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스터디 - 미국대학 교양교육 핵심과정과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안내
마크 C. 헨리 지음, 강유원 외 편역 / 라티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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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엄혹하고 까칠한 공황의 시절.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 몸도 몸이지만, 마음을 다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리하여, 마음의 치유와 치료가 절실한 때다. 주변의 위로와 위안도 좋지만 마음치료를 위해서는 자존감을 회복하고 삶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말하자면, 마음의 튜닝. 인문학은 그 중심이다. 최근 일종의 트렌드처럼 흩뿌려지고 있는 인문학. 최고경영자부터 노숙자, 수감자들에게까지 파고들어가고 있는 인문학의 향기.   

 

그런데, 과연 우리는 제대로 인문학과 마주하고 있는 것일까. 인문학이라 지칭되는 것을 무턱대고 흡수하면 될까. 편식도 안 되지만, 과식도 위험하다. 여기, 시민 가까이의 인문학을 위한 가이드가 나왔다.

《인문학 스터디 : 미국대학 교양교육 핵심과정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안내》(마크C.헨리 지음|강유원 외 편역/라티오 펴냄). 아마도, ‘인문학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지난 2월20일, 서울 신촌 토즈에서 책 출간기념으로 강유원 박사를 위시한 편역자들이 “인문학 공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가졌다. 일반인들보다 ‘인문학’을 깊이 연구한 편역자들의 목소리를 엿들었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질끈 동여맨 긴 머리가 허리 부근까지 내려와 ‘철학과’ 포스를 내뿜는 강유원 박사가 등장했다. 졸업하고 취직하지 않아도 욕을 먹지 않고, 취직을 안 해도 괜찮을 것 같아 철학과를 갔다는 말로 청중의 긴장을 푼 강 박사는 인문학의 요체를 한마디로 이렇게 설명했다. 文(문학) 史(역사) 哲(철학). 그렇다면 인문학은, 무엇인가. “어떤 사태에 부딪혔을 때 그 사태를 해명하는 근본 원리에 대해 따져 묻는 학문”이란다. 방점은 ‘따.져. 묻.는.’이 되겠다.  

 



몇몇 청중에게 요즘 가장 고민거리가 무엇인지 묻는다. “이명박”이라는 답변 앞에, 강 박사는 그런 대통령을 선출한 국민과 정치제도에 대해 되묻는다. “근본적으로 민주주의라는 것이 모든 사람의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는 제도인가.” 숱한 희생을 거치고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행에 따라 그닥 의심한 바 없이 받아 들여왔던 제도.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그것을 되물어봐야 하는 ‘사태’를 맞이한 것이다. “정치공동체로 사는 게 행복한지, 부족사회에서 사는 게 더 행복한지를 물어봐야 한다.”

그는 다른 일례도 들었다. 역사를 주로 다루는 한 블로그. 그 블로그는 이른바 ‘환빠’(환단고기에 열광하고 믿어 의심치 않는 매니아)의 허점도 지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환빠’들은 재차 공격한다. “한민족의 위대함을 깎아내리는 자기 비하 아니냐.” 그럼에도 해당 블로거는 다시 반박한다. “위대한지 아닌지 이전에, 사실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냐.”

강 박사가 강조하는 지점은 이것이었다. ‘환빠’는 이미 한민족이 위대하는 신념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 “인문학은 사실을 냉정하게 따져보는 한편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근본적으로 사실에 접근하려는 태도를 뜻한다.” 그런 면에서 인문학은 우리가 세계를, 사물을, 현상을, 그리고 인간을 바라보는 자세와 태도를 뜻하는 셈이다. 개념으로 무장하자는 말. 무개념, 탈개념의 박쥐(주. ‘로꾸거’ 읽을 것)가 활개 치는 세상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인문학 스터디》에 대처하는 자세

편역된 이 책은 원서와 다른 면도 많다. 차례도 다르고 편역자들이 새로 쓴 부분도 있다. 한국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려면 필요한 영역들은 따로 넣었다는 것이 강 박사의 설명이다. 6명의 편역자들이 전공과 관심 분야에 따라 카테고리를 맡고 의견을 보탰다.

“이 책에는 최신 이론이 담겨져 있지 않다. 그러나 최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말라. 내가 1980년에 대학에 입학해서 30여년 동안 이 나라에서 2년 이상 뜨는 철학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유행에 민감한 풍토를 지적함과 동시에 고전이야말로 진정한 옥석임을 강조한 말이렷다. “이 책은 기껏해야 막스 베버와 카를 마르크스가 있다. 서양 현대철학사는 최신 이론에 지나치게 매달리면 돈 낭비다. 번역의 오류도 많고 연구자가 없어 검증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인문학 공부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강 박사는 우선 ‘꼼꼼하게 읽’을 것을 권한다. 한 리뷰어가 ‘다소 독단적인 저자의 선택’이라며 ‘bias(편견, 편향)’라는 단어로 이 책을 평했는데, 강 박사는 “‘논거를 갖춘 확신’을 편견이라고 일컫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책은 논거를 가진 확신이다. 저자인 마크C.헨리는 어리숙하고 띨띨한 사람이 아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장난이 아니다. 이 책이 얼마나 잘 쓰여 졌는지 봐야 한다. 본문내용만 충실히 읽는 것이 인문학 공부의 가이드라인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문장 하나, 문단 하나에 핵심적 내용이 압축된 예.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서구 문학의 기원이 최고 지배자가 아닌 모범적인 개인의 이야기로 시작됨으로써, 서구 문명은 모범적인 황제들이나 신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고대 또는 초창기의 문학을 보유한 다른 문명과 구별된다.”(p.37) 우리나라의 주몽이나 박혁거세와 같은 왕이 아닌 장군의 이야기에서 시작함으로써 개인주의에 대한 역사적 전통을 알 수 있다는 것이 강 박사의 설명이다. 이처럼 단어 하나부터 충실한 책 읽기가 이뤄진다면 160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인문학 전 영역을 포괄하고 궁리 끝에 압축적으로 액기스만 뽑아낸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또 이 책은 해당 영역마다 ‘읽어야 할 도서 목록’이 있다. 주요 저자의 핵심 저서를 다룬 ‘원전’부터 개괄입문서, 역사책, 세부주제 입문서와 연구소 등으로 층위가 나눠져 있다. 자신이 원하는 공부의 깊이와 방향에 따라 위에서부터 차례로 잡는 것이 좋겠다.




