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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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독후감을 쓰기 쉬운 책이 있다. 내용이 너무 엉망이면 실컷 욕을 하고(<언어의 온도>,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 어중간하게 마음에 들면(<열두 발자국>,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소감도 어중간하게 쓰면 된다. 반면에 마음을 강하게 흔들면 소감을 적기가 어렵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담고 있는 내용이 너무 크기 떄문이다. 발췌문만 잔뜩 가져오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저 좋다, 좋다, 고만 하는 소감을 싫어하지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하 슬픔)은 아쉽게도 좋다, 좋다, 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책이다.

문학 평론가 신형철의 신작이다. 2010년 이후에 발표한 글과 미발표 원고를 추렸다고 한다. 영화에세이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이어 두번째 읽은 신형철의 책인데, 앞선 두 권(<몰락의 에티카>, <느낌의 공동체>에 비하면 이 두 권은 일기 정말정말정말 쉬운 편이었다. 초기 두 권은 읽다가 덮어버렸으니 말 다했지.

한 리뷰어는 신형철의 글이 이전보다 문제의식이 얕아지고 글의 길이가 줄었다고 말했는데, 나름 수긍이 가기도 한다. 초기보다 더 대중친화적이지만 나쁘지 않다. 이게 신형철식 진화가 아닐까. 저 같은 무지랭이에게 좋은 글 읽게 해줘서 감사드립니다.

책 내용에 대해서는 감히 평을 할 수 없다. 제목처럼 책은 대체적으로 ‘슬픔‘이라는 감정을 골자로 삼았다. <정확한 사회의 실험>에서 보지 못한 사회에 대한 글 - 진보와 보수, 박 전 대통령 탄핵, 혐오사회, 국가주의 - 은 신형철이라는 사람을 조금 새롭게 바라보게 만들었다. 아내의 수술과 같은 개인적인 이야기도 들어있다. 그래도 신형철은 문학평론가니까, 가장 눈에 밟히는 부분은 역시 문학에 관한 부분이다.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들인데 신기하게 신형철의 목소리, 아니 글소리를 통해 읽으니 새롭게 다가온다.

400쪽이 조금 넘는 분량은 아주 많지는 않고 글이 크게 어려운 편도 아니다. 하지만 한 달이 넘게 책을 못 끝내다가, 12월의 끝자락에 마음먹고 마지막 장을 덮었다. 이렇게 보내기 아쉬운 책이었다. 산문집의 출간 간격이 7년이니, 다음 산문집은 2025년에 출간되나? 작년에는 2018년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영화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 때문이라고 농담했는데, 2025년까지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생겼다.

이하는 발췌문. 찜해둔 문장이 너무 많아서 정말 마음에 드는 친구들을 고르고 골라 소개한다.

>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_53쪽

>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은 억울하다. 이 억울함이 벌써 폭력의 결과다. ‘폭력‘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정의를 시도해본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단편적인 정보로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면서 즐거워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어떤 인터넷 뉴스의 댓글에, 트위터에, 각종 소문 속에 그들은 있다. 문학이 귀한 것은 가장 끝까지 듣고 가장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문학은 4.3과 5.18의 반복을 겨우 저지한다. 제주에서 광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그것은 나의 확신이라기보다는 다짐이었다. _93쪽

>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_176쪽

> 시가 그토록 대단한가. 그렇다면 시는, 있으면 좋은 것인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인가. 소설과 영화와 음악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면 시 역시 그렇다. 그러나 언어는 문학의 매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매체다. 언어가 눈에 띄게 거칠어지거나 진부해지면 삶은 눈에 잘 안 띄게 그와 비슷해진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마음들이 계속 시를 쓰고 읽는다. 시가 없으면 안 되는 것 아니라 해도, 시가 없으면 안 된다고 믿는 바로 그 마음은 없으면 안 된다. _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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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금희 지음, 곽명주 그림 / 마음산책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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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리뷰어는 이 소설을 읽고 이렇게 평했다. 아무 주제도, 의미도 없이 그저 아름다움만 좇아 소설로서 가치가 떨어진다, 고. 대체 얼마나 대단한 분이길래 소설을 이렇게 평했을까.

