먹기, 그것으로 거저먹자는 것이다. 그러니 용에 마주한 사랑 따위는 때려치우고 우리 지렁이 사랑을 하자구. 지렁이는 땅을 기고 사는 것 같애도 말이야, 힘이 있어 임마. 무슨 힘인 줄 알아. 온몸으로 땅을 갈아엎어 땅을 살리는 사랑의 힘이 있거든.”(p.144)

나는 다짐한다. 나를 비롯해서 시대의 야만에 억압받는 이들이 부디 버티고 견디길. 그러기 위해서 힘을 보태야 함을. 사람 사는 벗나래(세상)가 아닐지라도 어영차 버티고 살아남아 노나메기를 꿈꾸기. “제아무리 굶더라도, 제아무리 됫싼 매를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 모딘 고비를 어영차 버텨내고 살아남기만 하면 사람은 더없이 착하고 어진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이 벗나래(세상)엔 나쁜 치들만 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도막에 한술 닿은 끈매(인연)는 달구름(세월)이 가고 또 가도 끊기질 않는 것이 삶이라는 게 아닐까.”(p.149)


댓글(0) 먼댓글(1)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2009), 백기완, 한겨레출판사
    from Finding Neverland 2009-12-25 12:58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백기완 선생의 이름 석자를 알 게 된 것은 역시 대선 때문이었는데, 하도 어려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두 번째 출마 때 그의 이름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는 건 확실하다. 92년 대선 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하고, 민중이니 민족이니 무슨 말인지도 모르던 나는 십 수년 그를 잊고 살았다. 웹서핑 중에 몇 번 그의 이름을 만났을 법한데 별 뜻없이 지나쳤으리라. 요즘 이십 대 중에 그를 기억하거나 관심을 둘 사람이 몇..
 
 
 
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롤랑 바르트는 아마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마지막 저서인 《카메라 루시다》에서 언급한 '푼크툼'이 회화 보기에서 차용될 줄이야. 그것도 21세기, 자신의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말이다. 미학자 진중권 교수가 이번에는 미학과 미술사를 넘어, 회화보기의 새로운 경지를 제시했다.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을 회화에도 적용해서 말이다.  

책 제목이기도 한 피터르 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는 최근 그의 처지와 맞물려 묘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 더구나 브뤼헐은 당대 권력자들을 조롱하고 대운하를 반대한 전력을 갖고 있으며, 그에게 풍자의 대상은 서민이라고 비껴가질 않았다. 진 교수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그는 인터넷을 사용하는 일반인이라고 무조건 편들지 않는다. <디 워>논쟁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목격했다.  

그런 진 교수가 스스로 꽂혔다며, 열 두 작품을 언급했다. 우리가 잘 아는 작품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른바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도 있다. 어떻든간에《교수대 위의 까치》를 관통하는 개념은 푼크툼이다. 즉, 똑같은 제재를 보더라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꽂히는 감각. 나한테는 꽂히지만, 다른 이에겐 꽂힌다는 보장도 없는, 작품과 나 사이의 개별적이고 고독한 관계. 피사체가 있는 사진에서만 쓰이던 개념인데, 그 개념을 완화했다는 것이 진 교수의 설명이다.

그것은 참 재미있는 개념이다. 진 교수가 언급한 열 두 작품은 이전에 우리에게 주입된 회화를 보는 방법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낯설게 보기다. 표준적인 작품 해설에 의한 미술사 보기가 아닌, 내 마음에 꽂히는 '삘'로 작품 마주대하기. 표준적인 작품 읽기가 아니어서일까. 책은 흥미를 불러 일으키며, 의외로 미술보기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더구나, 타의에 의해 교단에서 쫓겨난 그의 처지와 맞물려, 책에 나온 작품들이 (잘리지 않았다면) 강의실에서 얘기될 것들이었다고 하니, 마지막 강의를 받고 있는 듯한 느낌. 책에 대한 집중도 또한 높아진다. (교단에서) 사라졌지만,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온 이 아이러니.  

책은 곳곳에서 찔러댄다. 회화를 보는 시선이 하나가 아니며, 미술사가 아닌 전혀 다른 분야의 시선을 빌려서도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의미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범례적으로 보여준달까. 경계를 넘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방법이 앞으로 회화를 만나면, 나만의 푼크툼의 순간을 만끽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란 기대를 하게 한다.   