학문은 정통적으로, 자세는 겸손하게

아직은 ‘인문학자’라는 타이틀이 ‘쪽’ 팔린다는 강 박사는 한국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5년에 걸친 ‘공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책 한권을 외우면 5년 동안 술자리에서 화제가 마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자 소리를 들으려면 공부를 20년은 해야 한다. 문학, 역사, 철학에서 제1영역을 어디로 잡든 10년을 하고 나머지 두 영역을 5년씩 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는 학문은 유행이 아님을 상기시켰다. “절대 유행 따라 읽으면 안 된다. 정통적인 것에 대한 까닭 없는 반항이 있는데, 학문은 정통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통적이라는 것은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다. 대학원 등에 가서 철학을 공부하고자 한다면, 커다란 주제를 잡아라. ‘자유’, ‘존재’, ‘필연성’과 같은 무시무시한 주제를 다루고 그런 주제를 다룬 가장 잘 된 책들을 만나라. 피카소는 세밀화의 왕이었다. 그것이 있어서 추상화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즉, 정통에 대한 추구가 있었기 때문에 창조가 가능했다.” 마크C.헨리도 말했다. “뉴만의 가르침을 상기하자. 시간의 편협함을 피하라. 다시 말해 최신 사유라고 해서 최선인 것은 아니다.”(p.123)  

 




이런 공부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강 박사는 선생과 태도를 들었다. “즐기는 수준을 넘어서고자 하면 하루 1시간씩 빡세게 공부하고 매주 2매씩 글을 써봐야 한다. 그러려면 선생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는 선생이 꼭 필요하다.” 이는 책에 나온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대학 교육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두고자 한다면 두 가지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바로 스승과 친구다.”(p.27)

강 박사는 선생의 ‘야단’이 곧, ‘절호의 찬스’임을 강조한다. 선생의 말에 담긴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공부의 기본이다. “좀 더 도전적인 책을 골라서 써 보라”는 말을 들었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무슨 책을 쓸까요”라고 물어보는 것이 기본이라는 것이다. “(선생이) 아끼고 사랑하면 야단을 치게 돼 있다. 그럴 때는 그냥 대가리를 밀고 들어가야 한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간극을 채우려면 혼자서는 안 된다. 선생에게 배워라. 선생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정통적인 학자(교과서)를 찾아라. 간극 때문에 인생이 망가질 수도 있다. 독학은 안 된다.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일로 만드는 것이 인문학 공부다.”

그리고 겸손함. 배움에 있어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고 강 박사는 강조, 또 강조한다. 자신이 공부한 것을 정리하면서 읽는 자세 또한 겸손함에서 나온다. 아무리 날고뛰어도 대가들 앞에서는 ‘삽질’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법. “자기 자신을 겸손하고 냉정하게 파악하고 지적인 겸손함에서 인문학 공부는 시작된다. 인문학의 출발점은 곧, 아주 겸손한 마음이다.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모르면 ‘잘 모르겠다’는 소리를 해야 한다. 어떤 질문을 해도 대답하기 위해서 공부한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인문학은 그리하여, 개념교육이다. 무개념이 양산된 것은 인문학을 소홀한 결과다. 교양 없는 인간의 잉태. 지금 우리가 처한 공황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경제정책의 실기와 고민의 부족. “어떠한 경제정책이나 경제체제가 적합한가라는 문제에 대한 접근은 단순히 경제적 생산과 분배의 효율성을 따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특성에 대한 깊은 인문학적 이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p.91)


강연 후기

강연은 즐거웠다. 어쩌면 그것은 인문학의 즐거움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다시 인문학을 고민한다. 지금-여기에서 인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할까. 나는, 우리는 인문학을 통해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책은 어쩌면, 일반 시민들이 공부하고 향유해야 할 인문학에 대한 접근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 “지적 균형감각은 교양교육을 받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열매다.”(p.123)

그리고 이 말, 명심해야 할 것. “인문학 공부는 책을 읽고 이해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자신이 이해한 바를 글로 써서 정리할 때에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p.18, 편역자 서문 중에서) 공부를 하는데, 이해가 안 된다고? 그렇다면, 또 이 말. “마음을 어지럽히는 텍스트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어 방법이 있다. 바로 여러 번 읽고 비판적으로 읽는 일이다.”(p.123)

“스타가 되고 싶어? 스타가 되고 싶으면 연락해”라던 한민관 노브레이크 엔터테인먼트 대표(<개그콘서트>)의 말을 빌자면,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어? 인문학을 알고 싶으면 책을 사~” 인문학,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고? 이 엄혹한 시대를 관통할 지혜를 얻고 싶다고? 16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이 책 하나로, 당신은 세상을 향한 또 하나의 문을 열게 될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그랬다. 자신의 무지를 자각할 때에만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책을 펴라. 눈과 귀를 열어라. 마음치료의 의사는 바로, 당신이다.    

 





p.s… 이날 강연을 제대로 듣고 음미하고 싶다면, 강유원 박사의 블로그(
http://allestelle.net)에 들어가면 된다. 좀 더 자세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나온다. 책을 읽기 전에 이를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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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깊다 -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
전우용 지음 / 돌베개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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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 서울탐사기, ≪서울은 깊다≫를 읽고

서울이 시끄럽지 않은 때가 있었을까. 올해의 서울도 그렇다. 쇠고기에서 촉발된 촛불들의 행렬이 대표적이다.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다. 서울은 언제나 그렇게 바람 잘 날 없는 도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서울로 서울로 모여든다. 오래 전부터 서울은 그랬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다. ‘말은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고도 했다. 속담의 뜻과는 무관하게, ‘서울’은 그렇게 가야할 곳이고, 보내야 할 곳이었다. 로마제국의 힘을 비유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를 지금-여기의 현실에 대입하자면, ‘모든 길은 서울로 통한다’가 될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들으면, 서운하고 얼토당토않은데다 버럭하겠지만, ‘서울민국’은 어쩌면, 지독하게도 현실이다.

