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갈 수 있는 배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윤희 옮김 / 살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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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6년 11월, 온/오프라인 서점가를 휩쓴 <편의점 인간>을 기억하실 겁니다. 책을 읽어보지 못한 분들도 아쿠타가와 상을 비롯해 일본 3대 문학상을 휩쓸었던 작가의 흔적을 곳곳에서 목도하셨을 테지요. 오늘 소개드릴 책은 무라타 사야카 작가의 신작. <멀리 갈 수 있는 배>입니다. <편의점 인간>이 편의점에서 일해온 저자의 어떤 시원이라고 한다면, 오늘 소개드릴 책은 본격적으로 그의 세계관으로 도입할 수 있는 책이랄까요.




2.

주제는 섹슈얼리티. 정확히는 성에 관한 고착화된 시선의 윤리랄까요. 주인공은 셋. 남장을 하는 리호, 여성성에 집착하는 츠바키, 물체  감각으로 살아가는 치카코입니다. 이 세명이 올라탄 배, '섹슈얼리티'라는 이름의 바다를 표류하는 세 여자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국내보다는 주제면에서 확실히 한 발 빠른 느낌이 들기도 해요. 섹슈얼리티나 젠더 관련한 화두는 이제서야 국내에서 강력하게 얘기되고 있는 것들이니요. 옳고 그름과 관계없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가장 우려해야 할 것이 그 불편함일 테지요. 정확히 그 지점에서, 이 소설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불편한 이야기를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펼쳐보이는 것이죠. 섹슈얼리티를 원료 삼아 요리를 보여주는 것 같달까...





3.


오늘은 독서실 책상에 일본 사람의 특징을 다룬 책과 다양한 상식, 예절에 대해 엄격하게 편집된 책을 늘어놓았다. 그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늦게까지 있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자습실에 다니기 때문에 특별히 공부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니 늘 이런 잡학 관련 책들을 읽게 된다. 별에 대한 감각이 강한 치카코는 이렇게 다양한 상식이나 규칙을 알아가는 것이 좋았다. 애초에 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규칙의 나열은 언제 보아도 흥미롭고 사랑스러웠다. 남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내용의 책도 좋았다. 소꿉놀이를 하면서 아이들은 규칙을 만든다. 여기부터 앞쪽은 지하실이니까 아버지만 들어가야 해, 아침 식사는 모두 식탁에 앉아서 먹어야 해, 이렇게 단순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소꿉놀이는 즐겁다. 치카코에게는 이런 책이 그런 놀이의 규칙을 나열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소꿉놀이 안에서 어느 틈엔가 생겨난 규칙, 그것을 지키기 때문에 환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저자는 정상과 비정상, 혹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들의 위험함, 평범함과 비범함 사이의 경계를 유려하게 넘나듭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며 경계선을 뭉툭하게 해체하는데, 저자의 탁월함이 돋보이는 부분이지요. 자연스러운 것들은 자연스럽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규범이 되었는지요. 이를 테면, 두발단속이랄지, 교련이랄지,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던 많은 제도들이 그렇습니다. 한때는 노예제도 역시 자연스러웠던 시절이 있었죠. 


오늘 소개하는 소설도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느끼지만 이것은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 아니 정확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 재료를 자연스럽게 튀기고, 볶고, 지지는 <멀리 갈 수 있는 배>. 많은 분들께 교과서 대신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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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남긴 증오
앤지 토머스 지음, 공민희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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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앤지 토머스의 <당신이 남긴 증오>입니다. 표지 일러스트부터 강렬합니다. 헤어밴드와 눈빛은 차치하고서라도, 피부색과 푯말이 주는 함의가 이미 클 텐데요. 원제인 "The Hate U Give"의 앞머리를 따 보면 THUG이 됩니다. 러프하게 번역하자면 폭력배...정도가 되겠지만 아시다시피 굉장히 다층적인 의미를 가진 낱말이랄까요. 얼마간 책의 방향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해요.



2.

  간략하게 책 소개를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아마존과 뉴욕타임스에서는 출간과 동시에 판매량 1위를 기록했고, 올해까지 2년 연속 아마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입니다. 이야기는 평범한 16살의 주인공이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시작됩니다. 가해자는 경찰. 사건은 다음 날부터 언론에 선정적으로 보도가 되기 시작하는데요. 줄거리부터 긴박합니다. 

