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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기 전 나의 이야기
카타리나 베스트레 지음, 린네아 베스트레 그림, 조은영 옮김 / 김영사 / 2018년 11월
평점 :
1.
오랜만에 괜찮은 신간을 추천합니다. 카타리나 베스트레의 <내가 태어나기 전 나의 이야기>입니다. 저자가 낯설 만도 합니다. 현재 생명과학부에서 세포생물학을 연구하고 있는 분이거든요. 다만, 타고난 글재주를 가지고 웹에서 많은 기사를 써왔습니다. 그게 굉장히 인기를 끌었는지, 이렇게 책의 형태로 출간되자마자 전세계 19개국과 판권 계약을 맺었어요.
자연과학 교양서적의 필연적인 지루함과 삭막함은 저는 관련 전공자들의 직무유기로 보는 편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소개드릴 책은 역시 빌 브라이슨을 필두로 한 저널리스트들의 기조를 닮아 있어요. 쉽게 말해 쓸데없이 흥미롭습니다. 백과사전이나 전공서적에서는 좀처럼 등장하기 힘든 표현들과 과정들이 적나라하게 포함돼 있어요.
즉, 본인의 전공분야인 세포생물학의 기본원리를 다룹니다. 하나의 세포가 어떻게 복잡한 기관을 갖춘 인간이 되어가는지, 그 경이로운 과정을 얇고 밀도있게 담아내고 있는 책이에요.
2.
재밌습니다. 우선 동생이 그림을 그렸고 글은 본인이 썼는데 궁합이 좋아요. 첫 문장은 이렇습니다. 임신 몇 시간 전, 누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경주가 시작된다. 벌써부터 독자들의 시선을 잡아채는 대목이에요. 출산에 이르는 과정은 주로 임신부의 시점에서 서술되곤 하지요. 하지만 이 책에서 출산과정의 절대적인 주체는 태아라고 얘기합니다. 태아. 모두가 겪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절의 이야기. 그렇게 이 책의 제목은 <내가 태어나기 전 나의 이야기>가 된 것이지요
3.
아리스토텔레스는 살아 있는 생물이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생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믿음에 따르면 곤충은 나뭇잎에 맺힌 이슬에서 생겨나고, 나방은 양털에서, 굴은 끈적한 진흙에서 만들어진다. 2천 년이 지난 후에도 이런 발상은 여전히 유행했다. 17세기 화학자 얀 밥티스타 판 헬몬트Jean Baptiste van Helmont는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생명을 제조하는 대단히 창의적인 방법을 고안했다. 예를 들어 집에서 생쥐를 키우고 싶다면, 그 제조법은 매우 간단하다. 밀알을 가득 채운 용기에 땀에 절어 더러워진 셔츠를 넣는다. 그리고 21일을 기다리면, 짜잔! 밀알은 코를 씰룩대며 킁킁거리는 진짜 살아 있는 생쥐로 변신한다....
그러니까 이 대목은 소위 자연발생설이라는 터무니 없는 과학사를 설명하는 대목이에요. 전공서적에서 읽을 땐 드럽게 재미없는 이야기가 시종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밀알이 생쥐로 변신할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그것을 믿던 시대가 있었던 것이고 이 책은 그런 작은 과학사까지 흥미롭게 호출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포가 어떻게 왼쪽과 오른쪽을 구분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섬모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미세소관과 관련환 수많은 질환들과 전공서적들의 내용들이 스쳐오는데요. 책은 그 얘기를 깊숙이 소재삼으면서도 너무나 쉽게 풀어냅니다. 그러니까 섬모라는 가는 털이 체액의 흐름을 한 방향으로 이끈다는 문장으로 어려운 이론을 풀어내는 것입니다.
인중에 대한 설명은 어떤가요. 인중이 콧물을 모으기 위한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별다른 기능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외에도, 꼬리는 왜 없어졌는지, 일란성 쌍둥이라 해도 지문은 왜 다를 수밖에 없는지, 심장 세포는 자기가 손이나 발이 아니라 심장이 되어야 한다는 걸 어떻게 아는지, 분만의 시작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지 등을 쉽게 설명하는 저자의 필력이 탁월한 책이에요. 책이 굉장히 얇아요. 무척 재밌고요. 많은 분들께 기본 교양서적으로 강력히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