‘유아독존의 수도.’ ≪서울은 깊다≫의 저자, 전우용은 서울을 그렇게 표현했다. 생존과 확장을 위해 농촌을 수탈해야만 했던 도시 중에서도 서울은 유별났다. “조선시대 내내 사실상 유일한 도시였고, 다른 도시의 발전 가능성을 봉쇄한 채 모든 경제적․사회적 자원을 독점하면서 커나갔다.”(p28)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다. 앞선 정권에서 ‘행정수도 이전’ ‘지역균형발전’ 등의 화두를 본격적으로 들고 나오긴 했지만, 서울은 여전히 ‘식탐’ 많은 ‘식신’의 위치다. “서울은 한번 빨아들인 것은 사람이든 물질이든 되뱉지 않았다. 급기야는 스스로 자신의 중력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빅뱅’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어 있다.”(p28~29)

숱한 사람과 물질을 빨아들였던 ‘서울’은, 그러나 자기만의 독자적인 기억이 없다. 아니 정확하게는 기억을 묻은 채 살아간다. 마치 출세와 성공만을 위해 어렵고 힘들었던 기억을 내팽개친 야심차고 야멸찬 드라마 주인공처럼. 누군가의 말마따나, 시간을 새기지 않는 괴벽을 지닌 도시 서울. 너무 많은 기억에 짓눌리면 과거의 잔재가 불길함을 야기할 수도 있지만, 서울은 심했다. 압축성장과 팽창일로는 기억과 사유의 능력을 박탈하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장소를 모욕할 수는 있어도 그 흔적을 지울 수는 없는 법이다. 장소 위에 새겨진 역사는 누적될 뿐 대체되지는 않는다.”(p36~37) 기억이 침잠된 서울의 괴벽에 불평만 늘어놓던 시민이었던 나는, ‘서울은 깊다’는 주장에 솔깃했다. 지워지지 않은 흔적, 대체되지 않고 누적된 어떤 기억이 덧붙여진 서울. ‘인위적으로 조성된 계획 도시’(p52), 서울의 웅숭깊음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더욱 서울을 사랑할 수 있을 터. “기억하는 것만이 역사가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도 역사다.”(p185)

≪서울은 깊다≫는 서울의 속살을, 우리가 몰랐던 서울의 어떤 기억을 끄집어낸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즉위식이 열린 원구단(圓丘壇)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슬픈 상징으로 전락한 역사는 시청부근 호텔촌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역사는 묻힌 채 비즈니스만 횡행하는 풍경, 어쩐지 신자유주의가 집어삼킨 지금의 현실과도 겹친다. 덕수궁(경원궁)의 슬픔도 만만치 않다. 잔디(사초)는 당초 무덤에만 쓰던 풀이었는데, 일본은 이를 대한제국의 심장부였던 그곳에 건물을 헐고 잔디를 심었다. ‘거대한 무덤.’으로 만든 그들의 속셈.

물론 슬픈 역사만 있는 건 아니다. 재미난 팁도 있다.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면 연인들이 헤어진다는 속설은 대체 어떻게 유래된걸까. “여러 이야기가 있으나 내 생각에는 두 가지가 그나마 설득력이 있다. 하나는 1927년 이후 경성재판소(현 서울시립미술관)가 정동에 들어선 이래 이혼 소송이 이곳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배재학교 학생과 이화학교 학생들이 정동 입구로 나란히 걸어 들어가다가 정동교회 앞에서 헤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연인’과 ‘이혼하기 위해 다투는 부부’는 분위기상 확연히 표시가 날 테니 뒤의 이야기가 더 사실에 근접한 것 같기도 하다.”(p205)

그리고 지금은 아늑하고 포근한 도심 속 산책로, 정동길. 그곳은 대한제국 시절, ‘천자의 나라이자 세계 속의 대한제국’임을 내세워 백성들에게 자존심을 심어주고자 한 의도가 있던 장소였다. 또한 지금이야 고전적이고 고즈넉한 모양새를 갖고 있지만, 이전은 그렇지 않았다. 외국 공관을 비롯해 근대식 건물의 집합소였다.

서울 남산에 한 자리를 차지한 와룡묘. 제갈공명을 모신 사당이 서울에 있는 이유 또한 이 책은 알려준다. 일본 제국주의가 남산기슭에 만든 일본인 최고의 충신을 모신 남산대신궁의 상징에 맞서는 한편 충성심 고취를 위한 고종의 ‘꼼수’였단다. 그러니까 현재 와룡묘가 있는 아래쪽에 남산대신궁이 있었다. “와룡묘는 왜인들이 서울 안에 만들어놓은 ‘그들만의 성소’를 바로 내리누르는 곳에 자리잡았다.”(p370)

≪서울은 깊다≫는 그렇게 흥미롭다. 개인의 경험에서 이야기를 확대하면서 깊은 서울을 전한다. 서울을 좀더 보듬을 수 있는 방법이다. 개인의 발견에서 비롯되는 세계 혹은 우주의 확대. 전 교수는 책 곳곳에 ‘상상력’을 동원했다며, 독자에게 한참 미안함을 토로했지만, 나는 외려 고맙다. 좀더 깊은 서울을 공유함으로써 상상력이 활개칠 수 있는 공간은 넓고 깊어질 터이다. 서울이 더 깊고 넓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역시나 상상력이 아닐까.

사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상상하기를 멈췄다. 서울시에서 아무리 ‘천만상상 오아시스’라며 떠들어대도 우리는 알고 있다. 서울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고작 ‘뉴타운’뿐이었음을. 지난 총선에서도 확인하지 않았던가. “1980년대말 이후에 만들어진 ‘신도시’들은 ‘섞여살기’보다는 ‘따로 살기’를 원하는 주택 소비자들의 요구에 충실히 반영했다... 공간과 장소를 공유해본 경험을 갖지 못한 채 자란 아이들이 앞으로 무엇을 공유할 수 있을까”(p56)

그렇게 “연대의식이 사라진 도시는 대립의 현장일 뿐 통합의 공간은 아니”(p57)었다. 서울이 그랬다. 그냥 외따로 떨어진 그들만의 제국이었지. 그런데 지금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다. 광장이, 축제가 서울을 바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성급한 기대. 우리는 어쩌면 ‘쇠고기’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촛불이 하나씩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서로 어울려 살기 위해 계급적 이익을 일부 유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 있”(p56)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다시 말하지만, 성급하고 성마른 기대다. 지금의 서울은 그때와 또 같지 않다.