  그러니까 이걸 두고서 혹자는 포커 게임에서 동력을 얻어와 '게임'이라고 했던 건가요. 젠더, 세대, 성별, 피부색까지....모종의 플레이어가 본인이 원하는 결과를 위해서 패러다임을 씌운다는 겁니다. 이를 테면 젠더 문제가 화두인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사건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여성혐오'같은 방향으로 사건을 몰아가는 식이죠. 그렇게 되면 전혀 관련 없는 화두들이 덕지덕지 살이 붙게 되고, 정작 내부의 본질은 보기가 힘들어지게 되는 것인데요. 그로 인해서 누가 이득을 보는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지 않으면 손쉽게 휘말리게 됩니다. 

  오늘 소개드릴 소설도 비슷한 맥락이에요. 묘사방식에 있어서 경찰은 모범적인 인물로, 피해자인 칼릴은 마약 거래상이라는 의혹으로 그려집니다. 무기같은 건 소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생략해 버려요. 수사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가해자인 경찰은 무죄로 풀려나게 된다. 하지만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주인공 스타. 공교롭게 현장에 있었던 스타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소설의 윤리학이죠. 현실과 맞서 싸울 것인가, 안전한 침묵을 택할 것인가. 


  당장 한국에서도 혐오와 관련된 사건은 멀지 않습니다. 멀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어제만해도 폐지 줍는 할머니가 이유없이 죽어야 했지요. 선과 악이 뚜렷해 보이는 이러한 혐오 사건들은 쉬워 보이지만 그 내면에 숨어있는 본질을 보기 위한 치밀한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윤리학을 보여주는 것이 다름 아닌 소설의 역할일텐데요. 혐오와 인종차별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 어려운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3.

열두 살 때 부모님은 내게 경찰이 날 불러 세웠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해 알려주었다. 아빠는 체포되거나 총을 맞는 데 어린 나이는 없다고 말했다. "스타, 경찰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손이 보이게 하고 절대로 갑자기 움직여서는 안 돼." 난 누군가가 칼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길 바랐다.




지나친 위악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생생한 인물묘사와 섬세한 표현으로 공감을 자아내는 소설입니다. 21세기 폭스에서 제작해 개봉을 앞두고 있기도 하고요. 많은 분들께 그전에 원작으로써 권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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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서광들
옥타브 위잔 지음, 알베르 로비다 그림, 강주헌 옮김 / 북스토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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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 기다리시는 분들 많으셨죠? <애서 잔혹 이야기>로 유명한 옥타브 위잔의 <애서광들>입니다. 애서가 무엇이냐. 사전식으로 풀자면 책을 아끼고 사랑함 정도일까요. 그렇다고 논픽션은 아니고 1895년에 프랑스에서 출간된 소설집입니다. 저자 본인이 저명한 애서가이기도 하고요. 수록된 그림은 알베르 로비다가 맡았습니다. 이야기의 동력으로는 저자의 애정만한 게 없는 것 같아요. 애서가가 쓴 책을 욕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므로, 책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빠져들 소설집입니다.





2.

  총 11편의 소설이 담겨 있어요. 종종 사료로 역사가 다뤄지기도 하면서 픽션답지 않은 입체감을 조성하기도 하는데요. 어디까지나 굉장히 다양한 책의 이모저모가 담겨 있어서 특별한 구석이 있습니다. 책 자체가 굉장히 인기를 끌었는데, 수록된 그림에도 그 지분이 충분해요. 작가가 훌륭한 이야기꾼인 것도 있지만 수록된 삽화들이 이야기의 디테일들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습니다.






3.

