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22:1-20 은금을 줄지라도
호주의 원주민들은 마법사가 저주하면 시름시름 앓다가 며칠 뒤에 죽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부두 죽음(Voodoo Death)'이라고 하는데 마법사가 저주해서 죽은 사람이 꽤 된다고 합니다. 선진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발생하는데 의사가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하면 환자는 절망에 빠져 삶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라고 하는데 의사가 약을 처방하고 효과가 없을 거라고 말하면 실제로 차도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부정적으로 말하면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부두 죽음이고 노시보 효과입니다. (반대로 긍정적으로 말하면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것을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하고 합니다.) 이 사실을 모압 왕 발락은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고 광야를 지나 요단 강 동편에 있는 모압 평야에 이르자 심히 두려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백성들보다 많았기 때문입니다.(민22:3)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래부터 이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야곱이 요셉의 초청을 받아 애굽으로 이민 갔을 때는 인구가 70-75명이었는데 400-430년이 지나자 성인남자가 6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60만 3천 5백 5십 명이었습니다.(민1:46) 성인 남자 한 명당 아내가 있고 아이가 2명이 있다고 가정하면 60만 곱하기 4하면 240만 명이 됩니다. 우리 집으로 가정하면 300만 명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극히 미약했으나 나중에는 심히 창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교회도 지금은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창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소가 밭의 풀을 뜯어 먹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사방에 있는 먹을거리를 다 먹어치울까 걱정이 됐습니다.(민22:4) 옛날에 먹고 살기 힘들 시절에는 입 하나가 느는 것이 걱정거리였잖아요?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은 전쟁을 하면 모압이 불리하니까 브돌에 사는 예언자 발람에게 사신을 보냈습니다. 모압은 오늘날로 말하면 레바논이고 브돌은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 있기 때문에 오늘날로 말하면 이라크입니다. 거리로 환산하면 640km가 넘는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420km 정도가 되니까 굉장히 먼 거리였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브돌 예언자 발람을 부른 까닭은 무엇일까요? 브돌 예언자 발람이 복을 빌면 복을 받고 저주를 하면 저주를 받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주하여 모압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민22:6) 모압 왕 발락은 부두 죽음 다른 말로 하면 노시보 효과를 알고 있었나 봅니다. 여러분 혹시 장난으로라도 자녀에게 저주하지 마십시오. 정말로 저주가 내릴까 두렵습니다. 그렇다면 브돌 예언자 발람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었을까요?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믿는데 고고학자들이 발람이 실제 인물이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1967년 ‘프랜켄’이 이끄는 네덜란드의 고고학 원정대가 ‘데이르 알라’라는 지역에서 회반죽으로 된 석고 조각 몇 점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발람이 밤중에 신의 메시지를 받았는데 그것은 이웃이 기대하는 메시지가 아니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과 과학이 상충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성경이 비과학적이 아니라 초과학적이라 과학이 성경의 기적들을 규명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압 사신들은 ‘복채’를 가지고 브돌 예언자 발람에게 이르러 모압 왕 발락의 부탁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발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민22:8)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브돌 예언자 발람은 모압 사신들이 먼 길을 걸어서 왔으니 일단 휴식을 취하라고 말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말씀하시면 모압 사신들에게 통보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브돌 예언자 발람의 모습을 보며 오늘날 설교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발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했듯이 설교자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해서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민22:12) 이것은 중요한 말씀이니 함께 읽읍시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하나님은 발람에게 모압 사신들과 함께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은 자들’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 '복을 받은 자'란 수동분사는 과거에 이미 ‘복을 받았던 자’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해서 ‘복을 받고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복을 받을 수 있듯이 우리도 이미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복을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과거에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에벤에셀의 복’(삼상7:12)을 받았고 하나님이 지금 나와 동행하신다는 ‘임마누엘의 복’(마1:23)을 받고 있고 나중에는 주님이 준비하신다는 ‘여호와 이레의 복(창22:14)’을 받을 줄 믿습니다.
모압 사신들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모압 왕 발락은 더 높은 고관들과 더 많은 복채를 딸려 브돌 예언자 발람에게 보냈습니다.(민22:15) 발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발람이 사신들에게 말했습니다.(민2:18-19)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발람은 아무리 많은 은금을 준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해서 전하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브돌 예언자 발람의 모습을 보며 오늘날 설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또 발견하게 됩니다. 발람이 하나님이 말씀을 가감해서 전하지 않았듯이 설교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해서 전하지 않아야 합니다. 금에 이물질이 혼합되면 그것은 순금이 아니듯이 설교에 자신의 생각이 가미되면 그것은 순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전하라는 것을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발람은 지난번에 하나님께서 모압 사신들과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신들이 다시 오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또다시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민22:20)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하나님은 지난번에는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는 함께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나라 정치인들처럼 말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하셨다 왜 다시 가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을 알면 브돌 예언자 발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게 되며 우리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발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했고 그것도 가감 없이 전했기 때문에 오늘날 설교자의 역할 모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다른 본문에서는 그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아야 그에 대한 다면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2장 15-16절을 봅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 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는 발람이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 모압 왕에게 갔기 때문에 그의 나귀가 미친 행동을 저지했다고 말씀합니다. 발람의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가 길을 막아선 것을 보고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잖아요? 이번에는 유다서 11절을 봅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예수님의 친형제인 유다는 발람이 삯을 위하여 어그러진 길을 갔다고 말씀합니다. 발람의 가는 길은 잘못된 길이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마지막에 가서 처음과는 다르게 반전이 일어나는데 발람도 처음과는 다르게 반전이 일어났던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발람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는데 신약성경은 발람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구약성경과 구약성경이 다른 경우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의 조명아래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이 우선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은 왜 발람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발람이 다시 물은 데서 이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발람이 다시 묻자 그냥 마지못해 가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추정해 봅니다. 발람은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 은금이 탐이나 가도 되느냐고 다시 물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시기 위해 가라고 허락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발람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는 진실한 예언자였지만 나중에는 은금을 탐내다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브돌 예언자 발람의 모습을 보며 오늘날 설교자가 어떠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발람이 진실한 예언자였지만 은금을 탐내 타락했듯이 저도 돈을 탐낸다면 타락하게 된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비단 저에게만 주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은금 때문에 실족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아간은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나서 은금을 감추었기 때문에 가족들과 몰살당하지 않았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은금을 숨겼기 때문에 부부가 같이 죽지 않았습니까? 돈은 우리가 사는데 꼭 필요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우리를 타락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선용하면 축복의 도구가 되지만 악용하면 파멸의 도구도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뚝이는 중심이 있기 때문에 흔들어도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우리가 돈을 인생의 중심으로 삼는다면 돈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삼는다면 잠깐 흔들리더라도 제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발람처럼 처음에는 신실했지만 돈 때문에 나중에는 타락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삼아 물질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저와 여러분이 돼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