정리하자면, 우리에게 서울은 무엇인가. 우리는 서울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우리의 서울은 안녕한 걸까. 서울의 속살을 좀더 알고 싶다면 ≪서울은 깊다≫는 충분히 유용하다. 책은 그렇게 서울에 발을 디딜 것을 권한다. 이 책의 미덕은 또 있다. 그곳이 꼭 서울이 아니라도 좋다. 발이 딛고 있는 땅을 좀더 깊이 파고들어가 보라고 속삭인다. 그 깊음에 놀라면서 우리의 세계는 넓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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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꽃 - 농부 전희식이 치매 어머니와 함께한 자연치유의 기록
전희식.김정임 지음 / 그물코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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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하기 위한 필독서, 《똥꽃》
전희식․김정임의 《똥꽃》을 읽고


책과 함께 하는 동안,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따끔거렸다. 그건 내 부끄러움 때문이었고, 내 위선 때문이었다. 나는 가급적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살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똥꽃》은 그것이 단지 착각이었음을 알려줬다. 그랬다. 이 책은 정작 내 노부모에 대한 예의를 제대로 지키고 있었던가, 하는 뼈아픈 자문을 하게끔 유도했다. 아프고 또 아팠다. 특히나 어머니. 

나는 어머니를 다시 생각했다. 2년여 전 위암 수술로 체중이 많이 줄고 아직 수술 전의 입맛을 되찾지 못하신 내 어머니. 그전에도 불효자였던 나는 어머니를 ‘환자’로만 대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움직이는 것이 불안했고, 어머니가 그 전처럼 집안일을 하고자 하시는 것이 불만이었다. 책은 그런 나를 일깨웠다. 어머니를 ‘환자’ 역할에만 머무르게끔 한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었다. 어머니는 어머니 그 자체의 존재였건만, 나는 선을 넘어섰던 것이다. 어머니를 환자의 역할로만 규정해 버린 나의 폭력. 전희식 선생은 치매 어머니를 역할이 아닌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고 있었다. “소박한 효심만으로 늙은 어머니를 모실 수 없을 것이다.”(p.30) 그렇다. 존재에 대한 예의는 친절하고 상냥하고 돌보는 것만으로 지켜질 수 있는 게 아닌데 나는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늙고 더구나 병을 겪은 어머니에게 심신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내 멋대로 규정해 버린 것이다.

전 선생이 어머니를 서울이 아닌 장수군의 시골집에 모신 것은 그런 이유였다. 어머니의 남은 인생을 가두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도 나는 어머니를 ‘환자’의 틀에 가둬 어쩌면 사육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존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각자에겐 고유한 삶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있다. 늙고 병들었던 어머니이라손 자유의지로 행동과 생의 행로를 결정하는 것을 온전히 존중해야 한다. 하물며 전 선생은 그 의지가 자유롭지 못할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그렇게 대했건만, 나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 가족의 간섭과 제재는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설혹 그것이 애정일지라도. 가족 사이에 선이 없다는 자체로 그건 폭력이다. 그것이 선의였다고 해도 역할이 아닌 존재를 질식하게 했다면, 그건 비윤리적인 것이다. 전 선생의 어머니에 대한 태도와 자세는 내게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어머니의 존재감을 북돋우고 있었다. 어떤 가치판단 없이 어머니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존댓말을 쓰고, 오갈 때마다 인사와 큰절을 올리고, 하는 일마다 꼬박 알리고 허락을 받았다. 치매 어머니를 세상 밖에 동떨어진 존재가 아닌, 혼자가 아닌 존재로 여기는 그 태도가 나는 참으로 인상 깊었다. “치매 걸리면 다 그렇다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수롭지 않은 거라고 말은 하면서도 치매 노인의 비난과 의심이 정작 자기를 겨냥하면 열불을 내면서 반박하고 무시하는 것을 나는 많이 봐 왔다.”(p.98)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치매에 대한 편견을 하나 거둬줬다는 것이다. 치매를 단순 병으로 치부하고 치매 이전의 삶과는 단절된, 치료할 수 없는 무엇으로 간주하던 나였다. 그런 면에서 그의 시각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어머니 굴절된 삶의 현재적 표현이 지금의 치매다. 오늘의 어머니를 인정하려면 고른 삶뿐 아니라 굴절된 삶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치매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어머니 인생은 일찍 사라졌을 수도 있다.…치매는 그렇게 살아온 삶에 대한 필요한 현상이고 치유의 과정이다.”(p.99) 한마디로 그의 해석 말마따나, ‘포기한 삶의 틈새로 끼어든 이물질들’.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노인의 고통과 아픔을 덜어 드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해 본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상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나는 정작 알지 못한 채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책이 말하듯,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생각하는 돌봄’이 필요한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자식이 없는 삶은 가능하지만 부모가 없는 삶은 없다”(p.250)는 김광화 선생의 언급마냥, 문득 내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밤이 기억났다. 잠자리 들기 전, 나는 갑자기 울음꼭지를 켰다. 아들의 갑작스런 울음소리에 놀라 방으로 온 어머니에게 나는 “엄마가 죽는 게 싫다”고 징징거렸다. 죽음을 처음 인지하던 시기에 어머니의 죽음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날 안아주면서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우리 아들을 두고 먼저 안 죽어”라고 말했다. 그건 물론 거짓말임을 안다. 어린 아들을 안심시켜 주기 위한.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새삼 그때를 떠올렸다. 아들을 두고 안 죽는다고 했던 어머니의 그 마음. 나는 그런 어머니를 얼마나 이해하려고 했던가. ‘어머님의 건강과 존엄을 생각하는 기도잔치’를 통해 전 선생이 건넸던 이 말은 못난 아들인 나의 마음을 콕콕 찔러댔다. “내 어머니를 간절히 떠올리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없이 베풀고 끝없이 용서하는 어머니 마음을 갖는 것, 세상의 어머니로 살아가리라 다짐하는 것, 어머니를 모심으로써 스스로 세상어머니가 되는 것.”(pp.157~158)

그렇게 어머니와 함께 노인들을 다시 생각했다. 고령화 사회, 실버복지 등을 떠벌리지만, 시류는 그렇지 않다. 노인들을 백안시하면서 ‘어리게 혹은 젊게 보임(동안)’에 대한 과도한 경배수준의 찬사를 읊어대고 있는 것이 지금의 풍경이다. 이건, 늙음 혹은 나이듦에 대한 차별이 명백하다. 이 책은 그래서 어떤 경고다. 누구나 늙고 죽어갈 것을 알면서도 젊음 혹은 동안이라는 이름의 분별없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를 향한. 결국 그 분별없는 열정이 훗날 날카로운 부메랑이 돼 우리의 존엄을 훼손하리라는 것을.  