소설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인간 본연을 탐구하고(<죄와 벌>),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전쟁과 평화>), 사회의 부조리함을 비판하고(<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그냥 이야기 자체가 끝장나게 재밌는 소설이 있다(스티븐 킹의 많은 작품). 소설에 이렇게 계보가 많은데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이하 나는 생각해)는 어떻게 분류해야 할까. 나는 과감하게 ‘무용하지만 쓸데없이 섬세해서 아름다워 좋은 소설‘류에 두고 싶다.

250쪽의 분량에 판형도 작고 한 쪽에 글자 수도 적다. 그런데 총 8~15쪽으로 쓰인 19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책 자신도 첫 페이지부터 김금희의 ‘짧은 소설‘이라고 명명한다. 아, 가뜩이나 단편은 이해하기 힘든데 길이도 짧다니, 난항이구만. 각각에 대한 소감을 말하기에는 지식과 정성이 부족하므로 대충 분위기를 나눠보자면 낭만, 이별, 일상의 위화감 정도 되겠다.

낭만의 테마를 가진 작품들은 나를 살짝살짝 웃음짓고 설레게 했다. 책의 포문을 여는 ‘원피스를 돌려줘‘는 원피스를 돌려달라는 여자의 요청에 헤어진 연인이 잠시 만나는 이야기다. 주말 오후에 할 일이 없어 헤이리로 드라이브를 갔다가 주차한 차가 어디 있는지 잃어버리고 마는데, 여자가 작품의 마지막에 되뇌는 ‘산술 불가의 여름밤‘이라는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사람의 감정은 그래, 순수 논리로만 이어진 산술과는 정반대로 제멋대로인 거겠지.

이별의 분위기는 발췌문이 덕지덕지다. <나는 생각해>를 읽은 사람 중 꽤나 많이 이 부분에 줄을 쳐두었으리라 생각한다. 책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감각적인 문장이다. 이별의 고통과 견딤에 대해 예리하게 써내려갔다.

> 나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문득문득 하는 생각, 대체 지하철의 이 빈 공간들이 어떻게 지상의 압력을 견디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빈 공간이 견디는 것이 아니라 지상이 빈 공간을 견디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견디고 있어야 이 도시라는 일상의 세계가 유지되는 것이고. 각별히 애정한, 마음을 준 누군가 우리 일상에서 빠져나갔을 때, 남은 고통이 상대와 유리된 오로지 내 것이 되면서 그 상실감을 견뎌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상대 역시 견뎌야 완전한 이별이 가능한 것처럼. _‘우리가 헤이, 라고 부를 때‘에서, 77,78쪽

또 하나 소개하자면, 우리가 소중한 것을 잃을 때 마음 속에서 뚝 부러지는 느낌을 표현한 문장이다. 물리적 충격으로 시디가 부서지고, 그 파편들이 가슴에 박혀 콕콕 쑤시는 느낌이 절로 든다.

> (좋아하는 가수 보아 음악은 엠피스리로 안 듣는다면서) ˝그건 뭐 다른 데서 다른 게 아니라 쉽게 지울 수가 없으니까, 지우려고 하면 이른바 일종의 충격, 버튼을 누르든 시디를 부러뜨리든 아무튼 힘을 써야 하는 거니까, 그렇게 해야 뭔가를 지울 수 있다는 건 중요해. 그런 건 정말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닮았달까.˝ _‘영건이가 온다‘에서, 122쪽