'사라진 주체'라는 테마로 진행된 요하네스 굼프(Johannes Gump, 1626~?)의 <자화상>이 메타 회화를 언급한다는 대목에선 17세기 화가들의 자의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엿봤다. 이 작품, 희한하게 주체가 3개다. 하나는 뒤통수, 다른 하나는 거울, 남은 하나는 캔버스. 현실과 비현실, 더 나아간 비현실이 함께 등장하는데, 현실과 비현실은 위치를 바꾼다. 가장 현실적이어야 할 작가는 뒤통수만 보이고 캔버스에 그려진 자화상이 가장 강력한 효과를 드러낸다. 가상이 현실을 압도하는 셈이다.   

이것은 그렇다고, 굼프가 창안한 것은 아니란다.그럼에도 굼프를 비롯한 17세기 화가들은 보들리아르가 언급한 시뮬라크르(자기동일성이 없는 복제)를 일찌감치 다룬 셈이다. 화가의 정체성을 넘어 회화의 정체성을 다룬 진화의 단계. “굼프는 관객에게 등을 돌려 얼굴을 감추어버리고는 화폭 위에 거울에 비친 ‘영상’과 캔버스에 그려진 ‘모상’만 남겨둔다. 그 결과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자연스레 그림을 그리는(또는 거울을 비추는) ‘행위’만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런 식으로 굼프는 자화상을 이용해 ‘주체의 본성’이 아니라 ‘재현의 본성’을 주제화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굼프는 ‘화가의 정체성’을 묻고 있지 않다. 그가 묻는 것은 ‘회화의 정체성’이다.”(pp.143~144)  

여러모로 진 교수의 범례적 회화읽기는 곳곳에서 놀라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림 보기가 보다 즐거워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답이 있어야 안심을 하는 제도권 교육의 폐해는 이런 것이 아닐까. 답 하나만 좇아 모든 가능성을 차단해 버리는 것. 푼크툼은 그것만큼 중요한, 새롭게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알려준다. 답을 푸는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질문을 제기하는 능력임을.  

굼프의 <자화상>이 진 교수를 사로잡은 이유는, ‘모델-재현’의 상식적 관계를 무너뜨린 디테일 때문이었다. “재현은 모델과 상관없이 제 의지를 가지고 따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느 것이 나인가? 뒤통수를 보이는 저 머리인가? 아니면 거울 속의 얼굴인가? 그것도 아니면 캔버스 위의 얼굴인가?”(p.159) 진 교수로 하여금 질문을 던지게 만든 굼프의 <자화상>. 

세상을 보는, 세상을 사는 재미가 하나 더 늘었다. 푼크툼으로 인해, 《교수대 위의 까치》가 안겨준 책 읽기의 행복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쌤앤파커스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미국 버지니아에서 한국인 유학생이 총기 난사를 했던 사건. 그 비극 앞에 어이 없게도, 그가 한국인이라서 국가적으로 사과를 해야 한다던 주장도 있었다. 비극 앞에 있거나 그 사건으로 경악한 많은 미국인들도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실제로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가 단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런 그를 제대로 보듬지 못한 사회가 문제가 됐을 뿐.   

그런 것으로 따지자면, 지구상의 남자들은 모두, 죽어 마땅하다. 없어져야 할 족속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악과 폐해의 당사자는 거의 남자들이다. 그렇게 따지자니, 우습긴 한데, 그만큼 남자들은 늘 문제를 일으킨다. 영원히 철들지 않는다는 말은, 진실에 가깝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그런 남자들의 심리를 보여준다. 왜 그들은 좋지도 않다는술을 입으로, 위로, 간으로 퍼붓는 것일까. 오죽하면 이런 말도 있을까. “한국 성인 남자는 여가의 절반을 술을 마시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 절반은 술을 깨우는 데 사용한다.” 한국 성인 남자들은 대부분 재미를 모른다. 아니, 어떻게해야 재미가 있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혼자 있는 법도 모른다. 그래도 꼴에는 강한 척 해야 '가오'가 선다.  

제목부터 자극적인 이 책은, 술술술 읽힌다.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그것이 대한민국의 성인 남자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혹은 그 남자를 지겨워하거나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여성들에게도 이해도를 높여준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재미와 감탄을 모르고 살아가는 남자들을 위한 처방전 혹은 그런 남자들을 알고 싶은 여자들의 참고서이다. 