무엇보다 나는 책의 노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 깜짝 놀랐다. 전혀 생각지 못한, 품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童話)는 있는데 왜 노화(老話)는 없는지, 노인헌장과 노인생활헌장이 정작 얼마나 노인들(의 존엄)을 배제하고 있는지. “노인에 대한 사회의 무지와 무례가 도를 넘고 있다.”(p.161)는 그의 말은 명백한 사실이다. ‘육아’(育兒)에는 그토록 애를 쏟고 사회적 비용을 들이면서, ‘시노’(侍老)에 무관심한 것은 결국 자신과 사회의 존엄을 깎아먹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큰 행사나 공공기관은 방문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올 수 있도록 시설이 마련되고 놀이교사를 배치하기도 하지만 어디에도 불편한 부모를 모시고 갈 수 있는 행사나 공공기관은 없다.”(p.161)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하는 것. 그것에 대해 우리는 좀더 많은 얘기를 나눠야 한다. 누구에게나 닥칠 노년을 위해서라도, 노인들의 마음에 한 발짝이라도 들어가는 일이 중요하다. 전 선생은 책을 통해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사랑은 죽은 세포도 살리고 정성은 통증을 경감시킨다는 체험적 결과를. 노인은 외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같은 하늘아래 숨을 쉬는 존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분들이다. 노인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 얘기에 장단을 맞춰주면서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해주는 일이, 우리네 삶의 품격과 존엄을 위해 필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책은 내 얼굴을 화끈거리게도 만들었지만, 내 어머니, 노인, 치매에 대한 새로운 경지를 열어줬다.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동안을 경배하는 사회보다,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노년을 맞기 위한 질문과 답을 할 수 있는 사회, 그런 대화를 격려하는 사회를 만들어 우리 자신의 존엄을 지켜야한다. 

충분히 밥값 하고 계시는 내 어머니를 위해, 그리고 언젠가 내게도 닥칠 노년을 위해,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좀더 귀 기울이고 어머니의 존엄을 지키는 아들이고 싶다. 이젠 내가 어머니 등을 두들겨 드리면서, 나를 상하지 않게 하면서, 인간과 존엄 그리고 돌봄을 좀더 생활 속에서 실천할 때다.

P.S. 아직 이 해가 저물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남았지만, '아듀 2008~'을 외치기 전까지 몇권의 책을 더 읽겠지만, 이변이 없는 한, 《똥꽃》(전희식·김정임 지음/그물코 펴냄)은, (내가 꼽은)'올해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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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괴물 - 할인행사
봉준호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미군기지의 환경오염 현황 및 정화계획, 정화사업 진행 상황이 상시 공개된다는 경기도의 발표가 있었다.
진즉, 말 안해도 당연해야 할 것이 선심쓰듯 발표되는 것이 나는 못마땅하지.
지들끼리 꿍꿍따, 놀고 있는 꼬라지, 졸라 못마땅.
그렇게 미국만이 유일하게 해외에 군사기지를 두고 있지, 잘났어 증말.  

사실, '괴물'은 여전히 서식 중이다.
2년 전 온 천하에 정체가 드러났음에도, 뻔뻔도 하지.
이젠 새끼까지 깠다.
그 쉐이는 근데 돌연변이인지, 변태인지, 쥐새끼 닮았다. 찍찍.
괴물 찌끄레기로 설쳐대는 꼬라지, 장난 아니다. 머리 용량은 꼴랑 2MB란다.
콱 쥐어불고 싶은 쥐쉐이.
젤로 짜증나는 건, 그 쥐쉐이, 약자들만 물고 늘어진다는 게다.
괴물 찌끄레기다보니, 만만한 건, 그저 약하고 없는 자들 뿐이다.
딴데 가선, 찍소리도 못하는 쥐쉐이.
토건사업 한답시고, 기실 시궁창이나 뒤지던 쉐이라, 악취만 진동하는 쥐쉐이.
70년대의 구호가 그랬다지. "우리 동네 남은 쥐를 모두 잡자"
어쩜, 그리 70년대 구호와 딱 어울리시나. 이 쥐쉐이.
절대 괴물이 되지 못함을 알면서도, 괴물을 욕망하는 꼬라지하곤.

2006년 7월27일, '괴물'의 존재가 세상에 공개적으로 처음 드러났던 날이었다.
영화 <괴물> 개봉.
1300만이 넘는 흥행의 첫 테이프를 끊으며 등장했던 괴물은,
끝내 박멸되지 않았다.
2년이 지난 지금, 괴물은 되레 서식지를 넓힌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우리 안의 괴물도 점점 더 커져간다.
2년 전에서 한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외려 뒤로 밀리고 있는 우리 동네.
쥐쉐이까지 득세할 정도로 서식환경이 더 나빠진 탓이다.
괴물과 쥐쉐이의 서식앞에 우리의 생존법은, 아마 '하악하악'(?)


아래는 2년 전, 내가 만난 <괴물>에 대한 품평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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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들의 연대 보여준 '괴물'

“약자는 뭉쳐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무너지는 수밖에 없다.”


#1. 최근 주한미군기지의 환경오염실태와 비용처리 문제가 재차 도마 위에 올랐다. 주한미군이 반환했거나 반환할 예정인 기지 중에서 환경오염 조사를 마친 29곳의 오염 실태는 한마디로 ‘어이없음’이었다. 무상으로 빌려 쓴 주제에 이를 더럽힌 ‘싸가지 없음’ 때문이다.




이에 한국과 미국은 환경치유와 절차 등을 놓고 1년6개월여 동안 ‘협상’을 진행해 왔다고 한다. 한국정부는 ‘오염자부담원칙’을 들어 주한미군의 책임을 주장했으나 ‘합의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오염정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기지들을 돌려받게 된 상황. 힘 센 놈의 ‘강압’에 의한 것인지, 그렇지 못한 자의 ‘포기’였는지는 몰라도, 이른바 ‘합의’는 이뤄졌다. 그렇다면 이른바 깡패에게 삥 뜯길 때도, ‘합의’는 된 거다.




