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젠가 야근 후 축 늘어진 마로를 업고 집에 가던 날.
나 역시 천근만근 터벅터벅 느릿느릿 걷는데,
저멀리 마주오는 사람 하나가 손을 휘휘 젓는다.
동네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다른 이 보고 그러는 줄 알고 계속 느린 걸음을 옮기는데,
잠시후 그 사람과 몇 걸음 앞까지 마주치게 되자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넨다. "뒤를 보세요."
뭔일인가 돌아보니 트럭 한 대가 아주 아주 느리게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경적 한 번 울리지 않고 골목길 내내 나의 느려터진 걸음을 참아준 트럭기사.
미안하고 고마워 얼른 비켜서서 인사를 하니,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곤 그제서야 속도를 올린다.

2.
언젠가 마로와 함께 서울나들이를 나갔던 날.
좌석버스를 타고 보니 군데 군데 빈 자리는 많이 있었지만, 죄다 한 자리씩만 비어 있었다.
그 중 하나를 골라 앉으려고 하는데, 마로 또래 사내아이와 앉아있던 내 또래 아줌마가 손짓을 한다.
아는 사람인가 싶어 멈칫하는데,
손짓한 아줌마가 건너편에 혼자 앉아있던 아주머니에게 딴 자리로 옮겨달라고 부탁을 하고,
부탁받은 아주머니도 당연하다는 듯이 다른 자리로 옮기신다.
덕분에 마로와 나란히 앉게 되어 고맙다고 인사하니,
두 아주머니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여자끼리 돕고 살아야죠. 애 데리고 다니는 게 보통 일인가."

3.
매일 아침 어린이집 버스를 타는 곳은 동네 버스 정류장 위치와 일치한다.
애 셋 딸린 어머니이기도 한 원장 선생님이 직접 버스를 몰다 보니 약속시간보다 지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정류장 표지판을 뱅뱅 돌며 마로가 장난을 쳐 행여 차도로 나설까봐 살피게 되는데...
몇 주 전.
표지판 옆에 서 있던 청년 한 명이 마로 노는 양을 유심히 보다가
버스가 올 때마다 양팔을 아래로 벌리는 거다.
심지어 자기 탈 버스가 왔을 때도 맨 마지막에 타면서 마로와 차도 사이의 가로대 역할을 해준다.
그 마음씀이 어찌나 고마운지 순간적으로 눈물이 글썽글썽.

최근의 소소하지만 훈훈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이유는
작지만 따스한 배려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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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6-01-26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고마워라. 눈물이 글썽.

paviana 2006-01-26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눈물이 글썽..
역시 여자보다는 아줌마가 더 좋은거 같아요.아줌마는 나라의 대들보.^^

瑚璉 2006-01-26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여유를 점점 보기 어려워지는 것 같아 슬픕니다. 저라도 잘해야죠, 뭐.

얼룩말 2006-01-26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저도 글 읽으면서 마지막 문장 얘기 생각했었는데..
이런 글 써주셔셔 정말 고마워요. 제 마음도 훈훈해졌어요...

hnine 2006-01-26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마음 짠~해가며 일하고, 아이 키우며, 집안 이끌어 나가는 줄도 모르고, 아줌마 어쩌구 하며 조롱하는 듯한 말을 하는 남자들 보면 저는 마구마구 흥분합니다.
제 아이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어떻게 해야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부모가 행동으로 솔선수범해서 보이는 수 밖에.

이쁜하루 2006-01-26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따뜻해요.. 글 읽는데 컴퓨터에서 배경음악으로 시크릿 가든의 아다지오 깔리네요..
정말 눈물 그렁 그렁 맺혀집니다.

호랑녀 2006-01-26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번은 경험도 있고, 그렇게 자리 만들어준 경험도 있는데...
와, 1번 경험은 정말 생각도 못했어요. 저는 지금까지 트럭 운전자들은 대부분 난폭운전자라고 생각했거든요. 아, 부숴버려야 할 편견 ^^

조선인 2006-01-26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전 특히 그 청년에게 감동했어요. 아직 학생으로 보이는데 그런 마음씀이 자연스레 몸에 배인 게 어찌나 기특하던지.
파비아나님, 역시 아줌마 사정은 아줌마가 알아주죠?
호정무진님, 님은 YMCA잖아요. *^^*
얼룩말님, 솔직히 고백하면 아쉬운 얘기가 너무 많아 투덜댈까봐 훈훈한 기억을 애써 떠올렸답니다. 저 참 못됐죠?
hnine님, 솔선수범이 참 힘들어요. 원래 착한 사람이 아니라 더 힘든가봐요. ^^;;
이쁜 하루님, 오, 저도 듣고 싶어요. 아다지오, 헤드셋을 찾아봐야겠네요.
호랑녀님, 흐흐 정곡을 찔렸네요. 저도 트럭기사라서 더 감격했거든요.

Mephistopheles 2006-01-26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메피스토입니다.
저런 분들 때문에 아직도 세상은 살만한가 봐요...^^

반딧불,, 2006-01-26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뭉클...

하이드 2006-01-26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하고, 훈훈한, 아니, 가슴 뜨거워지는 얘기들이네요.
마음들, 배려들, 정말 지치고 힘든 일상에 박혀있는 보석같은 존재들이라는것, 그분들은 알까요? 나도 언제 나도 모르게 그런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2006-01-26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06-01-26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넵, 아직은 살만한 세상. 참 좋은 말이죠. 우리 딸도 그 말 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
반딧불님. 덩달아 또 한 번 뭉클.
하이드님, 님은 이미 서재에서 보석같은 존재 아니던가요?
ㅋㅋㅋ 봤어요. 봤어. 으쓱하는 아영이가 귀엽더군요. ㅋㅋㅋ

urblue 2006-01-26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뭉클, 이에요.

울보 2006-01-26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441014

그래서 살만한 세상아닌가요,


조선인 2006-01-26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아블루님,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뭉클뭉클한 솜베개로 베개싸움이 하고 싶네요. ㅋㄷ
울보님, 네, 진짜루~

깍두기 2006-01-26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세상에 착한 사람 많네요.
아니, 좀 드물어서 이게 감동할 꺼리가 되는건가.
운전하면서 1번 아저씨처럼 하기 힘든데.
(제가 운전하면서 보니까 운전대 잡으면 성질 엄청 더러워져요^^)

조선인 2006-01-27 0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이야 진짜 대들보죠. 아니다, 대들보를 양성하시는 분인가?
깍두기님, 드물어서 감동하는 거일 수 있겠죠. 어쨌든 그래도 고맙죠. 히히
따우님, 맞아요, 입석 명당!!! 아웅, 그리고 따우님이 멋진 건 어머님 덕분인 거죠?

토토랑 2006-01-2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배가 좀 나와서.. 유난히 피곤한 어느날. 지하철에 서있는데 아무도 안비켜주더군요. 그때 저를 부르는 동남아 아가씨(아주머니??) 한명.. 허름한 옷에 그 분도 피곤해 보였는데 자리를 양보해 주시더라구요. ㅡ.ㅜ
특별히 붐비지도 않아서 널럴한 전철안이었는데.. 그분만 그렇게 자리 내주셔서 너무 고마왔어요.
앞으로 지하철 타게되면 꼭 한번은 주위를 보고 자리 양보할 수 있음 할려구요.

조선인 2006-01-27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토랑님, 자매애는 국경도 초월하는 거군요. 흐뭇 흐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