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지은이는 ‘로쟈’라는 필명으로 이미 인터넷에서는 많이 알려진 유명 블로거다. 지은이가 밝힌 것처럼 나도 처음에는 ‘로쟈’라는 필명이 ‘로자 룩셈부르크에서 따온 것으로 여성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로쟈‘라는 필명은 도스도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에서 따온 것이었다. 지은이가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는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제서야 왜 ’로쟈‘라는 필명이 등장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가 올린 페이퍼를 들여다보면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인문학자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지은이는 자신이 전공하지 않은 분야들을 건드리는 그와 같은 자신의 모습에 대해 ‘곁다리 인문학자’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는 지은이의 겸손이라고 본다. 정통 인문학자가 보여주는 정형적이고 틀에 박힌 이야기들보다, 지은이는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시니컬하게, 때로는 독설이 넘쳐나게, 마치 리듬을 타듯이 속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토해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문학 책을 뒤적이다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 때문에 인문학은 재미없고 따분한 학문으로만 여기는 것이 현재 우리 인문학의 모습이다. 개인적으로도 몇 장 뒤적이다가 도저히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어서 책을 덮어두는 경우가 종종있었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인문학의 위기라고 하는 것이 실은 독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쉽게 독자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인문학자들에게도 있다는 취지로 이야기한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지적하는 바와 같이 오역 투성이의 번역본은 그런 무책임함을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경우라고 한다.

그런데 지은이의 글은 일단 쉽다. 그리고 편하다. 물론 어려운 부분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부분도 몇 번 읽으면 대체적인 문맥은 이해가 간다. 그런데 다른 책들은 몇 번을 고쳐 읽어도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제대로 알고 글을 쓴 건지 의심이 들 정도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책은 자신의 지식을 뽐내려고 쓰는 것이 아니다. 대중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하고 자신도 다시 거기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본다.

이런 생각은 다음 글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오덕 선생이 말씀한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믿는다' 모름지기 글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글을 씀으로써 내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비로소 내 생각으로 정리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다시 내 일상의 에피소드에 전적으로 반영된다. 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본서 제90쪽 참조)

그런 점에서 지은이의 글쓰기는 흡족스럽고 즐겁다.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다섯 개의 서재로 구성되어 있다.

‘로쟈의 문학 노트’라는 부제가 붙은 서재1 “걷어차야지만 자리에서 일어난다”에서는 지은이의 책읽기에 대한 생각과 김훈, 김규항, 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자신의 전공인 러시아 문학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다. ‘로쟈의 예술 리뷰’라는 부제가 붙은 서재2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에서는 황혜선에 대한 글을 제외하면 전부 영화에 대한 이야기다. 파트리스 르콩트의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레오 카락스의 ‘나쁜 피’, 카트린 브레야의 ‘로망스’, ‘지옥의 해부(포르노크라시)’, 에밀 쿠스투리차의 ‘인생은 기적처럼’, 김기덕의 ‘사마리아’, ‘빈집’ 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김기덕의 영화에 대한 비평은 김기덕 영화를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로쟈의 철학 페이퍼’라는 부제가 붙은 서재3 “아, 이 겸손한 느릅나무들”에서는 주로 니체와 데리다, 그리고 벤야민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철학에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은 관계로, 이 책에서 이 부분은 읽기가 쉽지 않았다. 법, 정의, 폭력 등 어떻게보면 서로 조화될 것같지 않고 대립적이며, 단순한 소재의 이야기일 것 같은데, 지은이는 이를 날줄과 씨줄로 엮어 새로운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로쟈의 지젝 읽기’라는 부제가 붙은 서재4 “내 머리는 불타고 있어요”에서는 지은이의 지젝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온다. 특히 지젝과의 가상 대담을 엮은 부분과 지젝을 통해 한국 문학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인상깊었다. 지젝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우리시대의 엘비스’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지젝에 대해 애정공세를 퍼붓는 지은이의 이야기에 지젝에 대한 책을 읽어야할 것같은 강한 끌림이 일어났다. 물론 지은이가 지젝을 잘 설명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차후 지젝에 대한 지은이의 연구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로쟈의 번역비평’이라는 부제가 붙은 서재5 “내 울부짖은들 누가 들어주랴”에서는 이제껏 보아온 지은이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나라의 번역 현실에 대해 아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제대로 된 번역을 할 수 없다면 아예 책을 내지 말라며 독설에 가까운 말을 뱉어낸다. 지은이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이제껏 우리가 원래 인문학은 어려운거라고 생각하며 그냥 넘겨버린 것도, 일정부분은 번역자의 오역과 무신경이 낳은 부산물의 일부일 수 있다. 지은이의 책에 대한 애정과 번역자의 노고가 느껴지는 부분으로 너무나 안쓰럽게 보이기도 한다.

두툼한 책을 덮고 나니 새벽이다. 많은 생각들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1997년부터 2009년까지 지은이가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글을 읽는 시간은, 척박한 인문학적 토양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간 지은이의 모습을 각인하게 되는 시간들이었다. “책읽기는 즐거운 도망이며 즐거운 저항이니, 악착같이 즐겁게 책을 읽으라”고 말하며 오늘도 컴퓨터 앞에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지은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지은이가 오랜 시간동안 고민하고 생각한 내용들을 한꺼번에 소화하기란 벅차다. 틈날때마다 꺼내 읽으며 지은이의 지적 유희에 빠져들고 싶다. 
 

책의 첫 부분인 프롤로그를 다시 한 번 읽어봤다. 지은이는 백범의 「나의 소원」중 일부를 인용하고 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라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큼이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니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의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본서 제16쪽 참조).”

무슨 이유로 지은이가 그렇게 열심히 끊임없이 읽고 쓰고 떠들어(?) 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지은이, 로쟈는 이제 고공비행하고 있다. 온라인으로만 접하던 사람들을 넘어, 오프라인으로 사람들을 접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해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로쟈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볼 수 있도록 더 높이 비행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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