한국 정부를 대표한 환경부는 미국과의 합의 결과를 “우리 정부가 원하던 수준에 미흡하다. 나머지 오염 치유는 반환 이후 우리나라(국방부)에서 치유할 계획이며, 국민부담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환경부는 그 치유 비용을 기준에 따라 277억원~1205억원이 들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환경단체 등에서 추산한 수천억과는 큰 차이가 난다.
"오염 미군기지 반환, '협상'이 있긴 있었나"
 14개 미군기자 환경오염 실태 또 드러나



#2. 2000년 용산 미군기지 영안실 부소장 맥팔렌드 앨버트는 한국인 직원에게 주검 방부처리용 약품인 포름알데히드 475㎖짜리 480병(20상자)을 싱크대 하수구에 버리도록 명령했다. 포름알데히드는 장기간 노출될 경우 백혈병 등 암을 일으키는 발암물질로 물에 희석돼도 독성이 없어지지 않으며, 하수구에 버릴 경우 하수관을 타고 퍼지는 가스도 유해하다. 이른바 ‘맥팔렌드 사건’.




당시 명령을 받고 이를 방류한 군무원은 이를 미8군 34사령부에 보고 및 진정을 제기했으나 미군은 별 내용없이 유감만을 표시했다. 이에 녹색연합은 당시 토머스 슈워츠 주한미군 사령관과 맥팔렌드 부소장을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서울지검은 포름알데히드 무단방류 지시 혐의로 맥팔렌드를 벌금 500만원에 약식기소했고 서울지방법원은 정식재판에 회부했다. 




담당재판부는 공소장 부본을 맥팔렌드에게 송달하려 했으나, 주한미군 당국은 수차례 수령을 거부했고 현재까지 공판은 열리지 못하고 있다. 더 웃긴 건, 미군은 맥팔렌드에 대한 자체적으로 감봉 30일의 징계처분을 했다는 공식입장을 발표했으나 얼마 뒤 맥팔렌드는 영안소 소장으로 승진까지 한 반면 이 범죄행위를 시민단체에 제보한 한국인 군무원은 해고당했다. 웃기는 짬뽕이다.




똥배짱과 굴욕 사이




환경오염 관련 국제 원칙은 ‘오염자’ 부담이다. 그리고 범죄가 저질러졌다면 처벌받는 것이 당근 아닌가. 오염자와 범죄자가 누구인지는 명약관화하다. 그런데도 저지른 자는 ‘똥배짱’이고 피해를 입은 자는 ‘굴욕’이다. 줄 거는 다 주면서도 돌려받는 건 불신뿐인 이 괴상망측한 상황. 지금의 한미관계는 예를 들자면, 부하가 살인을 저지른 조폭 두목을 위해 큰집까지 갔으나 가족들도 돌봐주지도 않고 배신당한 그런 형국 같다. 최소한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말,은 여기서는 통용될 것 같지 않다. 이미 ‘괴물’이 돼 버린 마당 아닌가.




잠깐, 괴물(怪物)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1. 괴상하게 생긴 물체.

2. 괴상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괴상(怪常)의 의미는 또 이렇다. 보통과 달리 괴이하고 이상함. 보통 정도의 수준이라면 저런 어이없는 작태를 보일 리도 없다. 한마디로 수준이하다. 수준 이하의 것들을 이제부턴 ‘괴물’이라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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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사회가 낳은 ‘괴물’

 

개봉 직후 승승장구, 파죽지세인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 이런 미국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반미감정 어쩌구저쩌구 하는데 일정부분 맞다. 한강변에 나타나는 괴물의 탄생비화(?)를 다룬 첫 장면. 주한미군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한국인에게 포름알데히드의 무단방류를 지시한다. 그렇다. ‘맥팔렌드 사건’이 자연스럽게 대입된다. 독극물을 먹고 자란 괴물은 한강을, 서울을, 한국을 공포로 잠식한다. 미국이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현실사회에 대한 노골적인 메타포(은유)다.




이와 함께 미국(정확하게는 부시정부)의 괴상스러움은 다른 형태로도 풍자된다. 괴물의 탄생에 일조한 독극물의 방류에 이어 대중에 공포심을 주입하는 ‘(괴물)바이러스’. 기득권이 자신의 세력과 힘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은 알려져 있다시피 간단하다. 공포와 위험을 조장하는 것. 기득권의 개인기다.




영화 속에서도 이 같은 기제는 고스란히 작동한다. 있지도 않은 괴물 바이러스는 미국과 당국에 의해 존재하는 것처럼 규정된다. ‘에이젼트 옐로우’. 웃기지도 않은 바이러스 퇴치단의 존재에서 국제 정세의 한 단면이 연상되지 않는가. 그렇다. 이라크전. 전쟁광 카우보이들의 전쟁 명분은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WMD)와 생화학무기였다. 이미 일을 개차반으로 벌려 놓고선 ‘잘못된 정보(miss information)’에 의한 것이라고 당당히 말한 카우보이 괴물.




미국은 최근에도 ‘잘못된 정보’를 나불거렸다. 지난 6월 수니파 종교지도자를 7시간이나 구금해 수니파 이라크인들의 강력반발을 사기도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란을 향한 군사공격 위협 역시 마찬가지다. 부시정부는 저질렀던 실수를 되풀이하는 작자들의 모임 혹은 저질러 놓고선 나중에 ‘아님 말구’라며 뻔뻔하게 들이대는데 일가견 있는 집단이다.




그런 한편으로 기득권(지배자)이 만들어놓은 바이러스 포비아의 악영향은 세상을 우울하게 만든다. 사람들 사이에 만드는 간극. 극 중 마스크를 쓴 사람들의 행렬이 이를 대변한다. 기침하는 사람에 대한 따가운 눈총. 이를 통해 문득 AIDS바이러스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떠올린다. 전염에 대한 과도한 공포심을 조장하고 동성애에 대해 폭력을 가하도록 만든 어떤 편견. 이 편견 또한 우리 안의 괴물.
편견과 차별 그리고 자본, 감염인의 생명을 노린다
감염인에게 날아드는 해고통지서, 직장검진



그렇다. 괴물이 미국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괴물’은 다층적이다. 시작부터 ‘독극물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괴물>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사회를 그렇게 투영한다. 무고한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안겨다주고 생명을 빼앗는 괴물의 존재는 도처에 깔려 있다. 동맹을 무기로 때론 한국민의 삶을 억압하는 미국, 없는 자를 더욱 핍박받도록 시스템을 강권하는 신자유주의, 어이없는 명분으로 전쟁을 도발하는 패권주의, 한국이라는 땅에서의 비극 혹은 재난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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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은 단순히 자연 발생한 돌연변이 개체가 아니다. 비열하고 때론 평범하기 그지없는 악들이 쌓이고 쌓인 퇴적물이다. 그저 ‘깊고 넓은’ 한강에 방류하면 독극물이 희석될 것이란 단순치명적인 발상이 불러온 가공할만한 결과. 그 결과물 앞에 사람살이는 그저 괴물에게 무기력하게 당해야만 하는 것일까. 정부는, 언론은, 경찰은, 의사는..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은 과연 무엇을 해 줄 것인가.