마지막으로는 일상의 위화감이다. 낭만과 이별은 몽글몽글하고 감성적인데 반해 위화감이 풍기는 작품은 꽤나 불쾌하다. ‘이행성‘은 한 가족이 밀림을 끼고 있는 리조트에 여행을 가는 이야기다. 작중 아버지는 리조트에 몰래 얹혀 살아온 투숙객(멀쩡한 사람이었는데 모든 것을 버리고 오랑우탄 같은 모양새를 하고 리조트에 몰래 머무른다고 한다)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기묘한 불안감을 느낀다. 그리고 아들과 아내가 그들만의 다정한 대화를 나눌 때, 밀림의 깊숙하고 텅 빈 공간을 통과하는 바람소리를 들을 때 - 즉 자신도 모르게 가족에게서 소외되고 마음 깊숙한 곳에 공허가 자리잡았다는 것을 깨닳을 때마다 불안에 휩싸여 호텔 체크아웃 날짜, 비행기 편명, 직장과 직급을 떠올린다. 자꾸 아버지와 소문의 투숙객의 이미지가 겹치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생각해>를 말랑말랑한 감성과 아름다운 문장으로만 채운 소설집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려면 정교한 장치가 분명히 필요하다. 이것이 가장 잘 계산된 작품은 단연 ‘오직 그 소년과 소녀만이‘인데, 일정 시점 이전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기술에 대한 이야기다. 남자와 여자 모두 어릴 적의 나쁜 기억을 지웠고, 작품의 마지막에 여자는 단골 술집에서 <올리버 트위스트>와 <장 발장>을 몰래 가져온다. 재밌게도 두 작품 모두 과거 자신의 모습을 지우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인물의 이야기다. 위 두 편의 소설에 비춰보면 과거를 지운 둘은 밝은 미래로 향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스토리가 압축된 소년소녀세계문고를 아무리 읽어도 작품 전체를 정확하게 알 수 없듯이, 과거의 한 부분을 지웠다면 나를 온전한 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단골 술집 이름이 ‘없는 집‘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은 어떤 시간을 밀어내고 예정되어 있는 그 뒤의 시간을 적극적으로 끌어오는 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음에 올 시간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기대가 있는 때였다.
˝행복하다. 못할 게 뭐 있나, 맞제?˝ _‘나의 블루지한 셔츠‘에서, 146쪽

1년의 마지막 달 12월에 읽기 딱 좋은 작품집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김금희 작가를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읽기 싫은 마음이 들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그래, 산술불가의 이유였다. 사소한 일, 아무 의미 없이 우리 곁을 지나쳐간 많은 일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사사롭지 않게 기록해둔 김금희 작가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나도 당신들을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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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타고 들어가기 전 을지로입구역에 생긴 아크앤북 잠시 들렀다. 츠타야서점 컨셉으로 만든 곳이라는데 크게 멋있지는 않다 추워서 뇌정지가 생겼나...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버스가 3분 뒤에 도착한다는 알람을 보고 얼른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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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오프라인 서점 구경은 항상 재밌다. 종이책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실물성인데, 온라인 서점은 책에 관한 정보와 여러 사람들의 소감을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도 책의 실물감을 알 수 없다는 가장 큰 단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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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에서 나오는 핀시리즈는 모니터상에서는 그냥 몇 바이 몇 사이즈, 몇쪽으로 표시될 뿐이지만 실물을 보는 순간 다른 책과 다른 크기와 디자인에 반해 어머 이건 사야 해를 외칠 수밖에 없다. 책 디자인을 족고 책 사는 걸 소비자의 저급함으로 비하하는 이는, 종이책 그 자체가 감성의 종합체라는 걸 완전히 배제하는 무지랭이일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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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부터 알라딘을 사용했고 왠만하면 인터넷으로 책을 산다. 교보문고가 가까이 있다면 주력 서점을 옮기고도 남았을텐데. 제대로 된 서점 하나 없는 동탄에서는 서점 구경이란 꿈도 못꿀 일이다. 알라딘 중고서점이라도 꼬박꼬박 들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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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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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 삶의 한가운데 - 루이제 린저 (민음사, 1999)

가스 냄새가 소년 시절 친구 방의 일부였듯이, 불안이 일상이 되어버린, 나치즘이 횡행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삶의 한가운데>는 니나라는 아주 진취적인 여성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책의 뒷편에 ‘니나 신드롬을 일으킨 삶의 모험과 격정에 관한 소설‘이라는 광고문구가 있는데,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그 당시 남자가 아닌 여자가 이렇게 멋있고 냉소적이고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가히 신드롬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니나의 멋짐과 쿨함을 보여주는 몇 구절을 따와보면,

> 아, 때때로 모든 것을 걸 만한 위험이 없는 삶이란 아무 가치가 없어. _66쪽

라며 삶에서 안전성만을 추구하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아 발전이 없는 (나같은) 이들에게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리기도 하고,