무엇보다 저자인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의 '내 이야기'가 살갑다. 오밀조밀 궁시렁궁시렁 신변잡기에 불과한 그 이야기가 왠지 살갑다. 시시콜콜하지만, 수다의 힘은 의외로 세다. 여자들의 것이라고 치부했던 수다는 의외로 많고 큰 효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것도 술보다는 수다다. 저자의 수다가 살가운 것도, 저자가 친근하게 여겨지는 것도 책 속의 다종다기한 수다 덕분이다.  

사실 지금은 우울한 시대다. 20대부터 벌써 재테크에 미치라고 설파하고, 어떻게든 스펙을 좀더 높이 쌓아 어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알랑방귀를 낀다. 30대라고 다르진 않다. 현실이라는 이유로 부동산, 재테크, 육아 얘기만 나부낀다. 자신의 이야기는 쏙 빠졌다. 내 고유의 서사를 지운 삶인 셈이다. 어떡하면 재미가 있는지 모르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의 미덕은 무엇보다 '감탄하기'의 중요성을 알려준 점이다. “식욕, 성욕은 인간의 본질적 욕구가 아니다. 감탄이 인간의 본질적 욕구다”(p.283) “누가 나보다 더 분명하게 우리의 삶의 목적을 설명할 수 있다면 나와보라! 우리는 감탄하려 산다.”(p.293) 그것은 아마도, 세상에 대한, 작고 사소한 것에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열라는 말이다. 그러면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고, 정서적 경험이 풍부할수록 타인과의 관계도 유려해진다.

감탄할 줄 아는 것은 재미의 다른 말이다. 재미가 없으니 정치인 욕이나 하고, 폭탄주 돌려서 취하고 빨리 망가지는 거다. 많은 남자들은 그런 퇴행적 온정주의에 사로잡힌 노예들이다. 일 하는 것도 힘든 마당에 술까지 힘들게 마시는 소아병적 퇴행. 그럼에도 알코올이 힘을 발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비슷비슷한 처지이기 때문이다.   

책은 남자들에게 익숙지 않은 정서적 공유도 강조한다. 아내에게든 자식에게든 친구에게든 뭐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공유하면 살 길이 열린다.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표현도 그런 얘기를 터 놓음으로써 치유 받고 싶다는 마음의 다른 표현인 셈이다.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책은 알려준다. 사회적 지위? 기똥찬 집과 차?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당연히 여겨지는 어느 회사의 부장, 사장, 교수와 같은 내 사회적 지위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내 본질과 상관없는 것들이다”(p.100)  

그러면서 저자는 커밍아웃한다. “생각해보라! 도대체 언제까지 사장할 것인가. 언제까지 교수일 것인가. 나는 어느 대학의 교수나 어느 위원회의 위원장이 아니다. 나는 슈베르트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 내 노래에 감동하여 눈물 흘리고, 아내의 관심이 조금만 식어도 쓸쓸해하고, 하늘거리는 주름치마에 가슴 설레어 한다. 그게 진짜 나다.”(p.100) 아내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마냥 침울해지는 소심한 남자!

다시 말하지만, 이 시대의 문제는 모두 남자의 문제다. 가족에서 더 이상 남자(남편)는 필요없게 됐다. 기러기 아빠가 이를 대표하지 않나. 남자들은 돈'만' 버는 기계다. 그래놓고선 고작 하는 위안이 가족을 위해, 아이를 위해 희생한다? 참으로 불쌍한 족속이 아닌가.  

저자의 남자 다독이기는 별다른 게 아니다. 그럼에도 그 심리적 파장은 크다. 나도 그렇지만 아마도 이 땅의 남자들이 너무 획일적으로 길들여진 탓일 게다. 아니, 그보다 더 크고 중요한 사회적 문제도 많은데, 일일이 남자들 심리를 파고들 건 뭐야, 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우리는 다른 문제도 면밀하고 정교하게 접근할 수 있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남자들의 문화심리를 다뤘는데, 한편으로 (남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법, 재미있게 사는 법을 알려주는 가이드북이기도 하다. 허섭하게 야동틱한 이야기말고 생동감 있는 에로틱한 수컷의 향기를 풍기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그렇게 되면 감탄도 절로 나올 것이며, 우리는 자신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여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시간을 이겨낸 모든 것은 예술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