 

 

현실사회의 메타포




봉준호 감독은 미군으로부터 잉태된 괴물의 활약상(?)을 현실사회의 여러 모습과 결합시킨다. 괴물로 인한 재난은 그동안 우리네 사람살이를 끔찍하게 만든 인재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영화상의 설정이 낯설지 않다. 제대로 된 근대화를 거치지 못한 채, 비호감을 급호감으로 바꾸고자 노력했던 세월. 정권과 기득권의 호령에 억지춘향식 끌려 다닌 부작용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허우대 좋은 조어를 만들어놨지만, 음습한 곳에서 키운 한강의 괴물은 결국 우리네 사람살이를 위협하는 꼬라지.




봉 감독은 이를 위해 한강변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한 가족을 등장시킨다. 현서만 완전소중 챙기는 빈둥빈둥 소시민 강두(송강호)를 비롯, 운동권 출신 대졸실업자 남일(박해일), 늘 타이밍을 놓쳐 늦되는 남주(배두나), 강두의 현명한 딸 현서(고아성), 그리고 과거세대의 초상을 대변하는 할아버지 희봉(변희봉). 잘난 것도, 별달리 대수로울 것도 없고 가끔 사고 치면서 근근이 하루하루 버티는 루저 가족.




이들은 우리네 사람살이의 비극을 보여준다. 외부 혹은 내부의 적들에 둘러싸인 눈물나는 분투 혹은 애환. 현서를 찾기 위한 박씨 일가 앞에 우리 내부의 괴물이 떡하니 나타난다. 죽은 줄 알았던 현서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박씨 일가의 말을 씹는 건 미군도 아니고, 바로 내부에 있었다.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에 노출된 위험인물로 낙인을 찍는 것은 물론, 말을 씹는 것도, 우리를 지켜주는 존재로 알았던 ‘공권력’.




그들은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아이를 잃은 슬픔 따윈 안중에 없다. 또 다른 병균의 숙주로 치부해버리곤 감금과 치료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딸을 찾고자 애원하는 강두를 가볍게 정신병자로 몰아세우는 의사의 정신병적 매몰참은 또 어떻고. 뇌물 요구하는 공무원, 그림에만 몰두하는 언론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등등 우리 안의 괴물은 똬리를 튼 채 언제든 우리네 삶을 그로기로 몰고 갈 태세다. 강두 가족은 그저 누구의 도움도 없이 고군분투할 도리밖에.




뭐 글타고 이런 알레고리를 심오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익숙한 기제들 아닌가. 그저 웃으면서도 서글픈 심정이 밀려듦을 막을 순 없지만.




혹자는 바이러스에만 골몰하고, 괴물을 잡는데 띄엄띄엄한 정부나 당국의 처사가 이상하다고도 했지만, 나는 그것 역시 이 땅의 현실을 넌지시 알려주는 상징이 아니었나하는 싶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 구해주기보단 뒷북만 열라 쳐대는. 늑장대응, 수수방관..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봉 감독이 그걸 감안했다면 빙고~, 아님 말구.^^; 혼자만의 해석일 뿐이니 다른 생각이라면 나에게 돌을 던져도 좋다만ㅋㅋ 




어쨌든 영화의 이미지들은 우리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이나 현실을 적나라하게, 혹은 넌지시 떠올리게 만든다. 악몽 같은 일들을 여느 일상처럼 겪는 이 땅의 특수한 상황에서 괴물은 바로 바로 우리를 자양분으로 삼아 태어난 것이 아닌가. 이 풍자를 웃으며 바라봐야 하는 씁쓸함. 이 쓸씁함과 슬픔을 블랙유머로 풀어낸 봉 감독의 솜씨야 여기저기서 주야장천 떠벌린 마당이니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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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봉 감독은 정치적 함의를 다분히 품고 있음에도 프로파간다로서의 괴물을 직조하진 않는다. 그의 시선이 꽂히는 것은 괴물 등쌀에 부대끼는 소시민의 삶과 그들의 연대다.





약자들은 뭉치고 서로를 보호해야 한다




<괴물>은 우리가 슈퍼맨이나 X맨 등 기존 할리우드 영화들이 보여준 영웅상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존재와 맞닥뜨리도록 한다. 그건 일방적 구원이 아니다. ‘상호 보호’라는 테제를 간직한 한국형 영웅이라고나 할까. 그들은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 악을 무찌르는 익숙한 영웅의 전형과 다르다.




그들은 자기 삶을 지키려는데 충실하다. 굳이 가족애나 가족주의란 테두리를 짊어지지 않아도 좋다. <괴물>은 일견 현서를 구하기 위한 강두를 비롯한 박씨 일가의 ‘괴물(무찌르기) 원정대’의 좌충우돌기 같지만 결론까지 보자면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 괴물에 잡힌 현서가 그 출구 없는 하수구에서 더 작은 아이를 보호하려 애쓴다. 탈출을 시도하다 두 명 모두 괴물의 입에 먹혔을 때도 현서는 그 아이를 자신의 작은 몸으로 에워싼다.  그리고 강두가 그 아이를 거두는 과정.


그들은 약하긴 매 한가지지만 경쟁이나 생존을 위해 더 약한 자를 밟고 일어서지 않더라. 봉 감독이 인터뷰에서도 밝힌 내용도 그렇다. “...서로가 서로를 계속 보호하려는 이런 설정은 제가 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기도 해요.”




미군의 악행과 공권력의 부재로 괴물은 설쳐대고 가족은 갈기갈기 찢긴다. 나약한 소시민들이야 ‘보이는 위협’ 앞에 움츠러들고 타인에 대한 경계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 그건 인지상정이다. 그럼에도 아무 액션 없이 무너질 수 없는 것이 사람살이다. 괴물로부터 위협당해도 더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힘이 필요한 곳엔 손을 내밀 것을 권하는 것이 내가 본 <괴물>이었다.