> 너에게는 생을 끊으려는 이 시도도 삶의 일부인 것이다. 이것은 너의 정신과 생명력이 너에게 부여한 새로운 뉘앙스이며, 하나의 충격이며, 깊고도 흥미로운 경험이며, 일종의 실험인 것이다. _319쪽

라는 위험 수준의 발언까지 한다. 인생이란 그 자체로 축복받은 것이라는 다소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문구는, 자살마저 인생의 하나의 경험이라 생각하는 니나에게 아무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니나는 자살을 실험이라고 규정해 삶의 결정권을 온전히 자신에게만 귀속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않고 마음이 가는대로 사랑하니 예나 지금이나 이런 히피적인 모습은 열광할 만하다.

니나는 모든 것을 경험으로 생각하고 지내는데, 딱 하나, 늙은 고모할머니의 가게에서 일하면서 시간의 흐름과 늙음이라는 두 주제에 대해서 회의를 가진 듯하다.

> 나는 아주 오래된 사진들을 찾아냈어요. 거기에서 고모는 예쁘고 젊은 처녀였어요. 아름다운 신부였어요. 그런데 지금 저기에 늙고 추악한 여자가 있는 거예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악취를 풍기면서. _189쪽

책의 마지막에 달린 작품해설에서는 니나의 여러 모습을 명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늙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여자‘다. 바로 위의 문장과 반대된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간이란 자연히 추해지는데, 니나는 이를 추악하다고 말한다. 혹시 니나는 고모처럼 추악해지기 전에 삶을 끝내기 위해 자살하려고 하는 것일까?

오직 신세대의 젊은이들만이 할 수 있는 당찬(어떻게 보면 극단적이어서 무서운) 생각이다. 동시에 구세대가 보기에는 치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이런 신세대와 구세대의 구도를 뚜렷이 보여준다. 주요 인물만 봐도 니나는 진보와 신세대를, 슈타인은 보수와 구세대를 대표한다고 하면 조금 무리일까?

어느 리뷰에서는 슈타인이 답답하고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인물이라고 칭했다. 분명 슈타인은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감정표현을 드러내놓고 하지 않고 모험보다는 안정을 취하는 타입이다. 위의 리뷰 작성자처럼, 이런 슈타인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슈타인이 틀리거나 나쁜 사람은 아니다. 단지 우유부단하고 느리고... 그래서 그렇지...

의미가 서로 대립하는 두 인물이 논쟁을 하는 장면을 하나 꺼내보겠다.

> (슈타인의 대사) 니나. 나는 말했다. 당신은 젊기 때문에 힘을 믿고 있어요. 그러나 굴러가는 바퀴는 당신들의 저항과 희생과 어떤 영웅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아요. 어느 날 저절로 멈추는 거죠. _348쪽

> (니나의 대사) 그러나 당신은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은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삶을 비켜갔어요. 한번도 모험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신은 아무것도 얻지도 못했고 잃지도 않았어요.
> 니나는 정말 흥분했다. 당신은 행복한가요? 그렇지 않아요. 행복이 무엇인지 당신은 전혀 몰라요. 그러나 나는 행복해요. 나는 당신이 나의 인생을 당신 인생처럼 만들려고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요. 당신의 인생은 마치 일요일을 망쳐버리는 재미없고 어려운 학교 숙제 같아요. _349쪽

읽어보니 익숙한 대화 아닌가? 개인은 힘이 적으니까, 강하게 저항하지 말고 천천히 이룹시다! 아니, 모험을 하지 않은 당신은 뭘 몰라요! 위와 같은 대화는 당장 인터넷 게시판만 봐도 수두룩빽빽하고, 인류가 문명을 이룬 이후부터 계속 됐을 것이다. 슈타인은 니나를 걱정해서 조언한 것이겠지만, 니나는 그걸 꼰대질로 느꼈으려나.