  무엇보다 '애서'라는 주제에서부터 이미, 서재를 갖고있는 누구나 소장을 꿈꾸게 만드는 책이지요. 애서가라면 당연히 애서가들의 이야기에 끌리게 마련이므로 소장가치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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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수에 사로잡히고, 운명적이어서 이해할 수 없는 열정에 짓눌린 채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젊은 시절이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그때까지도 당신은 내 마음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끝났습니다. 모든 게 정리됐습니다. 당신이 내 청혼을 받아들였으니까요. 그 문제로 더는 왈가왈부하지 맙시다. 공증인들에게 맡겨둡시다! 그런데 시지스몽의 서재를 둘러봐도 괜찮겠습니까?” 엘레오노르가 소리쳤다. “이제야 모든 걸 알겠네요. 당신도 시지스몽의 친구로군요. 그 역겨운 책들을 보려고 온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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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서재만큼 개인을 잘 보여주는 공간이 또 있을까요. 그 서재에 관한 문장들은 그 자체로서 애서가들을 한껏 달뜨게 합니다. 책을 사랑하는 누구에게나 권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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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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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저자인 엔도 슈사쿠는 하루키를 폄하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스타일 하나로 밀어붙이는 작가인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하지만 소위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타일'은 아직도 충분히 감상되지 못했달까요. 많은 작가들이 그러한 스타일 하나를 구축하지도 못하는 게 실정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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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트 어스 - 수천 년간 지구를 빛낸 색의 과학사 살림청소년 융합형 수학 과학 총서 40
필립 볼 지음, 서동춘 옮김 / 살림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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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 소개드릴 책은 '살림'에서 출간된 '브라이트 어스'입니다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종류의 과학사 책이에요그러니까 과학사 일반이 아니라 '색깔'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과학일반을 들여다보는 책입니다이런 종류의 책은 특정 지점에서 깊게 파고들 수밖에 없는 형태이고저는 그 깊이를 일종의 필연이라고 보는 편이에요넓이와 너비도 중요하지만 과학이라는 주제는 얼마간 깊이가 확보되어야 비로소 재미가 있거든요올리버 색스가 추천사를 쓰기도 한 책인데요내용은 이렇습니다.

 

색을 만들어내는 재료에 대해 예술적으로 서술한 것은 물론이 방대한 문화예술사를 한 권에 담아낸 역작이다....


 

2.

저자는 '필립 볼'. 작가라고 해야 할까요. 20년 넘게 네이처의 편집자로 지내기도 했습니다하지만 그보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화학을브리스톨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이력이 중요할 테지요과학 및 대중 매체에 주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는 저널리스트로 보시면 됩니다그러니까 국내에선 정말 찾아보기 힘든 유형의 작가인데요과학사를 이처럼 흥미로운 부분을 선정해유려한 문장으로 담아내는 작가가 있다는 게 정말 부럽기도 해요대표적인 저술로는 <H2O>가 있는데오늘 소개드리는 책을 읽으면서 다른 작품들도 꼭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책의 구성은 단순합니다총 12장인데요. 1장은 '보는 사람의 눈'. 다시 말해 화실에 들어선 과학자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벌써부터 재밌잖아요. 2장은 물리학과 화학을 무지개라는 현상과 연결지어 설명하게 되고 이어지는 장들에선 색의 과학사그리고 화학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미술작품염료모더니즘에 관한 담론까지 유려하게 펼쳐나가는 책이에요긴 말 필요없이 본문을 볼까요.


 

3.

 

지오토의 자연주의는 시간을 그림의 한 구성요소로 편입했다고 말할 수 있다그 이미지는 더 이상 불변의 상징이 아니라 실제 흐르고 있는 시간에서 한 순간을 고정시킨 것이었다이것이 화가들에게 끼친 효과는 실로 굉장했다자연에서 보이는 한 장면은 주위의 빛에 의존하며 그 빛은 시간에 따라 변한다.

어두컴컴해 음산하거나지중해의 강력한 햇살에 하얗게 표백되거나저녁놀에 부드러워질 수 있다이것은 화가들에게 극적인 분위기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자연에 미치는 빛의 효과를 철저히 이해해야만 가능했다자연에 충실할 것을 고집함으로써화가들은 중세적 구성의 양식화된 관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연은 무한히 다양한 형태와 색을 제공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동시에자연주의는 새로운 도전을 제기했다화가들이 만족스런 구성을 하는 데 필요한 색과 대상의 조화로운 배열을 부과하는 법칙이 자연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책이 경망스럽지 않은 선에서흥미진진한 에피소드를 담아내기도 하고색이라는 테마에 한정해서 깊이를 확보해내기도 하는 탁월한 책이에요많은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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