누군가를 짓밟고 일어서라는 무한 경쟁의 구도를 주입시키지 말았으면 한다. 약육강식이 아닌 상호보호가 필요한 시대. 자국민들의 안위를 보장하지 못하면서 실체 없는 국익을 들먹이며 ‘걱정마라’는 흰소리만 해대는 정부가 누구에겐 괴물일 수도 있다. 대체 누구를 위한 이익인가. 양심을 걸고 했다지만, 그의 양심을 믿는다손, 그 양심이 지켜줄 것은 정작 약자들이 아닌 강자의 이익일 수 있음을 모르는 걸까, 알면서 그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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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경제수준의 국가들 중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느끼는 나라의 비극(MBC다큐멘터리 '행복'을 보니 그러더라). 강자는 괴물이 되고 약자는 노리개로 전락하는 사회. 장삼이사의 사람살이는 세계평화나 정의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조금이라도 더 불행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뿐이다. <괴물>의 괴물이야 보이는 위협이지만, 21세기를 휘감고 있는 괴물은 워낙 얍삽하지 않은가. 그 괴물에 맞설 수 있는 건 서로 손을 맞잡는 것 밖에 더 있겠나.




그러나 사실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남의 고통엔 관심없는, 그래서 너무도 엄혹한. 최근의 일만 놓고 봐도 그렇다. 포항 건설노조의 포스코 본사 점거를 놓고 ‘왜’라고 물으려 하지 않고 그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시선, 평택 대추리 농민의 절규·비정규직노동자들의 울부짖음에도 되려 그들을 배부른 자들의 농땡이 정도로 치부했던 눈길. 악의 평범함. 누구 말마따나 남을 짓밟고 일어서는 것이 미덕이라고 강요당하는 시대, “너의 불행과 아픔이 곧 나의 행복과 기쁨”이 이 시대의 명징한 징후 아니던가.


과연 이런 상황에서 연대가 가능하고 희망을 끄집어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신기섭 한겨레 논설위원은 이렇게 말한다. “가장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기득권층은 원래 그렇다 해도, 이들과 엇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은 달라야 한다. 그런데 왜 그들조차 점점 외면할까? 제 스스로 고통을 감당하기도 버겁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이웃의 고통에 예민해지는 것이 함께 사는 길이다.”


이글, 일독을 권한다
☞ 남의 고통에 무덤덤한 사회

최소한 인간은 아니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괴물이 되지 않는 길도 명징하지 않는가. 나도 당신도, 우리 안에서 키운 괴물에 잡아먹히는 일은 끔찍하다. 그리고 그것 자체도 인식하지 못한 채 사는 것은 더 끔찍하다.


<괴물>을 보면서 새삼 이 문구가 떠올랐다.

“약자는 뭉쳐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무너지는 수밖에 없다.”

내가 아는 약속의 장소는, 물론 없을 지도 모르지만, 이런 곳이다. 약자들이 뭉치는 곳.

그래서 나는 <괴물>이 좋았더랬다.






궁금하다. 당신이 본 <괴물>은 어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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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 외로운 너를 위해 쓴다
정이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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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마지막'으로 읽은 책. 무엇을 떠나보내고 싶어서였을까. 무엇을 정리하고 싶어서였을까. 누군가 그러더라. 연말, 소득공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 안에 가득찬 미련한 감정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흠, 그럴 듯하단 생각이 들긴해.

사실, '작별'이란 제목이 냉큼 마음으로 들어왔다. '이별(離別)'이 아닌, '작별(作別)'이어서 좋았달까. 그게 뭐, 별다른 차이냐고 투덜거리면, 할말은 없어.^^; 순전히, 내 억측이지만, 작별이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행위라면, 이별은 왠지 내동댕이쳐진 느낌이야. 이별은, 쓸쓸한 느낌이 더해. 백과사전을 뒤져보니, 그러더라. 작별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짐. 또는 그 인사', 이별은 '서로 갈리어 떨어짐. ≒별리·상별'. 내겐, 혀에서 구르는 '작별'의 어감이 더 좋아.

정이현은, 말하고 싶어했어. 나직하게. 나는, 그 말을 조근조근 듣는 아이가 됐어. 별다른 이유가 있겠어. 진짜, 작별할 시간이잖아. 2007년에게. '마지막'이라는 말이 주는, 이 묘한 감상들. 당신도 알잖아. 말끝마다, 마지막, 마지막 하면서 사람들은 어떤 주술을 외지.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어느 순간에 대해. 나는, 그 순간을 나누고 싶은 책으로 <<작별>>을 고른 게지. 나에게도, 영영 작별을 고하고픈 2007년의 어떤 순간들이 있으니까.

정이현은, 7개의 감정을 분절해 놨어. 외롭게, 가득하게, 어른스럽게, 자연스럽게, 사랑스럽게, 뼈아프게, 당혹스럽게. 덜그럭덜그럭. 정이현은, 균질하지 않아. 감정의 결은 출렁거리면서도 켜켜이 생의 결을 쌓아가고 있더라. 굳이 어렵게 따라갈 필요는 없더라. 자신을 증명하면서 타인과 소통하고픈 욕망에 시달리면서도, 타인과의 부대낌에 에라이,하고 고독을 택하고픈 소망 사이에서 외줄을 타기도 한다.

나는 처음, 정이현을 읽었다. 대체로 <<작별>>은 나른하고 미끈해. 섬뜩한 귀기나, 감정의 파고가 벅차 오르는 클라이맥스는 없어. 이 글에는, 도시 중산층, 큰 굴곡 없이 사랑받고 자란 사람의 향기가 은연 중에 뿜어나오더라. 뭐, 그것이 나쁘다거나, 좋다거나, 그런 말은 아니야. '마지막'을 레떼르를 붙이고 보기엔 무난하단 얘기. 2007년12월31일과 2008년1월1일이 사실 다를 건 없지만, '작별'은 12월31일에 어울리는 인사가 아닐까. 정이현의 '단칸방'에서 나온 지금, 나는 그냥 '90년대'가 아른거린다. 보고 싶거나, 그리운 그런 것은 아니고. 작별도 제대로 할 필요가 있지. 발길에 걷어채는 과거 때문에 발걸음을 떼기가 힘들다고? 발목을 친친 감으면서 매달리는 미련과 후회 때문에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겠다고? 그래도 우린, 거닐어야 한다는 걸 알잖아. 생은 그래도 지속됨을 알잖아.

그래, 2007년의 '균열'은 뒤편으로 밀어넣고. 2008년을 향한 '항해'가 기다리나니. 

그래,
작별은,
'뜨거운 안녕'보단 '나직한 안녕'이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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