> 나 같은 인간에게 새로운 시대의 운명이 맡겨져서는 안 된다. 나는 명철한 통찰력은 갖고 있으나 그 통찰에 무조건 따르는 힘을 소지하지 못한 부류에 속한다. 미래는 니나와, 그리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때로는 지나치고 일방적이긴 하지만 강력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가지게 될 것이다. 나 같은 사람들은 필요가 없다. _355쪽

슈타인은 결국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다. 작가는 이런 슈타인을 통해 보수적인 생각으로는 세상을 발전시키기 힘들다고 설파한다. 하지만 슈타인이 자신을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규정한 점은 조금 가슴이 아프다. 한 인간의 삶과, 세상의 진보라는 두 보기 중 진정 가치와 의미 있는 것을 고르는 객관식 문제가 있다면, 어느 것을 골라야 할까? 절대적 가치를 논할 수 없는 항목만이 보기로 주어진 문제는 풀기 어렵다. 이 난제 때문에 우리는 인류 문명사 동안 이렇게 토론하고 싸워왔다.

그래서, 슈타인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길 결심하면서 내뱉는 독백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구시대는 나이가 들었다고, 보수는 사회를 극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한다고 사회에서 무조건 퇴장시켜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 따위는 집어치우고,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는 것만이 진정한 인류의 진화가 아닐까.

> 나는 이 시대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니나는 내가 현재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마 그녀도 내가 시대와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다고 비난할지 모른다. 내가 그런가? 정말일까? 대체 누가 도피하고 있다는 말인가? 쫓겨난 자들과 함께 알려지지 않은 해안으로 달려가는 자들인가. 아니면 한때 소중했던 것들을, 아마도 영원히 바래지 않을 것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자들인가. _363쪽

하나의 책을 어떤 이는 페미니즘 소설로, 어떤 이는 역사 소설로, 어떤 이는 사회학 소설로 읽었다. 인물과 시대상을 모두 배제하면 신념과 선택에 대한 아주 근사하고 멋진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 선택을 위해서 서로 어떤 대화를 나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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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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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부터 유지해온 독서기록 포맷을 바꿨다. 기존에는 월별로 어떤 책을 읽었는지 구분했고, 책마다 오름차순으로 숫자를 붙여 달과 해에 얼마나 책을 읽었는지를 숫자로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작년보다 권수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노심초사해 얇은 책 한 권이라도 더 읽으려고 하고(많이 읽는 게 물론 나쁜 건 아니지만 목적이...) 저번 달보다 적게 읽으면 괜한 자격지심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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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달마다 5-6권 정도의 향상성 유지와 한 해의 독서 패턴(1,2월에 대박쳤다가 3월에 바닥으로 곤두박질, 다시 6월에 슬금슬금 컨디션 회복 후 10월에 바닥 아래 지하실이 있다는 걸 깨닳음)을 알게된 건 좋은 일이다. 그러니까, 그런 패턴은 이제 몸이 기억하니 기록에 굳이 나를 맞출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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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앞에 붙었던 통계를 나타내는 모든 숫자를 지웠다. 책을 덮은 달과 책, 그리고 간단한 별점만 남겼다. 연/월까지 지우면 내가 저때 어떤 책을 읽었고 어떤 감정으로 살았으며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달에 몇 권 읽었는지 알 수는 있지만, 구태여 들여다보지 않는 한 모르게 해뒀다. 사실 별점도 필요없는데... 지울까 생각 중이다. 어차피 9년간 얼마 읽지도 않은 책, 그 간단한 인상마저 떠오르지 않는다면 책읽기를 그만둬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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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독서 노트는 디지털화(?)가 완료됐다. 에버노트에 이미 모든 자료가 다 있고, 장문으로 옮기지는 못했어도 손으로 쓴 짤막한 독서노트도 사진으로 찍어 노트에 보관 중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걸 베어라는 문서앱에 저장해뒀다는 건데... 이놈은 손글씨를 ocr로 인식 못해서 텍스트로 검색이 아예 안된다. 에버노트로 다시 옮겨야 한다. 아,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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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독자는 독서기록 따위는 하지 않는다지만 내 독서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는 버릴 수 없다. 물론 내 허세와도 직결된 문제기도 하고. 이거 올리면 좀 있어 보이지 않나? 마막 고민하는 척. 11월 권수가 상대적으로 많은 건 9월과 10월에 게으름 피워서 계속 밀린 책을 겨우 끝낸 것이다. 제대로 된 독후감 한 편도 못 남긴 게 무지의 단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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